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77화
1112화
문안으로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건 이드였다.
차원의 인이 열었고 라미아가 안전을 보장했지만, 그래도 혹시 위험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문을 지난 즉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차르르륵.
문을 넘어가는 느낌은 특이했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속을 지나는 듯하달까.
게이트나 결계를 지나는 것과는 또 달랐다.
무엇보다 섬뜩할 정도의 이질감이 가장 불편했다.
이국적이라는 말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굳이 비교하면 외국이 아니라 아예 다른 행성 쪽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공기부터 달랐다.
문을 나서며 숨을 들이쉬던 이드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흐~ 흡. 이거,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고산 지대처럼 공기 중 산소량이 20% 이상 감소해서 그래요.”
“몸도 좀 무거워.”
“중력은 15% 정도 증가했어요.”
언제나처럼 모든 의문을 해결해 주시는 라미아 님의 성음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상은 곧이어 도착한 피터와 추적조도 바로 감지했다.
“묘하군요. 뜨겁지 않은 사우나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하하. 확실히 그런 느낌이기는 하군요.”
그보다 정확할 수 없을 듯한 표현에 이드가 웃었다.
“최소한 침입자 대비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마리가 말했다.
하지만 온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손은 등 뒤로 향한 채였다.
거기엔 검은 날을 반쯤 내민 단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라미아가 좀 더 안심할 수 있도록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정확히 봤어요. 이 세계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죠. 침입자 대비용의 지독한 수는 썩을 만큼 있으니, 굳이 이런 효과도 미미한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이 세계’, 즉, 그들은 문을 통해 그레센이 아닌 다른 세상에 온 것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차원 공간을 당겨 만들어 낸 이곳은 분명 그레센과는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공간이 맞았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차이점은 분명히 특이했다.
외부와 똑같이 만들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이와 같은 환경을 조성한 것이니까.
어떤 목적이 있으리라.
잠시 주변을 살피듯 어슬렁거리던 이드가 손을 쥐었다 펴고를 반복하고는 말했다.
“다른 용도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수련 공간으로는 매우 효과가 뛰어날 것 같네요. 호흡은 힘들고, 몸과 검은 무거울 테니까요.” 각각 20%와 15%.
숫자로만 보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움직임이 격렬한 수련을 시작하면 이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다.
당장 몸에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산에 올라가 픽픽 쓰러지는 경우와 비슷한 이치다.
“이런 공간에서 수련했다면 남작의 실력이 소문 이상인 것도 납득이 되는군요. 스승 덕분에 좋은 공간을 얻었어요.
은근히 이 환경을 탐내는 듯한 이드의 발언에 라미아가 기가 막힌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그보단 잘 키워서 써먹겠다고 보는 쪽이 더 합리적이지 않아요? 애초에 진짜 좋은 스승이면 이런 위험한 일에 이용해 먹지 않죠.”
이드는 그 말에 슬쩍 눈을 피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틀린 부분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서로 득을 보기 마련. 즉, 한쪽만 다른 한쪽을 이용해 먹는다고 보긴 어렵다는 뜻이었다.
당장 재능 있는 아이를 제자로 두려는 이유가 뭐겠는가.
뛰어난 제자가 명성을 얻으면 그 스승의 이름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 아니던가. 훌륭한 이를 스승으로 두려는 이유 역시 자신의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서로서로 좋은 거다.
이런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기실 가족끼리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가족 간에 정이 없고, 스승이 제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관계보다 그 뒤의 것을 더 중히 여긴다면 그건 애초에 그 인간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생각보다 넓은 것 같지?”
라미아의 말을 슬쩍 넘긴 이드가 주변을 살피는 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공간은 외부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제법 되었다.
곡식이 익어 가는 기름진 모습 대신 황량한 들판이나 특이한 나무가 가득한 숲.
검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날카로운 돌산과 그 사이에 위치한 원형의 성까지.
“대신 목적지가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침 피터가 넉살 좋게 나서며 이드의 말을 받았다.
그 뒤를 따라 주변 탐색을 마친 추적조가 모여들었다.
“주변은 깨끗합니다.”
“남작의 발자국을 찾았습니다. 방향으로 보아 저기 성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남작 외의 것도 두 개가 더 발견되었습니다. 간격이나 형태, 무게 배분으로 봐서는 그 주인들도 무인으로, 경지는 마스터 이상으로
추측됩니다.”
이드는 추적조가 찾아낸 발자국을 확인했다. 과연 남작의 것과는 형태가 달랐다.
그 자국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남작과 존 워스 이외에 이 문을 지나다니는 제삼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또 예상하지도 못했던 변수네.”
이드가 팔짱을 끼었다.
과연 수수께끼의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처음 떠오르는 것은 이 공간에 상주하며 존 워스가 진행 중인 일을 관리하는 마법사였다. 그러나 추적조는 발자국의 주인이 무인이라고 했다. 그때 같이 흔적을 살피던 라미아가 물었다.
“혹시 이자들이 언제 나가고 들어갔는지도 알 수 있나요?”
