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63화
1098화
오일이 지났다.
이드는 여전히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사이 황녀가 두 번 더 다녀갔는데, 이드가 마중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카논으로 가지 않아 다행이란 의미였다.
이드로서는 좀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책임감 없어 보이나? 아무렴 이런 시기에 자리를 비울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죠. 여기서 이드가 빠지면 그 공백이 어마어마하잖아요.’ 라미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 검후를 중심으로 저택에 머무는 전력은 검후와 은색 기사단, 검은 돌, 그리고 이드 일가가 전부다. 적색과 흑색 기사단이 검후를 따르고 있지만, 소드 팰러스에 있는 그들이 당장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즉,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 세 사람이 수도에 있는 전력의 절반, 아니,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검왕은 어떤가.
당장 그가 호위로 데려온 기사도 실력이 상당했고, 숨기고 있는 전력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검은 돌과 라울의 분석에 따르면 발터의 저택을 습격했던 기사단 정도가 최소 두 개 이상은 더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물론 검왕은 아직 검후가 같은 수도에 있음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드 일가가 카논으로 가고 없다면?
결과는 굳이 볼 필요도 없이 뻔하다.
“바벨도 아직 완전히 믿기는 이르잖아요.”
지금이야 라울의 주도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 중이지만, 앞일은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배신할 확률은 높지 않으나 방심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아무렴 내가 존 워스의 처벌을 코앞에 두고 카논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괘씸한 거지.”
불퉁한 얼굴이 된 이드가 퐁퐁 콧방귀를 날렸다.
존 워스에 대한 황제의 처벌이 발표되면 검왕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정말 미친 척하고 황궁이라도 범하려 한다면, 검후도 보고 있지만은 않으리라.
그런 만큼 이드도 그때까지는 안티로스를 떠날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럴 만도 하죠. 그나저나 검왕 쪽은 예상보다 너무 조용하네요.”
“에단의 보고로는 검왕파로 분류되는 귀족들도 당황하고 있다더라고.”
이드는 전날 저녁 찾아왔던 에단의 보고를 떠올렸다.’
이제 존 워스에게 입궁이 허락된 시간도 사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이건 예상했던 일이다.
오히려 의외의 사건은 검왕의 침묵이었다.
존 워스에 대해 황제가 최후 통첩을 날린 그 날부터 검왕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기사파를 중심으로 귀족들을 모아 벌이던 파티도 아예 중지해 버렸다.
그리고는 황제의 결정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장 애가 타는 건 기사파, 그 안에서도 삼검왕을 강력히 지지하는 지지자들이었다.
누구보다 앞에 서서 자신들을 이끌어야 할 검왕이 싸움에 진 개처럼 조용히 엎드려 있으니 말이다.
“혹시 황제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닐까요?”
“에이, 설마…”
그런 모습에 이런저런 소문까지 더해지자, 지지자들도 황제의 결정에 대한 부당함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황제와 검왕의 눈치만 열심히 살폈다.
그나마 이들에게 다행인 점은 검왕이 소문처럼 소드 팰러스로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구심점을 잃는 문제를 떠나, 검왕이 싸움에 졌음을 인정하는 바나 다름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돌아가는 정계의 소식에 이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나보다 더 검왕을 모르나.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저러고 있는 거지.”
이드는 세간에 떠도는 헛소문을 모조리 무시했다. 대신 그 시간에 검후와 은색 기사단의 수련을 열심히 도왔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 황제가 준 시간이 이틀 남았을 때,
라울에게 부탁했던, 카논에 대한 정보가 도착했다. 꼼꼼하게 정리된 자료는 두꺼운 마법서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에단이 안타까워했다.
“아깝다. 하루 차이였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검은 돌이 정리 중인 자료는 내일 완성될 거란다.
감히 규모 면에서 바벨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건만, 아무래도 정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함께 방문한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속도는 느리지만, 분석에서는 무조건 저희가 더 나을 테니 기대해 주세요.”
차분한 목소리에 반해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에단 못지않다. 그 말과 함께 바로 돌아가는 모습이, 아무래도 일이 끝날 때까지 밤을 샐 듯했다. 이드는 그런 둘을 향해 뒤늦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재로 들어가 마법서급 자료의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
“그러고 보면 카논과는 묘하게 인연이 없었네.”
이드가 그리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아나크렌이나 라일론과 달리, 카논이란 나라는 직접 살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위해 잠시 발을 디딘 것이 다였다.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는 나라였는데도 너무 관심이 없었다. 새삼 반성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이드는 카논을 새롭게 알아간다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울이 정리한 자료는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양도 늘고 질도 뛰어났다.
