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69화
1005화
“당연히 먹었습니다. 저녁이요.”
“좋네. 시간도 늦었으니, 야식 먹기 딱 좋은 시간이네.”
“그렇죠. 네? 네?”
아니, 이 시점에 뜬금없이 웬 야식 타령?
이드는 큰 눈을 끔뻑거리는 케마란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긴 시간 저택을 사용하지 않아서일까. 요리를 하고 남은 재료는 보이는데, 주방 특유의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 제대로 먹은 거 맞아?”
그런 질문과 함께 자신이 뭘 먹었는지를 떠올려 보는 이드였다. 케마란의 대답은 빨랐다.
“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수프와 두꺼운 샌드위치요.”
“같은 거네.”
돌아와 먹었던 수프와 샌드위치를 떠올린 이드가 에단을 돌아봤다.
“큼. 비밀 유지를 위해서 요리사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검은 돌에 요리사급의 요원이 있어서 쓰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못해서 대신 커크가 간단히 준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
과연 이런 저택을 준비하고서도 저녁은 소풍에 가져가는 도시락 수준이 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기사들과 주방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에단이 주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이상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다. 그가 지켜본 이드는 이유 없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배가 고프면 쓸데없이 예민해지는 법이거든. 육포보다는 나아도, 수프에 샌드위치가 속을 든든히 할 정도는 아니니까. 맛있는 걸 먹여 주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겠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송이 신입 병사도 아니고, 은색 기사들이 그렇게 단순할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에단이 머리만 벅벅 긁어 댔다.
그에 이드는 두고 보라는 듯 조리대를 치우려 했다. 당연히 명예 후작이 움직이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이윽고 조리대가 다 치워지자 라미아가 나섰다.
이드는 중원에서 그레센으로, 그레센에서 지구로, 다시 지구에서 그레센으로 세 번의 차원 이동을 경험했다. 그뿐인가? 그레센에서 급하게 장거리 이동을 한 적은 셀 수도 없다.
그런 경험을 하는 동안 이드가 가장 아쉬웠던 점이 바로 먹거리다. 그레센에 와서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그리웠던 것이 바로 먹거리였으니까. 그런 안타까움을 확실히 인식한 후 이드는 다람쥐가 되었다. 뭐든 맛있다 싶은 건 대량으로 아공간에 보관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미아의 아공간은 최고의 창고였다. 요리를 넣으면 온도 변화가 없는 것 물론이고, 상하지도 않으니까.
살아 있는 가축을 보관할 수는 없지만, 그와 다름없게끔 신선도를 유지하는 건 가능했다.
당연히 지금도 라미아의 아공간에는 다종다양한 갖가지 요리가 가득했다.
라미아는 그중 특히 맵고, 짜고, 달콤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요리들만 꺼내놨다.
“여기에 따끔따끔 탄산이랑 위장을 태우는 술이면 예민하던 신경이 흐물흐물해지는 건 순식간이란 말씀!”
“아무리 그대로 술은…….”
에단과 톰이 말리고 나섰다. 적진이 코앞인 데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술이라니.
덕분에 독주는 가벼운 샴페인으로 바뀌었다.
준비가 끝이 나자 이드가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불렀다.
“가서 기사들을 데려와.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수고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내가 내리는 음식이라고.”
지금 분위기에 그냥 먹으라면 거절하겠지만, 이드가 내리는 상이라면 기사들도 차마 거절하기 힘들다.
“네, 맡겨 주세요!”
“그런데, 단장님과 스폴 수석 기사님은 저희가 모셔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두 사람에겐 내가 가 볼 테니 다른 사람들만 챙겨.”
부담스러운 사람은 이드가 맡겠다고 하자 신나서 달려 나가는 두 사람이다.
이어서 세팅의 마무리를 부탁한 이드가 저택을 나섰다.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한창 답답한 속을 풀고 있는지, 거친 기파가 파도치듯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라 이드가 찾아간 곳은 저택에 딸린 수련장이었다.
처음부터 그리 설계한 듯, 외부에선 희미하던 소리가 수련장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롭게 고막을 두드렸다.
차차차창!
격렬히 검이 부딪히는 금속음이었다. 또 그만큼 거칠어진 호흡 소리까지.
어두운 밤이지만 희미한 달빛을 받은 검이 희게 번쩍였다.
“멋진 월하검무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이드가 감탄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두 사람의 대련은 마치 잘 짜인 액션 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침 사용하는 검법도 난화십이식으로 같았다.
“그런데・・・・・・ 좀 거친데?”
두 사람의 대련을 살피던 이드는 면면부절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야생마처럼 날뛰는 부분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검을 다루는 능력이 부족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아까 방을 뛰쳐나가게 했던 화가, 검로를 통해 다시금 뛰쳐나온 것이리라. 그런 거친 분을 풀기 위해 집중해서인지 두 사람은 이드가 온 것도 모르고 대련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이드는 저택을 한번 돌아보고는 팔짱을 꼈다.
“요리들이 아깝기는 하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지.”
그저 격렬한 대련이기만 했다면 이드는 듣도 보도 못한 요리를 먹여 주겠다며 둘을 멈췄을 거다. 하지만 검로만큼이나 경동 중인 기파가 그걸 막았다.
경지가 높을수록 몸에 익은 무공은 흔들리지 않고, 고치기도 힘들다. 마치 견고한 건축물처럼 말이다.
다만 지금처럼 기파가 흔들리는 중이면 다르다. 적절하고 적당한 외부 자극이 있을 경우, 한 단계 상승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입은 즐겁지만, 몸에는 나쁜 요리와 비교할 거리가 아니었다.
대련이 점점 격렬해졌다. 깊게 몰입한 둘은 자연스럽게 대련이라는 틀을 넘었다.
