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92화
1028화
목에 닿은 칼로 피가 흐르는 중에도 이드와 웃고 떠들던 검후였다.
그런 모습이 변하는 것도 순식간. 그녀는 언제 웃었냐 싶게 지엄한 눈길로 이드를 쏘아보았다.
반말이 뭐 그리 문제냐 할 수도 있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하고, 그놈 저놈 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들어서 문제 될 사람이 없을 때나 괜찮은 일이다.
당사자나 관계자가 있는 곳에서 그랬다가는 무슨 꼴을 볼지 몰랐다. 작게는 잔심부름 정도의 가벼운 벌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당장 피가 이어진 친족간에도 말을 함부로 했다가 큰 싸움이 나는 일도 심심치 않으니 말이다.
이 모든 일은 말에 그만한 힘이 있기에 발생한다. 말의 형태에 따라 각자의 높고 낮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검후에게 반말을 한다? 이 대륙에 이종족을 제외한 인간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당사자인 검후가 생각해 봐도 그랬다.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신 게 언제였더라.’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힘든 와중에도 자신을 살펴 줬던 오라버니.
그나마 그녀에게 편히 반말할 수 있는 그가 죽은 후, 그녀에게 감히 함부로 말하는 존재는 없었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반말은 오히려 신선할 지경이다.
‘사실 기분이 크게 나쁘지도 않아.’
하지만 자신의 기분과 달리 그녀에게는 사회적 위치가 있었다.
그녀의 위엄은 곧 제국의 위엄이기도 했다.
그래서 경고를 날렸는데, 돌아온 말이 눈치가 없다고?
기분 나쁜 ‘척’이, ‘척’이 아니게 되려 할 때였다.
한데 왜인지 눈치 없다는 말이 유독 귀에 거슬렸다. 거기에 과거 이드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듯, 닮았다는 말이 아쉬울 정도로 똑같은 상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번뜩.
문득 작은 가능성 하나가 벼락처럼 검후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곧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든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이 땅이 비밀과 신비가 가득한 곳이라지만, 이 인물이 과거의 그 이드일 리가.
만약 동일 인물이라면, 살아 있었다면 어째서 ‘그때’ 나타나지 않았던가. 연인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애써 부정하고 있을 때, 이드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당사자와 똑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는 무슨. 맞을걸?”
“뭐가 맞는다는 건・・・・・・ 가?”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정답을 직감한 것일까. 말투부터 묘하게 변했다. 반말임에도 어쩐지 반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피식.
이드는 그 모습에서 과거 꼬꼬마 시절 시르피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마인드 마스터.”
흠칫.
“네가 과거에 알던 이드.”
화들짝.
툭툭 던지는 말에 반응이 맛깔스럽다.
그러나 이 장소가 안전한 곳은 아니지 않은가. 이드는 검후를 갖고 노는 걸 접고 자신의 정체를 확실히 밝혔다.
“나와 그가 동일 인물인지 의심하고 있잖아. 그거 맞는 추측이라고. 내가 이드고, 마인드 마스터야. 후예가 아니라 본인이지.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마인드 마스터라는 건 대체 누구 입에서 처음 나온 거야?”
그에 검후의 표정이 혼란, 기쁨, 부정, 안도 등 실로 다채롭게 변했다. 의심과 사실의 차이일까. 머리가 복잡한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 이드가 초인 기사에게 눈을 돌리려는 찰나, 검후가 급히 입을 열었다.
혼란한 중에도 이드의 말에 대한 진실을 확인하려는 모습이, ‘과연 검후’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한 모습이다.
“당신이 이드 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는 있나요?”
“일단 증거도 없이 네 말투가 바뀐 건 뭐냐고 하고 싶지만 그건 일단 두고 보자, 증거랄 만한 게 있나?”
생각해 보니 딱히 없다.
당시 있었던 사건 자체야 컸지만, 그와 별개로 이드가 아나크렌에 머물렀던 시간이 길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남겨 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
“옳지. 증거는 아니지만, 기억나? 꼬꼬마 때 네가 내 방에 들어와서 씻고 있는 모습을 음흉하게 훔쳐봤잖아. 어린 게 발랑 까져.”
신나게 떠들던 이드가 말을 멈췄다. 그런 이드의 턱 아래로 초인 기사가 떨어트린 단검을 들이민 검후가 있었다.
그녀가 새초롬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 가짜 뉴스 당장 멈추지 못하겠습니까! 훔쳐본 게 아니라, 옷만 감췄을 뿐이에요!”
“흐음. 그랬던가. 기억이 잘.
“당신이 말해 놓고 기억을 못 하면 어쩌자고!”
증거를 보이란 말을 했을 뿐인데, 어떻게 본인이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상황으로 흐른 것일까.
단검이 흔들릴 정도로 파르르 떨며 바락 소리치는 검후의 모습을 보자니 어지간히 흥분한 것 같다.
그러게 왜 증거를 요구해선 말이다.
보통 어린아이의 치기로 귀엽게만 봐서 그렇지, 달리 보면 매일매일 흑역사를 갱신하는 나날들의 모음이 바로 어린 시절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사람이 바로 이드였다.
“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발랑 까졌다는 건 취소해 주지.”
짐짓 단검이 두렵다는 듯 양손을 든 이드의 너스레에 새초롬하던 검후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아른아른 물기를 머금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이드 님.”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지. 우리 꼬마 황녀님.”
두 팔을 펴고 다가오는 검후의 모습에 이드가 그녀를 마주 안아 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나저나, 널 만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할 때 보러 올 걸 그랬어.”
“호호호. 전 좋은데요. 덕분에 이드 님이 이렇게 구해 주시고. 그러고 보면 이드 님은 볼 때마다 절 구해 주시는 것 같아요.’
