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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99화


1035화

날짐승은 달리지 못하고, 네발짐승은 날지 못하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다툴 일이 많지 않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쉐어 가든 상공에서 벌어지는 멸천붕과 신랑의 싸움을 보면 과연 누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각각 멸천붕과 신랑으로 현신한 이드와 메르시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일심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가까이서 보면 스치기만 해도 피떡이 될 무시무시한 공격의 폭풍이지만,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개싸움 판이었다. 그것도 날짐승과 네발짐승이 다투는 개싸움 말이다.

이렇게 된 주원인은 메르시오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미세한 힘의 약화로 밀리고 있음을 알았기에, 싸움의 승기를 잡고자 본인의 스타일로 미친 듯 몰아붙인 것이다.

이드 역시 근접전이 두렵지 않았기에 물러서지 않은 것이고,

다만 그런 과정에서 주변이 끼치는 영향이 당장의 문제라면 문제일까. 지금도 그렇다.

콰쾅!

발톱과 발톱이 한데 엉켜 바닥을 뒹굴고 나면 그 자리에 온전히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아니, 꼭 뒹굴지 않더라도 그랬다. 

“흥.”

치지지지직.

메르시오가 불 대신 은의 송곳니를 뿜어내면 이드가 그것을 화경으로 한데 묶어 비틀어 버린다.

그러면 그 비켜 낸 공격에 직격당한 집 수십 채가 무너져 돌덩이가 되고.

쩌어엉!

쾌와 강의 정수를 담은 힘과 힘이 충돌하면 그 충격에 남은 흔적은 모래가 되는 식이다.

둘의 전투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 아닌데도 벌써 주변엔 세 번째 탑과 그 주변 내성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앞서 뚫려 버린 내성으로 인해 파라켈 후작이 큰 손해를 볼 거라고 했지만, 이젠 그런 문제 이전에 당장 무너진 쉐어 가든의 재건 비용을 더 걱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그건 전부 파라켈 후작의 몫. 이드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드와 메르시오는 미친 듯한 파괴 행위를 이어 갔다.

조금 답답하다 싶으면 멸천붕의 의형강기를 거두거나, 웨어 울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며 철저할 정도로 쉐어 가든을 무너뜨려 갔다. 그 속에서 이드는 생각지도 않은 희열을 느꼈다.

특히 메르시오가 강력한 한 수를 치고 들어오거나, 허초를 던졌을 때 자신이 그걸 알아차리고 받아넘겼을 때 그런 느낌이 한층 더했다. 이때 느끼는 희열은 단순한 흥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를 찬물로 씻어내는 듯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콰르르릉!

음속을 넘는 속도의 충돌에 그 사이에 있던 공기가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일, 이 초의 짧은 순간.

그 속에서 이드가 풀어낸 공방이 칠각삼십육수백팔검이다.

아무리 무림의 고수들이 평범한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고 해도, 이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으리라.

의념을 움직이면 가능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 이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수련하고 환골탈태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더라도, 선천적인 종의 한계는 분명히 있으니까.

일반적인 인간의 몸으로 이와 같은 공방을 따라가려 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드는 그런 한계를 확실히 넘어선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로는 그레이드론의 유산을 받아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유산을 받은 후에도 이렇게 육체를 한계까지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정신의 관에서 메르시오와 싸울 때 희미하게 느끼긴 했지만, 이런 자극을 제대로 받아 본 게 당최 얼마 만인지.

이것은 단순히 이드 혼자만의 감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심기체는 하나가 되는 법.

당장만 해도 이드의 공격이 한결 더 부드러워지고 가벼워졌다. 그 영향인지 거칠었던 멸천붕의 모든 움직임 역시 한층 우아하고 고아해졌다. 당연히 형태만 보기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메르시오와 부딪힐 때 천지로 흩어지던 기운도 대나무처럼 유연하고 끈끈해졌다.

메르시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드는 그렇게 드러난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필요하면 머리와 무릎 등 전신을 이용했고.

