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36화
972화
그렇다.
도망이 아니라 빼 간 거다. 날치기고, 납치다.
죽기 직전이던 해더웨이 입장에선 구출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드가 사전에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행여 해더웨이가 도망치려 하면 막으려 세심히 살피고 있었는데도 메시지 마법의 흔적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인즉, 사전에 해더웨이의 동의를 구하고서 데려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정신이 좀 나간 상태라지만, 정신의 관 부관주를 마음대로 움직일 만한 인간이 많을 리가 없다.
그것도 라미아 말고는 공간 이동이 쉽지 않은 이 정신의 관 안에서 말이다.
“그럼 결국 하나뿐이지, 부관주의 동의 따위는 필요 없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키릴 베이몬. 미완의 마탑 탑주, 그뿐이다.
긁적긁적.
이드가 희미하게 남은 마나의 흔적을 더듬으며 턱을 긁었다.
원격 마법도 조심하고, 주변에 기척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도 눈뜨고 빼앗길 줄이야. 이런 게 바로 마법의 대단함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이곳이 적의 뱃속이란 점도 있고.
“좋은 기회였는데. 이렇게 놓치네. 역시 나쁜 짓은 하는 게 아닌데.”
굳이 상대를 괴롭히지 않고, 바로 여길 통째로 부숴 버렸으면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이 사실을 라미아가 알면 비웃지 않을까? 아니면, 잔소리를 하거나.
해더웨이가 살았다는 사실에 비해 사소하다면 사소한 걱정을 가지고 돌아설 때였다.
꿈틀.
해더웨이의 뇌를 감싸고 있던 살덩이가 밟혀 꿈틀거렸다.
주변 조직이 부서지고,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뇌가 사라졌는데도 살아 있다니. 질긴 생명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이 생명력 때문에 해더웨이도 자신의 뇌를 이 살덩이로 감싸 두었겠지.
“이거 어쩌면 쓸모가 있겠는데?”
살덩이를 밟아 버리려다 멈춘 이드가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드가 허공섭물로 살덩이를 띄웠다.
주변 조직과 뇌를 한 번에 잃은 살덩이는 빠르게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써먹기도 전에 죽어 버리면 곤란하지.”
말과 함께 이드가 무극신기를 일으켰다.
살덩이를 살릴 방법은 없지만, 무극신기라면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대체하다 못해 넘친다.
솔직히 살덩이 따위에 쓰기는 아까운 기운이다. 무극신기를 가다듬기 위해 한 수련이 얼마인데!
이드는 라미아를 부르며 자기 생각을 전했다.
“어때, 가능할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럼 올 수 있겠어? 적색 기사단 일은 끝났고?”
청색 기사단과 대치한 적색 기사단 때문에 발을 빼지 못했던 라미아다.
-거의요. 일단 전 이제 없어도 될 것 같아요.
“좋아. 그럼 당장 와 줘.”
-알았어요. 라발 단장에게 말하고 바로 갈게요.
라미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신난 목소리가, 금방 달려올 것 같다.
이드는 주변을 살폈다.
잘 만들어진 석실은 전투의 여파로 반파되어 있었다. 원래 형태를 유지하기는커녕 재수 없으면 천장에서 떨어진 돌에 맞아 돌아가시게 생겼다. 석실을 돌아보던 이드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을 때다.
고여 있는 물과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마법사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드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다음 순간 시체가 숯덩이로 변하며 수증기가 솟아났다.
치이이이익!
열화인이다. 고여 있던 물은 열화인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다.
“시체를 다시 보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사람 몸을 가져다 쓰는 일에는 도가 튼 마탑이다 보니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후, 이드는 토벌대가 있던 통로에 발을 디뎠다. 모두 멀리까지 이동한 듯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급히 이동한 것 같아. 이그렌이 움직이기엔 딱 좋은 타이밍인데. 잘했겠지?”
모두가 정신없이 급히 후퇴하는 때, 한두 사람 정도 다른 길로 빠져도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그렌이 사무엘 백작을 처리할 최고의 때라는 것.
이그렌이 눈치가 있다면 이 혼란을 놓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 궁금한 이드다.
하지만 그저 잘했겠거니 하고 넘겼다. 아무리 그레이의 후손이라도 이런 사소한 것까지 옆에 붙어서 충고해 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그 시각, 이드가 걱정하는 이그렌은 당혹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눈치가 있었다. 토벌대가 후퇴하는 혼란 속에서 사무엘 백작을 유도해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그를 위해 스폴이 알게 모르게 신호를 주고 배려를 해 주었다.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움직이려던 그때. 이그렌은 자신보다 한발 앞서 사무엘 백작을 샛길로 유도하는 기사의 모습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이 왜 저기서 나와?”
도대체 어떤 놈이 자신의 목표를 훔쳐 가려는 건지 노려보던 이그렌은 그 정체를 알고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드가 말하던 라이벌이란 말이 떠 올랐다.
“설마 그 라이벌이라는 게 저 빅터라는 녀석을 두고 말씀하신 거였을까?”
이드의 수업권을 팔아먹어 소드 팰러스에서 쫓겨난 수련생.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사무엘 백작이 수작을 부린 것일까 생각하는 이그렌이다.
하긴 당시 수업권을 구입한 자가 보통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더 잘 된 걸지도 몰라. 빅터가 백작을 유도한 걸 본 사람이 있으니. 혹시라도 내가 의심받을 일은 없겠군.”
물론 그렇다고 사무엘 백작을 넘길 생각은 없다.
빅터에게 능력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그가 사무엘 백작을 죽일 것인지 어쩌려는 것인지 그 목적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일단은 따라가자.
