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62화
998화
심란하다.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지만, 내용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리는 몸이 흔들릴 정도로 떨어 댄다. 복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옆에 있으면 시끄럽고 정신없을 정도로 심하다. 그러나 정작 랜달 본인은 혼돈 상태에 빠져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거다.
“모르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못하겠다고!”
텅!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랜달이 책을 던지듯 덮어 버렸다. 평소 마법서를 아끼는 그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랜달은 이어 술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마셨다.
옅은 보라색의 술은 상당한 독주로, 뱃속이 짜릿했다. 하나 그뿐. 까칠하게 일어선 정신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를 심란하게 만드는 불안과 두려움의 근원이 독주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탑주. 초인 마법을 만들어 미완의 마탑의 문을 연 탑주가 바로 랜달을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왜 탑주가 아무 말도 없는 거냐고! 젠장!”
다시 술잔을 비운 랜달이 이마를 짚었다.
정신의 관이 붕괴되던 마지막 토벌. 그때 랜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적에 붙은 것은 아니지만, 토벌대는 물론이고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까지 감당해야 했던 미완의 마탑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사실은 랜달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배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보다 랜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존 워스와 메르시오, 거기에 이드까지 감추고 있던 전력을 발휘하면서 상황이 이상해져 버렸다.
토벌대는 모두 던전을 벗어났고, 정신의 관에 있던 마법사들 역시 준비된 마법진을 통해 탈출한 것이다. 그 순간 랜달은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미완의 마탑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현재 랜달의 모습을 보면 답이 나오지만, 그의 선택은 남는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세관에 존재하는 각 바이트 타블렛의 복제.
그런데 정신의 관의 것은 시간이 없어 복제가 완벽하지 못했고, 영혼의 관의 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마법사로서의 열망과 목표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은근히 기대하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탑주가 돌아오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말이다. 그건 누구보다 강렬하게 이드의 힘을 경험한 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탑주가 강하긴 했지만, 그가 상대한 이드의 힘도 탑주에 못지않았으니까.
그러나 역시 기대는 기대일 뿐이었다. 탑주는 멀쩡히 복귀했고,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마법사들을 이끌고 이곳, 영혼의 관으로 이동했다. 랜달은 영혼의 관으로 이동한 후 탑주의 부름을 기다렸다. 당연히 자신을 불러 당시 행동에 대해 한 번쯤은 추궁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해 적당한 시나리오도 만들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탑주는 랜달을 부르지 않았다.
물론 탑주가 랜달만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착한 첫날 영혼의 관의 부관주를 부른 것 이외에 지금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랜달은 그 침묵이 꼭 자신을 향한 위협같이 느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것일까.
탑주의 침묵이 하루 길어질 때마다 랜달이 준비한 시나리오는 두 배씩 늘어나 지금은 한 시간을 떠들어도 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정말 피가 마르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먼저 찾아가 볼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약해진 상태였다.
“견디자, 조금만 더 견뎌 보자. 어쩌면 이대로 넘어갈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까.”
정신의 관이 붕괴되던 날, 마지막에 돌아온 탑주의 심각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랜달이다.
그날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만약 탑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명예 후작의 힘을 겪었다면 자신의 잘못을 들추기보다 덮어두어 미완의 마탑의 전력을 보존하려 할 수도 있었다. 톡톡!
“무슨 일인가?”
“탑주께서 랜달 님을 부르셨습니다.”
“알…… 겠다.”
랜달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는 순간 날아든 호출에 가슴 한쪽이 덜컹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랜달은 빠르게 마음을 정리했다. 결국 올 게 왔구나 하고.
복잡하던 머릿속에 구멍이 뚫린 듯, 온갖 잡념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덕분인가. 다시 눈을 뜬 랜달의 눈은 더 이상 탁하지 않고,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랜달은 그대로 자신의 방을 나서 탑주의 연구실로 향했다. 탑주는 연구실을 개인실 겸 집무실로 쓴다.
잠시 후 연구실 앞에 도착한 랜달은 생각지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이더비히 부관주가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오랜만입니다. 랜달 부관주님. 지내시는 건 괜찮으신가요?”
자주색 풍성한 치마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타이트한 가죽 상의를 걸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영혼의 관의 부관주인 이더비히 라카비리움이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다른 분도 아니고 랜달 부관주님이라 신경을 더 썼거든요. 아, 저도 탑주님 호출을 받았답니다. 한참 두문불출하시더니 겨우 일이 좀 풀리셨나 봐요. 호호호.”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 부드러운 미소와 말투가 마법사라기보다는 귀부인 같다.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랜달은 오히려 긴장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눈앞의 이 여성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다가 피를 본 사람을 여럿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이는 것과 달리 무서운 여인이었다. 오죽하면 해더웨이보다 이더비히를 더 높게 치고 있는 랜달이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모든 걸 떠나서 세 관주 중 이더비히의 초인 마법이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저 여자를 왜 같이 부른 거지?’