퍼억.

“끄악! 빌어먹을. 겨우 3%이지 않냔 말이다!”

연이어지는 치명타에 메르시오가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메르시오 입장에서야 죽을 맛이었으리라.

3%의 차이를 자신의 전투 스타일로 메꾸기 위해 저돌적으로 밀어붙인 것인데, 그 결과 되레 이드의 전력이 상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때쯤이었다.

콘티에롬을 탄 랜달이 빛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아무리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고 해도, 이드나 메르시오 모두 그런 움직임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드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분명 숨기고 있는 아티팩트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랜달의 마혈과 함께 마나를 제압할 때 그의 물품을 점검한 이드였다.

정체까지는 파악하지 못할지언정, 물품이 가진 마나 자체는 정확히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설령 놓치는 게 있더라도, 그걸 잡아낼 라미아도 옆에 있었고 말이다.

한데 그런 이드와 라미아 두 사람의 눈을 피해 도주할 방법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이렇게 놓치는 것인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랜달이 뜬금없이 결계에 충돌해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라미아가 기사단이 배치한 결계에 손을 댔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이드는 뒤늦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랜달을 향해 이를 갈았다.

‘끝까지 여유를 부린 이유가 있었단 말이지. 기대하라고. 다음엔 뼛속까지 추려 줄 테니까.’

물론 지금은 눈앞의 메르시오에 집중할 때다.

마침 메르시오 역시 랜달이 하늘을 가로지른 방향을 신경 쓰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에 살짝 의문이 드는 이드였다.

처음엔 검후를 목표로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은 마치 랜달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랜달이 한때 생명의 관 부관주이기는 했지만, 이제 생명의 관도 없는데, 어째서 탑주도 아닌 랜달을?

확인해 볼까? 기회는 지금 아니면 없을 테니까.

메르시오의 생포가 불가능한 걸 떠나, 잡더라도 순순히 말해 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목표를 놓칠 뻔해서 놀란 모양인데, 안심해. 빠져나갈 구멍은 철저히 막아 뒀다고.”

“흐흐흐, 고맙군.”

가지런히 번뜩이는 이빨이 참 보기 좋다.

친절한 답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검후보다는 랜달에 더 무게가 실린다고 확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천만의 말씀. 겸사겸사 네가 빠져나갈 구멍도 막아 뒀거든.”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미아 놈. 네가 승기를 잡은 것도 지금 이 순간의 일일 뿐이니까.”

“알아. 승기를 잡은 겸에 끝을 보려고. 그래서 쥐구멍도 막은 것이고.’

“크크큭. 그럼 과연 얼마나 잘 막아 두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콰과과과과

힘을 응축하듯 몸을 웅크린 메르시오를 중심으로, 일순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그 주변으로는 다양한 크기의 은의 송곳니가 나타나 회전했다. 그러자 흡입력은 이내 커다란 회오리가 되어 결계 끝까지 닿을 정도가 되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

하지만 이드는 그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도 메르시오를 놓치지 않은 채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다.

회오리가 비록 화려해 보이지만, 겉모습일 뿐, 멸천붕의 날갯짓 한 번이면 흩어질 바람에 불과했다. 오히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저 회오리에 숨어 메르시오가 무엇을 노리려 하는가다. 

“아우우우!”

하지만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이드의 추측이 틀린 것일까.

메르시오는 바람을 타고서 신랑으로 변했다. 동시에 쩍 벌어진 주둥이로 회오리를 물고는, 사방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오로지 이드에 모든 전력을 쏟아붓던 것과는 분명 다른 형태였다. 오히려 쉐어 가든 자체를 부숴 버리겠다는 쪽에 가까웠다. 쐐애애애액!

“미친! 대마법 방어진!”

덕분에 겨우 붕괴된 현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기사단은 혼비백산한 채 방패와 검을 들어 바람의 브레스를 막아야 했다.

그 모습에 이드의 고개가 황급히 라미아와 일행들을 향했다.