“대충은 가능합니다. 우선 지금 들어선 남작을 제외하면, 이 발자국 주인이 가장 최근에 들어왔다가 나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흐릿한 이 발자국은, 들어오긴 했지만 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그건 결국 지금 이곳에 남작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을 거라는 의미군요. 이드?”
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라미아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존 워스가 아닌 제삼의 인물일지도 몰라. 이 세상을 만든 존 워스라면, 이미 우리가 문을 넘은 시점에서 나타났을 테니까.” 이드가 만난 혼돈의 파편은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했다.
거친 인물도 있었고, 능글대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겁쟁이는 없었다.
다시 말해 최근에 방문 후 돌아간 발자국이 존 워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실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아요. 어찌 됐든 여기선 더 알아볼 게 없으니 우선 들어가 보죠. 과연 어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그 얼굴도 확인할 겸.”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한 이상, 계속 입구에 서 있을 필요는 없다.
피터는 추적조에서 몇 명을 빼서 입구를 지키게 했다.
문을 들어 올 때도 인원을 남겼기에 남은 일행은 순식간에 절반 정도로 줄었다.
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하자 황량한 모습들이 더욱더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들판에는 잡초 하나 없고, 나무는 바짝 말라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숲의 형태는 띠었지만, 차마 그리 칭하기에는 티끌만큼의 생명력도 남지 않은 모습이다.
숲을 사랑하며, 거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엘프가 보기에는 가히 충격적일 모습.
이드는 새삼 일리나와 동행하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혼돈의 파편은 이런 모습의 세상을 원하는 걸까.
‘신경 쓰여요?’
문득 떠오른 상념을 공유한 듯 라미아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곡식이 익어 가는 모습과 너무 비교되니까 좀 그렇긴 하네. 그들에게 패한 세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혼돈의 파편이 승리한 세상이라. 음. 모든 게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들은 세상의 끝을 의미하니까.’
그에 비하면 황량하지만 땅도 있고, 나무도 있는 이 공간은 아직 볼만한 편이었다.
‘왜요. 갑자기 책임감이 빡 생겨요?’
‘새삼? 애초에 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고.’
현재까지는 드래곤 하트에서 나오는 강력한 내공을 기반으로 이드가 혼돈의 파편보다 우위를 점해 왔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혼돈의 파편 각 개체마다 가진 힘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 둘 이상의 혼돈의 파편에 합공을 당하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냥…… 차원의 인이 날 이곳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그레센도 여기처럼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하긴 그러네요. 벌써 옛날에 카논이 대륙을 정복하고, 계약을 완성한 혼돈의 파편이 세상을 끝내 버렸겠죠. 그렇게 보면 이드가 용사네요.’
‘켁 구려, 용사는 내 취향 아니다.’
‘왜요? 용사면 무림의 협객과 비슷한 느낌인데, 협객 좋아했잖아요..’
‘세상을 알았거든. 그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게 사는지. 난 그럴 자신 없어. 세상보단 너와 일리나가 더 소중해, 혼돈의 파편만 정리하고 중원으로 돌아가면 중원과 시온 숲을 오가면서 조용히 살 거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미아가 바짝 다가붙는다.
‘흐흥. 나중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듣기 좋은 소리네요.’
그와 함께 그녀에게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행복의 오라.
사방을 경계하면서 두 사람을 뒤따르던 피터와 추적조는 갑자기 바뀐 기운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
이런 좋은 분위기가 오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성에 가까워지던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드와 라미아가 동시에 멈춰 섰다.
그에 추적조가 즉시 사방을 경계하며 공격 준비에 들었다.
피터가 물었다.
“왜 멈추신 겁니까?”
“이 앞, 기의 흐름이 단절되어 있어요.”
“마법 때문이에요.”
이드의 대답에 이어 라미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투두두둑.
바닥의 흙이 알아서 비켜서며 그 아래 숨어 있는 검은 돌덩이들을 내보였다.
“호론석을 기준으로, 성안의 기운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막아 놨어요.
“과연, 호론석을 여기에 쓰고 있었던 거네.”
물론 지하에 많이 쌓여 있는 양으로 봐서는 앞으로도 많이 가져다 쓸 것 같지만 말이다.
“호론석으로 결계를 세웠다는 건. 그만큼 저 안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다는 거로군요.”
“혹시 저희의 침입에도 조용한 이유가 저 결계 때문일까요?”
성을 노려보는 피터와 호론석 결계에 집중하는 마리였다.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침입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일 테지만 말이다. 당장 그들만 해도 이드가 없었다면 문을 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문을 넘는 것 이전에 그 존재를 밝히고 그 모습을 드러내게끔 하는 일 자체가 큰일이다. 도대체 어떤 고위 마법사가 오리하르콘을 가지고 이 시골 땅을 헤매 다니겠는가.
그러나 마리가 질문한 목적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럼 저 결계를 넘는 순간, 저쪽에서도 저희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봐야겠군요.”
“그렇겠죠?”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스릉.
마리를 포함한 추적조는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전투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