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7화
993화
록마틴 후작과 황녀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서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내게 명예 후작과 악수할 영광을 주겠소?”
“엉뚱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예 후작이야말로 엉뚱하오. 그런 굉장한 실력을 감추고 있으셨다니. 난 오늘 전설의 한 장면을 보았다오. 그래서 최강의 기사와 가장 먼저 악수를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소.”
이 사람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나.
이드가 록마틴 후작의 손을 잡았다.
“굳이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최강이라는 단어는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최강’은 어떤 적을 상대로도 이겨야 한다. 그에 비해 이드 자신은 혼돈의 파편 둘, 혹은 셋의 합공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록마틴 후작은 그저 겸양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 껄껄 웃기만 한다.
사실 그가 이드의 속내를 알아도 아마 그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드와 달리, 혼돈의 파편은 제국의 품에 안을 수 없으니까.
록마틴 후작 다음은 황녀였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그녀의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꼭 검후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지만 명예 후작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요. 그래서 믿음이 더 굳건해졌답니다.”
속삭이는 마지막 말. 아무래도 검후를 찾아 주겠다고 했던 약속에 대한 것인 듯하다.
“이제 곧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황녀까지 이야기를 마치자 록마틴 후작이 주변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단 이 자리에 임시 진지를 만들어야겠습니다. 바로 이동하는 것은 부상자와 지친 토벌대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할 일이 정해지자 꾀죄죄한 몰골을 한 사람들이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진지를 찾아 쓸 만한 것들을 회수하고, 주변 나무를 베어 막사를 다시 만들었다.
힘 좋은 기사와 초인, 그리고 재주 많은 마법사와 신관들이 달려들자 공사는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이드도 공사에 힘을 보탰다. 일리나와 함께 정령을 불러 흙집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전력을 다하자 이전에 비해서는 작고 옹색하지만, 편히 쉬기에 모자람이 없는 진지가 완성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공사가 끝이 났으니 참 다행한 일이었다.
정리까지 마친 시각, 록마틴 후작이 토벌대를 모으고 황녀와 함께 사람들 앞에 섰다. 기사가 가져다 놓은 듯한 깔끔하게 잘린 돌 위에 올라선 것이다.
“오늘은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을 많이 겪은 날입니다. 그리고 또 뿌듯한 날입니다. 바로 힘겨운 토벌이 드디어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정신의 관에 대한 토벌이 지금 이 순간, 이 시각으로 끝이 났음을 토벌대의 영웅들에게 정식으로 선언하겠습니다!”
록마틴 후작 이후에 이어진 황녀의 말도 그 내용은 비슷했다.
정신의 관에 대한 정식 토벌 완료 선언.
사실 모두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더없이 화려하고 찝찝한 마무리였다. 던전이 무너지고 지반이 통째로 뒤집어졌다. 토벌을 더 이어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토벌에 참여한 모두가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크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박수도 형식적인 수준이었고, 환호도 그리 크지 않다.
그에 황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토벌 완료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안티로스의 황제 폐하께서 공식적으로 다시금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그저 힘든 전투를 함께한 자축의 의미가 큽니다. 화려한 파티는 없어요. 그러나 자축하는 자리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것. 그래서 현재 토벌대가 가진 모든 술과 고기를 풀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즐겁게 취하세요. 오늘 취하는 것은 황녀로서 허락하겠습니다.”
그렇게 황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오~ 역시 황녀 전하께서 저희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십니다!”
“토벌의 끝이다! 술통을 열어라!”
“황녀 전하 만세!”
“록마틴 후작 만세!”
“명예 후작님 만세!”
“라미아 님도 빠트릴 수 없지! 그분이 아니었으면 무덤을 만들 필요도 없이 그대로 죽는 신세였다고!”
일부는 술을 마시기도 전에 이미 취해 버린 듯, 벌써 미친 듯이 떠들어 댔다.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곧 준비하고 있던 술과 고기를 들고나왔고, 이윽고 곳곳에 술판이 벌어졌다.
함께 생매장의 위기를 넘겼기 때문인가, 오늘의 술판엔 기사도 초인도, 마법사와 신관의 구분도 없었다. 그저 모두 한 덩이가 되어 술을 푸고, 돌림 노래처럼 자신들의 모험담을 쏟아 내기 바빴다.
그래도 역시 가장 회자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드에 대한 이야기다. 불과 수 시간 전에 그런 엄청난 전투를 보았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 모습을 보던 황녀가 만족한 듯 말했다.
“모두 신이 났군요.”
“오늘은 힘든 날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런 걱정은 마시고, 저희도 자축의 술잔을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명예 후작.”
록마틴 후작이 이드의 의견을 구했다. 오늘의 주인공이 이드임을 분명히 하는 모습이다.
그에 이드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술은 뒤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좀 일찍 쉬어야겠다 싶어서요.”
물론 진짜 피곤한 건 아니다. 다만 토벌도 끝나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는 토벌대에서 이 이상 복잡하게 엮이고 싶지 않아서다.
술을 권하는 록마틴 후작만 봐도 자신을 귀찮게 할 만한 생각이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이미 얻을 것을 충분히 얻은 이상 굳이 그런 귀찮은 자리는 사양이었다.
