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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00화


936화

오랜만에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따라오려는 스폴은 겨우 떼어 놓았다.

네 개 조가 빠지고 나니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어쩌지. 이제 누나들 얼굴도 조금씩 흐릿해지는데.”

작은 언덕에 올라 털썩 주저앉은 이드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뜻하게 않게 떠나온 고향과 가족들.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어느새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그런데 아직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교감을 통해 차원의 인이 가진 의미와 사용법은 알았지만, 완전한 완성을 위해서는 혼돈의 파편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야, 너 날 집으로 돌려보내 줄 생각이 있기는 한 거냐?”

이드가 차원의 인이 있던 손목 부위를 쿡쿡 찌르다 털썩, 하고 그대로 누웠다. 말도 못 하는 녀석을 붙잡고 무슨 짓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가끔 하는 이런 의미 없는 짓이야말로 이드의 생활의 일부였다.

오히려 시온 숲을 나온 후로는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드물어서 하지 못한 일이랄까.

“그나저나 고향에 돌아가면 아무래도 정식으로 식을 올려야겠지? 누나들도 보고 싶어 할 테고.”

나른한 오후 그렇게 의미 없는 말과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는 이드였다.


아직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 있을 시간.

갑자기 던전 입구가 부산해졌다. 그러더니 입구에서 사 조 조원들이 걸어 나왔다. 지친 그들을 이 조 조원들이 돕고 있었다.

“신관님! 신관님, 여깁니다! 여기 환자가 있습니다!”

“뭐? 짐? 이 새끼야! 너 지금 뭐가 우선인지 몰라서 물어? 그건 그냥 적당히 던져 놔! 지금은 부상자 치료가 최우선이라고!”

“오 조와 일 조는 어떻게 됐어? 우리보다 먼저 나온 조가 있어?”

“젠장. 저 안은 완전 지옥이야. 진짜 지독하다고!”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부상자도 많았다. 상처가 없어도 오물이 묻어 하나같이 모습이 엉망이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13층까지 오면서 고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역시나 뭐요?”

“역시나 가장 어려운 코스인 것 같다고. 시끄러워서 나왔니?”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케마란과 네리베르, 그리고 일리나가 있었다. 그 뒤로는 황녀와 스폴도 나오고 있다.

밖의 소란에 나온 것 같다.

특히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줄줄 흐르는 땀도 닦지 않고 달려 나온 것이, 일 조가 피해를 입고 나온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뛰어나온 것 같았다. 그나마 일 조가 아니라서 안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많은 부상자에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비명 소리가 많이 들렸습니다. 고함 소리도 크고, 그런데 피해가 큰 것 같은데. 일 조는 괜찮을까요?”

“무슨 소리야. 네리베르! 쉴라 단장님과 은색 기사단이 있다고. 사조처럼 피해가 큰 일은 없어!”

케마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조가 약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만큼 쉴라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다행히 사망자는 많지 않아 보이는데, 명예 후작님은 가 보지 않으실 건가요?”

두 손을 꼭 쥔 황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아래 사상자들이 모두 제국의 동량들이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제국의 황녀로서 참 훌륭한 마인드라고 할까?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가 가면 방해만 될 거예요. 저보단 록마틴 후작님이 계셔야죠. 제가 도움이 될 일도 없을 테고.”

마침 빠르게 내려오는 록마틴 후작을 보며 말했다.

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사실이다. 이곳이 중원이나 지구라면 다를지 모른다. 무공을 기반으로 한 이드의 의학 지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니까.

고수의 의학 지식은 혈도와 외상으로 치우치긴 하지만, 작은 도시에 명의라고 소문난 자들 못지않은 것이 보통이니까.

하지만 그레센 대륙에는 신관과 마법사들이 있다.

기도문 한 구절에 부러진 뼈가 붙고, 화려한 스펠과 시동어에 끊어진 내장이 붙는다.

그런 자들이 이곳 토벌대에는 바글바글했다.

인체 실험이라는 금단에 분노한 신전에서 대대적인 지원 인력을 붙여 둔 때문이다.

지금 모여 있는 신관들이 힘을 합치면 과장 조금 더해서 죽은 사람도 살려 낼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 이드가 끼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인 것이다.


현장에 도착한 록마틴 후작의 체계적인 지시가 이어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부상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받은 후,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옮겨지고,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짐을 받아 들었다.

지친 기사들에게는 보고보다도 휴식이 우선 주어졌다.

그렇게 정리된 자리에는 어지러운 발자국과 함께 붉은 핏자국만 남았다.


잠시 후 록마틴 후작의 기사가 달려와 사조의 보고가 있을 것을 알려 왔다.

이드는 황녀의 권유에 후작의 막사로 향했다. 어차피 오 조와 일 조가 복귀하면 똑같은 보고가 이어지겠지만.

