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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57화


794화

네 사람은 곧장 수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 수련장을 차지하고 있던 이그렌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용하고 있던 수련장을 내어 주었다.

이그렌을 포함 세 명의 구경꾼을 옆에 두고 쉴라와이드는 대련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쉴라는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학생이었다.

이드와의 대련에서 난화십이식을 모두 펼쳐 보이며 이드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은 짧은 시간에 검법의 12초식을 모두 익혀 낸 것이다.

검후에게 배운 난화십이식의 초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빨랐다.

물론 난화십이식을 완벽하게 수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드는 그녀를 무림사에 남을 천재라고 인정했을 거다.

쉴라가 수습한 것은 검법의 형과 검로까지였다. 각 초식에 숨은 심의와 오묘한 내공 운용의 비의까지는 아직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복잡한 형과 검로를 익혔다는 것만 해도 그녀가 가진 재능과 노력은 인정해야 했다. 초식이 아름다운 난화십이식의 검로는 다른 검법에 비해 특히나 복잡한 것이었으니까.

“이야, 일리나가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겠는데?”

그렇다고 쉴라가 대련에서 난화십이식을 주공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완벽히 익히지 못한 무공으로 절대 강자에게 덤벼들 만큼 어리식지 않으니까.

그녀가 이드에게 난화십이식을 보인 것은 내가 이만큼 익혔다는 것을 보이고, 틀린 부분이 없음을 확인받기 위한 것.

대련의 주는 쉴라가 기존에 익히고 있던 폭풍육식이 되었다. 난화십이식을 익힌 덕분일까. 난화십이식 중 여섯 초식을 원본에 가깝게 분리해서 만든 폭풍육식은 쉴라가 난화십이식을 익힌 이후 더욱 위력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아무리 원본 검법을 익혔다고 해도 배우던 검법에 이렇게 많은 변화가 오기는 어려운 일인데, 그 어려운 일을 쉴라는 당연한 듯 해낸 것이다. 

‘쉴라 경의 재능은 습득과 응용에 있구나.’

이드는 쉴라가 가진 재능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아무나 은색 기사단의 단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능력과 재능이 있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백점 만점에 구십 점 드립니다.”

대련을 마친 이드가 검을 수습하며 말했다.

최고라 할 수 있는 두 검사의 손에서 수없이 부딪힌 검은 뜨겁게 달아올라 열기를 뿜고 있었다.

“십 점만큼 모자란 점은 뭔가요?”

“시간이요. 벌써 백 점을 주면 다음 대련에 더 높이 줄 점수가 없잖아요.”

즉, 사실상 만점이라는 소리다.

이드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환하게 웃는 쉴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일리나와 라미아 옆에 털퍼덕 주저앉아 있는 이그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입을 떡 벌리고 두 사람의 대련을 감상하고 있던 이그렌이 재깍 앞으로 달려와 섰다.

“감상은?”

“그저 엄청나다는 말밖에 못하겠습니다. 두 분을 보니 앞으로 제가 갈 길이 까마득한 것 같습니다.”

“좋아. 그 길을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죽을 각오로 수련해야겠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버럭 소리치는 이그렌의 목소리에 이드는 만족했다. 꽉 조인 수련에 조금 싫증을 내려 하던 이그렌에게 이번 대련은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쉴라 경이 방문해서 네 상대를 해 주실 거다. 최대한 실전처럼 할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언제 그런 이야기를!”

“지금, 그렇죠, 쉴라 경?”

“이드 님의 말씀이라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이드의 말에 쉴라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는 사람이 이드가 아니라도, 뛰어난 후배의 상대는 그녀가 즐겨 하던 일이니까.

이그렌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드와 맹렬하게 대련하던 쉴라의 모습은 차라리 황홀하기까지 했지만, 자신이 그 상대가 된다 생각하니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명화를 망칠 예비 죄인이 된 느낌이랄까?

이드는 그런 이그렌을 위로하며 말을 건넸다.

“참, 쉴라 경과의 대련이 끝나면 케마란과 네리베르와도 대련시켜 줄 테니까. 기대해.”

과연 쉴라와의 대련 후에 체력이 남아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말이 목에서 꼴깍거렸다.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날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이그렌은 미리 써 둘 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쉴라가 이드를 찾은 저녁.

모이엔은 게일의 저택을 방문했다. 현재 게일은 이드를 상대로 비겁한 방법으로 대련을 신청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근신 중에 있었다. 사건 당일 게일을 부른 기사단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펄펄 뛰며 분노를 토했다. 그때의 모습을 봐서는 수백 번이라도 게일을 기사단에서 제명시킬 기세였지만, 황제의 거부로 제명당하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그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황제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이 근신 중인 저택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게일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신 중인 게일과 친분을 쌓아 볼 생각을 한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 게일을 찾아오는 기사는 없었다. 그런 얄팍한 계산으로 다가가기에 부정한 기사라며 분노하는 기사들이 너무 많아 결국 모두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중에 찾아온 모이엔이기 때문에 하인들은 더욱 놀랐다.

내심 기사로서, 인간으로서 끝난 것이 아닌가 했던 게일을 저 유명한 오색 기사단의 다섯 단장 중 한 명이 찾아오다니!

“오랜만이군, 검왕자.”

