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33화


1068화

해가 떴다.

은색 기사단은 지하실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겠지만 괜찮다. 그 똑같은 하루 속에서 실력이 쑥쑥 늘고 있으니까.

무려 검후와 쉴라가 온종일 붙어서 전력을 다해 수련을 시키고 있는데, 실력이 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 지하실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검후와 쉴라가 없다는 것이다.

“아~ 오늘 수련은 쾌적할 것 같아.”

“엉엉! 너무 좋아! 짜릿해!”

숨 쉴 틈 없이, 말 그대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예술적으로 몰아붙이는 수련의 늪에 빠져 있던 기사들은 조용히 환호했다.

그렇다고 요령을 피우겠다는 건 아니다.

차라리 귀신의 눈을 속이고 말지, 검후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잘 아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들에겐 본인의 손으로 배신자를 베고, 검후께 소드 팰러스를 온전히 돌려 드리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수련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이드는 검후와 쉴라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부부가 있는 방문을 그렇게 벌컥벌컥 열면 어쩌자는 거야?”

이드가 혀를 찼다.

급한 마음이야 이해한다. 수십 년 긴 세월 보관만 하고 있던 물건이 드디어 주인을 찾고, 그 비밀을 드러내려 하니 얼마나 궁금할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후 정도 되는 사람이 다른 집 부부의 침실을 허락도 없이 열고 들어오면 어쩌냐는 거다.

밤사이 소드 팰러스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라 부부 사이의 애정을 돈독히 하고 있었으면 썩 난처할 뻔했다. 그런 이드의 불만에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치는 검후다.

“제가 바보예요? 그런 소리가 기척이 없으니까 들어온 거죠. 또, 좀 보이면 어때요? 제 나이가 몇인데,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요. 호호호.” 말과 함께 음흉하게 웃는 모습이 완전 아줌마다.

하도 기가 막힌 모습에 이드가 잠시 말을 잊었다.

아니, 자기 나이 많은 거하고 남이 부끄러워하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 얼굴을 보고 검후의 진짜 나이를 바로 떠올리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어휴~ 말을 말자. 헛소리 그만하고 대충 거기 앉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포기한 이드가 대충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에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쉴라를 뒤에 단 채로 자리에 앉던 검후가 탁자에 놓인 익숙한 가죽 주머니를 보고는 이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설마 저한테 말도 없이 먼저 확인하신 거예요?”

“아니거든? 소드 팰러스에 다녀온 이야기 중이었거든? 지금도 이렇게 노려보는데, 그거 무서워서라도 먼저 볼 엄두가 나겠냐?”

“제가 뭘 했다고…….”

그와 함께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문질러 끌어 내리던 검후는 곧 주제를 돌렸다.

“그럼 지금 확인하실 거예요?”

이런 걸 보고 기가 빨린다고 하는 건가? 이드는 묘하게 지치는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왔으니까 그러려고, 마침 라미아가 봉인을 풀어내는 방법도 확인한 참이거든.”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기세등등한 라미아의 모습에 ‘죽’이 뭔지 모르는 그레센 토박이들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지만 딱히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던 라미아는 곧장 봉인 해제의 준비에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리고, 각 포인트에 세 개의 마나석을 올려 둔다.

그리고 가져온 반지를 그 중앙에 세워놓고는 손을 뗐다.

“준비 끝. 이제 일리나가 나설 차례에요.”

“어떻게 하면 돼요?”

“간단해요. 반지를 낀 상태로 저 반지에 살짝 부딪히면 돼요. 그 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요.”

“이렇게요?”

팅-

반지가 부딪히자 맑은 소리가 났다. 소리는 곧 울림이 되어 공명을 시작했다.

“아!”

뒤이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액체처럼 변해 빠져나가더니, 미리 세워 두었던 반지와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됐어요. 이제 저기다 피를 떨어트려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리나가 저들끼리 둥글게 뭉치는 중인 두 개의 반지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이슬처럼 스며 나왔다. 내력으로 피를 밀어낸 것이다.

곧이어, 한데 뭉친 피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졌고,

쩡!

그녀의 피를 흡수한 반지는 투명한 수정구로 변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곤 라미아가 설치한 마법진을 통해 마나석의 마나를 흡수하며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상당히 복잡한 순서로 진행되는 작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이드는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검후를 돌아보았다.

“왜? 또 불만이라도 생겼어?”

“그런 게 아니고요. 저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무공으로는 저 반지의 봉인 같은 걸 풀어낼 수 없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겨서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하고 시큰둥하던 이드는 의외로 무공과 마법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

“보통 검기나 검강을 사용하면 어지간한 마법은 파괴할 수 있는데, 저기 반지에 걸린 봉인 같이 복잡한 경우에는 무공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워서요.”

제법 진지하게 묻는 검후의 질문에는 스스로의 경험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렴 무공을 연구하는 중이나 그 후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 하나 없었을까.