가장 앞에 적힌 것은 카논의 역사였고, 다음으로는 현재의 카논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혼돈의 파편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되거나 연관이 의심되는 일들이 세세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과거 혼돈의 파편이 주도했던 전쟁 이후 그와 관련해 성장한 가문이나, 정치 세력. 혹은 혼돈의 파편과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건 등 말이다.
거기에 더해 카논에서 존 워스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나 가문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과연 라울이라고 할까.
이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드는 두 시간에 걸쳐 이런 내용을 머리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남은 것은 하나의 이름이었다.
“뱅커올슨 남작.”
그는 존 워스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딱히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자이지만, 라울은 특히 그의 이름에 붉은 줄을 그어 놓았다. 개인적인 생각을 추가해 놓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드 역시 자료를 살피는 것만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현재 존 워스가 그의 영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남작 가문의 외동으로 태어난 뱅커올슨은 어린 시절을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생으로 보냈고, 운이 좋았던 모양인지 존 워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고도 소드 마스터 중급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해 모든 관심에서 멀어진 인물이었다.
이후 카논으로 돌아가 작위를 승계한 후에도 외부 활동 없이 조용히 영지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존 워스가 그의 영지를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영지가 국경에 가까이 위치하긴 했다. 그런 만큼 카논을 방문한 존 워스가 한때의 제자를 찾는다고 해도 절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이드가 존 워스와 혼돈의 파편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라울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그걸 제외하더라도 제국에 죄를 지은 죄인이 하필 카논에 있는 제자의 작은 영지를 방문 중이라니. 그 자체로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뭐, 존 워스가 인간이라면 숨겨 둔 아들인가 의심이라도 하겠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라 혼돈의 파편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어느새 자신의 양옆에 선 라미아와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이드가 자료를 살피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를 찾아와서는, 이드와 함께 보았더랬다.
“그런 거죠. 아니면, 혼돈의 파편도 자식을 볼 수 있으려나?”
문득 떠오른 의문에 라미아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혼돈의 파편은 종식을 고하는 파괴자잖아요. 어차피 멸망시킬 세상에 자식을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다.
만약 자식을 볼 수 있다 해도, 혼돈의 파편이 원칙적으로 해야 하는 일과는 그 궤가 완전히 달랐다.
변화할 능력을 상실한 세상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그렇다면 자식도 같이 죽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세상과 함께 그들을 창조한 창조주가 미친 듯한 사디스트가 아닌 이상 그렇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일리나는 다른 의견이 있나 봐요?”
“의견이라기보단. 혼돈의 파편에게 생식 능력과 함께 반려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있다면, 혼돈의 파편이 자식을 만드는 것도 세상의 멸망을 막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게 말이……”
“될 것 같지?”
과연 종족이 다르면 보는 관점이 다른 모양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일리나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긴 그러고 보면 여러 가지 전설 속에서 세상을 구한 결정적 요소는 결국 사랑이지 않던가?
“아쉽네요. 정말 일리나 말처럼 되었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이드가 혀를 찼다.
혼돈의 파편이 세상의 멸망을 포기하면 남는 건 카논의 대륙 통일 뿐이다.
검후나 다른 사람들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사실 카논이 대륙 통일해서 이드에게 해가 될 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긴 시간 동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혼돈의 파편이 갑자기 사랑에 빠질 일이 있을까? 거기에 기대를 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열심히 혼돈의 파편의 뒤를 쫓는 쪽이 더 효율이 좋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제 목적지는 확실히 정해졌네요.”
“그렇지. 내일 완성될 자료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게 없었으면 존 워스의 행적을 그대로 쫓아야 했을 테니까.”
존 워스의 문제도 있지만, 이드가 당장 카논으로 가 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도대체 그 넓은 제국 땅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살펴야 할지 깜깜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분명한 기준점이 생긴 것이다.
“그럼 존 워스에 대한 문제만 확정되면 바로 출발하는 거죠?”
“별다른 문제만 없다면 말이지.’”그런 의미에서 검왕이 지금처럼 계속 조용히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뒤가 걱정되어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때, 일리나가 책상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며 말했다.
“그런데 카논엔 누가 가나요? 분명히 말하지만, 이번엔 저도 같이 갈 거예요.”
“…..”
그렇지 않아도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일리나에게 뒤를 부탁할 생각이었던 이드는 그녀의 선수에 내심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