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26화
1061화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문이 지금은 커다란 댐의 수문 같았다.
마치 활짝 열린 수문에서 산더미 같은 물을 쏟아 내는 것처럼 살기는 세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작은 생물쯤은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이고, 그 외는 실례를 하고 도망갈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 앞에 정면으로 선 세 사람은 이런 일반적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환영 인사 한번 상당히 거칠군. 이봐, 나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쩌업 하고 입맛을 다신 라울이 장난스럽게 발터를 툭툭 쳤다.
그에 또 다른 일행의 얼굴을 확인한 발터가 라울의 손을 쳐냈다.
“헛소리 적당히 하고 넣어 둬. 자네 농담에 시사이판의 심장이 먼저 멈추기 전에 말이야.”
“걱정 마. 그 정도로 약하게 키우진 않았다고. 그렇지?”
“・・・ 그렇….죠.”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사이판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그런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시사이판이 내심 욕을 뱉어 내는 사이, 라울과 발터는 저택의 계단 앞에 멈췄다.
그 상태로 발터가 확인하듯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살기를 느끼고도?”
“오히려 이게 증거지. 검후께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의지가 없으셨다면 어땠을 것 같나?”
발터는 라울의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살기를 뿜기 전에 벌써 공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원래 살기란 어쭙잖은 경우에나 흘리는 것이다. 고도로 다듬어진 기세는 공격보다 먼저 나서는 법이 없고, 한번 나서면 좀처럼 물러나는 법이 없다. 한데 이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없다.
라울이 눈을 찡긋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기억하라는 강요지, 지난 시간, 나와 바벨이 검후에게 가했던 부당한 시간에 대해서. 어쩌면 각오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군. ・・・・그래서, 그 각오는 했나?”
“그걸 최대한 회피하고 목적을 이루는 게 내 일이잖나. 그럼 들어가지.”
라울이 문을 두드렸다.
퉁퉁퉁.
곧이어 저택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와 함께 달빛이 열린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시야가 좀 더 넓어졌을 땐 저 멀리 축제의 불빛을 은빛으로 반사하며 도열해 있는 은색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흡!”
공간을 나누던 문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로의 존재를 눈으로 인식했기 때문일까.
일순간 한계치까지 치솟는 살기에 가슴이 눌린 시사이판의 호흡이 멈췄다.
물론 라울과 발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치솟은 살기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지고, 대신 기사들의 내력이 연동하며 바위 같은 중압감으로 세 사람을 내리눌렀다. 그건 실체를 가진 압력이었다.
그제야 살기가 걷히며 온전히 드러나는 은색 기사단은 평소 이드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토벌대가 출정하던 날의 정복도 아니었다.
거의 풀 플레이트에 가까운 갑옷부터 투구에 화려한 망토까지. 완전 무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식만 요란한 것이 아닌, 당장 전장으로 뛰쳐나가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그녀들이 만들어 내는 압력에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랄까.
하지만 은색 기사단의 시위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두 손을 얹어 바닥에 세우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쿵쿵!
“으윽…… 젠장.”
흡사 거인이 해머로 바닥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와 진동. 그리고 그때마다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력이 강해진다.
마치 꿇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무언의 압박. 그에 살짝 무릎이 굽혀진 시사이판이 이를 악물며 욕설을 뱉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행히도 은색 기사단의 시위는 거기까지였다.
뚜벅뚜벅.
은색 기사단이 뿜어내는 기운에 축제의 소음까지 밀려난 가운데, 유독 선명히 들리는 발소리와 함께 스폴이 기사들 사이를 지나 나타났다. 그녀는 오로지 발터만을 바라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은색 기사단 소속 스폴 세이벤이 발터 오 오휀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토벌이 끝나고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일반 반겨 주어 고맙소.”
발터의 짧은 답변에 이어 스폴의 시선이 드디어 라울과 시사이판을 향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는 순간, 라울은 내심 감탄했다. 처음보다는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살기가 넘실거리는 기사들과 달리 무감정한 스폴의 눈 때문이었다. 철저히 감정이 절제된 눈빛.
라울이 가진 정보 속 은색 기사단의 수석 기사는 지금의 모습과 정반대 성격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두 분 손님께선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퍽 인상 깊었습니다. 하하하.”
인상을 쓴 시사이판과 달리 낭랑하게 웃는 라울에 내심 혀를 찬 스폴이 무표정을 유지하며 돌아섰다.
“그럼 검후님께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곧이어 계단을 오르는 스폴에 세 사람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계단을 오르는 순간. 돌연 그들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사들이 철컥거리며 발을 굴렀다.
그건 마치 세 사람의 뒤를 쫓는 추적자의 발소리 같았다.
