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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80화


1016화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이드에 방 안의 움직임이 멎었다.

“오래 기다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반기는 말이 어쩐지 섬뜩하다. 반듯이 허리를 세운 쉴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보다는 기름으로 유난히 반들거리는 입가로 자꾸 시선이 가는 이드였다.

“쉴라 경.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었는데………….”

“앗, 크흠.”

그 말에 쉴라가 황급히 몸을 돌려 입가를 털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미 다 봤는데.

무엇보다 날카로워졌던 눈매부터 둥글어진 상태다.

대신 그녀의 희생 덕분에 자신들이 과자를 먹던 중임을 떠올린 일리나와 에린이 이드에게 보이지 않게 입가를 정돈할 수 있었다.

“감시 중인 요원으로부터는 아무런 보고도 없습니다만?”

의문을 표하는 에린.

입가에 기름은 지웠지만, 대신 한가득 쌓인 색색의 과자 봉지가 긴장감을 바닥까지 떨어트린다.

바스락거리는 과자 봉지의 재질은 둘째 치더라도, 겉에 적힌 글씨는 하나같이 지구에서 사용되는 것들.

이 땅에 지구의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라미아 말고 누가 있을까.

아마도 막간을 이용해 여자들끼리의 친목을 다지는 데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여성진들의 입술도 이해가 갔다. 한번 손대면 멈추기 힘든, 달콤하고 부드러운 지구산 과자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니까.

다만 살찌는 데도 효과가 대단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녀들의 활동량을 생각하면 문제도 아니다.

“내성의 분위기가 변했다. 철과 피 냄새를 동반한 살기가 짙어졌어.”

“내성에서 싸움이 일어난 걸까요?”

그렇다면 기회, 이쪽도 당장 움직여야 한다.

에린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내성에서 뿜어진 살기는 외부를 향하고 있어. 안에서 싸움이 났다면 살기가 안에서 폭발했겠지. 이건 외부의 적을 향한 거야. 방향은 대충 저쪽일까.”

그렇게 말하며 이드는 그 외에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말했다.

외부로 뻗어 나가는 살기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지만, 내부에 똘똘 뭉쳐 웅크리고 있는 투기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기다려 보자고. 뭔가 변화가 있는 건 확실하니, 곧 보고가 있겠지.”

그런 이드의 말이 있고 몇 분 정도가 지났을까.

검은 돌에서 사용하는 특유의 암호 노크와 함께 두 명의 검은 돌이 별채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감시자로부터 급보입니다. 좀 전 연락병으로 보이는 병사가 급히 내성으로 들었는데, 그 후 성안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고 합니다. 동시에 외부에 머물고 있던 피오 단장이 내성으로 향했습니다.”

“타란 백작의 호출인가?”

“통신 마법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성에서 나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말에 이드와 에린의 눈이 마주쳤다.

내성에서 연락을 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움직였을까? 혹시, 사건이 일어날 걸 미리 안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진짜 우연이거나, 통신 마법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에린은 추측을 잠시 뒤로 하고, 다른 요원을 보며 말했다.

“그쪽은?”

“명예 후작님의 명에 따라 쉐어 가든을 수색 중이던 요원들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쉐어 가든에서 두 시간 거리에 일단의 무리가 갑자기 출현. 수는 대략 이천 이상. 그런데…….”

말을 하던 요원이 잠시 망설인다. 보통 정확하지 않거나 신뢰성이 떨어지는 정보일 때 이런 모습이 나온다.

에린은 그 모습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재촉했다.

“네 역할을 혼동하지 마라. 네 일은 정보 전달일 뿐이다. 계속해.”

그렇다. 그의 임무는 정보의 전달. 어떤 이상한 내용이라도 그는 오차 없이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 후의 분석이나 진위의 확인은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확인된 수는 이천 이상. 그중 대부분은 전신이 검은 몬스터이고, 그 중앙에 몬스터를 이끄는 마법사들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마법사의 숫자는 파악 불가. 현장 요원이 이후 행동에 대한 명령을 대기 중입니다.”