마치 폭주하듯 사방으로 바람을 쏘아 내고는 있지만, 저 메르시오의 공격을 기진맥진한 기사들이 막아 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와 함께 머리에 떠오른 금선탈각의 네 글자.

아니나 다를까. 이드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는 흰 선을 만들며 허공을 가로지르는 메르시오가 있었다.

씨익.

동시에 이드의 시선을 느낀 듯 번뜩이며 눈을 돌린 메르시오의 주둥이가 살벌하게 벌어진다.

당장 랜달 주변으로 모이고 있는 이드의 일행을 모두 물어뜯어 주겠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런 메르시오의 생각과 도발은 결과적으로 성급한 것이었다.

이드는 다급한 모습 대신 오히려 입가에 비웃음을 장착했다.

“뇌정. 비혼, 멸혼, 삼색연화!”

초식의 심의를 되짚은 일리나의 기합 담긴 목소리와 함께, 땅에서 하늘을 향해 떨어지는 붉은 검강의 폭포수가 메르시오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순간, 절묘한 기습이어서일까. 아니면 일리나의 공격이 강했기 때문일까.

메르시오의 전신에 검강으로 인해 작지만 끊임없이 흉이 새겨졌다.

뿐인가. 그녀를 향한 메르시오의 반격 역시 착실하게 막아냈다.

어쩌면 메르시오가 이미 이드와의 싸움에서 받은 피해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메르시오를 상대하는 일리나는 오랜 노력에 대해 보상 받는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드가 사라지기 전까지 저들 혼돈의 파편과의 싸움에서 그녀는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한데 지금은 이렇게 메르시오의 발을 묶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고, 그래서 이드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그녀를 고취시킨 것이다.

“가세하겠습니다!”

게다가 이곳엔 일리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에 달려온 쉴라가 가세하며 일리나의 검초에 부족한 힘을 보탰다.

쩌저정!

일리나에 비해 실력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난화십이식이라는 무공을 연환할 수 있다는 점과 일리나에게 배우며 호흡을 맞춘 경험은, 짧은 시간이지만 메르시오를 상대로 버틸 근간이 되어 주었다.

“……실력이 늘었구나, 내 딸.”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후가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이 메르시오를 오랫동안 상대하기에는 근본적인 힘의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던 둘에게 잠깐이지만 발목이 잡혔다는 사실에 메르시오로서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겨우 이따위로 내 앞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냐!”

메르시오는 발톱에서 검강과 같은 예기를 뿜어 두 사람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는 땅을 뒤집어 일리나와 쉴라의 다리를 뭉개 버리려 했다. 그에 급히 물러난 두 사람이었으나, 다리에 상처를 입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메르시오는 그런 둘에게 더 달려들지 않았다.

이드의 눈을 속이며 이곳으로 달려온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때문인가. 메르시오는 랜달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바로 라미아다.

“찢어 주마!”

그에 메르시오가 발톱을 휘둘렀을 때였다.

이드의 일라이져가 흐릿한 그림자와 함께 나타나더니, 메르시오의 발톱을 막았다. 라미아와 이어진 라인을 따라 공간을 넘은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 없다고 했지.”

“뿌드드득,”

이드에 앞이 막힌 메르시오가 대차게 이빨을 갈더니 갑자기 땅에 발을 박아 넣었다.

‘뒤?’

이드는 순간 발아래로 벼락처럼 스치는 기운을 따랐고,

차라라라락.

다음 순간, 랜달이 서 있던 땅이 가시 꽃이 피어나듯 가시를 길게 뻗으며 일어났다. 그 가시 하나하나에 어려 있는 메르시오의 기운. 심상치 않다 싶은 순간, 메르시오가 말했다.

“인정하지. 네놈이 이겼다. 하지만 트로피는 내가 갖도록 하겠다.”

동시에 가시와 콘티에롬이 닿았고.

치지지직!

난폭한 불꽃과 함께 콘티에롬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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