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594화


1030화

투두두둑. 쿵!

또 어디가 무너진 것일까. 어디의 돌이 떨어진 걸까. 어딜 받치던 기둥이 쓰러진 걸까.

무너지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빛이 스며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먼지가 하얀 눈처럼 빛났다.

쩌엉!

그러나 다음 순간, 위에서 쏟아지는 빛과는 다른 차갑고 푸른빛이 번뜩였다.

그러자 뿌연 먼지가 사라지고, 뒤이어 그 아래 있던 짐마차 크기의 바위마저 쩍 하고 갈라졌다.

“푸후~! 비열한 개자식들!”

그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타란 백작이었다. 아니, 그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라 수십의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모두 크고 작은 상처에 먼지까지 가득 뒤집어쓴 모습이다.

그래도 압사당하지 않은 게 어딘가.

그들이 나온 구멍 안에는 바위와 벽이 교묘하게 겹쳐져 공간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곳곳에 손자국과 무기를 휘두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 틈이 기적 같은 운 때문이 아닌, 기사들의 힘과 위기 대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셈이었다.

“구른 단장, 피오 단장은 무사한가! 각자 기사단을 챙기지 않고 뭘 하는 거야!”

타란 백작이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오크 전사처럼 포효했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여유 있고, 느긋한 태도와는 다른 거칠고 야만적인 전사의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강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변경백의 진짜 모습일지도.

좌우간 일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것 같은 타란 백작의 포효에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던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그 속에는 양 기사단의 단장들도 있었다.

누가 단장 아니랄까 봐 타란 백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주변의 상당수 기사는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단장은 빠르게 기사들을 챙겨 나갔다.

과연 뛰어난 실력자들이기 때문일까. 의외로 무너진 바위와 벽에 깔린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희생자가 적은 것도 아니다. 특히 매몰되어 쉽게 구할 수 없거나, 바위나 벽에 깔려 큰 부상을 입은 부상자의 수가 사망자보다 많은 것도 문제.

하지만 이곳은 적진. 전투가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일단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만을 챙긴 두 단장이 타란 백작 앞에 섰다.

“보고하도록!”

“수도 기사단. 부상자, 사망자, 실종자 다수. 현재 싸울 수 있는 전력은 91명입니다.”

“피오 기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싸울 수 있는 전력은 85명입니다.”

뿌드득.

보고를 듣는 순간 타란 백작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쉐어 가든과의 전투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를 제외하더라도, 희생자의 수가 크다.

그가 기억하는 것만 세어 봐도 양 기사단 합쳐 60명 남짓이 전투 불능이다.

타란 백작이 분노를 담아 천장을 노려보았다. 뻥 뚫려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뼈대만 간신히 남은 탑의 흔적이 코앞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들이 목표로 정하고 확보하려고 애썼던 탑이다. 바로 검후가 있다고 믿었던 그 탑. 그게 무너진 것이다. 절레절레.

‘이럴 때가 아니지. 폭발이다.’

붕괴 직전 머리 위에서 드래곤의 브레스가 연상될 정도로 거칠던 힘의 폭류를 떠올린 타란 백작이다.

“상황은 파악된 게 있나?”

“탑이 폭발한 것으로 보아 높은 확률로 함정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다만 쉐어 가든놈들도 휩쓸린 것으로 봐서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통로를 막아 버리듯 쏟아진 천장의 돌 더미 너머로 희미하게 고함과 신음성이 들려왔다.

탑의 폭발과 붕괴에 기사단보다 조금 더 가까운 위치에 있던 쉐어 가든이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쌍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이는 족족 목을 날려 버리고 싶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함정을 준비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결투도 아닌 전투에 비겁이란 말이 어디 있나. 다만 앞뒤 분간 못하고 함정에 빠진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컸다.

조심스러운 구른 단장의 말에 타란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함정이 확실하네. 우리를 유인한 후에 빠질 생각이었겠지.”

“그럼 이 폭발은 사고인 걸까요?”

“아니. 그 많은 부하를 미끼로 쓴 자야. 그런 이가 설치해 둔 함정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그럼?”

“침입자. 누군가 함정을 발동시킨 거다. 우리 말고 검후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거야.”

점점 확신으로 물드는 타란 백작의 목소리에 피오 단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미완의 마탑 놈들일까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단 마탑을 공격했던 의문의 강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사단장들의 말에 벌써 경쟁자가 둘이나 나왔다.

그중 미완의 마탑의 경우 마스와 손을 잡고 작전 중이긴 하지만, 만약 검후를 독점할 수 있다면 온전히 그리할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간단하다. 역지사지 마스도 그럴 꿍꿍이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폭발에 날아갔을 것………… 같습니다만. 아닐 가능성도 있겠네요. 험.’

성급히 결론을 내리려던 피오 단장은 타란 백작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짐에 따라 급히 말을 바꿔 보였다.

“쯧쯧, 통로는 여기 하나. 그런데 우리와 쉐어 가든의 눈을 피해 탑으로의 접근이 가능하다 보나?”

““・・・・・・ 밖에서 온 걸까요?”

“당연하지! 그리고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폭발에도 충분히 살아남았을 거다. 우리처럼. 그리고 이 탑에 검후가 없다는 걸 알고 다른 쪽으로 향했겠지.”

피오 단장과 마찬가지로 내부로의 접근을 완전히 배제한 타란 백작이다.

