이드 2부 – 353화
790화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제국 북부 귀족들의 맹주 노리코 후작의 명령을 받고 이드를 찾았던 티그릭 백작은 간질간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는 얼굴은 맞는데, 누구인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본능이 기억을 떠올리기 거부한 까닭이었다. 적이 두려워 대가리를 땅속에 숨기는 새대가리 레벨이지만, 본능이란 놈이 대개 이렇게 멍청하다.
그리고 본능이 두려움에 떠는 시간이 지나고 티그릭 백작은 겨우 앞에 선 아가씨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밀리아…… 황녀…… 전하?”
“여러분을 기다리게 한 계집아이가 누구인지 이제 보이는 모양이군요.”
황녀의 대답에 티그릭 백작은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착각에 빠졌다. 동시에 그의 옆에 있던 뚱뚱한 귀족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황녀를 향해 계집아이라고 막말을 퍼부었던 자였다. 계집아이라고 조롱한 사람이 황녀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심장마비가 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티그릭 백작은 차라리 그가 부러웠다.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싶은 순간 황녀가 말했다.
“그대들이 그러고도 감히 제국의 귀족이며, 황제 폐하의 신하입니까!”
“화, 황녀 전하~”
갑작스러운 고성에 티그릭 백작과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에 황녀가 실망과 분노가 깃든 눈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방금 제정신이냐고 했지요? 내가 묻고 싶군요. 명예로운 제국의 귀족이 마치 저 뒷골목의 불량배처럼 우르르 몰려와 행패를 부리다니. 진정 제정신인가요?”
“저,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리고 귀족의 예법이라고 했나요? 오히려 귀족의 예법을 지키지 않은 게 누구죠? 어느 예법에 자작이나 백작이 후작을 상대로 이렇게 무례해도 좋다고 적혀 있나요? 그리고 무엇보다.”
탕!
긴장감을 높이듯 말을 끊은 황녀가 강하게 바닥을 찼다. 백작과 귀족들이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황녀가 불을 뿜듯 호통을 쳤다.
“그 무엇보다 큰 잘못은 감히! 감히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예 후작의 작위를 부정한 것입니다!”
“부, 부정하다니요! 저, 절대 그런 일은 없…….”
황제의 명령을 부정하다니. 그것은 역모나 다름이 없다. 지은 죄가 있어 용서를 빌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은 티그릭 백작이 급히 변명을 내놓지만, 황녀는 그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드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그들의 천박하고, 품위 없는 행동이 충분히 그녀의 기분을 거스른 탓이다.
“닥치세요! 그대들은 그 입으로 후작과 명예 후작이 같지 않다 말했고, 황제 폐하께서 고심하여 내리신 명예 후작의 작위를 깎아내리지 않았습니까! 설마 이젠 내가 직접 들었던 사실조차 부정할 생각인가요!”
그들은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결국 부정하지 못했다. 황녀의 말대로 사실이니까.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드는 서슬 퍼런 황녀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감탄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방금 앞에서 살살 애교를 떨던 사람하고 동일 인물 맞아? 카리스마가 아주 흘러넘치는데.”
[안면 몰수는 정치인 기본 스킬 아니겠어요?]
황녀가 정치인인가? 그런 것도 같다. 황제의 핏줄로 태어나 황궁에 살고 있으니까 그들의 생활이 곧 정치겠지. 결국 선후가 다를 뿐이다.
그때 겨우 정신을 차린 자가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황녀 전하의 자비를 바라옵니다.”
“자비를 바라옵니다.”
그를 따라 티그릭 백작도 이마를 찍었다.
“걱정 말아요.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않으니. 대신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귀족원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겠어요. 그렇게 알고 물러가세요.”
“저…… 전…….”
“그 이상 말하면 귀족원이 아니라 아바마마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제 눈앞에서 사라지세요.”
황녀가 황제를 부르는 호칭이 갑자기 변했다. 그것은 즉, 공적인 일이 아니라 모욕을 당한 딸이 아버지에게 이르겠다는 뜻. 자연히 개인감정이 섞인 벌은 강도를 더하게 된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안다. 티그릭 백작들은 절망한 표정으로 엎드린 자세 그대로 기어서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고 돌아선 황녀의 얼굴은 언제 성을 냈냐는 듯 봄바람같이 부드러웠다.
“황녀 전하께서는 연극배우를 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이드가 빠른 표정 변화를 보며 말하자 황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사실 조금 배웠었답니다. 감정과 표정을 감추는 건 황녀의 기본이거든요.”
연기가 황녀의 기본 스킬인 사실은 새롭게 알았다.
과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말에 고개를 저은 이드가 소란스러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귀족이 우르르 몰려나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가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지금 끝난 것 같죠?]
“그럼 남은 시간은 제가 써도 될까요?”
은근슬쩍 라미아의 말에 따라붙는 황녀다.
얼굴을 보니 남는 시간 수련 지도를 부탁할 것 같다. 이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어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틀 안에 황궁에 들르기로 약속당한 것은 덤이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어수선한 저택의 분위기는 집사가 나서자 빠르게 정돈되기 시작했다. 이드와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미아가 문득 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왜?”
[일 크게 만들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니 결국 크게 키웠네요. 엮인 귀족이 한둘도 아니고, 황녀까지 관여되어 있으니 굉장히 시끄러워질 거라고요.]
“그러게. 하지만 어쩌겠어. 다 자업자득인데. 누가 허락도 없이 들어오랬나? 거기다 나는 조용히 있었다고. 일을 키운 건 황녀지”
[흐응~ 그럼 건승기를 뿌린 건요?]
