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49화
885화
“한계라뇨?”
황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저렇게 멀쩡히 잘 움직이고 있는데?
혼자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에 두 손 모아 응원하는 중인데, 난데없이 한계라니?
그에 이드가 친절히 설명했다.
“돌이 비록 불에 강하지만, 계속 달구다 보면 부서지고, 녹아내리죠. 그처럼 케일롭 경의 몸도 열을 견딜 수 있는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콰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여덟 번째 돌탑이 무너졌다. 그에 따라 화력이 오르고.
“훅훅! 훅훅!”
케일롭의 숨이 거칠어졌다. 가쁜 숨을 따라 그의 입에서 김이 났다.
이드가 그 모습을 가리켰다.
“보이시지요? 저 불길 속에서 입김을 뿜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아니죠.”
저 안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문에서 수 미터 떨어진 상태에서도 얼굴을 뜨끈하게 달구는 열기로 충분히 느끼고 있다. 그 안에서 입김이라니? 한여름 땡볕 아래 호수가 얼어붙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황녀는 저것이 입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생각대로였다. 이미 케일롭은 뜨거운 열기에 빠져 있었다. 은은한 단계는 옛날에 지났다. 입에서 나는 입김도 사실은 속에서 끓어오른 수분이 돌로 변한 피부로 빠지지 못하고 입을 통해 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초인기 스톤 자이언트가 아니었다면 벌써 내장이 익어 버렸을 열기가 그의 몸에 쌓였다는 방증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오래 버텼다 할 수 있었다.
“후퇴를 명령하시죠.”
황녀의 말이 아니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케일롭 경, 작전은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경에게 무리가 가는 듯하니 즉시 복귀하도록.”
증기 기관차처럼 김을 뿜으며 다음 돌탑으로 향하던 케일롭은 갑작스러운 이드의 말에, 힘들어하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남은 돌탑이………….”
“토벌대에 사람이 자네만 있는 것이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그리고 황녀 전하가 보시는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고 싶은가?”
“…..충!”
망설임은 짧았다. 자신의 몸인 만큼 누구보다 한계라는 걸 잘 알았다. 다만 자존심에 한 번 거절해 봤을 뿐이다. 사실은 내심 반가운 말이었다. ‘아무렴. 황녀 전하께 못난 모습을 보여 드릴 수는 없지.’
케일롭은 즉시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조금 늦었던 모양이다.
탑을 부수고 전진하며 강해진 화력은 뒤로 후퇴하는데도 전혀 약해지지 않았고, 그 열기는 빠르게 케일롭의 골수에 이르렀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다리가 풀린 케일롭이 쓰러지려 했다.
“어? 어?”
“그러게 나오랄 때 바로 나오면 좀 좋아?”
이드는 쯧쯧 혀를 차며 허공섭물로 쓰러지려는 케일롭을 잡았다.
“에이쿠, 황녀 전하 앞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는데…………….”
이대로 쓰러져 숯이 될 위기보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던가! 이드는 죽음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어이없는 태도에 헛웃음을 흘리며 그를 끌어냈다.
“흉한 꼴 보이지 않게 해 줄 테니, 얌전히 있으라고.”
“어? 어!”
하지만 그런 이드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케일롭은 갑자기 입구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자신의 몸뚱이에 놀라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쓰러지는 것은 피했어도 보기 흉하긴 오십보백보다.
당황하던 케일롭은 곧 이드와 눈을 마주치고는 상황을 이해했다.
‘이런 망신이!’
순식간에 아까 승부욕을 불태우던 마법사 메이슨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케일롭의 생각일 뿐이었다.
여덟 개의 돌탑을 파괴한 그의 성과가 메이슨과 같을 리가 있겠는가. 겨우 살라만다의 둥지라는 불지옥을 탈출한 그를 초인들이 열렬히 반겼다.
“역시 케일롭 경의 초인기는 대단합니다!”
“메이슨 마법사가 나섰어도 깨지 못한 걸 여덟 개나 깼다니. 멋지십니다!”
하지만 그중 케일롭의 귀에 들어오는 것은 황녀의 목소리뿐이다.
“케일롭 경이라고 했던가요. 경의 용기 있는 행동과 불길을 견디는 의지는 오늘 전투 중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군요. 대단했어요.”
“여,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황녀의 칭찬에 케일롭이 감격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녀의 칭찬을 받은 기사는 그 손등에 키스할 권리가 있었다. 영광스럽게도! 하지만 그런 그를 스폴과 이드가 동시에 막고 나섰다.
“어째서 막으십니까?”
세상 억울해 보이는 케일롭의 반응에 스폴은 불쌍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경에겐 미안하지만, 현재 경의 몸은 너무 뜨거워 황녀 전하의 옥체에 해가 될 수 있으니 아쉽더라도 참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케일롭의 몸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손을 잡았으면 화상 확정이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케일롭이 급히 손을 거두자, 이번엔 이드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자네 지금 막 초인기를 해제하려고 했지?”
끄덕.
당연하다. 그 하얀 손에 딱딱한 돌멩이 입술로 키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시. 그럼 자네,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지금 모조리 타 버렸다는 건 알고 있나? 초인기를 해제하면 타 버린 옷이 자동으로 생겨나는 건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알지?”
안다. 아주 잘 알았다.
“이런 세상에 맙소사!”
이드는 기겁하는 케일롭의 모습에서 그에게 옷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녀 앞에서 나체쇼라니. 케일롭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물론 피나는 수련을 거듭해 강인해진 몸이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럽지, 부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황녀 앞에서 나체쇼를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도 황녀에게 공을 치하받고 손에 키스를 하려는 중에?
