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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27화


963화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적을 향해 돌진할 것 같았다.

그 앞을 일리나가 막아서기 전에는 말이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탐색하겠어요.”

“소검후님께서요?”

“네. 저라면 어지간한 상황에 모두 대처가 가능하니까요.”

일반적인 전투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그 말은 곧 얼마의 희생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엘프들은 이런 상황이 오면 강자가 앞에 선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강자라면 대처가 가능하고, 그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후방에 있는 동족들이 대처하거나 도망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리나도 그래서 앞으로 나섰다.

다만 그녀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함께하고 있는 이들이 엘프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 엘프와 인간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소검후님의 말씀은 잘 알겠지만, 이번 공략은 조원들에게 양보해 주세요. 뜨거워진 저들의 용기에 찬물을 부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리나의 정체를 들어 그 차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쉴라의 말에 기사들이 힘차게 호응했다.

“믿어 주십시오! 소검후님께 못난 모습은 보여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저희들이 활약할 기회를 주십시오!”

“천사님들을 대신해 저희가 싹 정리하겠습니다!”

“천사님은 어느 놈이야?”

끝에 이상한 놈이 끼어들긴 했지만 기사들이 원하는 바는 확실했다.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일리나도 굳이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일리나가 한발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 일단의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 기세만 보면 다짜고짜 돌진할 것 같았지만, 기사들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 앞에 있는 타원형의 수상한 공간이 함정임은 확정된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은 용기와 만용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우르르 몰려 나가 희생자만 늘리는 어리숙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은 일리나의 말처럼 탐색과 확인이 먼저다.

“아래쪽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럼 우리가 위쪽을 맡겠습니다.”

미리 정해 뒀는지 일 조의 기사와 삼조의 초인들이 나섰다.

기사들은 통로의 아래쪽으로 내려갔고,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은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과감하게 공간을 살폈다.

타원의 공간은 넓었지만, 수십 명이 종횡무진하자 확인은 금세 끝이 났다. 어찌나 샅샅이 수색했는지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탐색이 끝나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갔다.

함정이 있는 것이 확실시되는 공간에서 함정은 고사하고 수상한 점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다니. 이런 망신이.’

‘여기 함정이 있는 건 맞는 거야?’

아래위로 나뉜 기사들이 알게 모르게 눈으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물러나세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일리나가 단검을 던져 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살보다 빠르게 허공을 가른 단검이 몇 초 전 초인이 지난 자리에 박혔다.

방금 지나친 초인이 아무것도 찾지 못한, 평범한 돌로 만들어진 벽. 하지만 일리나의 단검이 박히자 평범하지 않게 변했다.

끼기기기기-

유리가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단검이 박힌 자리로부터 커다란 균열이 생기며, 듣기만 해도 손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균열은 석벽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일루전과 실드 마법이 혼용된 위장막에 생긴 것. 곧 그것이 유리처럼 부서지며, 그 뒤에 숨어 있던 해더웨이와 마탑 마법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움직였다.

“적이 노출되었다. 포위하라!”

외침과 함께 통로 밖으로 뛰쳐나가는 기사들의 모습은 수문이 열린 댐에서 쏟아지는 산더미 같은 물처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의 모습에도 해더웨이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 역시 발각되었음에도 일절 당황한 모습이 없었다. 

“일루전 실드를 이렇게 쉽게 파악하다니. 과연, 소검후의 명성이 높은 이유를 이해했소.”

한 점 흔들림 없는 무표정과 함께 고저 없는 목소리는 기사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순간 일리나는 해더웨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빠르게 그들의 힘과 주변에 일렁이는 마나의 양을 확인하고는 발신기의 단추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확실하게 적을 처리할 방법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기는 하니까.


그리고 이드는 이때 발신한 신호를 받은 것이다.

“일리나의 신호인가. 라미아?”

-저와 이드가 있는 곳과는 달리 순수 마법 전력인 모양인데, 쉬운 상대는 아닌가 봐요.

이드와 달리 짧게 추가된 문자까지 받은 라미아가 일리나의 상황을 간략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일리나가 신호를 보낼 리가 없지. 그럼 어떻게 할까? 여긴 곧 내가 나서야 할 듯해서, 네가 움직이면 좋을 것 같은데.” 

이드가 방어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오 조의 초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이쪽도 조금 곤란해요. 라발 단장과 모이엔 사이에 아주 제대로 불이 붙었거든요. 싸우기 직전이에요. 거기다 기사뿐 아니라 마탑의 마법사에, 초인까지 있어요.

“아, 그럼 네가 빠지면 위험하겠네.’

아무래도 라발과 적색 기사단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모이엔 쪽에서 제대로 준비를 한 모양이다.

-라발 단장에게 말해서 잠시 후퇴하도록 할까요?

아직 싸움 전이니 후퇴하는 척 모습을 숨기며 라미아가 잠시 일리나에게 지원을 갔다 오는 방법도 있다. 그게 아니면 적색 기사단과 함께 움직여도 되고.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색 기사단과 청색 기사단이 보통 사이도 아니고, 여기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래도 기세에서 꺾이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순간을 방해할 수는 없지.”