건승기는 오행대천공의 화륭기와 풍령기를 상생의 원리로 묶은 것으로, 공격을 위한 강기로 쓰지 않고 사람에게 사용할 경우 건승기에 취한 사람은 술에 취한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
즉, 방에 들어선 그들이 막말을 쏟아 낸 것이 오로지 그들의 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 있어도 참았을지 모를 것을, 건승기로 인해 참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드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라미아이기 때문에 눈치챈 사실이었다.
“글쎄~ 난 그냥 방이 서늘한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인데? 차를 자꾸 마셔서 속이 찼거든. 지금도 으슬으슬한 게 좀 누워야 겠는걸?”
뻔뻔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은 이드가 라미아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독을 사발로 들이켜도 멀쩡할 사람이 차 몇 잔에 속에 탈이 났다는 말을 누구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인지.
문득 눈이 마주친 이드와 라미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리며 폭소했다.
귀찮은 일거리가 생겼지만, 평화로운 하루였다.
따각따각따각.
이십 마리가 넘는 말이 안티로스의 대로에 나탔다.
한두 마리라면 몰라도 대로에서 말을 타는 것은 불법이다. 복잡한 대로에서 말을 달리다가는 사고가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십 마리가 넘는 말이 나타났다. 당장 경비대가 달려와야 하지만 경비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로에 있던 사람들도 그들을 나무라거나 두려워하기는커녕 익숙한 듯 말을 타고 나타난 기사들을 구경했다.
이런 행진이 한두 번이 아니고, 허가를 받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며칠 되지 않았다.
황제가 세운 토벌의 깃발을 보고 토벌대에 들기 위해 제국 각지에서 모인 기사단이 자신들의 이름을 자랑하고 알리기 위해서 시작된 행진이었다.
누가 먼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그 기사단이 제국민의 환영과 박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토벌대에 참가하는 기사단은 경쟁적으로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안티로스의 대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가 가장 큰 환영과 박수를 받을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 기사단도 대단한데. 갑옷이 화려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실용적이야. 저런 갑옷을 착용한 기사단이라면 실력도 좋겠지? 쉽게 죽지는 않겠어.”
그의 말에 옆에 함께 있던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니, 자네 저 기사단이 누군지 몰라?”
“모르는 게 어때서? 내가 제국의 기사단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허허, 저 붉은 성문의 문양을 모른다고? 메르디안 기사단이잖아. 메르디안! 한때 날리던 용병이었다면서 그것도 몰라?”
다그치는 남자의 말에 친구인 듯한 남자가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은 들어본 것 같구먼. 그래도 내가 활약하던 곳과는 거리가 멀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나저나 어제 온 콜키 기사단도 그렇고. 저런 유명 기사단이 참가하는 토벌대면 큰 위험은 없겠어. 그렇지 않나? 이럴 게 아니라 자네도 한번 참가해 보는 것이 어때? 다녀와서 무용담도 좀 들려주고, 돈도 벌고 말이야.”
“예끼! 모르는 소리 말아. 위험하지 않은 싸움터가 어디 있다고. 거기다 자넨 여기 이 남산만 한 배가 안 보여? 이런 걸 달고 어떻게 달리란 말인가?”
친구인 남자는 불룩하게 솟은 배를 퉁퉁 두드렸다.
“왜 든든하고 좋구먼. 칼에 찔려도 그 두툼한 살이 다 막아 줄 것 같은데. 하하하!”
“뭐야? 말이면 단 줄 알아? 어디 자네부터 내 뱃살 맛을 보게!”
껄껄 웃던 남자는 친구의 배치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두 손을 들었다.
“항복, 항복, 어지간한 기사도 잡을 그 배치기는 그만 넣어 둬. 그보다 언제나 오려나?”
“누가?”
“흐흐흐, 오색 기사단 말이야. 오색 기사단!”
과연 오색 기사단이라는 이름에는 메르디안 기사단을 알아보지 못하던 남자도 눈을 크게 뜨며 반응했다.
“진짠가? 오색 기사단도 오는 건가?”
“당연하지! 이런 일에 오색 기사단이 빠질 수 있나. 더구나 이 사악한 흑마법사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는 포로를 죽이려고 감히 소드 팰러스를 범하지 않았나. 당연히 우리 오색 기사단이 그냥 있을 수 없지. 암!”
마치 오색 기사단에 가족이라도 있는 듯 열정적으로 말하는 남자였지만, 사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소드 팰러스와 오색 기사단은 제국민이 전 대륙에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였기 때문이다.
그에 한때 용병이었던 남자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고개를 쑥 빼더니 물었다.
“그럼 은색 기사단도 오겠구먼? 언제 온다던가? 내 다른 기사단은 몰라도 은색 기사단의 기사 분들은 꼭 봐야겠어.”
“에라이, 죽어라. 이놈아! 감히 은색 기사단의 기사님들에게 침을 흘려~!”
퍼억!
그 모습에 기사단의 행진이 끝나고 흩어지던 구경꾼들이 낄낄거리며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은색 기사단의 행진은 꼭 보고 싶구먼. 거기에 이번에 새로 나신 명예 후작님의 부인이 있다던데. 소드 팰러스 사람들이 소검후라고 부른다더만?”
“그래. 나도 궁금하긴 해.’
“그래도 검후님이 있는데 소검후라니. 난 마음에 안 들어.”
“허허, 자네가 마음에 들고 말게 있나. 소문이 그런 것을. 그보다・・・・・・ 진짜 검후님도 보고싶구먼.”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