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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70화


1105화

푸른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절반 정도 몸을 일으킨 시간.

세상이 붉게 밝아져 올 때.

쿠르르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희미한 천둥소리가 들리는가 싶은 순간.

한바탕 사나운 바람과 함께 땅에서 솟아나듯 하나의 인형이 나타났다.

“도착.”

“여기가 뱅커올슨 남작 영지입니까.”

이드와 그 품에 안긴 라미아.

그리고.

“웨에에에에에엑~

피터였다.

그는 이드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네 발로 땅을 기며 토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당장 내장이라도 뱉어 낼 것 같았다.

숨쉬기 어려워 보이는 얼굴은 희고 붉었으며, 빙빙 도는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상이 아닌 상태랄까.

한동안 그렇게 모든 걸 토해 낸 피터는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당장 옆에 오크가 식칼을 들고 나타나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모습.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걱정된 이드가 물었다. 물론 토사물과 냄새를 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헥헥…… 조금만・・ 쉬겠습니다.”

“그러죠.”

피터도 그 모습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자신 같아도 굳이 타인의 토사물에 가까이 가기 싫을 테니까.

다만 조금 원망스럽기는 했다.

‘내가 지금 이 꼴을 하고 누운 게 누구 때문인데. 그나저나 국경에서 여기까지 정말 날이 새기 전에 도착할 줄이야. 저게 인간이냐.’

아예 짐작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카논만큼이나 넓은 아나크렌의 땅, 그 절반을 단 칠 일 만에 가로질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피터는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빨라야 하는지, 그 속도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하룻밤 내내 온몸으로 실감해야 했다. 글로 보는 것과 체감하는 것 간의 차이는 실로 지독했다.

말의 그림자도 타 보고, 새의 그림자도 타봤지만 이런 속도는 맹세코 처음이었다.

사지에 힘이 없는 건 물론이고, 바람에 쏠린 얼굴도 얼얼했다.

정말이지, 중간에 나가떨어지지 않고 어떻게든 그림자를 붙들고 버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 속도에서 떨어지면 죽었지. 암, 죽었어.’

가장 큰 위기는 작은 바위를 뛰어넘듯 한걸음에 산을 넘을 때였다.

오금이 저리다 못해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아찔했다.

그럼에도 버틴 건 순전히 생존 본능 덕이리라.

그런 상태로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을 몰래 바라보던 피터가 눈을 감았다.

‘라울 님이 입이 닳도록 신경 쓰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어.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 역시 대단하구나.’

이드 앞에서는 모른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드와 라미아가 누구이고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도 알고 있는 피터였다.

이는 라울의 판단이었다.

진짜 길잡이의 용도로만 붙였다가 정작 급한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 위해서였다.

말단 정보원처럼 이드와 라미아에 대해 모르는 척 군 행동 역시 라울의 의지였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드의 대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목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슬슬 뒤집어진 속이 진정되는 듯하자,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과 얼굴을 씻고는 이드 곁으로 다가갔다.

“남작 가문의 영지가 생각보다 넓은 것 같네요?”

이드가 오른쪽에 위치한 산과 왼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딱 보기에도 상당히 기름져 보이는 땅이었다.

“뱅커올슨 가문이 원래는 자작 가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땅을 그대로 지금까지 물려받았죠. 영지민은 대략 9만, 기반이 탄탄한 가문이지만, 정쟁에 밀려 남작으로 떨어진 후로는 영지에서 거의 나가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현 가주도 철벽의 검왕을 스승으로 두고도 반 은거 중이니까요.”

재능은 좀 부족하지만, 무려 철벽의 검왕이 아끼는 제자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실력을 메꿀 수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게 바로 현 남작이다.

“과연 영지에 웅크려서 뭘 하고 있을지 힘껏 파 봅시다.”

말을 마친 이드는 길을 따라 뱅커올슨 남작의 영지에 발을 들였다.

남작 영지는 기본적으로 농사에 기반을 둔 조용한 곳이었다.

다만 오래된 가문인 데다 땅도 넓고, 농산물이 많은 만큼 다니는 사람이 적진 않았다.

주로 상인과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이었다.

그 외에도 농사를 위한 우마차와 짐마차, 수레들이 바쁘게 오갔다.

해가 완전히 떠오른 직후부터였다.

덕분에 이드의 일행도 그 흐름에 섞여 쉽게 남작성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원래 자작 성이었을 남작성은 상당히 컸다.

외부 농지에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몬스터와 도적들이 있는 이상 영주와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서 단단한 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으리라. 게다가 그게 아니라도 국경과 가까운 만큼 위험성은 더 컸다.

중간에 몇 개 영지가 있다고는 하나, 언제 전쟁이 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여러 문제로 인해 튼튼히 지어진 성에 비해, 경비는 허술했다.

대부분이 농사를 위해 출입하는 농민, 혹은 상인과 용병들이기 때문일까.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일행의 신분도 확인하지 않았다. 

“국경 도시도 그랬지만, 여긴 진짜 허술하네요. 혹시 이것도 카논의 특색인가요?”

