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48화
984화
무림에 금강불괴라는 것이 있다.
짧은 네 글자 안에 든 태산보다 높은 무리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간단히 말해 보자면 이런 거다.
어떤 방법을 써도 무너트릴 수 없는 절대의 육신. 무인에게 있어 심검보다 더 멀고 먼 꿈같은 경지로, 금강불괴에 이르는 길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때문에 종종 내금강과 외금강으로 단계를 나누기도 한다.
그래 봤자 제대로 대성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일단 어느 한쪽이라도 성공한다면 한순간에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이르러도 방심할 수는 없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눈이라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눈은 내외 금강 어느 쪽을 완성해도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구조적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온전한 금강불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평범한 무인의 눈에 비하면 돌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튼튼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검이 닿으면 쉽게 상하긴 마찬가지.
그리고 이런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건 메르시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청백의 화염을 가죽 대신 두르고 있지만, 그 외 다른 부위는 여전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생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럼 과연 메르시오의 눈은 어떨까? 저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메르시오는, 과연 내외 금강의 한계를 벗어나 거의 모든 생물의 약점인 눈까지 단단할까.
“커허허헝!”
피눈물을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 답은 나온 것 같다.
“제법 아플 거다, 똥개 놈아.”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이드.
그 주변으로는 광혼의 빛이 호신강기가 되어 메르시오의 화염으로부터 이드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드의 의지에 따라 광혼을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광인멸혼류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물론 방금 메르시오의 눈을 터트린 것은 광혼이 아니다. 빛과 어둠은 대조적인 속성이니만큼 함께할 수 없으니까.
12대 식 태주묵혼.
“역시 저 똥개한테는 광혼보다는 침투경을 기본으로 한 태주묵혼의 타격계 쪽이 효과가 좋군.”
이드가 메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해서 광인멸혼류에 이어 또 다른 12대 식, 태주묵혼을 꺼내 든 것이다. 확인을 마친 이드가 일라이져를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이드의 손은 칠흑처럼 검어져 있었다.
단순히 색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마치 현철을 녹여 만든 듯,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가볍게 부딪히기만 해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태주묵혼의 검은색은 팔목 위로 더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이드를 보호하고 있는 광인멸혼류 때문이다.
12대 식은 강력한 만큼 각각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연환이 매우 어렵다.
속성이 비슷하다면 그나마 쉬운 것도 있지만, 광인멸혼류와 태주묵혼은 그 성질이 정반대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연환이 더더욱 힘든 것은 당연했다.
눈 부신 빛과 칠흑의 어둠. 색깔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저 똥개 스펙이 어지간히 좋아야지.”
이드가 본 메르시오의 최고 강점은 단단한 육체와 강력한 힘, 그리고 빠른 속도다.
주변을 용암으로 녹여 버리는 능력이나, 광혼을 녹이는 화염 브레스, 실버 쿠스피드 등도 물론 대단하다.
그러나 압도적인 신체 능력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저런 힘과 속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그에 비할 만큼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꺼내 든 게 바로 태주묵혼이었다. 무결 둔의 극한에서 태어난 12대 식.
눈으로 보기엔 느리지만, 느리기에 놓치지 않고, 끈질기기에 빠르다.
둔 결의 핵심이자 태주묵혼의 정의다.
이드의 손이 검게 물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태주묵혼의 무겁고 끈끈한 힘에, 주변의 빛마저 그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빛이 움직임을 멈추면, 그 빛은 어둠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속도는 느리다. 목표를 놓치지는 않지만 느린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어지간한 상대면 문제가 없지만, 메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태주묵혼 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내뿜는 화염 탓도 있지만, 태주묵혼과 궁합이 좋지 못함을 알면서도 광인멸혼류를 거두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태주묵혼의 느린 속도를 광인멸혼류로 보완하려는 것.
과연 생각만큼 잘될지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래! 쉽게 죽지 않는다면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태워 주마!”
이 똥개에 된장을 바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해내야지.
이드는 길지만 짧았던 생각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2초다. 2초 만에 눈동자가 터진 고통을 분노로 승화시켜 공격하는 메르시오.
화르르륵.