이드는 어떤 식으로 답을 해 줄까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일단 결과만 말하면, 가능해. 파이어 볼이나 저 봉인이나 마법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는 건 마찬가지. 즉, 그중 어떤 걸 자르려 해도 근본적인 개념은 같다는 거야. 다만 그 둘의 격이 다르듯, 저 봉인을 자르기 위해서는 무공의 경지도 그만큼 높아야 가능하겠지. 무공에 한계를 두지 마. 만류귀종을 명심해. 이 말은 단순히 무공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이치를 담은 거니까. 궁리하고 또 궁리해. 마법이 공간을 가를 수 있다면 무공으로도 가능하고, 마법으로 하늘을 난다면 무공으로도 가능한 거야. 네가 포기하는 그 순간이 무공의 한계인 거지.”

방법론이 아닌, 무공에 대한 인식에 대해 말하는 이드였다.

그 모습은 매일 밤 지하실에서 대련을 통해 검후의 수련을 도울 때와는 또 달랐다.

사실 검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에게 틀에 박힌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재능을 제한하는 일에 불과했다.

이런 이드의 모습에선 제법 스승으로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지구와 소드 팰러스에서 가르침을 내렸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드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던 검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드 님이 지금 해 주신 말씀, 항상 명심하며 되새기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해제 작업은 착착 진행되어, 라미아가 마지막이라며 말했다.

“이제 이드가 나서면 끝이에요.”

“나까지?”

이드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라미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랬잖아요, 철저하다고, 방금 이드는 무공으로 뭐든 자를 수 있다고 했죠? 물론 보통은 가능하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특수한 경우도 있다고요. 이 반지가 그래요. 이건 같은 마법으로도 정해진 순서와 필요 조건을 철저히 따르지 않으면 바로 소멸해 버려요. 봉인이 티끌만큼이라도 상하는 순간, 펑! 하고 부서지는 거죠. 그러니 아무리 높은 무공을 쌓아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요. 모든 일에는 예외라는 놈이 있으니까요.”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검지까지 들고서 말한 라미아는 곧 이드를 재촉해 마나 패턴을 주입하게 했다.

그 일련의 작업을 마친 뒤, 이드가 입을 열어 시동어를 대신하는 이름을 불렀다.

“나오세요. 세레니아.”

퐁!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뿜어지던 빛이 스위치를 내린 듯 사라지고, 그 안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이드님.”

빛 속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세레니아였다.

다만 그 크기가 손바닥보다 작았다.

거기에 체형도 달라졌다. 늘씬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고 머리가 큰 유아 체형에 큰 눈이 너무.

“귀여워!”

검후가 솟아오르는 감동을 숨기기 힘든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세레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양손에 안아들고 얼굴을 비벼 댈 기세였다.

그걸 안 것일까. 미리 예방이라도 하려는 듯 세레니아가 그 작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고마워요, 시르피. 여전히 예쁘네요. 그동안 잘 있었나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그에 검후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꼬았다. 다만 그게 칭찬을 들어 좋은 건지, 너무 귀여운 세레니아와 악수를 할 수 있어서 그런지는 누구도 몰랐다. 

“다행이에요. 지금까지 반지를 잘 보관해 준 것, 진심으로 고마워요.”

“겨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걸요.”

조금 기가 죽은 검후를 보며 미소 지어 준 세레니아가 이드를 향해 돌아섰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두 분이 무사히 만나신 걸 보니 퍽 마음이 놓이는군요.’

“지금 그 모습, 단순히 마법 영상이 아니군요?”

단순한 녹화본이라면 이렇게 대화가 이어질 수 없다.

아무리 드래곤의 머리가 뛰어나다지만,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변할 줄 알고 사소한 반응 하나까지 계산할 수 있을까.

이드가 놀라며 묻자 세레니아가 이제는 마나가 다 소진된 마나석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 모습은 제가 미리 심어 두었던 사념이에요.”

“왜 우리가 몰랐죠?”

무려 이드도, 라미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장의 선명한 모습만 봐도 상당히 강력한 사념인 듯한데 말이다.

“은밀성에 가장 신경을 썼거든요. 사념체와 정보를 분리하려고 사념체는 일리나의 반지에, 정보는 저쪽 반지에 남겼죠. 그러니 존재감 자체도 매우 흐릿했을 거예요.”

그 정도면 그냥 ‘신경을 썼다’ 정도가 아니라, 심혈을 기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려 사념체에 담긴 정보를 분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인공적으로 사람의 기억을 빼서 백치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별일 없이 이렇게 이드 님을 다시 만났잖아요.’

“그러네요. 참, 그럼 지금 진짜 세레니아는 어디 있는 거죠? 그레센으로 돌아온 후 어떤 드래곤도 만날 수 없었어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리나의 반지로 당신을 불러도 답이 없었고요.”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이드의 말에 씁쓸한 얼굴을 하는 세레니아. 그 모습에 이드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역시라뇨? 그럼 지금 상황을 예상했다는 말입니까?”

“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 어쩔 수 없었던 이유는 당연히 혼돈의 파편이고요?”

끄덕.

확신을 가진 이드의 말에 세레니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