차창, 땅, 팅, 티팅!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울리던 금속음이 불규칙해졌다. 대신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검기 덕에 소리는 오히려 맑아졌다. 이드가 손을 쓰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대련의 선의 넘은 후부터 점차 스폴이 밀렸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스폴이 크게 다치거나, 몰아가 깨어질 수 있었다.
슈슉.
이드가 검 끝을 노리고 지력을 쏘아 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린 취을난지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검 끝을 조금씩 흔들며 지났다. 두 사람이 몰아에 들지 않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둘에게는 싸우고 있는 서로만 보일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고수의 싸움은 촌각에 갈리는 것, 검 끝만 흔들려도 충분히 피하고 막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불협화음이 생기고, 위험할 순간마다 개입하길 몇 번을 했을까.
스폴의 기파에 이끌리던 쉴라의 것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빠르게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이드는 퍽 아쉬워했다.
“자주 오지 않는 기회인데. 아깝네.”
쉴라는 돌연 정신이 들었다. 잠에서 깨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익숙했다.
오랜 시간 무공을 수련하며 몇 번이나 경험해 봤다. 무공에 깊이 빠져든 순간이 이랬고, 갑자기 찾아든 깨달음의 순간이 이랬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이 경험이 지나면 크든 작든 실력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이상의 생각을 정리하거나 기뻐하기도 전에, 그녀의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까운 시간을 놓쳤네요. 그래도 멈추지 말아요, 쉴라 경. 아직 스폴 경이 깨어나지 않았으니까.”
이드의 전음이었다. 그 덕분인가.
깨어남과 동시에 쉴라는 자신을 향한 스폴의 공격을 늦지 않게 막아 냈다.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해 재빨리 사방을 살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전음을 사용했다.
“두 사람을 찾으러 나와 보니, 마침 둘 다 몰아에 빠져 있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흐름을 유지하려고 손을 썼지만………… 아쉽게 쉴라 경은 깨 버렸고, 스폴 경은 아직 저 상태입니다.”
짧았지만 앞뒤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쉴라는 경험도 있었고.
그녀는 금방 스폴을 상대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평소의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는 스폴의 눈은 검을 향하고 있음에도 그 뒤의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이런 경우 검후는 상대가 한계를 넘을 때까지 거목처럼 버티고 서서 받아 주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일까?
쉴라는 스폴이 최대의 성과를 얻기를 바랐다. 마침 최고의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존재도 옆에 있지 않은가. 그녀는 즉시 전음을 사용했다.
“명예 후작님의 배려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쉴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대륙에 무인이 몇인가. 검후를 따르며 지금과 같은 상황을 본 적도 있고, 은색 기사단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본래 당사자에겐 큰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스폴 경이 이번 기회에 더 많은 걸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드는 그 요청을 바로 승낙했다. 말 몇 마디 더하는 일에 어려울 것이 무언가. 어차피 땀 흘리는 일도 쉴라가 해 줄 것이고.
“지금 스폴 경의 검법은 강을 넘어 패도로 흐르고 있어요. 물론 성향에 따라 검법의 모습이 바뀌긴 하죠. 다만 무공을 대성한 거라면 몰라도, 현 상태로 한도를 넘어서면 좋을 것도 없어요.”
“흐름을 부드럽게 끌고 와야겠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이죠. 혈화, 분영화, 뇌정화만을 사용해서 상대하면 될 겁니다.”
이 세 초식은 난화십이식 중 가장 강맹한 초식들이다.
강을 유하게 하는데 어째서 강한 초식으로 상대하게 하는 것인가. 그건 강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강이 부딪혀 깨지기를 반복하면 결국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고 부드러운 속살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이 과정에서 속살이 드러나기 전에 완전히 부서져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오판을 하기에는 이드가 스폴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변화무쌍한 성질을 가진 스폴 경이라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지.’
“차라리 명예 후작님이 대신해 주시면 더 좋지 않을까요?”
“곤란해요. 스폴 경은 지금 예민한 상태입니다. 상대가 바뀌는 순간 몰아가 깨어질지 몰라요.”
이드는 여지를 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어디 생고생을 떠넘기려고 말이다.
그렇다고 이드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떻게 진입할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것이 몰아다.
티 나지 않는 보조라면 몰라도, 싸우는 상대를 바꾸는 건 취을난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극이다. 스폴에게 있어서는 천지개벽과 같다고 할까.
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쉴라도 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검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무쌍하던 흐름이 점점 단순해져 종국엔 이드가 말한 세 초식만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과연 은색 기사단장이라고 할까. 초식을 한정했음에도 크게 밀리지 않고 스폴을 상대하는 모습이다.
거기에 짧지만 몰아를 경험한 덕분인가.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뇌정화 때문에 초식간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던 모습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교정되어 갔다.
덕분에 스폴을 상대해주고 있는 쉴라도 신이 나는 듯했다. 그렇다고 주목적을 잊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화아아아.
부딪히고 깨지고를 반복하며 힘을 잃어 가는 듯 보이던 스폴의 검에서 맑은 적색의 검화가 피어나 성벽처럼 단단하던 쉴라의 검망을 밀어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힘을 쓴 것 같지 않을 정도였다.
촤아아악.
그렇게 쉴라를 대련장 끝까지 밀어 버린 다음, 스폴이 몰아에서 깨어났다.
“음…… 어디서 맛있는 냄새 나지 않아요?”
“…….”
“하하하. 이제 보니 스폴 경은 무공 실력보다 더 뛰어난 코를 가졌군. 갑시다. 좀 식었겠지만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뒀으니까. 축하나 하지요.”
“무슨 축하 말씀입니까??”
그제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는 스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