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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68화


1103화

뿌연 증기가 가득한 욕실. 참방참방

살그머니 휘저어 본 발끝으로 전해지는 물 온도가 적당하다. 그대로 발을 담근 후 천천히 몸을 집어넣었다.

쏴아아

물이 넘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욕조에 몸을 기댔다. 턱 바로 아래까지 물에 잠기고, 따뜻하고 둥실둥실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아 올라왔다.

“흐아아~ 좋구나~~~~”

“지금 완전히 아저씨 같은 거 알아요?”

살짝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깨를 조금 내놓은 채로 물에 몸을 담근 라미아가 보였다.

“그거야말로 고정 관념이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하다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다못해 긴 숨이라도 토하기 마련이다. 따뜻한 온수에 긴장이 풀리고, 전신이 이완된 결과다.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반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틀린 말은 아닌데, 이드는 그 말투가 문제라고요.”

“그건 인정.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 말투는 무려 차원 세 곳의 문화가 섞인 거니까.”

하지만 라미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찌익!

그녀가 만든 물 대포에서 쏘아진 물이 이드의 코를 가볍게 때렸다.

“어쩔 수 없는 게 어딨어요? 근성을 보이라고요.”

“푸하~ 무슨 말투 하나에 근성까지 나와? 그래서, 아저씨 같아서 싫어?”

“아니니까 고치라는 거잖아요. 쳇.”

그리 말한 라미아는 자리를 옮겨 이드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폈다.

그 상태에서 다시 두 손을 꼼지락거리자 물줄기 하나가 이드의 이마로 쏘아졌다.

“알았어. 고쳐 볼 테니까, 그만하자.”

전후좌우가 자유자재다. 명사수도 울고 갈 명중률에 물기를 쓸어내린 이드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자 우쭐한 라미아가 코웃음을 치고는 머리까지 기대 온다. 그에 그녀의 머리를 말없이 쓸어 주던 이드는 잠시 조용한 기분을 즐기다 입을 열었다.

“우리를 맞이한 피터라는 남자, 어떤 거 같아?”

“정보 능력은 어떨지 몰라도, 행동 같은 게 굉장히 자연스러웠어요. 전투력도 에단과 비슷해 보이고. 한 마디로 뛰어나요.”

“그렇지. 그의 말처럼 말단은 아닐 거야.”

아무리 바벨이 대단해도 에단급의 실력자를 그렇게 쓸 수는 없다.

모르긴 몰라도 중앙, 그것도 라울로부터 직접 내려진 명령에 지부장급이 직접 움직인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어쩌면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신경 쓸 거 없잖아요. 어차피 여기서 헤어질 사람인데.”

“그렇긴 한데, 부탁했던 길잡이가 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럼 다시 부탁하고, 놓고 가야죠.”

라미아의 말이 옳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일리나도 때어 놓고 왔는데, 여기서 길잡이를 끼워 넣어 발이 느려지는 건 사양이다.

바벨의 영향력은 카논에서도 동일하다고 하니, 목적지 근처에서 새로운 길잡이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내심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라미아가 이드의 무릎을 뽀득뽀득 문지르며 물었다.

“이건 만약인데요. 목적지인 남작 영지에서 존 워스를 찾게 되면 어쩔 거예요?”

“존 워스가 아직도 거기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잖아요. 카논을 떠나기 전에 만날 수도 있고요.”

뱅커올슨 남작 영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는 있지만, 정말 거기만 들렀다 갈 생각은 없었다.

남작 영지에서 뭔가 찾게 되면 몰라도, 아니라면 존 워스의 행적을 쫓아 본 후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럼 죽여야지. 메르시오와 마찬가지로.”

마치 수박을 자른다는 듯 무심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라미아가 몸을 돌렸다.

쏴아아-

출렁이는 물이 다시 욕조 밖으로 흘러넘쳤고, 이드는 능숙한 솜씨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더 넣었다.

“바로 죽여도 되겠어요? 검왕과 함께 일을 꾸미던 것 같은데. 거기다 다른 혼돈의 파편이 깊이 숨을지도 모르고요.”

“어차피 검왕은 제국의 문제니까. 그리고 남은 혼돈의 파편이야, 드래곤들이 돌아온 후에 같이 움직이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드래곤들의 행방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을 때야 이런저런 불안한 가설을 두고 망설였지만, 답을 얻은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일단 보이는 대로 혼돈의 파편 수를 줄이고, 드래곤이 돌아오면 그때 그들과 손을 잡으면 될 일이다.

수십의 드래곤을 이끌고 방문하면 협조적이지 않을 나라가 없을 테니 말이다.

굳이 아나크렌에서처럼 자신을 증명하는 귀찮은 과정이 필요가 없게 되는 거다.

그렇게 각국의 협조를 받으면 혼돈의 파편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뭐, 이드가 그렇게 정했다면 불만은 없지만, 만약 싸우게 된다면 놓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미완의 마탑 때문에?”

“네. 메르시오도 그렇고, 존 워스도 그렇고. 그들이 관련되었다는 건 미완의 마탑에 뭔가 있다는 거니까요. 사실 존 워스를 추적하는 것보다 미완의 마탑을 완전히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싶거든요.”

이드는 라미아의 충고를 흘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이 있고.’

앞서 토벌을 앞둔 쉴라도 영혼의 관에서 나타날지 모를 혼돈의 파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던가.

