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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1화


498화

터엉!

 “컥!”

길 비얀 기사단장은 거대한 해머가 전신을 두드리는 충격에 뒤로 튕겨 나갔다. 앞서 진입한 자작을 따라 기사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섰지만,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게 이어진 충격에 들어갈 때보다 빠르게 성 밖으로 튕겨 나온 것이다. 이대로라면 꼴사납게 땅에 뒹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장도 그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초인의 힘을 가진 자작의 밑에 있으면서 오로지 실력으로 오른 자리였다. 기사단장은 금방 중심을 잡고 땅에 착지했다.

그와 함께 뛰어들었던 기사들은 성벽 안쪽이나 기사단장의 주변에 형편없는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쯧.”

기사단장은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성안을 살폈다. 성안은 뿌연 먼지가 가득 차서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검을 뽑아 들고 단단히 대비하며 성안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그 사이 세차게 흘러가는 바람에 먼지가 빠르게 사라지고, 그가 나갈 저 앞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기사단장은 더 이상 전진하던 것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앞에는 밤하늘이 보일 정도로 무너져 버린 성의 일부와 검은 기운을 뱀처럼 휘감은 모습의 자작, 그리고 그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검을 들고 있는 이드가 보였다.

“으음.”

기사단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자작의 모습을 딱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은 자작이 작위를 물려받은 후 기사단의 충성 맹세를 받고 일 년 뒤였다. 그는 기사단이 약하다고 말하며 단신으로 기사단 전체를 상대했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기사단을 압도했다. 두 번째는 기사단이 상대하기 힘든 초인을 자작이 직접 제압하고 나설 때였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기사단은 그때마다 칼질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작님!”

그리고 기사단장은 이와 같은 상황에 꼭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보아서는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의 충돌로 건물이 무너지고 그 여파에 자신과 기사들이 날아갔다. 고작 충돌로 일어난 여파에 말이다.

그런데 그 폭발의 여파는 자작의 뒤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작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젊은 검사가 충돌의 여파를 조종했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길 단장의 상식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괴물과 괴물의 싸움이다.”

여기서 곁에 있어 봐야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게 기사단장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작도 그런 기사단장의 생각을 알았는지 가볍게 손을 저어 보였다.

기사단장은 그것이 물러나라는 자작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자작님, 승리하시고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무운을!”

자작에게 크게 외친 기사단장은 뒤로 돌아 나가며 크게 소리쳤다.

“골드로드 기사단은 모든 병력과 성안의 인원을 수습하고 성 밖으로 이동한다. 서둘러라!”


이드는 자작의 등 뒤로 사라지는 기사단장을 힐끗 확인한 후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자작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에 하지 못할 말이 뭐 있을까. 이드는 자작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라미아, 여기에 계속 있기에는 공기가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은데. 먼저 나가 있을래?”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마침 나갈 길도 넓게 트여 있으니까요. 대신 이번에는 쓸데없이 오래 끌지 말아요, 이드.]

강력한 방어막으로 일리나와 에단을 보호하고 있던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대답하고는 성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한쪽 벽이 완전히 날아가면서 성 밖의 모습이 환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지만, 조심해요. 이드.”

“그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이에요, 일리나.”

이드가 일리나의 말에 살짝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상황에 맞지 않게 가벼워 보였다. 그때 라미아가 마법을 시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너져라, 공간의 벽. 블링크!]

풋!

다음 순간 이드는 등 뒤가 휭하니 비어 비린 것을 느꼈다. 세 사람이 머물러 있던 공간을 공기가 채워 나가며 살랑이는 바람이 불었다.

이드는 그 감각을 잠시 느끼다 자작을 바라봤다. 그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일행이 나가는 것도 막지 않고, 무슨 생각을 그리 그리하십니까, 자작님?”

“흥, 그것들은 내가 잡고자 하면 언제든 잡을 수 있다.”

과연 그가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이드는 라미아를 상대해 본 후에도 자작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것보다 네놈, 초인이 아니구나!”

자작은 오랫동안 고민하던 답이 나왔다는 듯 단호하게, 또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저 분노는 무엇일까. 이드는 궁금했다. 분명 처음 그와 부딪힐 때 자신을 속였다고 내보이는 분노는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언제 스스로 초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던가요.”

