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71화
1106화
이드가 마리의 안내를 받으며 주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찰스는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이윽고 이드가 피터를 불렀다.
“하실 말씀이라도?”
“문득 궁금해서요. 바벨에 피터나 마리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마리, 찰스, 피터.
하나같이 흔해 빠진 이름이다.
기억하긴 쉽지만 마치 나무, 꽃, 바위처럼 무언가 하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쓰는 거겠지만.
“아하하하. 글쎄요. 피터만 대략 백 명이 좀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아가면서 쓰기도 해서.”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벨이 여기저기 발을 걸친 범위를 짐작해 보면 응당 임무에 따라 이름을 바꿀 수밖에.
그나저나 수백 명의 피터와 마리가 한자리에 모이면 그것도 제법 볼만할 것 같다.
그렇게 잠시 잡담을 하는 사이, 문단속을 마친 찰스가 돌아왔다.
그러자 마리가 선반에서 두 개의 소스 병을 꺼내 들었다.
“결계 발동시키겠습니다.”
찰칵.
그리 말한 그녀가 두 병의 바닥을 붙여 돌렸고, 결합된 소스 병에는 여태 보이지 않았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급격히 멀어지며 주변이 살짝 어두워졌다.
조도를 줄여 밖에서 안으로의 시야를 차단함은 물론, 소리까지 없애는 결계를 가동한 것이다.
“초인기가 아니라 마법을 쓰는군요?”
라미아는 탁자 위에 올려둔 소스 병에 관심을 보였다.
초인이 초인기가 아닌 마법을 쓰는 것도 신선했거니와, 방금 사용한 마법의 수준 자체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은밀해졌달까?
‘이렇게까지 기능성을 극한으로 추구하면 더 이상 마도(魔道)가 아니라 기술이네요.’
이런 라미아의 감상은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 마법에 바벨이 투자한 시간이 무려 십 년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마법이 편리하니까요. 초인기로 차단하기엔 유지 시간이 신경 쓰이고, 모든 초인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도 문제고요.”
“하긴, 그런 문제도 있죠.”
대표적인 예가 신체 강화 계열의 초인들이었다.
그들이 이들이 조작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 외부 환경을 조작해야 하는 단음 따위는 다룰 줄 모른다는 거다.
그렇게 라미아의 의문을 해결해 준 마리가 피터를 향해 물었다.
“다른 요원들도 소집할까요?”
“서두를 필요는 없지. 그보단 두 분께 물이라도 좀 내어 오겠나?”
“그럴 필요 없어요.”
이드가 손을 내저었지만, 마리는 바로 물을 가져왔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상관은 피터라는 것일까.
그에 이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모금 마시고는 확인하듯 물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죠?”
“번잡하진 않아도 넓은 영지니까요. 세 개 조로, 전부 해서 열두 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코 많은 수는 아니다.
그나마 이 정도 숫자가 가능한 이유도 그들이 전부 초인기를 보유한 초인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반 정보원이었다면 아마도 영지를 뛰어다니다 진작 지쳐 쓰러지고 말았을 거다.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다른 두 조는 각각 상인과 용병으로 활동하며 움직인다고 했다. 부부로 위장한 이들과 달리,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기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위장한 것이다. 촤르륵.
곧이어 이드 일행 앞에 종이 한 장이 펼쳐졌다.
뱅커올슨 영지에 대한 지도였다.
거기에는 이들이 직접 손으로 그린 듯, 뒷골목 하나까지 상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사실 처음 명령을 받고 달려올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습니다.”
지도를 앞에 둔 마리가 살짝 푸념을 섞어 말했다.
“확실히, 보고서에 별 내용이 없기는 했죠.”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이드에 마리와 찰스의 어깨가 보이지 않게 움츠러들었다.
“면・・・・・・ 목 없습니다.”
“아니, 탓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맞다.
그저 흔한 확인 사살일 뿐이다.
보고서에 내용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존 워스의 존재로 인한 의혹은 있지만, 그걸 구체화할 요소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없었다.
하긴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이드도 벌써 카논으로 달려왔겠지만 말이다.
마리가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도착한 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지 대부분이 탁 트인 벌판과 농지다 보니, 의심할 곳이 극히 적었던 겁니다.”
그나마 수상한 장소를 조사해도 별달리 나오는 게 없었다.
그럼 자연히 다른 곳을 뒤져야 하는데, 막막했던 거다.
어디 음습한 뒷골목도 아니고 탁 트인 들판에 무슨 의심을 두겠는가.
마리는 들판 앞에서 울고 싶어지던 그때를 떠올리고는 우울해했다.
그런 부하들의 모습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 많은 선배이자, 아직 현장에 뛰고 있는 그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런 영지가 더 조사하기가 까다롭기는 합니다.”
마치 부하들을 감싸는 듯한 그 말에 이드가 진짜 아무렇지 않다며 재차 손을 내저었다.
“정말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마리 씨가 말씀하시는 바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만하세요. 어쨌든, 지도를 꺼냈다는 건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는 거겠죠?”