양쪽에 있던 두 개의 머리가 각각 백염과 화염을 뿜는 동시에 메르시오가 달려든다.
순간 사방이 녹아 물처럼 흘러내렸다. 바닥 역시 녹아 구멍이 났다.
전투 내내 은근히 느껴졌던 열기와는 차원이 다른, 광혼을 녹였을 때 정도의 화염.
하지만 태주묵혼은 광혼과 다르다.
모든 것이!
푸르르르륵!
검은 기운은 의지를 가진 듯, 넓게 퍼져 사라지지 않고 이드를 둘러싸고 있던 화염을 뚫고 솟아올랐다.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 결국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화염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그 속에서 언뜻 비치고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
파파팟!
그리고 그림자를 봤다 싶은 순간.
하얗게 빛나는 이드가 무너진 화염을 넘어 블링크 마법을 쓴 듯한 빠르기로 메르시오 앞에 나타났다. 이드의 팔과 다리에는 주요 혈맥의 흐름을 따라 태주묵혼이 검은 띠처럼 둘러 있다.
광인멸혼류와 태주묵혼. 비율로 따지자면 7:3.
그 상태에서 이드의 주먹이 메르시오의 코를 내리쳤다.
태주묵혼을 위해 변형되었으나, 그 근간은 철황권.
쾅!
바위를 부수는 듯한 폭음.
이드는 집요하게 메르시오의 검은 코만을 노려 공격했다. 올려치고 내려치고, 정권, 장권 등.
물론 코가 개의 약점이라는 말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이런 이놈에게 개의 약점이 적용되기나 하겠나.
그저 놈의 코가 가장 앞에 튀어나와 있어 두드린 것뿐이다.
일점 집중의 연속된 공격에 결국 메르시오의 검은 코가 터지고, 찢어졌다. 수박 몇 통을 넣어도 남을 것 같은 콧구멍에선 코피가 쏟아진다.
“아우우우!”
철황권의 완벽한 연환기에 메르시오는 달려들 때보다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났다.
그 도중, 녀석의 눈이 붉어지며 스칼렛 버스트가 쏘아졌다. 그것도 세 개의 머리에서, 총 여섯 줄기.
기막히게도 어느새 터져 버린 눈알이 재생한 메르시오였다. 그 재생력은 만월의 마력을 받은 웨어울프보다 뛰어나 보였다.
그러나 광혼을 뒤집어쓴 이드는 어렵지 않게 스칼렛 버스트를 피해 냈다.
그러면서도 이드의 주먹과 발은 쉬지 않았다. 세 개의 머리가 연결된 부위를 주로 노렸다.
공격이 닿을 때마다 신경질적인 화염이 일었지만, 태주묵혼의 힘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검은 주먹과 발이 두드린 자리에는 화염이 꺼질 듯 흔들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
반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메르시오는 빙글 몸을 돌렸고.
팟!
다음 순간 메르시오의 모습이 순식간에 웨어울프의 형태로 변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여전히 가죽을 대신한 화염과 화려한 꼬리 정도일까.
“변하면 뭐가 다를 것 같냐?”
그 변화에 따라 자연스레 이드의 권로도 바뀌었다.
거대 괴수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크기의 인간형을 상대할 때는 당연히 그 패턴이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인간을 상대로 만들어진 무공을 익힌 이드의 입장 상, 후자가 더 편했다.
자연스럽게 허초와 변초가 섞이며 권로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메르시오도 생각 없이 형태를 바꾼 건 아니었나 보다.
컹 하고 외치며 힘을 끌어낸 순간, 공간이 불탔다. 메르시오의 순간 속도가 이드를 뛰어넘자 마찰열을 이기지 못한 공기가 단번에 불타오른 것. 퍼퍼퍼펑!
메르시오의 손 그림자가 늘어난 듯하더니, 이드의 전신을 동시에 두드렸다.
그에 이드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팔로 공격을 막아냈다 싶은 순간.
휘익!
독사 대가리처럼 늘어져 있던 꼬리가 돌연 이드의 가슴을 쳤다. 그냥 맞으면 가슴을 함몰될 정도의 힘이었다.
