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23화
959화
진흙 위에 뱀이 지난 듯 구불구불한 길. 그 끝에 존 워스를 꽁꽁 휘감고 있는 검은색 고치.
중력구가 고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저거면 끝이다. 이기셨어!”
칸이 확신했다. 복면들을 상대하는 중에도 발터와 암살 기사를 살피던 그였다. 앞서 어느 기사단의 단장에게 말한 것처럼 이 전투의 중심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초중기를 무시하던 암살 기사를 제압하는 중력 밴드와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중력구를
저 상태로 중력구에 당하면 검후라도 끝이다. 이 승부의 승리는 발터의 것이다. 칸은 확신했다.
동시에 칸의 목소리를 들은 이드는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렸다.
“다 잡은 존 워스를 칸이 살리네.”
저런 말은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하면 안 된다. 죽은 후에도 잘못하면 살아나는 마법의 키워드, 라미아가 들었다면 안타까움에 칸의 통수를 날렸을 거다.
무엇보다 그런 장난스러운 설정을 빼더라도 그렇다.
“저 존 워스가 저렇게 쉽게 당할 인간이 아니지.”
초중기, 중력 밴드, 중력구 하나하나가 기사단을 통째로 갈아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술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드가 볼 때 존 워스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끼이이-
아니나 다를까. 존 워스를 가두고 있는 중력 코쿤이 비명을 지르며 물풍선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어코 안에서 뿜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몇 곳이 퍽 하고 터지고 만다.
코쿤을 뚫고 튀어나온 물체를 본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편?”
그랬다. 코쿤을 뚫고 나온 물체는 부서진 검의 일부였다. 숫자는 열네 개.
크기도 작았다. 숫자도 숫자지만, 중력 밴드가 얽혀 있는 부분을 제외해서 그런 것 같았다.
코쿤에서 나온 검편은 곧 금빛으로 반짝이며 금방 크기를 키웠다. 금속 자체가 커진 것이 아니라, 내력으로 이어진 존 워스의 내력을 받아 검편을 중심으로 검강을 형성한 것.
“열네 자루로 이기어검술을?”
순수한 놀라움에 탄성을 감추지 참지 못하는 이드다. 이기어검의 경지에 드는 것도 까마득한데, 그걸 열네 자루로 한다니. 길고 긴 강호 무림의 역사에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슈슈슛!
폭죽처럼 치솟은 검은 허공에 아름다운 금빛 궤적을 그리며 중력구를 향해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치잇!”
금검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발터의 결단은 빨랐다. 중력구를 폭발시킨 것이다.
아니, 폭발시키려 했다.
푸푸푹!
하지만 그의 의도를 미리 안다는 듯 금검이 공간을 건너뛴 듯한 속도와 함께 중력구에 박혀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네 자루의 금검에 난자당한 중력구가 폭주했다.
지이이잉!
압축되어 있던 압력이 검은 물줄기처럼 새어 나가며 벽에 깊은 자국을 남겼고, 검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겨났다. 격렬한 진동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찰나.
금검이 움직였다. 검사의 검보다는 외과 의사의 메스와 같은 움직임,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정확한 의도를 가진. 촤촤촤촥!
이리저리 찌르고 가르며 중력구에서 넘쳐흐르는 압력의 토출구를 만들었다. 바로 중력 코쿤을 향해서.
중력에 중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중력이 한곳을 향하면 그 힘을 두 배가 되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면?
“누가 그렇게 둘까!”
난도질당한 중력구를 포기한 발터가 구멍은 뚫렸지만 여전히 존 워스를 단단히 묶고 있는 코쿤을 움직였다.
그에 단단한 고치 형태의 껍질이 슬라임처럼 변한 코쿤이 폭주 직전의 중력구와 금검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제압에서 자폭으로 목적을 바꾼 것.
동시에 발터의 입에서 기합인지 명령인지 모를 고함이 터지고.
쿠웅!
중력구가 폭발했다. 코쿤 안에서의 폭발임에도, 칸들은 순간 높은 산에 오른 듯 귀가 먹먹함을 느껴야 했다.
폭발의 압력 때문인가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진 코쿤이 곧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석실의 천장까지 닿았다.