보고가 끝나는 순간 실내에 있던 사람들끼리 눈이 마주쳤다.

“전신이 검은 몬스터라면, 최근 지겹게 봤죠?”

“정신의 관에서 부리던 녀석들이죠. 역시 어부지리를 노리고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었던 거네요, 미완의 마탑 놈들이. 그렇다면 내성이 분주한 이유도 알겠군요.”

일리나와 쉴라의 말.

그에 에린이 요원에게 물었다.

“그들이 발견된 방향은?”

“동쪽 두 번째 높은 산에서 오른쪽. 저기입니다.”

요원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은 아까 이드가 내성의 살기가 향한다던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새삼 이드의 능력에 혀를 내두른 쉴라와 에린이 말했다.

“과연 탐색한 보람이 있네요. 그런데, 보란 듯이 모습을 보인 것을 보면 마스에 단순히 정보만 넘긴 건 아닌 것 같지요?”

마스는 어떤 방법으로 쉐어 가든에서 검후를 빼내려고 할까.

이에 대해 이드와 일행은 다양한 가설을 내놨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싸워 힘으로 빼앗는 것이다.

전력을 얼마든지 보낼 수 있는 마스의 땅이니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타란 백작에 타란 기사단, 수도 기사단도 나섰으니까. 그러다 파라켈 후작을 설득해서, 당당히 쉐어 가든에 입성하는 모습에 다른 계획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살피는 중에 딱 봐도 수상한 무리 같은 티를 내며 마탑이 나타난 것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우연으로 보긴 힘들다.

이드는 에린에게 이 상황의 해석을 맡겼고, 그녀의 입은 거침없이 열렸다.

“저희가 분석한 정보에 따르면 내성을 지키는 브리더 자작은 파라켈 후작이 명령한다고 순순히 검후를 내놓을 인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검후의 존재가 발각될 것을 감수하고 갑자기 들이닥친 기사들을 내성에 들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적당하게 그 구실이 나타난 거겠지요.” 

“쉐어 가든의 눈을 딴 곳으로 돌리는 거로군. 병력도 같이.”

“마스를 공격하는 적이 나타나 기사단을 급파했다면, 쉐어 가든에서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겠죠.”

드러난 상황을 기반으로 가볍게 주고받는 말에 마스와 쉐어 가든의 현재 상황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 분석에 특별한 재주를 보인 에린의 역할이 가장 크지만, 이드를 포함한 남은 세 사람 역시 천재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턱을 쓰다듬던 이드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과연 강력한 적을 상대로 검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스가 검후를 보호한다는 시나리오가 되려나? 때마침 쉐어 가든이 준비하고 있던 공간 이동도 불가능해질 예정이고 말이지.”

그건 번득이는 직감이 내놓은 답이었다.

“지금으로선 명예 후작님의 말씀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 같습니다.”

“그 계획대로라면 곧 저희들이 나설 때가 올 것 같군요.”

쉴라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말했다.


내성은 빠르게 전투를 준비했다.

이드의 짐작대로 정체불명의 적으로 알고 있는 미완의 마탑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다.

“적이 가까이 왔다. 총관은 이 사실을 영지민들에게 알리고 경계시켜라. 벤벤 경은 성문을 닫고 성벽 위에 병사들을 올려라. 너는 가서 위리더 남작을 불러와라. 서둘러라!”

당연히 그 중심에는 브리더 자작이 있었다.

그는 정신없는 중에도 기계처럼 정확하게 필요한 명령들을 내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급한 일을 처리했을 때 피더스 남작이 브리더 자작의 갑옷을 들고 다가왔다.

“정말 적이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갑옷 입는 것을 도우며 피더스 남작이 말했다. 그는 살짝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타란 백작과 기사단이 검후를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 진짜 적이 나타나다니.