오늘 탑주가 부른 이유가 자신을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닌 건가?
“혹시 탑주께서 무슨 이유로 저희 두 사람을 불렀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어차피 곧 알려 주실 텐데 굳이 먼저 궁금해할 필요가 있나요?”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랜달은 대답 대신 연구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기다려도 안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작업 중이신 모양입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어머, 친절하셔라.”
방긋 웃으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는 이더비히, 랜달은 그 뒤를 따라 연구실로 들어섰다.
바스락.
그와 동시에 발에 밟히는 종이들. 넓은 연구실 바닥엔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가득했다.
벽의 삼면엔 책이 빼곡했고, 방의 중앙엔 마법에 쓰이는 물품들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책상에 고개를 숙인 탑주가 있다.
아직 두 사람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슬쩍 확인한 종이의 내용은 하나같이 초인 마법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데 왜 모두 기초에 대한 내용뿐이지?’
이미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새삼 왜 기초를 풀어 내고 있단 말인가.
탑주가 이 작업을 위해 며칠 동안이나 두문불출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는 랜달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더 깊어지기 전, 이더비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 보면 우리 탑주님은 가끔 말썽쟁이 같으실 때가 있다니까요. 랜달 부관주님이 보시기도 그렇죠?”
도저히 공감해 줄 수 없는 말과 함께 탑주에게 다가가는 이더비히.
동시에 봄바람처럼 일어난 초인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종이들을 모아 정리해 그녀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은밀하고 매끄러운 운용에 랜달은 소름이 돋았다.
‘초인기 운용 능력이 이전보다 더 발전했군.’
그렇게 놀란 눈으로 이더비히를 쫓던 랜달은 그녀가 탑주의 책상 앞에 도착한 순간, 어느새 고개를 든 탑주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한낱 노크 소리와 달리, 초인력은 정확히 감지하고 고개를 든 것이다.
꿀꺽.
깊고 투명한 눈과 마주친 랜달은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마음속 걱정을 들킬 것만 같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나 랜달에겐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압박의 시간은 돌연 끝이 났다. 탑주가 들고 있던 펜을 툭 하고 탁자에 던지고는 의자에 몸을 기댄 것. 끼이이익!
한계까지 기울어진 의자가 내는 비명에 랜달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마에 솟아난 땀을 급히 닦아 내고는 탑주의 책상 앞에 섰다.
“부르셨다 하여 달려왔습니다.”
“……잘 왔다.”
랜달의 말에 탑주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이더비히가 탑주의 얼굴을 살피고는 속상해하며 말했다.
“며칠 사이에 너무 홀쭉해지셨어요, 탑주님.’
“시답지 않은 소리는 그만하고, 인원 배정은 마쳤느냐?”
“네. 전문 분야와 실력에 따라 나눴으니, 금방 익숙해 질 겁니다.”
“어차피 뿌리는 하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외의 것들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마스에서 탑주님의 입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신의 관이 붕괴한 날부터 마치 부하에게 하듯 독촉에 가까운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 상황에 이더비히의 추가 설명까지 듣자 탑주의 입가에 냉소가 떠 올랐다.
“그쪽은 당분간 무시해도 좋다. 어차피 마스와는 정당한 계약 관계에 있다. 놈들의 요구에 끌려다닐 이유가 전혀 없지.”
마스와 손을 잡기는 했다. 하나 그건 자연스러운 형태로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지, 결코 마스 따위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마친 탑주가 랜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쉬었느냐?”
“이더비히 부관주의 배려 덕분에…….”
“이번 일로 인해 네게 실망이 컸다.”
역시 그냥 지나가진 않는구나. 그래도 생각보다 시작이 부드럽다.
그리 생각한 랜달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최선을 다하는 중에 너만 볼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해더웨이가 있었고, 네 권한은 작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이유로 넌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고 회피했다.”
단호하게 이어지는 탑주의 말에 랜달의 고개는 더 깊이 조아려지기만 했다.
그러나 내심은 달랐다. 오히려 탑주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도했다.
‘1번 시나리오인가. 운이 좋았군.’
1번 시나리오는 랜달이 예상한 탑주의 반응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당연히 최악은 랜달과 바벨의 연결은 물론, 탈출 실패이고 말이다.
“어머나, 랜달 부관주님이 그런 실수를 범하셨을 줄은 몰랐네요.”
옆에서 이더비히 부관주가 묘하게 김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바이트 타블렛을 노리고 복귀를 선택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데. 하지만 내심 기뻐하는 랜달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속내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덕분에, 그를 바라보는 탑주의 무심한 눈빛의 의미를 읽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옆에서 모두 보고 있으면서 모른 척 ‘어머나’ 하는 소리를 연발하는 이더비히 부관주가 보통이 아니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