“감히 선택받지 못한 천한 것이, 선택받은 자의 행세를 하다니. 그 죄, 죽어 마땅하다.”

‘허, 참. 지금 화내고 있는 게 고작 그거 때문이야? 자기 안목이 없다는 걸 들켜서 화내야 하는 거 아냐?’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자작의 사고방식은 이미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랐다. 자작과의 첫 대면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초인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신성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지식인처럼 보였는데, 초인이라는 단어 앞에서의 그는 단순한 멧돼지 같았다.

“미친놈. 그게 내 탓이냐? 너 혼자 착각하고 지껄인 탓이지!”

이드는 더 이상 자작과 이야기하는 것은 쓸모없다 생각했다. 그 생각은 바로 검으로 튀어나왔다.

쾅!

강력한 진각에 바닥이 갈라지며 이드가 쏘아져 나갔다. 붉은 거도가 다시 불타올라 자작의 검게 물든 발치를 노렸고, 진각으로 끌어올린 힘을 그대로 휘돌린 뇌전각(雷電脚)이 흉험한 기세로 자작의 머리를 노렸다.

샤하악!

눈앞을 가득 채우는 발 그림자를 자작이 채찍으로 막는 동안, 그의 발아래에서 그를 휘감고 똬리를 틀고 있던 기운이 세모꼴의 대가리를 들고 이드의 검을 몸으로 휘감아 넘기며 빠져 나갔다. 그 순간만은 자작의 모습도 검은 뱀과 하나가 되어 사라지고 그곳에는 거대한 이무기 한 마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드는 채찍과 부딪치며 생긴 반탄력으로 자작이 서 있던 곳에 몸을 세우며 이제 막 2층 복도에 몸을 세우려는 자작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붉은 번개가 하늘로 솟는 그림 같은 혈뇌천강지의 일격이었다.

주르륵-

“크윽!”

빈틈을 노린 절묘한 공격을 막지 못한 자작의 얼굴에 칼로 베인 듯한 자상이 생기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자작이 손등으로 닦아 낸 피를 보더니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머리가 두 개라 이건가?”

원래 이드는 자작의 머리를 노리고 지력을 뻗었다. 헌데 그가 인식하기도 전에 흩어지던 검은 기운이 자작의 뒤통수를 비늘처럼 둘러싸며 지력을 비켜 낸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이 얼굴 전체에 미치지 못한 듯 자작의 얼굴 한쪽에 커다란 칼빵 자국이 생겼다.

자작은 화끈한 통증이 일어난 후에야 자신의 공격을 알아차린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작의 의지 이전에 검은 뱀이 스스로 움직여 자작을 보호했다는 말이다. 결국 자작의 힘을 움직이는 것은 자작의 의지와 검은 뱀의 의지 둘이라는 것이다.

이드는 순간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두사의 모습을 생각했다.

“쯔쯔쯔. 어찌나 대단하게 말해서 푸른 피라도 흐르나 했더니, 자작도 붉은 피가 흐르는군. 어떻게, 그렇게 초인들을 잡아먹고도 아직 진짜 선택을 받지는 못한 모양이오?”

“놈! 감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나의 초인기 붉은 뱀 앞에서도 계속 그럴 수 있을지 보자!”

자작의 말에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자작의 발아래에서 오우거 허벅지만 한 검은 뱀이 온전한 모습으로 튀어나와 허공을 구불거리며 날아왔다.

“붉은 뱀이 아니고 검은 뱀이잖아. 색맹이냐!”

츄악-

이드는 눈앞에서 떡 벌어지는 뱀의 아가리를 보며 살짝 몸을 띄웠다.

콰쾅!

뱀의 머리가 창처럼 땅에 박혔다. 이드는 그대로 뱀의 몸을 타고 오르며 검기를 쏘아냈다.

순간 입을 앙다문 자작의 채찍이 회전하는 방패가 되어 검기를 막았다. 그런데 채찍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었다. 검은색은 뱀에게 양보한 듯 핏빛의 칙칙한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쏘리. 색맹은 아닌 모양이네.”

붉은 뱀은 이 녀석을 보고 말한 거였던 모양이다. 이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채찍이 복잡한 변화를 보이며 수십으로 늘어난 머리를 들고 사방에서 이드를 향해 뻗어왔다.

치르르르륵~

허나 이드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붉은 뱀의 독니는 약했다.