“방심하지 말게. 지금 나타난 놈들이 진짜 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브리더 자작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에 피더스 남작이 혀를 찼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전날 후작님과의 통신 후에 나는 바로 주변 영지에 사실을 알리고 경계를 부탁해 둔 상태였네.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어. 영지의 경계에 은밀히 보냈던 기사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당한 것은 아닙니까?”

“나도 혹시나 싶어 바로 확인했지만 살아 있어. 이상 없다더군. 이천이 넘는 괴생명체가 영지 안에 나타났는데도 보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피더스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보는 눈이 한둘도 아니고.”

“그렇지. 둘 중 하나야. 미리 들어와 숨어 있었거나, 쉽게 숨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왔거나. 거기에 더해서 마음에 걸리는 건 몬스터의 모습이야.” 

그 말과 함께 브리더 자작이 종이 한 장을 내보였다. 그건 연락병이 들고 온, 급보가 적힌 종이였다.

브리더 자작은 그중 한 부분을 가리켰다. 바로 이드의 눈을 번뜩이게 만든 대목이었다.

“전신이 검은.. 괴물이라. 이거, 미완의 마탑입니까?”

당연히 이드 이상으로 미완의 마탑과 관계가 깊었던 바벨이 모를 수가 없었다. 피더스 남작의 눈빛이 바로 험악하게 변했다.

내성에서 검후를 지키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소문이 파다한 일에 대해서까지 모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평민들은 알 수 없는 더욱 자세한 일까지 전달받은 쉐어 가든이다.

거기에 더해 미완의 마탑과 소드 팰러스가 손을 잡고 초인을 공격했다며, 그들이 쉐어 가든을 공격할 것을 걱정해 전력까지 보충한 상태이지 않던가.

그 전력을 이끌고 온 것이 위리더 남작이다.

“설마 미완의 마탑에서 마스를 움직였단 겁니까?”

“마스가 검후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단순히 파라켈 후작님의 변심이라고 여겼던 일이지만, 그 전에 마스에서 먼저 검후의 존재를 알고 파라켈 후작님을 압박했다면?”

“……가능성이 높군요. 무엇보다 마스는 힘에 대한 탐욕이 강한 나라. 의심스러운 정보라도 검후를 얻을 수 있다면 일단 손을 뻗었을 테니.”

“그렇지. 검후만 얻을 가능성이 있다면 파라켈 후작님과 척을 지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을 테지.”

“그럼 지금 나타난 미완의 마탑도 사실은 마스와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목적은 우리의 전력을 나누어 각개격파하려는 것일 테고.”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면 답이 나오겠습니다.”

피더스 남작이 힐끗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엔 타란 백작과 구른 단장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검을 손에 든, 완전 무장 상태다.

이미 저들에 대해 경계하라고 명령을 받았던 쉐어 가든의 기사들이 신경을 날카롭게 바짝 세웠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이야 어떻든 상관이 없다는 듯, 두 사람은 브리더 자작 앞까지 다가와서는 말했다.

“왕실에서 확인한 적이 나타난 것 같은데. 맞소?”

“아직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에 뻔히 보이건만 어떻게 모를 수 있겠소. 기사들이 바쁘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단숨에 알았소. 정체불명의 적이 아니고서 이 마스에서 누가 함부로 쉐어 가든을 향해 검을 들 수 있겠소.”

파라켈 후작은 마스 초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후작의 영지를 공격한다는 건, 마스에 있는 대부분의 초인 세력과 척을 지겠다는 말인데,

타란 백작의 말처럼 마스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기사 하나를 잡고 물었더니, 적이 나타났다고 하더구려. 해서 놈들이 나타났구나 싶어 이렇게 달려오는 길이오.”

“…..”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돕겠다니. 참 고마운 일인데, 왜 이렇게 입맛이 쓴 것인가.

친근하게 웃는 타란 백작을 보며 브리더 자작이 꿀떡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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