이그렌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 눈이 동그래진 스폴에게 눈짓을 하고는 빅터와 사무엘 백작, 두 사람이 들어간 통로로 발을 들였다.
그가 통로에 발을 들인 직후, 라미아가 나타났다.
이드 옆에 꼭 붙어 선 형태다.
일반적으로는 공간 간섭을 피하기 위해 간격을 유지하지만, 상관없다.
그녀가 이드에게 돌아오기 위한 공간 이동은 그와 달리 영혼이 이끌어 주는 것이니까.
“빨리 왔네.”
“빨리 오라고 한 게 누군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라발 단장에게 말은 제대로 하고 온 거야?”
“당연하죠.”
당당하게 튀어나오는 즉답에 뭐라고 추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다른 질문을 던지는 이드다.
“청색 기사단 처리는 잘 됐어?”
“깔끔하게요. 싸우기 전에는 좀 복잡한 느낌이었는데, 전투를 시작하니까 라발 단장님도 기사들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지독하게 싸우더라고요. 전 그저 옆에 마탑 마법사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청색 기사단이 가진 아티팩트를 무효화하는 일밖엔 한 게 없어요. 아, 부상자 치료하고.”
역시나 한 게 없다고 할 수준이 아니다.
“혼자 다 했네. 고생했어.”
“에헤헤헤. 그보다 그 살덩이가 부관주가 남긴 거죠?”
말과 함께 살덩이를 살피는 라미아의 모습에 이드가 물었다.
“커스 체이서 가능할 것 같아?”
커스 체이서 신체 일부, 또는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통해 그 주인을 추적할 수 있는 마법이다.
이 마법은 특히 숙련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하며, 물건과 주인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 연결 고리가 있는가에 따라 다양한 사용 방법이 존재했다. 이드가 살덩이를 보고 이 마법을 떠올린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특히 아직 살아 있다는 점도 주요했다. 뇌와 연결되어 있던 만큼 주인과의 연결도 잘 되어 있을 테니까.
과연 이드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살덩이를 살피던 라미아가 득의만만한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던 것.
“당연하죠. 이런 걸 두고 커스 체이서 마법을 못 걸면 마법사가 아니라고요. 잘만 하면 부관주의 위치만 알아내는 걸로 끝이 아니겠는데요?” “끝이 아니면, 뭐가 있는데?”
“우후후후, 그건 조금 뒤의 즐거움으로 두고, 일단 넘겨주세요.”
말과 함께 용돈이라도 받는 듯 두 손을 내미는 라미아다.
그리곤 그녀의 손 위로 붉은 룬 문자가 솟아나더니, 주문의 그릇을 만들어 냈다.
이드가 그릇 안으로 살덩이를 집어넣자 뚜껑이 덮이고, 마법진과 룬 문자가 살덩이를 휘감아 조였다.
그 상태에서 다시 라미아의 주문이 이어지고, 그릇 주변으로 삼중의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헷, 끝!”
“된 거야?”
“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연히 성공했죠. 이제 본체와 연결될 때를 기다리면 돼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여기서 ‘본체’라 함은 당연히 해더웨이를 말하는 거였다.
“부관주의 위치를 찾으면, 당연히 탑주의 위치도 나오겠지?”
“그 옆에는 바이트 타블렛도 있을 테고요.”
이드의 말을 받으며 히죽 웃는 라미아.
아무래도 생명의 관에서 탈취한 바이트 타블렛을 내어 준 것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녀의 웃음 속에는 너무나 목적이 분명한 욕심이 담겼다.
물론 이드로서는 그녀의 욕심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 오 조 문제부터 해결해 볼까?”
“저도 같이 가요.”
“당연하지. 그나저나 이것도 못 버티고 모조리 다 당해 버린 건 아닌지 몰라.”
“그럼 그걸로 끝이죠. 사로잡힌 것까지 구해 줄 의리는 없잖아요.’
냉정히 말하는 라미아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차피 오조 초인들을 구하려는 것도 의리 같은 게 아니라 이쪽의 필요에
의해서였으니까.
라미아가 마법으로 이드와 자신을 이동시켰다.
두 사람이 나타난 곳은 석실에 벽면 가득히 뚫려 있는 문 중 하나의 앞.
“혹시나 해서 미리 봐 둔 좌표에요.”
라미아의 말이었다. 이런 걸 보면 참 준비성이 좋았다.
다행히 오 조는 전멸 당한 상태는 아니었다.
“발악이 추하군.”
대신 전멸에 가깝게 몰려 있었다.
한데 뭉쳐 있던 오조 조원들의 덩치는 삼분의 일로 줄어 있었다. 주변에는 사망한 초인들의 시신이 많았다. 그리고 한쪽에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심한 상처와 함께 적에게 사로잡힌 초인들이 짐짝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아 단단히 방어 중인 초인들 앞에 있는 발터. 그의 모습 역시 엉망이었다.
옷은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에 젖었고, 상처와 입에서는 실시간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하나 상처가 작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행이랄까. 치명상이라고 불릴 만한 상처는 없다. 대신 출혈이 심한 것이 문제.
그런 그의 전신으로는 여전히 흙이 갑옷처럼 둘려 있다.
특히 오조 초인들을 지키듯이 서 있는 골렘에서도 발터의 초인기가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저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부하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터와 마주 선 존 워스.
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가 뭉개져 있다.
큰 출혈은 없지만, 한눈에 봐도 뼈와 근육이 크게 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면 검을 사용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재 발터가 서 있는 것도 그 상처를 만든 공격이 성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정의의 흑기사가 등장하기에 완벽한 타이밍이네요.”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 이드를 본 라미아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