“누가 할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 반말은 계속 써도 되겠지요? 검후님?”
포옹을 풀고 떨어진 이드의 말에 검후가 그걸 굳이 물을 필요 있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꼭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정말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거든요.”
“허허.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들었네.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보자, 네가 몇 살이더라.”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수를 세려는 순간, 검후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발톱처럼 반사적으로 이드의 손을 잡아챘다.
“본인 앞에서 나이를 세다니. 오랜만에 만나서 싸우자는 건 아니겠죠?”
꼬꼬마 시절 이야기가 나온 후 빠르게 거리감을 좁힌 것이 무색할 정도로 눈빛이 삼엄하다.
“설마 아직 신경 쓰는 거야? 이제 나이는 단순한 숫자로 여길 정도가 된 거 아냐?”
여성이 나이에 민감한 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지. 설마 세 자리 숫자를 본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천만에요. 젊어도, 늙어도 여자라고요! 제가 가능한 한 신년 행사에 빠지는 게 왜일 거 같아요?”
설마 그런 이유라니. 통보도 없는 무책임한 불참에 애를 태우는 황제가 알았으면 뒷목을 잡을 만한 사유다.
물론 황제에게 말해 줄 만한 의리는 없으니, 황녀에게만 살짝 이야기해 줄까 보다. 검후에 대한 존경이 큰 만큼, 반응이 참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이야깃거리 하나를 챙긴 이드가 다시 초인 기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옛 추억으로 관계를 회복하며 친분을 다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할 일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일.
“으으으”
마침 눈이 마주친 초인 기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급히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몸이 부서지는 것도 무시하고 어떻게든 제압을 풀어내려던 시도도 멈춰 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은 모양이야.”
그 말에 초인 기사가 움찔했지만, 억지로 눈을 돌리고 있는 건 여전하다.
목도 움직이지 못한 상태로 최대한 눈알만 굴리고 있어서 그런가, 눈에 진하게 핏발까지 섰다.
과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저 초인 기사의 기분은 어떨까?
“어때, 저자에게 볼일이 있니?”
“제 마음대로 해도 되나요?”
“눈을 봤는데. 항복할 것 같지는 않더라고. 충성심이 대단한 모양이야.”
“이드 님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은・・・・・・ 비밀인 거죠?”
“아직은 밝히면 시끄러우니까. 다른 사정도 있고.”
짧은 이드의 대답에 알았다고 답한 검후가 초인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드 때와 달리 검후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제국 법에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방법을 사용해서 고통스럽게 죽게 되어 있지만, 지금 상황과 그대의 충성심을 높게 사는 의미에서 고통 없이 처벌하도록 하겠다.”
카칵.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후는 단검을 초인 기사의 정수리에 박아 넣었다.
내공이 금제된 상태에서, 그것도 단검으로 단단한 두개골을 뚫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을 터였다. 한데도 마치 수박을 찌른 것처럼 깔끔했다.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게 별것 아니라는 듯한 모습에서, 그녀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수련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심장이 아니라 머리를 찌른 이유라도 있어?”
“초인이라면 심장 정도는 재생시킬 수 있으니까요. 또 죽은 사람의 머리에 든 기억을 빼는 초인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과연,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인가.
“그렇게 신경 써 주니 고마운데?”
“이 갑갑한 곳에서 구출해 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럼 이제…… 앗!”
쿠훙!
말을 이어 나가던 검후가 급히 자세를 고쳤다. 폭음에 뒤따른 진동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란하네. 그나저나, 손 좀 줘 봐.”
이드는 세 번째 탑이 있는 곳을 힐끗 돌아보았다.
이 진동, 폭탄이 터졌다기에는 약하다. 아마 그들이 세 번째 탑 바닥에 진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드에게 검후가 팔을 내밀었다. 이드의 신분을 확인했기 때문인가, 전혀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다.
이드도 마찬가지 태도로 검후의 맥문을 잡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냥 보기에도 힘이 봉인된 듯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봉인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러는 쪽이 이후의 일을 위해서도 좋으니까.
“쯧. 꽁꽁 잘도 묶어 둔 것이, 쉬운 물건은 아니네.”
빠르게 봉인의 탐색을 마친 이드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어지간하면 힘으로라도 날려 버리겠지만, 단전과 주요 대맥에 바짝 붙어 있어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검후라고 꽤 신경을 썼나 봐.”
봉인에서 복잡함을 넘어 세심하기까지 한 흔적을 느낀 이드가 그리 말하자, 검후가 윙크를 날리며 자랑스러운 듯 답했다.
“지금 전 이드 님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었거든요. 거기다 몇 번 봉인을 자력으로 풀어냈더니,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이번 건 저도 해결할 자신이 없었는데, 이드 님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쉽지는 않아도 어떻게든 해체해 주실 것 같으니까요.”
봉인이 복잡해진 이유가 너였냐.
이드는 방글방글 웃는 검후를 향해 그렇게 쏘아 주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탑 아래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아무래도 너 먼저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이번 일…… 제 구출만 있는 게 아니로군요? 그렇죠?”
밖으로 나가는 거야 간절히 바라던 바지만, 자신은 따로 남겠다는 듯한 이드의 뉘앙스에 검후가 살짝 거부감을 보이며 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상황을 설명했다.
검후를 가둔 초인파와 빼앗으려는 마스. 그 사이에 마탑이란 자들이 또 끼어 있고, 그를 잡는 것이 검후의 구출과 더불어 중요한 목표라고 말이다.
“그럼 제가 목표란 말인데, 결정했어요. 저도 남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버리는 검후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의 반응에 이드는 싱거운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