-방법이 있어요?

“왜 없겠어? 내가 있잖아.”

-이드가요? 그럼 거기 문제는 어쩌구요? 곧 개입해야 할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여기 초인들이 적색 기사단이나 일리나보다 중요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다 마침 내가 없어도 대충 시간을 끌 만한 땜빵용 장비도 너한테 받은 게 있고.”

-제가요?

이드의 말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라미아다.

그에 이드가 아공간에서 넓적한 판을 꺼내 들며, 히죽 웃었다.

“그래. 이거.”

-앗! 내가 만든 대천사 라….!

“뭐! 이름이야기니까 생략하고, 바로 초인들의 생명수 같은 그 아티팩트지.”

오조 전용으로 제작한 후에, 초인기를 각성한 이드에게 혹시나 쓸모가 있을까 싶어서 라미아가 침실에서 조용히 뚝딱거려 만든 물건이었다. 제국의 지원을 받은 토벌대도 가진 재료가 모자라 하나밖에 만들지 못한 물건을 라미아는 너무 쉽게 만들어서 이드의 손에 쥐여 준 것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라미아는 이드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게 있으면 오 조의 상황에 좀 더 여유가 생기겠네요.

“그렇지. 거기다 새로 균형도 맞출 수 있고, 지금은 오 조가 너무 불리한 상황이거든.”

그래서 이드가 일찍 나서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마침 일리나 쪽에 문제가 생겼으니, 자신을 대신해 이 아티팩트를 써먹을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이드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일리나와 삼조의 조원이 아니겠는가. 오 조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다.

“거기에 이걸 이용한 쪽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 오히려 잘됐지.” 

-아하하. 방금 좀 악당 같았어요. 그럼 일리나 쪽은 이드에게 맡길게요.

“걱정 말고 그쪽만 확실하게 처리해.”

그리고 라미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동시에 이드가 움직였다.

그런 이드의 목표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구경 중인 기사들. 마침 그들은 이드를 향해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드는 이들에게 전장에서 등을 보이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려 주기로 했다.

촤르르륵.

그런 이드가 꺼낸 것은 아공간 가장 구석에 들어 있던 못.

동시에 이드는 들고 있던 아티팩트. 대천사 라미아의 은혜를 작동시켰다.

앞서와 같은 빛의 파동이 번지고, 갑작스러운 빛에 모두가 놀라는 사이 이드가 기사들을 향해 못을 던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수십 개의 못이 취을난지의 묘리를 타고 비틀린 궤적을 그리며 기사들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아악! 눈, 내 눈!”

티팅!

“멍청한! 암살자다! 주변을 경계하라!”

“이깟 것에 당할 것 같으냐!”

대부분의 못은 기사들의 손에 튕겨 나갔지만, 운 좋게 궤적을 파훼할 능력도 속도도 떨어지는 기사들의 몸이나 눈에 박힌 것도 몇 있었다. 사실 이드는 이 공격에 일부러 힘을 뺐다.

정말 기사들을 죽이고자 했다면 못 하나하나에 강기를 주입할 수도 있었고, 혈뇌천강지의 파괴력과 속도를 더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사들 중 대부분은 무엇에 죽는지 알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하지만 이드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이드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사라진 후에도 뛰어난 은신 능력을 가진 암살자가 있음을 계속 경계하며, 오 조의 공격에 쉽게 나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까.

“저곳이다! 저곳에서 아티팩트의 빛이 시작되었다!”

마침 적당하게 한 기사가 허공의 한 점을 가리키며 소리쳤고, 동시에 검기가 그곳을 갈랐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

이미 이드는 그곳이 아닌 오 조의 머리 위에 도착해 있었다.

이드는 사방을 경계하는 초인들 중 하나의 무기 위에 발을 디뎠다.

투욱.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초인이 반응하려는 찰나, 이드가 그의 가슴에 대천사 라미아의 은혜를 안겨 주었다.

“이걸 쓰십시오.”

은신 영역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손과 아티팩트에 화들짝 놀라는 초인의 모습을 보며 이드는 짧은 말을 뒤로하고 물러났다.

괜히 오래 말을 섞어 봤자 의심만 살 뿐이다.

이럴 땐 최대한 접촉을 짧게 하는 것이 의심을 줄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위기에 처한 오조를 구하고, 하나뿐인 줄 알았던 대천사 라미아의 은혜를 전해 줄 사람이 아군 말고 누구라고 생각할까.

거기에 더해 마무리로 이번엔 마법사들을 향해 다시 못을 뿌리는 이드다.

“암살자를 조심해라!”

“등을 보이지 마라! 초인 놈들을 돕는 암살자가 있다!”

“암살자 놈도 초인이다. 공격 능력은 약해!”

“약해도 방심하다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고!”

생각지 못한 암살자의 등장에 혼란이 가득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본 후 비어 있는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 일리나에게 갈 시간이다.

“감히 어떤 놈이 일리나를 괴롭힌 건지 모르겠지만 죽여 달라면 죽여 줘야지.”

하얀 이빨을 간 이드가 발신기를 꾹 눌렀다.

동시에 이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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