그러나 끝내 코쿤은 폭발하지 않았다.
“죽이지 못했단 말인가.”
참혹한 심정으로 중얼거리는 발터와 상관없이 천장까지 부풀어 올랐던 코쿤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불안정하던 물질이 안정되는 모습이라고 할까? 폭발해야 할 코쿤이 터지기는커녕 안정이라니. 발터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과연 나쁜 예감은 틀리지 법이 없는 법인가. 사람보다 작게 줄어든 코쿤에 머리와 발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는 코쿤에 갇혀 있던 존 워스의 머리와 발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즉, 존 워스가 코쿤으로부터 탈출했다는 의미다.
“꽤 위험했군.”
그리고 존 워스의 머리가 완전히 밖으로 나오는 순간 코쿤에서 열네 자루의 금검이 튀어나오더니 존 워스, 정확히는 코쿤을 중심으로 회전을 시작했다.
마치 코쿤을 위협하듯, 양 떼를 모는 양치기 개처럼.
그에 따라 끝까지 줄어든 코쿤은 원래 중력구였던 크기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중력구로 변한 코쿤은 여전히 발터의 통제권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력구를 둘러싼 금검이 결계처럼 발터와 중력구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금검에서 눈을 뗀 존 워스가 검을 들었다. 검신이 부서진 검은 자루만 남은 상태였고, 그의 발아래엔 중력 밴드가 들러붙어 있던 검편이 떨어져 있었다.
“설마 내 손으로 검을 부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군. 인정하지. 자넨 증명에 성공했어.”
존 워스가 자루만 남은 검을 휘둘렀다.
그에 중력구를 가두고 있던 금검이 바닥 쪽의 공간을 열며 중력구를 땅속으로 몰고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닥에서 풀썩 먼지가 피어나며,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존 워스를 쫓아다니던 초중기의 중력 지대가 해제되어 버렸다.
탈취한 중력구로 초중기의 핵을 찾아 중화시켜 버린 것이다. 정신없는 전투 중에 초중기의 핵이 있는 위치를 찾았으니, 과연 검왕이라고 불릴 만했다.
하지만 발터에게 초중기의 중화 따위는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중력구를 제압하는 금검.
금검을 본 직후부터 발터의 눈은 암살 기사의 눈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소드 배리어 단절, 과연 증명되었군요. 단절의 소드 배리어는 철벽의 검왕 존 워스. 당신의 상징과 같은 것이지요. 이제 그 바보 같은 복면을 치우는 게 어떻습니까. 우습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존 워스가 복면이 아니라 아예 투구를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 굳이 이런 걸로 내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지.”
“그렇겠지요. 당신의 초인 혐오가 하루 이틀도 일도 아니고, 그래도 설마 초인이 싫어 마탑과 손을 잡을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봤다면 자넨 아직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겠지.”
툭 하고 투구와 함께 자루만 남은 검을 던져 버린 존 워스가 옆으로 손을 뻗자 어디선가 달려온 기사가 아기처럼 소중히 안고 있던 검을 건넸다. 그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잠시 맡겨 두었던 애검이었다. 검 자체는 수수하지만 주인이 검왕이기 때문에 유명해진 존 워스의 애검을 알아보지 못할 기사는 드무니까.
그 모습을 지켜본 발터가 조원들과 전투 중인 복면들을 가리켰다.
“당신이 나섰다면 저 복면들은 이 조 기사들이겠군요. 그럼 게일 경이 도움을 요청해 적색 기사단을 데려간 것도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아니, 아니군요.”
존 워스의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단숨에 이해된 듯 추려 나가던 발터가 곧 고개를 저었다.
짧지 않은 시간 함께한 적색 기사단은 모이엔과 같이 음흉한 이들이 아니었다. 아니, 성향상 그런 짓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자신도 이상함을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연기하며 빠져나갔을까?
아니, 어쩌면?
발터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품으로 돌아온 애검을 뽑아 들고 있는 존 워스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설마 우리뿐 아니라 적색 기사단도 목표인 것입니까? 우리와 분리한 것은 좀 더 쉽게 싸우기 위함이었습니까?”
짝짝짝.