이드도 사조가 어떤 일로 저만한 피해를 입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 조가 진입한 문과 다른 두 조가 진입한 문 안의 환경이 충분히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장이 부상을 입은 탓에 보고는 사 조 부조장이 맡았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록마틴 후작이 억지로 쉬게 했다. 하루에 끝날 공략도 아니고, 나머지 조의 복귀 후에 한 번 더 나설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조장의 보고는 길지 않았다.

그는 좁고 복잡한 미로에 대해 말했다. 간간이 섞인 함정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이전의 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크와 고블린, 마수들이 쏟아지고 나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놈들은 고통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심장이 찔리고도 달려들었습니다. 마치 언데드와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설명을 하면서 그때가 떠오르는지 가볍게 몸을 떠는 부조장이다.

사 조에서 부조장을 할 정도면 그 실력이 최소 소드 마스터 상급일 텐데도 던전 내 고블린과 오크에 두려움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어진 말에서 그는 그런 좀비 같은 몬스터가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속에 간간이 섞인 초인기를 이식받은 강화 몬스터까지 더해진 몬스터의 파도가 멈추지도 쉬지도 않고 해일처럼 덮쳤단다. 가히 몬스터 웨이브라고 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사조는 실력이 아니라 숫자에 밀렸습니다. 체력에서 패배했습니다. 끔찍한 곳입니다. 도대체 그 많은 몬스터를 어디에 숨겨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부조장은 거기 있는 몬스터가 올라오면 토벌대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걱정스러운 말까지 남겼다.

부조장의 보고가 끝나자 이드는 지휘부 막사를 나왔다.

아직 세 개 조가 복귀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따로 회의를 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회의를 할 사람도 없었다.

모두 던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이드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볼 수 있었다.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처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뒤에 일리나와 스폴이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었다.

“아직 나와 있었던 거예요?”

보고만 받고 나오는 길이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기에 상황은 모두 정리되어 던전 앞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사조 모습을 보고는 걱정이 됐나 봐요. 일 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해요.”

“그럼 저 둘도 앉아서 기다리지, 왜 서 있어요?”

일리나나 스폴이 의자에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테고.

그러자 스폴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눈으로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사단의 동료들이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자신들만 편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답니다. 참, 마음이 바른 후배들이지요.”

“……그런 장한 후배들을 앞에 두고 스폴 경은 왜 앉아 있나?”

“생각은 존중하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차라리 충분히 쉬었다가 부상자를 옮기거나 이어질 토벌에서 동료를 도울 생각을 해야죠.”

어디 하나 틀리지 않은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그러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던 두 사람이 슬그머니 움직여 막사로 들어가 의자를 가지고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와 일리나가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귀여운 녀석들.”

반면 자기 말은 듣지 않고 이드의 말에는 재깍 반응하는 모습에 토라진 스폴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러다 이드와 지휘부 막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보고는 들으셨습니까?”

사조가 어떤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사조의 이야기를 토대로 일 조의 상태도 헤아려 보고 싶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기에 사조의 보고 내용은 딱히 비밀도 아니다.

“거기 두 사람도 가까이 와서 앉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이런 거라도 들어 둬야 다음 공략에 도움이 되지.”

“네. 마스터!”

이드의 부름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잽싸게 움직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몸에서는 땀 냄새가 났지만, 불편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흘린 땀이고,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에 씻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드는 조용히 운디네를 불러 두 사람의 몸과 옷을 씻겨 줬다. 의미는 좋지만, 능력이 있는데 굳이 불편함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이드의 행동에 대해서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도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어서 이드가 부조장의 보고 내용을 간단히 추려 말했다.

그에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얼굴색이 점점 질려 갔다.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의 물량전은 기사들에게도 치명적인데.”

수업 내용을 떠올린 네리베르의 말에 케마란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우리 은색 기사단・・・・・・ 아니, 아니, 우리 일 조도 위험한 거 아냐?”

그에 스폴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케마란의 어깨를 눌렀다.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건 사조의 경우고. 일 조라면 괜찮다. 은색 기사단의 방진도 있으니까. 거기에 쉴라 단장님께는 새로운 무기도 있고.”

“새로운 무기면, 황금 둥지요?”

최근 쉴라에게 새로 생긴 무기라면 황금 둥지뿐이기에 케마란이 냉큼 반응했다.

“맞아. 강력한 갑옷과 불길. 그리고 혼전 중에 공중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도 활로는 찾을 수 있다.”

확신을 담은 목소리에 은은한 미소까지 더한 스폴의 말을 들은 네리베르와 케마란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드는 등을 기댄 채 그 모습을 보았다. 같은 기사단의 선후배로서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닌가.

스폴의 이야기는 분명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있어 위험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하지만 선배도 후배도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믿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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