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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65화


802화

황제 체면에 자신이 했던 말을 바꾸는 것이 자존심 상했던 모양이다. 오늘 어전회의에 이드를 부른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황녀였다.

하지만 황녀 뒤에 황제가 있다는 것이 너무 빤하게 보였다.

이드에게 그런 엄청난 비밀을 듣고 돌아간 황녀가 굳이 이드를 어전회의에 불러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 부분이 좀 불만이기도 했다.

말을 바꿔 부를 거면 당당하게 부를 것이지 황제 체면에 황녀 뒤에 숨는 것은 뭔지. 자존심 상하는 것보다 그게 더 꼴불견인데 황제 본인만 그걸 모르는 모양이다.

“생각은 좀 정리되었습니까?”

황녀와 함께 궁 안을 걸으며 물었다.

“이성적인 정리는 벌써 끝났답니다. 다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을 뿐이죠.”

“쉴라 경에게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황녀가 떠나간 후 편치 않던 쉴라의 안색을 기억하는 이드가 말했다. 사소한 문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쉴라 경이 제국과 검후님을 위해 얼마나 힘내고 있는지 아는걸요. 그냥 놀이에 끼워 주지 않은 꼬마처럼 조금 섭섭했어요, 호호.” 스스로 말하고 보니 정말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아 뿔이 난 꼬마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황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이드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황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께서도 어전회의에 참석하시겠지요?”

“네, 저도 토벌대의 일원이니까요. 토벌대의 지휘권과 제 위치에 대해서도 어전회의에서 발표하게 될 거랍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부분일 것이다.

이후 토벌대를 편성하는 것은 오롯이 지휘관의 권한이 될 테니까. 물론, 그것도 황녀가 지휘관의 권한에 간섭하지 않아야 할 테지만.

‘이 황녀가 그런 철없는 바보짓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앞에 서서 공을 세우길 바라고 토벌에 참가하는 귀족과 기사들의 머릿속은 아마도 누가 지휘관이 되느냐, 그리고 그에게 어떻게 잘 보이느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런 자리라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더 없을 텐데. 도대체 왜 절 부르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레오날도 후작님이랍니다. 명예 후작님이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거라고 황제 폐하께 말씀드렸죠.”

황녀의 고자질에 이드가 레오날도 후작의 이름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나크렌 제국 비전 난화십이식이라는 책을 가져올 때부터 느꼈지만,

가까이할수록 피곤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또 그 양반이로군요.”

“네. 그런데 너무 화내지 마세요. 레오날도 후작님이 명예 후작님을 부른 건 저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제가 전장에 서고 싶다고 부탁드렸잖아요.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황녀로서 토벌대와 함께하는 것뿐 아니라 기사들과 함께 직접 전장에 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명예 후작님께서 저와 함께하며 절 지켜 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 어지간한 반대는 쏙 들어갈 거라고 하셨거든요.”

이드의 힘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잘도 입을 닫겠다 싶지만,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것도 그럭저럭 듣기 좋은 명분일 뿐. 세세한 것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요. 황녀 전하의 실전을 돕겠다는 약속도 있으니까요. 그럼 바로 어전회의를 시작하는 겁니까?”

“아니요.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답니다. 그동안은 저와 티타임이나 가지시죠.”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황녀의 전갈에는 어전회의의 시간이 담겨 있지 않고, 그저 일찍 와 달라는 내용만 있었다.

“저와 같은 미인과 티타임을 가질 기회를 드리는 건데 싫으신 건가요?”

“네. 저 같은 유부남에게는 위험한 시간이거든요. 특히 라미아가 싫어하지요.”

“호호, 명예 후작님은 공처가셨군요.”

“애처가랍니다.”

이드는 황녀의 말을 정정하고는 그녀를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어전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모이엔은 통신구를 앞에 두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정해 둔 시간이 되자 통신구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게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이엔 단장님이십니까?]

“그렇네. 통신구는 잘 받은 모양이군. 직접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만 자네를 지켜보는 눈도 많고,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긴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나?”

의자에 몸을 기댄 모이엔은 과연 게일이 어떤 대답을 내어놓을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은은한 마나광을 발산하는 통신구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혼란스러웠을 뿐이지요. 저는 이전에도 소드 팰러스의 기사였고, 지금도 소드 팰러스의 기사이며, 미래에도 소드 팰러스의 기사일 것입니다.]

짝짝짝!

“훌륭한 대답이네. 과연 소드 팰러스의 검왕자다운 발언이야. 그래, 우리는 영원히 소드 팰러스의 기사지. 그 외의 것은 큰 의미가 없어. 아무렴. 잠시라도 자네가 흔들렸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럽군. 날 용서하게.”

모이엔이 유들거리는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이 어이가 없는지 잠시 말이 없던 게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이야기는 모이엔 단장님께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으하하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시간이 많지 않으니 검왕께서 자네에게 맡길 일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주겠네.”

[그 전에 발터 단장이 제게 했던 권유를 먼저 들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씨익.