존 워스의 흔적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라미아의 말처럼 놓치게 된다면 그를 쫓는 것보다 영혼의 관을 두드리는 쪽이 그를 끌어내는 데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났을 때다.

“적당히 피로도 풀린 것 같고, 그만 나가자.”

기분 좋은 온도 아래로 물이 식은 걸 느낀 이드가 욕조를 나섰고, 라미아가 그 뒤를 따랐다.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딱 맞게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이드와 라미아는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둘은 거기서 피터를 볼 수 있었다.

“저기로 가시죠. 미리 자리를 잡아 두었습니다.”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자리는 예약해 둔 것이고요.’

별거 아니라는 듯 너스레를 떠는 피터였지만, 이드는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당장 그가 가리키는 자리 중 의자 하나에서 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예약해 둔 자리에 다른 손님을 앉았다 갈 것도 아니고, 온기가 남아 있을 이유가 뭐겠는가. 하지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굳이 추궁할 이유는 없기에 모른 척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요리들.

대부분은 익숙했지만, 아나크렌과 일리나스에서는 보지 못한 음식들도 몇 개 있었다.

“아, 처음 보시는 모양이군요. 보람그라스라고, 카논의 자랑이죠. 맛은 확실합니다.”

바벨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카논의 사람이기 때문인지, 피터는 제법 자랑스럽게 요리들을 소개했다. 숙소와 마찬가지로 제법 돈을 쓴 요리들은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특히 보람그라스를 비롯한 몇 가지는 독특한 향신료가 들어가 있어 마치 태국 요리를 연상케 했다. 피터가 추천한 요리들은 상당히 맛있었다. 후식으로는 달콤한 과일과 차가 나왔다.

부우우우-

그와 함께 대기 중의 공기가 층을 이루며 세 사람 주변을 감쌌다. 섬세하지만 위협이 되지 않는 초인력이 만들어 내는 흐름의 목적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아서 정리했습니다.”

“능숙하시군요.”

“하하. 바벨에 속해 있다 보니, 이런 능력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희가 아직 여타의 길드처럼 세상에 드러난 상태가 아니라서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왜 당당히 공개하지 않는 거죠?”

“저야 알 수 없죠. 다만 저희 초인들의 시작이 좋지 않았고, 지금 또 많은 초인이 정계에 나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인과 용병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초인으로서 기사나 귀족이 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리라.

기본적으로 힘을 가지게 되는 형태도 다르고.

어쩌면 이런 점에선 용병들이 기사들 이상으로 초인을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노력 없이 갑자기 힘을 손에 넣게 된 초인이 푸른 피를 타고나는 귀족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그런데, 저희 초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바벨의 도움을 받는 처지인데 관심이 없을 수가 없지요. 그보다, 이렇게 자릴 잡아 두셨다면 용건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부탁하셨던 뱅커올슨 남작과 영지에 대한 조사 내용입니다. 중앙에 올린 보고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드는 피터가 꺼내 놓는 서류를 받아서 간단히 확인했다. 그의 말처럼 과연 내용적인 차이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자세한 건 직접 알아보면 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직접 방문한 것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안내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이드와 라미아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욕실에서의 예측대로 그가 길잡이로 선택된 모양이다. 물론 그 스스로 지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드가 미안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뛰어난 분이 길잡이를 해 주신다니, 고마운 일이지만・・・・・・ 과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저희 이동 속도가 좀 빨라서 말입니다. 과연 피터가 저희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지….”

“하하. 그 문제라면 전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안티로스에서 이곳까지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으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 하긴. 그걸 알고 있으니 저희를 마중하는 것도 가능했겠군요.”

“그렇습니다. 해서 두 분의 속도에 맞출 수 있도록 제가 길잡이로 선택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후 두 분의 행사에 제가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보이는 피터에 호기심이 일어나는 이드였다.

예상과 다른 대답에 의외다 싶었다. 또 이만큼 철저히 준비한 라울에 대해 과연 그답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 가장 관심이 일어나는 것은 마주 앉은 피터였다.

라울이 준비했고, 본인이 자신하는 만큼 그 능력에 대한 의심은 없었다.

초인력의 크기만 보면 그런 속도를 낼 수 없어 보이지만, 초인력의 다양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오히려 흥미가 돌았다. 과연 어떤 형태의 초인기일까?

이드는 빠르게 확인하기로 했다.

“그럼 유능한 길잡이분도 생겼으니, 바로 출발하도록 할까요?”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제대로 쉬지도 않으시고요?”

매우 당황한 듯 피터가 말을 더듬었다.

당연히 빨라도 내일 아침이나 되어서야 출발하리라 예상한 모양이다.

“따뜻한 물로 씻고, 옷도 갈아입었죠. 거기에 맛있는 저녁도 먹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쉰 겁니다.”

그게 어디 일주일 만에 제국의 절반을 가로지른 사람이 할 말인가. 엄청난 소리를 태연히 해 대는 이드에 피터는 뭐라 따지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이드와 바벨의 연결 고리인 동시에 길잡이다.

이드와 라미아가 결정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럼 나가 보죠.”

농담이 아니라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드와 라미아. 그 모습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피터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얼굴색은 매우 좋지 못했다.

‘아, 씨…… 똥 밟았다.’

그런 확신이 드는 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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