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4화
501화
에단은 아침 일찍 성에 머물고 있는 지라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티티를 떠넘긴 이후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또 오늘 아나크렌으로 출발한다는 소식도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에단은 가기 싫어했다. 지라지에게 티티를 포함한 골칫덩이들을 떠넘긴 때문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심기가 불편할 것은 뻔했다.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작이 죽은 이후 돌아가는 상황도 파악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오라는 이드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에단은 ‘그런 일은 직접 가지.’ 하고 내심 투덜거리며 성으로 갔다.
사실, 이드도 대장에게 떠넘긴 일들이 커서 얼굴을 보기 미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직접 가지 못하는 이유가 확실했다. 이드가 거하게 일을 벌여둔 덕분에 영주성 주변으로 많은 시선이 모여 있는 까닭이다. 생각 없이 영주성에 갔다가는 0세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인생이 털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드야 딱히 털릴 것도 없고 대륙 모든 국가의 힘을 모아도 이드의 과거를 모두 알 수는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3살 때 오줌 쌌던 이불 속 깊이 숨겨둔 사건은 몰라도 며칠 전 시온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이드는 미리미리 조심하기로 했다. 해서 지라지 밑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에단을 홀로 보낸 것이다. 덕분에 에단은 예상대로 지쳐 찌든 얼굴을 하고서 돌아왔다.
이드는 미안한 얼굴로 에단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죽는 줄 알았다고요, 마스터!”
이드가 건네는 칭찬의 말이 신호가 된 듯 에단이 지라지 대장을 찾아갔다가 갈굼당한 이야기를 왈칵 쏟아냈다. 잔심부름에, 괜한 트집에, 말꼬리 잡기 등등. 전형적인 갈굼이었다.
“지라지 대장이 그렇게 쪼잔한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이드에게 신나게 고자질하던 에단의 최종 감상이었다. 이드는 지랄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대장의 이름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름 없이 대장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이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에단이 어느 정도 속을 푼 듯하자 이드가 물었다. 그러자 에단이 슬쩍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에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같이 제국과 왕국의 수도에서 사람이 도착했답니다. 허기사, 왕국의 대표적인 국경도시를 다스리던 영주가 죽고, 영지민이 모두 보는 중에 영주성이 무너진 사건인데 조용히 처리될 턱이 없죠. 보통 트와이스가 끼어 있는 일은 뒷구멍으로 처리하고 서로 적당히 주고받고 끝나는데 말입니다.
일단 실질적인 조사는 대장이 영지의 마법사를 데리고 끝내 놓은 상태라서 오늘 온 높은 분들은 직접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오신 거랍니다. 교통도 사실 확인이 끝난 덕분에 자유롭게 열린 거랍니다. 사건의 책임 소재와 증거가 워낙 확실해 놔서 위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사정은 비밀로 해주는 조건으로 보상 문제를 의논하고 있답니다.“
확실히 일리나스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영주가 포식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포식자는 모든 초인의 공적이다. 일리나스의 귀족이 초인 포식자였다는 사실은 새롭게 태어나는 초인이 일리나스를 꺼리게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자칫 국력의 약화와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없어요? 자작을 죽인 범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말예요.]
라미아가 물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라 그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지고,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의 고개가 그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게 운이 좋았습니다. 저쪽에서 이번 일의 입단속을 원하고 있어서 대장이 중간에 손을 좀 썼답니다. 앞서 영주성을 침입한 산적들이 영주가
포식자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초인을 끌어들여서 초인의 손으로 영주를 자체 처리한 것으로요.”
“그게 말이 돼? 당장 기사단장이 날 보고 갔는데?”
“아, 그 기사단장은 짤렸어요.”
에단은 말과 함께 엄지로 목을 그어 보였다. 그런데 행동이며 말의 톤이 기사단장의 자리에서 잘렸다는 뜻으로 보이지 않았다.
[처형당한 거예요?]
“그렇지. 자작 밑에서 초인 포식을 위해서 움직였거든. 기사단장 이외에도 집사를 포함해서 수십 명의 목이 오늘 잘렸어. 오래 살려둬 봤자 자작에게 죽은 초인들에 대한 정보만 쌓이니까 빨리 정리한 거지.”
[그자들이 우리 이야기를 안 했대요?]
“당연히 했지. 알 수 없는 초인들이 자작을 죽였다고. 그래서 대장의 말이 더 쉽게 먹혔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보면 확실히 기사단장이나 집사는 자작이 이드를 완벽한 초인으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할 때까지만 옆에 있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그럼 자작의 일로 우리를 찾을 일은 없다는 거잖아.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물론입니다, 마스터. 대장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완전히 넘길 때까지 머무르면서 마스터의 이야기는 절대 나오지 않도록 확실히 처리해 놓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고마운 일이야. 뒤에 따로 보답을 해야겠다.”
“하하. 대장이 좋아할 겁니다.”
이드의 말에 에단이 기분 좋게 웃었다. 대장이 이드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쁜 에단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출발한다는 말도 전했고?”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국에서도 조심하라고 당부하시던데요. 그리고 보고서에는 삼 일 전에 본 뒤로는 더 이상 본 적이 없다고 적어 두겠다고 전하라고 하시던데요.”
이드는 에단이 전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해서 변장만 잘하면 제국에서는 이드가 언제 제국으로 들어올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였다.
이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편의를 봐준 것이다.
정말 쓸 만한 보답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용병거리는 긴 여정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언제 하이탈을 나갈 수 있을까 애를 태우던 사람들이 출입 통제가 풀리자 모조리 쏟아져 나온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그들에게는 일분일초가 돈이었다.