“난화십이식(花十二式) 분영화!”

이드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일라이져를 따라 그림자처럼 생겨난 붉은 꽃잎의 검막이 자작의 공격을 막았다. 오히려 붉은 그림자 속에서 한 장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자작을 향해 날았다. 난화십이식의 화령화다.

“기사 따위가 건방지다!”

자작은 화살처럼 쏘아지는 꽃잎에 다급한 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채찍의 손잡이 부분으로 초인기를 뿜어 막았다. 그는 초인도 아닌 기사의 공격에 당황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 절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쩡!

하지만 한장뿐인 화령화의 강기는 강했다. 한순간 멈칫하던 화령화가 뱀 꼬리 같은 채찍의 손잡이를 튕겨 내고 그대로 쏘아져 나가, 자작의 얼굴에 또 하나의 긴 자상을 남기며 자작의 입이 귀까지 찢어진 듯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자작이 한순간이나마 화령화를 막지 못했다면 아마 얼굴이 아니라 머리 한중간을 관통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바가지 흘렀다.

그러나 자작을 식겁하게 만든 이드에게는 화령화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이미 다음 공격을 위해 검을 들고 있었다. 그때 땅에 박혔던 뱀 대가리가 어느새 방향을 틀어 이드의 등을 노렸다.

그리고 그 공격이 이드에게 닿기 직전, 이드가 살짝 몸을 말아 그를 노린 뱀 대가리를 발아래 놓았다.

“쯧, 등 뒤를 노리다니, 너무 뻔하잖아. 뱀을 다룬다고 뱀처럼 단순해지셨소, 자작!”

이드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뱀 대가리를 밟고 몸을 뽑아 올렸다.

투퉁!

그와 동시에 검은 뱀의 머리가 이드의 발아래서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 흩어져 버렸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것은 이동과 공격을 같이하는 운룡팔식의 첩첩만관(疊疊滿息)의 수로, 발끝으로 만근의 경력을 쏟아내며 디딤돌이 된 상대를 곤죽으로 만드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커헉!”

뱀 대가리가 소멸한 영향은 컸다. 검은 뱀과 따로 행동하던 자작이 순간 휘청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눈에는 의문과 의심과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검은 뱀을 순간이라도 완전히 흩어 버린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힘은 강했고,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초인을 잡아먹고, 더욱 힘을 키우며 초인이라는 자부심과 초인에 대한 믿음과 귀족으로서의 영향을 키웠다. 하지만 실전에 대한 풍부함 경험만은 키우지 못했다. 덕분에 자작은 자신의 힘이 한순간 흩어지며 찾아온 탈력감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흩어졌던 검은 기운이 다시 모여들고 있지만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도 바보는 아니었다. 강력한 힘으로 내리누르는 것이 전부였지만 어쨌든 실전도 겪었다. 그 경험과 배움 덕분에 지금 이대로 몇 호흡만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목이 떨어지고 아직 멀쩡한 지하 ‘그 방’이 드러나면 자신은 귀족으로서, 그리고 초인으로서 다시 한 번 더 죽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절대………… 그럴 순 없지! 그것도 기사나부랭이에게.”

자작은 아찔하던 눈을 부릅뜨고 발악하듯 소리치며 손에 든 채찍으로 허공을 찍었다.

“춤춰라, 붉은 뱀!”

쫘아아악!

자작의 손에 들린 채찍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때리고 튀어 올랐다. 다음 순간 채찍은 쥐고 있던 자작의 몸까지 한 몸뚱이로 만들며 허공을 거슬러 오른 뒤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츄아악. 붉은 뱀의 저주를 받아라!”

검은 뱀의 머리를 깨고 3층의 지붕 위로 떠올랐던 이드는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인간의 말을 하는 뱀을 보며 기가 막혔다.

시온에서도 덩치로 밀고 나오더니, 여기서는 말하는 뱀이냐.

“지랄, 지가 무슨 용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이드는 문득 남만의 이족들 중에 거대한 뱀을 신으로 섬기는 이들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들이 여기 붉은 뱀을 보면 신이라고 할까? 이드는 문득 든 생각에 일라이져에 힘을 더했다. 

“신은 무슨. 이무기도 아깝다. 떨어져라. 멸혼향!”

이드의 기합과 함께 일라이져로부터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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