라미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국경 도시는 피터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넘긴다 쳐도, 이곳 경비는 말 그대로 장식용인가 싶을 정도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귀족이 제 목숨 챙기는 건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성문을 지키는 이유가 뭔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외부의 공격을 경계하고, 범죄를 막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하나다. 성의 주인을 지키는 것.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와도 주인이 명령하면 열리는 것이 성문이요, 아무리 평화로워도 주인이 명령하면 닫히는 것이 성문이다.

“그럼 여긴요?”

“가끔 있는 예외지요. 사실 이곳은 외부인들이 굳이 탐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 농사를 해서 벌어먹으니까요. 쌓여 있는 거라고는 곡식과 채소들뿐인데, 그걸 누가 훔치겠습니까. 심지어 영지민들이 가진 돈도 성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술 먹고 싸우는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일어날 이유가 없는 거죠.”

“성에서 영지민의 돈을 관리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별 관심 없이 듣고 있던 이드가 호기심을 보였다.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대부분 농부들이다 보니 배운 사람이 적어서 그런가, 상인 놈들이나 사기꾼 놈들에게 호구 잡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에 당시 영주였던 분이 상인과의 거래를 성에서 대신하고, 그 돈도 성에서 관리해 주기 시작했다더군요. 뭐, 지금에 와서 거래 정도는 직접 하게 되었지만, 돈은 여전히 성에 두고 있답니다. 영지민도 아는 거지요. 자기들 집보다 성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물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세월 영주가 영지민들의 돈을 빼돌리는 일 없이 진실하게 관리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면 다른 곳보다 문제가 일어날 요소가 적기는 하겠군요.”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대부분이 돈과 얽혀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특히 대형 사고로 발전한다 싶으면 열에 여덟은 돈이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원한이 생겨도 돈이고, 사랑이 깨져도 돈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성주라는 완충재가 끼어 있으니, 쉽게 문제가 일어나기 힘들 수밖에.

좀 더 이어진 피터의 설명에 따르면 성에서는 개인 간의 금전 거래에 대한 증인도 서 준다고 한다.

즉 친분 있는 옆집 사람이라는 이유로 배짱을 부릴 수도, 돈을 떼먹을 수도 없는 곳이 뱅커올슨이었다.

“보고서에는 워낙 간단히 적혀 있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살기 좋은 곳이었군요, 여기.”

“그렇습니다. 평민들 입장에서는 걱정 한 가지는 더는 것이니까요.”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피터에서 눈을 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간 봐 온 타 영지의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해 주면 한결 살기 수월해질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드였다.

영지민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귀족들이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실행한다 해도, 영주가 돈을 빼돌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작게 혀를 찬 이드는 밝은 분위기에 평화로운 성안을 살핀 후 피터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중간에 쓰러져 토하기는 했지만, 국경부터 남작 성의 소개, 그리고 지금도 앞장서서 이드와 라미아를 안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피터였다.

“뱅커올슨 남작 영지에 대한 조사를 명령받으면서 같이한 것이 바로 은밀히 둥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한 번의 조사로 끝날 게 아니라, 당분간 저희가 머물기도 하고 방문할 손님을 언제든 맞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럼 지금 가는 곳이 그 둥지인 겁니까? 바벨의 초인도 있고?”

이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피터의 말대로라면 뱅커올슨 영지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진행한 일이라는 건데.

일 처리가 보통 철저한 게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또 한 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다.

시작이야 어쨌든, 이런 라울이 지금은 자신과 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때마침 라미아가 이드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돌아가면 검후에게 좋은 이야기 좀 해 줘야겠어요.”

마침 같은 생각이었던 이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앞장선 피터를 따라 얼마쯤 움직였을까.

성에 있는 중앙대로를 벗어나, 작은 골목 몇 개를 지난 이드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 중 하나의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피터가 멈춘 거지만.

똑똑똑.똑똑똑.

피터는 마치 이전에 와 본 적이 있는 듯 거침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막 아침을 마치고 정리 중인 듯 소스가 묻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타나는 그녀는 누가 봐도 평범한 주부였다.

그녀는 피터, 그리고 그 뒤에 선 이드와 라미아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이른 시간에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피터라고 합니다. 찰스와는 5년간 동고동락했던 친구지요. 마침 근처를 지나다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나, 알아요. 우리 그이가 자주 이야기하던 그분이군요. 들어오세요. 마침 그이도 일을 나가기 전이었어요. 찰스! 나와 봐요. 누가 오셨는지.” 

여자는 살짝 호들갑을 떨며 일행들을 집안으로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누가 왔다고?”

“나야. 내가 왔네. 자네의 5년짜리 친구 말이야.”

여자의 부름에 대충 옷을 입고 나타난 남자.

한데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피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5년짜리 피터? 자네가 피터라고?”

“그래. 내가 피터야. 이걸 보면 알 거야.”

이드가 정말 잘못 찾아온 거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려는 순간.

피터는 익숙한 동작으로 품에서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의 강철패 하나를 꺼내 보였다.

표면이 상당히 거친 패에는 피터라는 이름과 함께 엉성한 형태의 고양이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순간.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찰스라고 합니다.”

“마리입니다.”

남작 영지의 평범한 주부와 어리숙한 남편은 사라지고,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남녀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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