일락은 그중 한 거대 상행에 이드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원래는 제법 규모가 되는 대형 상단의 상행이었지만, 한동안 꼼짝도 못 하다가 움직이게 되면서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끼리 뭉치다 보니 수백의 인원이 움직이는 거대 상행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행 중에서 자잘한 일들을 맡고 있는 에단이 일락에게 소개받은 상단으로 이드와 일리나를 안내했다.
거리를 채운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잠시 헤매던 에단이 수십 대의 마차들 앞에 책상을 놓고 뭔가를 적고 있는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에단이 다가온 것도 알지 못하고 책상에 코를 박고 있던 남자는 에단이 책상을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일락 부지부장의 연락을 받고 왔소. 아나크렌으로 가오.”
남자는 에단의 말에 책상에 올려진 두툼한 책자를 넘겨 보더니 상단의 중간쯤에 서 있는 마차들을 가리켜 보였다.
“9번째 마차에 타시오.”
“고맙소. 마스터, 저 마차랍니다.”
상단의 중앙에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한 십여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모두 이십 인 이상을 태울 수 있는 대형 마차였다. 그중 아홉 번째 마차부터는 여섯 명 정도씩 앉을 수 있도록 칸을 나누고 여러 개의 문이 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쯧, 그냥 마차 하나를 통째로 준비할 줄 알았더니, 일락이라는 지부장, 말만 요란했던 모양입니다.”
마차를 바라보던 에단이 상행의 앞 열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가 여섯 대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명색이 하이탈 용병길드의 부지부장이 알아봐 주는 교통편이라서 편안한 고급 마차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도 같은 마차 안에서 떠드는 소리를 전혀 막아 내지 못하는 나무 벽의 모습에 아쉬운 표정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편하게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걸로 만족하자고. 짐마차라도 타고 싶지만 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마스터, 그래도… 에이, 쭛!”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병길드의 부지부장이 가지는 힘을 잘 알고 있는 에단에게는 절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또 이드에게 두드려 맞은 녀석들에게서 받아낸 돈 정도라면 충분히 고급 마차도 빌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드가 괜찮다고 하는데 에단이 나서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단은 혀를 차며 불만을 삭혔다.
“뭐, 나쁘지 않네.”
아홉 번째 마차는 6인승씩 네 칸으로 나눠진 마차였다. 그중 제일 앞의 칸만이 비어 있었다. 방음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세 명과 한 마리가
쓰기에는 충분히 넉넉한 넓이였다.
출발 준비는 꽤 오래 걸렸다.
마차에 오르고 한 시간이 지나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일행이 마차 여행이 원래 지루한 것이라 시간을 보낼 용도로 준비했던 책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퉁퉁!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소.”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마차 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단이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전신에 파츠 아머를 덕지덕지 붙인 삼십 대의 남자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마차 안을 힐끔거리며 살폈다. 기본 예의는 고사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그 행동에 에단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의 앞을 막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요?”
자고로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자신이 고운 말을 쓰는지 나쁜 말을 쓰는지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 마차를 찾아온 사내도 그런 부류였다. 남자는 퉁명스러운 에단의 말에 버릇없는 놈이라는 듯 에단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이 상행의 보안 책임자요. 여기 엘프 레이디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소.”
‘이놈이 어째서 일리나를?”
보안 책임자라는 남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입술을 쭉 내밀고 있던 에단이 자세를 바로 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찾는 거요?”
“당신이 알 필요는 없소. 그 안에 있는 레이디가 엘프 분인가?”
“아니오. 그리고 무슨 일로 찾는지를 묻지 않소!”
“어허, 거 당신은 알 필요 없다니까. 내 엘프분께 직접 이야기한다고. 그보다 정말 엘프분이 아니오? 어디 얼굴 좀 봅시다!”
불끈!
“이 작자가………….”
완벽한 막무가내다. 에단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시비를 걸고 있다고 봐도 좋을 행동이었다.
이드가 그런 에단의 모습에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옆으로 물러서게 만들고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번쩍!
순간 이드의 눈에서 은빛의 무극기가 번쩍이며 쭉 뻗어 나왔다. 일정한 영역을 정하고 뻗어 나온 무극기가 멧돼지 같은 남자의 기운을 내리눌러 제압했다.
그러자 산만하게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오금을 웅크리고는 이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안에 있는 건 내 아내요. 함부로 타인에게 얼굴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소. 그리고 일행이던 엘프는 아침 일찍 먼저 떠났소.”
“어…… 어……험. 그, 그렇소.”
남자는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묘한 느낌에 순간 정신이 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엘프가 우리 일행에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고, 무슨 일로 찾는 거요?”
“큼. 용병길드에서 엘프가 있다고 들었소. 그쪽에서 우리 상단에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하기에 상단주께서 긴 여행길에 편한 마차에서 이야기나 나누고 싶다고 찾으셨소.”
순간 이드의 뒤에서 일락을 욕하는 에단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드는 일단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남자에게 다시 한 번 엘프가 먼저 하이탈을 나섰다고 주지시키고 돌려보냈다.
텅!
그리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 바로 에단의 거친 목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이런 빌어먹을 인간. 편의를 봐준다더니 아주 지랄을 하네. 마스터, 제가 가서 부지부장이라는 인간을 끌고 오겠습니다.”
상당히 끌리는 제안이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는 이드였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문제만 복잡해진다. 일단 참자. 더구나 상단이 지금 출발할 모양이다. 그 인간 영주성에 있다며? 갔다 올 시간 없다.”
과연 이드의 말대로 정리를 마친 상행이 진형을 갖춘 후 제일 선두에 있는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걸로 끝이니까 신경 쓰지 말자고. 뭣보다 이제 더 만날 일도 없으니까.”
이외에 일락에게 부탁했던 일도, 일락이 이드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없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