과연 이들은 이미 이드가 다녀갔음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하게 될까.

물론 그렇다고 두 사람의 추측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이드가 다녀간 건 사실이지만, 탑에 설치되어 있던 바론 밤을 터트린 것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저도 백작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검후는 이 탑에 없었을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구른 단장에 타란 백작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그럼 자넨 검후가 어디 있을 것 같은가?”

“쉐어 가든을 빠져나갔다는 정보는 없고, 공간 이동은 내성에서 막고 있으니. 가능성이 있는 건 저곳입니다.”

무너진 천장 너머 구른 단장의 손가락이 찍은 건 이드 일행이 있는 두 번째 탑이었다.

“무엇보다 갈림길에서 갈라졌던 기사들의 연락이 지금까지 끊어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아무리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전력을 모았다지만, 검후를 지키는 데 소홀하진 않았을 겁니다. 소수의 기사 전력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요.”

“쯧, 그들에겐 못할 짓을 했군.”

타란 백작이 혀를 차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현장에서 실수를 빠르게 인정하고 고치는 것. 그의 명성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그럼 기사들을 준비시키게. 지금부터 우리는 두 번째 탑으로 간다.”

“그럼 저놈들은 처리하지 않는 겁니까?”

피오 단장이 돌 더미 너머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검후가 중요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린 것으로 모자라 수많은 부하를 죽인 놈들을 두고 그냥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우선되어야 하는 목표는 검후다. 어떤 것도 그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다만, 일이 끝난 후를 기대해라.”

사납게 웃으며 말하는 타란 백작의 목소리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아직 매몰된 상태로 신음하는 부하들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구른 단장. 여기 있는 부상자들의 처리는 내가 결정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백작님의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것입니다.”

“・・・・・・ 부린, 하키.”

잠시 구른 단장을 바라보던 타란 백작의 부름에 두 기사가 달려 나왔다. 먼지를 덮어쓴 모습 중에도 서늘한 눈빛이 인상적인 기사들이다. 타란 백작은 두 명 기사의 머리를 껴안듯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런 후 앞장서서 달리며 소리쳤다.

“검후는 우리 마스의 것.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가자!”

“가자!”

“달려라!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앞장선 타란 백작 때문일까. 기사들은 한순간 야수가 된 듯 거칠게 달려나가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사들이 떠나고 순식간에 조용해진 공간에 남은 두 명의 기사와 매몰자들.

스르르릉.

그 속에서 부린과 하키 두 기사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슬픔을 갈무리한 눈으로 돌 더미, 그 너머를 노려보았다. 저들이 움직일 기색이 보이는 순간 그들의 검이 향할 것이다. 적들이 아니라 동료들을 향해.

동료들이 적에 의해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그것이 타란 백작의 명령이었다.


콰콰쾅!

탑의 최상층이 폭발하고, 그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탑이 무너졌다.

탑의 일부가 붕괴되어 떨어져 그 아래 있던 내성을 무너트리는 장면은.. 끔찍함을 넘어 차라리 장관이다 싶을 정도.

하지만 지금 랜달에겐 그런 것을 눈에 담을 정신이 없었다.

“여기다 바론 밤을 가져다 놓은 정신 나간 빌어먹을 놈. 이라 봤자. 라울인가. 젠장.”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멈추질 않는다.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기사단을 움직인 후 은밀히 탑으로 숨어든 랜달이었다. 성벽에 생긴 큰 구멍과 마법과는 다른 초인 마법 덕분에 침입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탑의 최상층에서는 조심에 조심을 더했다.

당연히 지키고 있어야 할 초인 기사들이 보이지 않아 더욱 조심했다.

밖에 없다면 그 이상의 전력이 안에서 검후를 지키고 있음이 틀림없었으니. 그래서 안을 살피려 했지만 실패.

이드의 기감을 막아 낸 수법은 랜달의 마법까지 완벽히 막아 낸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랜달은 더욱 확신했고, 감추고 있던 비장의 초인 마법을 사용했다.

그건 일종의 아스트랄체를 만들어 공간을 넘는 수법이었다. 훔쳐보는 건 실패했지만, 다행히 마법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벽을 넘은 순간, 방에 가득한 빛 무리가 자신을 옭아매는 모습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해서 즉시 마법을 사용해 탑에서 탈출했고, 거의 동시에 탑에 있던 바론 밤이 폭발했다. 가히 찰나의 순간이었다. 단 0.1초만 늦었어도 목숨이 날아갔을 터였다.

그렇게 탑 밖에서 폭발을 보게 된 랜달은 온몸을 두드리는 충격 속에서 희미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에 폭발의 원인이 바론 밤이란 사실을 알았다.

동시에 이 위험한 물건을 이곳에 가져다 놨을 만한 인간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고 말이다.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검후를 탈취한 사실을 알면 라울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당장 이번 일에 나서지 않으면 탑주에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인상을 찡그리던 랜달은 곧 긴 숨과 함께 복잡한 마음을 쏟아 내곤 몸을 돌렸다.

그의 목표는 여전히 검후의 확보. 그녀가 있어야 초인 마법의 핵심에, 바이트 타블렛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이곳에 검후가 없다면 저곳이겠지.”

랜달이 바라보는 곳.

그건 구른 단장이 가리켜 보인 두 번째 탑이었다.

마침 발아래서 타란 백작과 기사단도 두 번째 탑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보다 늦을 수는 없다. 랜달이 허공을 날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