“그렇다면 쉬어야지요.”
다행히 그런 이드를 억지로 잡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의 힘을 본 후라 이전보다 대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 데다, 그들 기준으로는 그런 엄청난 전투를 치렀으니 피곤한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드와 호감을 쌓고 싶은 것이지, 피로한 사람을 잡고 늘어져 불쾌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잡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덕분에 이드는 생각보다 쉽게 숙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드가 휴식하는 곳은 흙의 정령을 통해 만든 막사였다. 땅속으로 사라진 것과 똑같이 만들어 냈다. 물론 그 안에 라미아가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 만든 방이 있는 것도 똑같다.
막사에는 황녀만 빠진 평소의 멤버가 모여 있었는데,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
그 원인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쉴라와 라발에 있었다. 그 중 특히 라발의 표정이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 복잡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막사를 찾은 이그렌은 물론이고, 케마란과 네리베르까지 조용히 눈치를 보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 이드가 막사로 들어서자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이드를 반겼다.
“오늘은 유독 분위기가 무겁네요.”
가볍게 던진 말에 라발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복잡해서 그만.”
“아니요. 이해합니다. 청색 기사단 때문이겠지요?”
털썩 자리에 앉으며 내뱉은 이드의 말에 쉴라와 라발이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미운 정이 깊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평소 으르렁거렸어도, 오랜 시간 오색 기사단으로 함께 한 시간이 절대 짧지 않다.
그뿐 아니다. 오색 기사단에 들기 전 소드 팰러스에서 함께 수련생으로 무공을 배우기까지 했으니, 그 시간까지 더하면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전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전우를 직접 베었으니, 사람인 이상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아마 상황이 바뀌어 모이엔이 적색 기사단과 함께 라발을 죽였다면 지금쯤 축배를 들고 웃고 있었을 테니까. 얼굴을 쓸어내리는 라발의 뒤를 이어 쉴라도 입을 열었다.
“이후의 문제도 복잡합니다. 소드 팰러스의 자랑인 오색 기사단의 청색 기사단이 전멸했기 때문에 그 충격과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당장 세 검왕들만 해도 전멸에 대해 당장 조사를 시작하겠죠.”
청색 기사단과 황색 기사단은 검왕의 손과 발이라고 할 수 있다. 검후가 있을 때부터 충실히 검왕의 명령을 따라 일하던 기사단이다. 그러니 그중 하나가 전멸을 했다면 검왕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검왕의 힘이 줄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검왕의 경계심과 함께 분노가 높이 치솟으리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조사를 한다고 알 수 있는 일은 없지요. 모두 땅속에 묻혔고, 그 땅속에 있는 던전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솟아오르는 용암으로 봐서 시체조차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드였다.
“당연히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존 워스도 있었지 않습니까. 당시의 상황을 아는 존 워스라면 청색 기사단의 전멸에 저희가 관계가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거기에 라미아 님께 듣기로 존 워스가 탈출했다고 하고요.”
과연 라미아를 통해 먼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일단 그 부분에서 저는 존 워스가 복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라미아는 생각이 다르더군요. 만약 돌아온다면 확실히 곤란할 수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검왕 쪽에서도 그 일을 공식적으로 떠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자면 존 워스가 던전에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하니까요.”
그것도 토벌대를 돕기 위해 있던 것이 아니라, 토벌해야 할 대상인 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토벌대, 정확히는 초인들이 모인 오 조를 공격했다는 것이 알려질 테니까.
오히려 존 워스의 공격에 많은 사상자가 난 오 조의 초인들 입장에선 쌍수를 들어 환호할 일이다.
‘그러고 보면 청색 기사단을 친 적색 기사단을 초인파에서 지켜 줄지도 모르겠네.’
외부에서 본다면 매우 웃긴 콩가루 집안으로 보일 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부정적입니다. 오히려 검왕이라면 사실을 숨긴 후 저희를 함정에 빠트려 처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면 이상한 임무를 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습니다.”
사실 쉴라와 라발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들이 소드 팰러스에 속해 있는 오색 기사단인 이상, 세 검왕이 소드 팰러스의 이름으로 내리는 명령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었다.
오색 기사단은 소드 팰러스의 검이자 방패이며, 기사도를 실천하며 어려운 자를 돕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기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어려운 자를 도우라는 명령을 거절한다?
그건 그것대로 검왕 측에서 원하는 흐름일지도 모른다. 어떤 힘이나 음모도 필요 없이 소드 팰러스의 법에 따라 권한을 뺏고, 처벌할 수 있을 테니까.
이드는 고심에 빠진 두 사람을 보다 옆에 있는 스폴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과 달리 스폴의 얼굴엔 근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드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척 세우며 웃는다. 생각이 없는 건지, 믿고 있다는 건지 헷갈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럼 그 걱정, 제가 해결해 드리면 되겠군요.”
“어떻게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검후가 소드 팰러스로 돌아온다면, 그럼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순간 일리나와 라미아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검후가 돌아온다면 함정을 걱정할 게 아니라, 검왕들의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이드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갑시다. 검후를 구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