“정확하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 빠른 머리 회전과 훌륭한 전투 재능, 부하들을 돌보는 자세.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지. 정말 탐이 나는 인재야. 초인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정말 냄새나는 초인만 아니었다면 온 힘을 다해 아끼고 가르쳤을 것을.”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혐오스럽습니다. 당신들은 미친 겁니까? 주인을 찌른 검으로 이젠 자식과 같은 적색 기사단을 쳐 내는 겁니까? 기사들을 가족이라고, 모두 제자라고 하던 그 모습도, 검후를 대하던 것처럼 가식이었던 겁니까? 무엇보다. 이 일. 소드 팰러스에 있는 다른 검왕도 알고 있는 일입니까?”
“궁금한 것이 많지만 한마디로 답할 수 있겠군. 이는 모두 소드 팰러스를 위한 일이라는 것.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나를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기분이 나빠. 혐오스럽다고? 미쳤냐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초인파가 초인의 권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이 거대한 시설에 운영 자금을 대고, 갈아 넣을 재료를 공급한 것은 바로 자네들이야.”
발터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진실로써 존 워스와 소드 팰러스를 비난한 것처럼, 존 워스의 말도 진실이었으니까. 아무리 갈아 넣은 자들이 갱생의 여지가 없는 죄인들이라고 해도,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조원들이 있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좋지 않았다.
조원들 중에는 초인을 실험체로 사용한 마탑에 대한 순수한 분노로 달려온 자들이 있는 만큼 이 사실이 알려지면 흔들릴 수가 있다.
물론 전투중인 적의 말을 바로 믿지는 않겠지만……………..
그런 발터의 모습에 존 워스가 여유롭게 웃었다.
“후후후. 내가 저들에게 사실을 밝힐까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괜찮네. 굳이 초인 따위를 상대로 그런 귀찮은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초인은 그저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야.”
존 워스가 손을 들었다.
신호였다.
쿠르릉.
돌 구르는 소리가 나며 석실이 흔들렸다. 막혀 있던 통로에서 마탑의 인공 초인 시술을 받은 용병들과 노예들이 몰려나왔고,
“뭐, 뭐야 이거?”
통로 위. 이드가 서 있던 뒤쪽 석벽이 갈라지며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발터는 이를 악물었고, 칸과 초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못지않게 놀란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드다.
“・・・이야, 잘 만들었네. 기대고 있던 석벽에 이런 장치를 해 뒀을 줄은.”
이 얇디얇은 석벽 뒤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니. 별거 아닌 말과 달리 은근히 자존심 상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이드다.
당장도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마법사 하나가 찝찝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옆의 마법사가 소곤거렸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니, 자네.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이렇게 시끄러운데 무슨 소리?”
“그게, 누가 놀라는 소리가 나서. 거기다 눈앞에 뭐가 아른거리기도 하고.”
“자네…… 피곤한 거 아닌가? 있기는 뭐가 있단 말인가?”
동료 마법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팔을 약간 들어 지팡이를 이드가 있는 방향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이드는 앉은 자리에서 지팡이를 흘려 넘겼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 생각한 지팡이 주인은 지팡이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이상하다 말한 마법사는 스스로 피곤한 것 같다고 인정했다. 지극히 정상임에도 말이다.
똑똑한 마법사 하나를 한순간에 바보로 만들어 버린 이드는 쪼그리고 앉아 발터와 존 워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는 발터의 이마에는 어느새 희미한 땀이 솟아 있었다.
전투의 열기로 인한 땀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위기 상황에 의한 식은땀이었다. 동시에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길을 찾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회전하며 나타난 열기였다.
짧은 순간 발터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대처 방안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오 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이 깊은 모양이군.”
“으드득.”
“좋은 대답. 그럼 자네 고민을 좀 덜어 주도록 하지.”
말과 함께 존 워스가 발터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석벽에서 나타난 마법사 중 하나를.
“사실 나는 저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초인을 만들어 내는 놈들이니까.”
그와 눈을 마주친 존 워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준비해 둔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그러나 초인을 처리하는 데, 짧게 협력하는 정도면 참지 못할 것도 없지.”
거대한 마나가 움직이고 바닥에 희미한 마법진이 나타난 후.
초인기를 봉인당한 초인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