“모이엔 단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모이엔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게일의 모습을 무심한 척하며 살피고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크게 소문이 나지는 않았지만, 동료 기사들의 비난에 절망하고 술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멀쩡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군. 눈에 독기도 있고, 시큼한 땀 냄새를 보면 수련도 쉬지 않는 것 같고. 과연 검왕자.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지?”

생각을 마친 모이엔은 친근한 얼굴로 게일과 마주 앉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여 다행이군. 생각보다 멀쩡해서 놀랐어.”

“흐흐, 멍청한 짓은 하지만, 술로 도망치는 바보는 아니라서요. 그보다 수도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온 건 모르는 걸 보면 밖에 나가지 않는 모양이군?”

지금 수도에 삼색 기사단의 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근신 중이니까요. 일부러 찾아와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이번 마탑 토벌에 오색 기사단 중 은색, 적색, 그리고 나의 청색 기사단이 참가하기로 했거든. 실력이 좋은 수련생들의 실전 경험도 겸해서.”

“삼색 기사단까지 올라왔다면 곧 토벌대가 출정하겠군요. 그런데 수도에 오셨다고 겸사겸사 절 찾으신 건 아니실 것 같습니다?”

“왜. 그러면 안 되나? 자네와 난 꽤 사이가 좋았잖아.”

“단순히 사이가 좋다고 추락한 후배를 찾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요.”

게일은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모이엔에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계산적인 모이엔의 성격은 어지간히 그와 어울렸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는데 저런 소리를 한다.

사실 그와 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이상 끝까지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이었으니까.

‘설마 내가 이 꼴이 될 줄은 몰랐지.’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모른다. 게일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때때로 솟아오르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아주 지랄 같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초인 기사단장의 말까지.

게일이 다른 쪽으로 생각에 빠지려 할 때 모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나는 자네가 날 잘 알아서 참 좋아. 맞아. 그냥 온 것은 아니야. 페시딘 님을 대신해 찾아온 것이네.”

페시딘의 이름이 나오자 게일의 몸이 모이엔을 향해 기울었다.

“검왕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네의 행동에 매우 실망하셨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지요.”

“하지만 또한 자네를 여전히 믿고 있으시지. 한순간의 실수로 버리기엔 뛰어난 재능이자, 유능한 기사라고 말씀하셨지. 참으로 인자한 분이 아니신가.”

“예…….”

게일은 울컥하는 감동에 목소리가 떨렸다. 페시딘이 자신을 그렇게 믿었다는 것도 의외지만, 근신 동안 설움을 당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감정이 흔들렸다.

모이엔은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인 게일의 모습에 만족하고는 미리 준비한 말로 게일의 마음을 구슬렸다.

그리고 적당히 게일의 마음이 고조되었다고 생각되자 본론을 꺼냈다.

“조만간 자네의 실수를 만회할 자리가 생길 것이네.”

“그건 무슨 말입니까?”

“토벌대의 선봉. 자네는 그곳에서 이번 실수를 공으로 만회할 기회를 얻게 될 거란 말이지. 이번에 황제 폐하께 전하는 편지에 검왕님이 특별히 써 놓은 내용이지.”

설마 검왕이 황제에게 그런 부탁까지 했다고? 게일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니.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최고의 공을 세울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자넨 검왕자가 아닌가.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아. 토벌대에는 삼색 기사단과 내가 있고, 무엇보다 최근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이드 명예 후작이 있지. 어지간한 활약으로는 자네의 공은 티도 나지 않을 거야.”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라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던 모이엔은 슬쩍 한쪽 눈을 뜨며 게일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확약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준비했네. 특히 이 방법은 자네의 공을 크게 할 뿐 아니라 이번 토벌에서 검왕님이 목표로 하시는 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이야. 한번 해 볼 텐가?”

은근하고 뭉근하게 경계심이 들지 않는 말투.

‘이런 말투 며칠 전에도 초인 기사단에서 들었었지.’

검왕을 보는 듯한 위압감을 보이던 발터.

그가 떠오르자 모이엔의 말에 흔들리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게일은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기로에 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바닥을 적시는 땀을 몰래 닦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 보겠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검왕자. 검왕 님이 믿음을 보내는 보람이 있어. 하하하.”

모이엔이 껄껄 웃으며 게일의 어깨를 팡팡하고 두드리자 게일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숙여진 그의 눈은 냉정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애송이의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모든 행동에 득실을 따지는 상인에 가깝다.

‘어느 쪽의 손을 잡느냐에 내 미래가 달렸다.’

게일은 침착하게 이어지는 모이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것이 자신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련을 마치고 흘린 땀까지 정령의 도움을 받아 털어 낸 쉴라는 맑은 얼굴로 숙소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서 그런지 정신이 매우 맑았다. 토벌대 참가를 위해서지만, 성 안에 수천의 기사를 둘 수 없어 대부분의 기사단은 성 외부에 숙소를 만들었지만, 삼색 기사단은 황제의 특별한 배려로 성 안에 머물고 있었다.

쉴라가 방으로 돌아오고 잠시 후 라발이 조용히 그녀의 방을 찾았다.

“모이엔 경이 게일 경의 저택을 찾아가 한참 있다가 돌아왔네.”

라발은 쉴라에게 부탁받은 대로 모이엔의 뒤를 쫓은 결과를 전했다.

쉴라는 라발에게 감사를 표하고 팔짱을 끼었다. 풍성한 가슴이 위로 부풀어 올랐다.

“흐으음, 게일 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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