사실 라울이나 시사이판이라면 몰라도 제국의 백작인 발터라면 불쾌함을 넘어 죄를 물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의 태도였다. 그러나 양측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이건 만남이 성사된 순간 이미 예견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올라 접객실 앞에 도착한 스폴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검후님을 만나실 접객실입니다.”
철컥.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문을 열어 주자 스폴은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곧이어 문이 닫히자 세 사람은 접객실 안을 살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접객실 안쪽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의자 하나였다.
그 주변으로 은색 기사단의 주요 기사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검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검후를 대신하듯 앞으로 나온 이는 창가에 기대 있던 이드였다. 이드는 세 사람을 한 번에 눈에 담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라울과 시사이판에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셨군요.”
“검후님과 명예 후작님과 한 약속에 늦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검후님께서는…………….”
“곧 오실 겁니다.”
사실은 검후는 옆방에 있고, 그녀에 앞서 이드가 라울과 시사이판을 살펴보려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보다, 옆의 분은 저와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요? 라울 자작?”
“다시 뵈어 영광입니다. 명예 후작님.”
말과 함께 불쑥 손을 내밀었던 이드는 라울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내민 손을 잡자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속이고 접근한 것이 들켰으니 반응이 있을 만한데, 긴장하거나 떨리는 모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이 인물은 대화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 내는 게 어려우리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도?’
이드는 가장 뒤에 선 시사이판을 짧게 살핀 후 옆방에 있는 라미아에게 신호를 주었다.
잠시 후 접객실로 이어진 옆방의 문이 열리며 쉴라가 나서서 외쳤다.
“검후님께서 드십니다.”
그에 접객실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예였다. 검후가 그간 삼가고 있었을 뿐, 그녀는 누가 뭐래도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으니 말이다.
곧이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검후가 접객실로 들어섰다. 품위 있게 화장하고, 머리는 곱게 틀어 올렸으며, 고귀해 보이는 보석으로 치장한 검후는 누가 보아도 황족으로서의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는 접객실의 유일한 가구인 의자 앞에 서서는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소.”
“명을 받습니다.”
파지직-
순간 허공에서 번개가 번뜩였다면 착각일까. 세 사람이 고개를 든 순간, 검후와 라울의 눈빛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때까지 세 사람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던 발터가 뒤로 밀려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라울이 가장 앞으로 나서 있었으며, 발터 역시 자신의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검후였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군. 라울.”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검후님을 뵐 기회를 누구보다 빠르게 얻고 싶어서 말입니다. 덕분에 쫓아오느라 좀 고생했습니다. 그간의 우정으로 쪽지라도 하나 남겨 주시지 그랬습니까.”
웃는 얼굴을 한 채, 마치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 살갑게 구는 라울.
검후는 둘째로 두고, 은색 기사단의 기사라면 불쾌함을 넘어 분노할 모습이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검후에게 언질을 받은 것이다. 대신 검후가 고아한 표정으로 라울의 말을 받아쳤다.
“라울. 그대 입이 여전히 잘 돌아가는 듯해 다행이야. 하지만 우리 입장이 바뀐 만큼 조심하는 것이 어떨까? 그간 쌓은 우정을 위해서 말이야.”
“우정으로 전한 충고, 정중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간의 무례에 대해 검후께 정중히 용서를 청합니다.”
“・・・・・・ 용서를 청합니다.”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은 라울에 시사이판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무릎을 꿇었다.
검후는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 턱을 괴며 말했다.
“용서라. 하지만 어쩌지. 나는 옹졸해서 말이다. 입으로 바라는 용서에 응하고 싶지는 않구나. 다만 오늘 그대들의 죄를 묻지는 않겠다. 그러니 날 찾아온 용건을 꺼내도록.”
“검후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처음부터 그 말을 듣는 것이 목적이었던 양, 라울은 검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몇 기사들이 그 모습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라울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급히 검후님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검후님께서도 익히 아시는 검왕과 소드 팰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라울은 이미 검후도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간단히 핵심만을 다시 이야기했다. 차이라면 이드의 입장이 아닌, 발터와 바벨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일까.
“……해서, 저는 소드 팰러스에서 존 워스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검후님에 관련한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명예 후작께서 쉐어 가든에서 너무 화려하게 일을 벌이신 탓에 그들도 지금쯤은 검후님에 대한 일을 알았을 테니까요. 아마도 양측의 분란을 봉합하고, 손을 잡자고 나오겠지요.”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것은? 설마 그대들의 죄를 없는 것으로 해 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일 좋겠지만…… 훗. 어림없는 소리지요. 압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요청은 그저 저희에게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존 워스에게 죄를 묻고, 소드 팰러스의 힘을 깎아 낼 시간을 말입니다.”
검후의 예상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은 요청.
이드는 이어질 검후의 말을 기대하며 입술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