상상만으로도 그 후환이 두렵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황궁에서의 벌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일롭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황궁이 아니라, 자신처럼 황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기사들의 뒤끝이다. 자신이라면 그런 자에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손등 키스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황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쿵쿵거리며 초인들 사이로 사라졌다.
“호호호. 제가 본 초인 기사분 중에 제일 재미있는 분이군요.”
까르르 웃는 황녀에 이드는 혀를 찼다. 어떻게든 잘 보여 보려 한 케일롭이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용감한 기사이기보다는 재미있고, 엉뚱한 기사로 인식된 것 같아서다.
그 후 케일롭의 뒤를 이어 돌탑을 파괴하기 위해 마법사와 초인들이 나섰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초인들이 케일롭의 뒤를 이어 힘을 냈지만, 앞선 두 사람이 화력을 너무 올려 둔 때문인지 겨우겨우 하나의 돌탑을 더 부쉈을 뿐이다.
그러자 이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아무래도 3층은 삼조의 능력 밖인 것 같군요. 명예 후작님. 본진으로 돌아가 마법사들의 준비가 끝나길 기다려야 할까요?”
가장 먼저 입을 연 황녀의 말에 이드가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았으면 3층의 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러면 한껏 기세가 오른 삼 조가 실망할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나요?”
삼 조에 속한 마법사와 초인 중 저 불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는 아예 논외다. 그렇지 않아도 완전히 잊혀 손가락만 빨고 있다. 그 외 문밖에서 원거리 공격도 시도했지만 불길에 막혀 돌탑에 닿지 못했다.
최소한 황녀가 떠올릴 수 있는 공략법은 더 이상 없었다.
“왜 없습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설마 명예 후작님이 직접 저 안으로 들어가시겠단 말인가요? 위험해요.”
“저 안으로 초인도 들어가고, 마법사도 들어갔습니다. 저라고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과 기사는 달라요.”
황녀는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드가 강한 것은 알지만, 저 안의 열기를 견디는 것은 강함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만 올라도 어지간한 더위와 추위는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범위에서다. 그레이트 소드의 경지에 오른 자라도 저 정도 화력에 태연할 수는 없다.
쉬운 예로 그레이트 소드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호신강기도 검기는 견딜 수 있어도, 용암이 뿜어내는 열기나 세상을 눈으로 뒤덮는 블리자드의 냉기를 막아 낼 수는 없는 법이다.
황녀는 자신의 말에 동조를 바라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선 스폴과 기사들의 표정은 그녀와 같았다. 과연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라미아와 일리나의 얼굴을 본 순간,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저기, 두 분?”
가장 이드를 걱정해야 할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태연해도 너무 태연했다.
일리나는 한 푼의 걱정 없이 이드의 옷 매듭을 조이고, 라미아는 온탕의 온도를 체크하는 것처럼 손을 넣어 3층의 화력을 재고 있다.
평소 부부 관계도 좋아 보였는데, 걱정도 되지 않는 걸까?
“음. 이 정도면 온도가 더 높아져도 중급 정도면 충분하겠네.”
‘중급이라니. 뭐가?’
아니, 그 전에 손이 뜨겁지도 않나? 순간 자기가 모르는 고수들의 화염 극복법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바로 입으로 낼 정도로 황녀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가 아니라도 공략 대책을 위해 모여 있던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이드의 결정을 말리고 있었으니까. 모두 토벌대에 기사단을 이끌고 온 단장급이라 걸걸한 목소리가 주는 압력이 상당했다.
“명예 후작님의 생각은 알겠지만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하들을 두고 지휘관이 나서는 경우는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었을 때뿐입니다.”
“차라리 본진의 마법사들이 준비되길 기다리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아무런 대책 없이 나섰겠습니까. 마법사들과 초인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도 말입니다.”
“음. 분명 그렇긴 하지만………………”
“혹 불길을 막는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으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들으면 그런 물건이 있는데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질책하는 식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드는 그렇게 꼬아 듣지 않았다.
꼬아 듣는 것도 사상이 비틀어지고, 심사가 꼬인 속 좁은 인간이나 그렇지 정상적인 사람은 그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가 조심하는 마음도 이해는 갔다. 입바른 소리를 해도 높은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이 모든 이야기를 꼬아서 듣고 꼬아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게 마치 예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예법이 몸에 익으면 정상적이던 사람도 사상이, 귓구멍이, 혓바닥이 꼬여 버리는 것이다.
“아니요. 아티팩트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티팩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요.”
“그런 것이 있습니까? 혹시,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 중에 그런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까?”
이드 하면 마인드 마스터고, 마인드 마스터 하면 무공이 아니던가.
한 기사의 말에, 저 멀리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기사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거린다.
이드는 그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그런 무공은 있다. 균형 잡힌 무공이 어렵지. 음과 양 중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친 무공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그리고 이드에게도 있다. 불을 다스릴 수 있는 무공. 바로 오행대천공의 화.
하지만 이드는 여기서 그걸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드의 주머니에 든 무공이 무엇이 있나 궁금해하는 사람 천지인데.
그걸 꺼냈다가 무슨 고생을 하라고.
그리고 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오행대천공보다는 이 방법이 훨씬 뛰어나고, 능률적이며, 편하다.
“라스갈”
화르륵.
부름을 들은 불의 중급 정령 라스갈이 이드의 손 위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