그 말과 동시에 입으로만 웃고 있던 모이엔의 눈가에 진심을 담은 미소가 담겼다.

초인파에서 모이엔이 게일을 만났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모이엔도 초인파가 게일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그들 사이에 소드 팰러스에서 파악하지 못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 분명한데, 게일이 그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면 모이엔은 게일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 상황에 맞는 쓸모가 있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사용법의 난이도와 결과물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모이엔은 게일과 초인파의 만남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이것은 이제 너와 내가 다시 한편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이런 정보력이 있으니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런 모이엔의 뜻을 확실히 전달받은 게일은 이를 악물고 갑갑하게 목을 조이는 상의의 단추를 잡아 뜯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모습과 달리 이어지는 목소리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평탄했다.

[어전회의도 있으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일의 말을 시작으로 통신구를 통해 두 사람은 모이엔이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악한 흑마법사 토벌을 위한 회의의 시작을 알립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어전회의가 시작되었다.

평소 한둘 정도는 빠지던 귀족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모조리 참석했고, 가장 상석에 황제와 황녀가 자리했다.

“우선 제국과 대륙의 안녕을 위하여 토벌에 참가한 용사들을 대표한 그대들의 용기와 기사도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럼 토벌전에 대해 논해 봅시다. 우선 내가 뽑아 놓은 토벌대의 지휘관들부터 발표하겠소.”

먼저 스타트를 끊은 황제는 록마틴 후작을 시작으로 토벌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호명당한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앉았다. 이는 황제가 정한 것으로, 어지간한 흠이 있지 않으면 반대할 사람이 없다.

황제의 힘이 약하면 반대라도 하겠지만, 현재 황제의 힘은 역대 황제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고했기 때문에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귀족파라고 모여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는 자들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귀족들이 노린 것은 토벌대에서 자신들이 맡을 임무에 대한 것이었다.

토벌대에 소속된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에 설지 정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어느 지휘관 아래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서 얼마의 적을 벨 수 있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에 토벌 참가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한참을 목소리를 높여 가며 떠든 덕분에 노리는 자가 많은 자리는 빠르게 정해지고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때 목소리 큰 고위 귀족들의 모습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젊은 귀족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토벌대를 모아 느긋하게 움직이면, 과연 적들이 도망가지 않고 있을까요?”

당연한 의문이다. 멍청하지 않은 이상 토벌대의 어마어마한 병력과 싸우려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때로는 당연한 전력 차에도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토벌대가 목표로 하는 자들이 그러했지만, 첫 어전회의 참석에 긴장한

남자는 그런 사실을 사전에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쯧쯧, 자네는 어전회의에 참석하면서 그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나온 것인가? 적에 대한 자료를 봤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인데.”

볼에 흉터를 새긴 남자가 혀를 찼다.

“죄, 죄송합니다.”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그가 허둥거리자 풍만한 몸매만큼이나 후덕한 성격으로 소문난 토토로 백작이 끼어들었다.

“허허, 아직 어리니 그럴 수도 있지. 하나 앞으로는 조심하게. 황제 폐하께서 주재하시는 어전회의는 결코 어설픈 자리가 아니네. 일단 자네가 모르는 듯하니 내가 설명해 주지. 혹 모르는 사람들도 잘 들으시게.”

이드는 토토로 백작의 말에 젊은 귀족이 고개를 숙이며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흥미를 가졌다.

과연 저들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을까?

‘별거 없네.’

이드는 입맛을 다셨다. 이어지는 토토로 백작의 설명은 클라인과 쉴라와 논의한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미완의 마탑을 발견한 경위이고, 이제 자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세.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미완의 마탑에 모인 것은 사악한 흑마법사지. 이자들은 감히 제국의 귀중한 인재를 납치해서 인체 실험이라는 연구에 사용했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로 바이트 타블렛이라는 것을 만들었지. 바로 이 물건이 토벌대가 오는 것을 알면서 이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이네. 자네도 귀족이라면 마법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겠지? 그들이 얼마나 호기심과 연구에 목숨을 거는지 말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연구에 빠져 굶어 죽은 마법사의 예도 있잖습니까.”

“옳지. 이 미완의 마탑의 족쇄가 바로 이 바이트 타블렛이지. 그들은 이것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네. 그런데 우리에겐 다행인 것이, 이 물건이 대륙의 지맥에 묶여 있다는 것이네. 쉽게 잘라 낼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지. 즉, 바이트 타블렛을 버릴 수 없는 미완의 마탑은 토벌대가 목전까지 도달하는 것을 그저 손가락 빨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네.”

“과연 그런 것이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토토로 백작님의 말씀에 크게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인사성 하나는 밝아서 좋구먼.”

토로로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손자를 가르치는 할아버지 같아 보여 어전의 분위가 훈훈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마침 적당한 분위기가 된 것 같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대들에게 미리 알려 둘 것이 있다오. 그것은 이번 전장에 밀리아리아 황녀가 제국을 대표해서 기사들과 함께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오.”

술렁~

귀족들이 놀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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