“네. 다행히 늦지 않게 의심되는 몇 군데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래도 제때 찾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직접 행차한 지부장급 상관 앞에서 손가락만 빨았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런 마리의 말과 함께 지도 위에 노란 마커를 내려놓는 찰스였다.
이드 일행은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곳들이 의심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드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의 마커를 들었다.
“영주 성은 이미 조사가 끝났던 게 아닙니까?”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보고서에는 조사가 완료된 부분에 대해서만 올렸었습니다.”
“그럼 영주 성에 대한 조사는.
“네.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확인하지 못한 곳은 성의 지하와 금고 방으로, 기사들의 경계가 너무 철저해서 현재는 틈을 찾는 중입니다.”
“금고 방과 지하라.”
금고 방은 둘째 치고, 영주 성의 지하라면 의심하기 충분한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성의 지하라면 감옥으로 사용되지만, 경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목적이든 보안이 뛰어나다는 건 동일하다.
거기에 더해 기사들까지 경계를 서고 있다지 않은가.
마리의 말대로라면 이 영지에 이보다 의심스러운 곳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저희도 여길 뚫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의외로 틈을 찾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들으면 스스로의 부족함을 밝히는 것 같은 발언이지만, 정작 마리에게 움추러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반 기사라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수치라고 여기겠지만, 정보원은 정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그녀가 방금 한 말자체가 귀중한 정보였다.
뱅커올슨은 전형적인 시골 영지다.
영지의 주인인 남작부터 외부 활동이 거의 없으니, 상인만 없으면 어디 수도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출세를 바라는 젊은 기사들은 찾지 않는 영지가 되었고, 어느새 젊은 기사보다 나이 든 기사가 더 많은 곳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끝이었다면 마리나 찰스의 영주 성 조사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발을 막은 것은 세월의 흐름에 늙어 버린 기사들이 아닌, 시간이 내려 준 축복으로 강성해진 내공과 더욱 날카로워진 검을 얻은 소수의 진짜 기사들이었다.
뱅커올슨 영지에도 몇 없는 기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지키고 있다면 그곳은 꼭 확인해 봐야 할 가치가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럼 답은 나온 거다.
“우리가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건 영주 성이겠군요.”
이드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이어 나머지 마커가 붙은 곳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각각 농작물을 쌓아 두는 창고와 영주가 사냥에 사용하는 숲, 그리고 작은 별장이었다.
숲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차적인 조사를 마친 곳들이었다.
그럼에도 마리와 정보원은 쉽사리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벨에선 이 영지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찾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실력이 모자람 때문이라고 본 것.
그에 이들은 기준을 다시 잡았다.
“영지 자체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만, 저희가 받은 명령 속에 다른 기준이 있었죠. 존 워스. 저희는 이 영지에 발을 들인 그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과가 영주 성을 포함한 네 곳이었다는 거다.
그들의 조사에 따르면 뱅커올슨 영지를 수차례 방문한 존 워스는 실제 많은 곳을 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가끔 외출할 경우 방문한 곳이 저와 같았다는 것이다.
그 외 몇 군데 더 있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탁 트인 들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즉, 어떻게 의심을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조사 대상에는 넣지 않았다고 밝혔다.
“존 워스가 방문한 사실은 어떻게 확인한 겁니까?”
“다행히도 존 워스가 숨어 다닌 건 아니라서요.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은밀히 들른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거로군요.”
“…..”
마리는 답이 없었지만 이드는 대충 넘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뒤를 바짝 추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존 워스의 흔적을 바로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존 워스부터가 마음먹고 은밀히 움직인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그가 뱅커올슨 영지를 방문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존 워스가 숨기고자 했다면 라울이라도 그의 행적을 쉽게 알아낼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들어야 할 것도 충분히 듣고, 얻어야 할 정보도 모두 얻었다고 여긴 이드가 라미아와 피터를 향해 말했다.
“그럼 영주 성부터 살펴볼까요?”
“원하신다면 바로 안내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마리가 말했다.
피터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낮이라 보는 눈도 많으니, 영주 성은 밤에 살피시죠? 밤새 달렸으니 일단 쉬셔야지 않겠습니까?”
“그다지? 딱히 피곤하지도 않습니다만?”
“……제가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겨우 매달려온 처지에 민망하지만, 솔직히 체력과 초인력 모두 한곕니다.”
그와 함께 내민 피터의 두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마리만큼이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 솔직했다.
이드는 그런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생각해 보면 방금 전까지 바닥을 기며 토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죠. 아무래도 은밀히 탐색하는 일에는 피터 씨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니.”
무려 그림자 사용이다.
거기에 밤이라는 상황까지 겹치면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에 둘 사이에 오고 가던 대화를 눈치 빠르게 캐치한 마리가 즉각 움직였다.
“밤을 새서 이동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바로 쉬실 수 있도록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찰스가 따랐다.
부부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부부가 아닐까 싶어지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