퉁!
이드는 순간 집중력을 빠르게 올리곤, 가슴을 태주묵혼으로 감쌌다. 광인멸혼류와 태주묵혼의 비율은 6:4.
가슴을 두들겨 맞은 이드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비록 공격은 방어했지만, 덕분에 그 공격력이 몽땅 충격량으로 변해 튕겨 나가게 되었다.
그런 이드의 속도는 총알 같았다.
심지어 이드의 등을 받칠 벽도 흐물흐물한 용암으로 변한 상황.
퍼퍼퍼퍼퍽!
한참을 뒤로 밀려난 이드는 커다란 기둥에 부딪혀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이드가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메르시오가 눈앞에 다가와 발톱을 휘둘렀다.
그의 손은 어느새 신랑의 그것으로 변해 있다.
이드는 부딪힌 기둥을 차 그 반동으로 발톱을 피하고 메르시오의 어깨에 23번의 주먹을 박아 넣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진각으로 인해 발자국이 새겨진 기둥이 메르시오의 발톱에 동강 나고 있었다.
순간, 그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던 기둥에서 희미한 빛이 명멸하며 사라졌다.
동시에 정신없이 수정구를 문지르고 있던 탑주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건 안 돼!”
쩌어억!
이미 벌어진 일, 소리친다고 없던 게 되는 건 아니다. 그의 손에서 수정구가 쩌억 갈라졌다.
직후.
지상으로 부상하고 있던 정신의 관이 붕괴를 시작했고, 중심핵의 마나는 정상적인 흐름을 벗어나 사방으로 폭주했다.
꽈르르르르릉!
시작은 외곽부터다.
아래로 가라앉던 정신의 관이 차츰 형체를 잃어 갔다. 타들어 가던 초에 가스 토치를 가져다 댄 듯, 녹아내리는 것 같은 모양새로 부서져 내렸다. 폭주한 마나는 지하를 뚫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마나와 닿은 것은 마그마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인공 지진 같은 진동에 화가 나 있던 마그마다. 메르시오의 화염에 호응한 것도 모자라 폭주한 마나가 내려박히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터지고 말았다.
콰콰콰콰콰!
지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마그마의 힘은 엄청났다.
저 우주에서 떨어지는 메테오 마법이 무섭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 솟아오르는 마그마의 힘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 강력한 압력에 무너지고 있던 정신의 관이 밀려 올라갔다.
지상으로, 그것도 미친 듯 빠르게.
하지만 공기뿐인 지상도 아니고, 온통 사방이 흙인 지하에서 빨라서 좋을 것이 있을까?
그것도 중심핵의 폭주로 정상적인 부상이 실패해서 좌초 중인 정신의 관이? 콰드득. 콰드드득.
어림없다. 소금 밭에 던져진 얼음처럼, 사정없이 깎여 나가는 정신의 관이다. 그 충격과 압력은 그 안에서 전투 중인 이드와 메르시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잠시도 주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격렬해졌다. 무너지는 파편을 이용한 이드의 공격에 메르시오가 나가떨어졌다.
그로 인해 정신의 관의 붕괴가 더 빨라졌다.
이대로라면 마그마의 압력에 밀려 지상으로 나가기도 전에 정신의 관이 산산조각 난다.
“그럴 순 없지! 절대 그럴 순 없지! 차라리 이대로 묻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놓칠 순 없단 말이다!”
어떻게든 바이트 타블렛을 되찾기 위해서 자폭과 같은 부상을 선택한 탑주였다.
그런데 자폭으로 얻는 것 없이 끝나고, 저 파괴마들은 그냥 지상에 풀어 놓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노래지는 탑주다.
콰지직.
탑주는 마나를 집중해 갈라진 수정구를 이어 붙였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수정구 사이로 스며들며 수정구에 빛이 들어온 순간이다.
“가두어 소멸하라. 내뿜어 풀어 주리라.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나리라. 정신의 관이여, 최후에 환희하라. 베리타스! 크하하하하하!”
미친 듯한 광소.
통제 불능 두 파괴마로 인한 스트레스에 노이로제 기색을 보이는 탑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