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79화


1114화

돌아본 곳에는 검은 인간이 서 있었다. 그 뒤로 검게 일렁이는 게 꼭 망토 같았다.

“배트맨?”

그 이름을 외친 것은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 배트맨의 검은색 인간 이미지가 어디 보통 진해야 말이지.

“무슨 맨이요?”

다시 본 피터는 온몸에 그림자를 휘감고 있었다. 물론 망토로 착각했던 것 역시 넓게 퍼진 그림자의 일부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피터 씨는 괜찮아 보이는군요?”

“예.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약간의 초인력 소모와 저항감이 있어서 무언가를 막은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만, 제가 뭘 막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수준으로는 의념에 대해 인식하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하다. 제대로 된 개념이나 잡고 있다면 다행이랄까.

빠르게 체계를 잡은 무공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마법과 달리, 각자 개성이 뚜렷한 초인기의 특성 탓에 초인들에게는 체계적인 가르침의 부재라는 약점이 있었다.

“의념이라고, 대충 저주 같은 거라고 이해하시면 편할 거예요. 그보다, 피터 씨가 의념을 막았단 말이죠? 당연히 그림자로 막은 걸 테고요?”

귀찮음에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개념을 던져 준 라미아였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피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제 초인기니까요.”

“그림자. 하지만 단순한 그림자로 의념을 막을 수는 없는데.”

“저도 섀도우 워퍼가 저주를 막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혹시 이걸로 요원들을 감싸면 괜찮아질까요?”

“그림자. 음차원의 그림자. 혹시 모르니 시도해 볼 만하네요.’

조금 핀트가 어긋나고 있는 대화다.

그러나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피터는 즉시 가까이 있는 요원 하나를 그림자로 휘감았다.

“끄어허….. 헉헉.. 헉헉.”

그러자 비명 대신 거친 숨을 내쉬는 요원. 효과는 더없이 좋았다.

“역시 그림자가 아니었어.”

라미아는 그 모습을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그와 반대로 피터는 곤혹스러워했다.

일단 나서기는 했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요원 여섯을 그림자로 감싸고 버티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상태로는 멀리 갈 수도 없다. 즉, 이드를 살피는 임무는 물 건너가는 거다.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

이드가 빠른 답을 바라며 물었다. 현재 그는 의념을 막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장승이 된 처지였다.

그리고 라미아는 오늘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당연히 알아냈죠. 답은 그림자의 허(虛)였어요. 이 의념은 그림자에 내포된 음차원을 넘지 못하는 거예요. 그걸 응용하면, 아케인 디맨션’ 라미아의 손끝에서 6클래스 공간 마법이 만들어졌다. 정의되지 않은 임의의 공간을 생성하는 마법. 물론 라미아는 그걸 그냥 사용하지 않았다. 

“페어리 프랑크!”

기묘하게 꼬인 손가락이 요원들을 향하자 무지개 색으로 요란하게 반짝이는 장막이 그들을 감쌌다. 공간 좌표를 랜덤으로 재배치시키는 마법으로, 아케인 디맨션의 응용 마법이다.

요정의 장난이라는 이름처럼 아이들 용으로 보일 정도로 요란한 마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쉴 새 없이 고막을 두드리던 비명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일행들이 진땀을 흘리며 겨우 눈을 뜨는 모습을 확인한 이드가 물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거야?”

“아뇨. 조금만 더요. 다른 분들도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와 함께 라미아의 손짓을 받은 요원들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를 포함해 의념에 쓰러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본 그들에게 거부할 용기는 없었다. 특히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이 하나는 손발의 끝이 저절로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단순히 고통만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증거였다.

이드는 요원들이 모두 장막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라미아 옆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의념이 출렁이며 추적조를 덮쳤지만, 장막에 막혀 힘을 쓰지 못했다.

“역시 라미아의 실력은 대단해. 완벽하네. 그나저나 이 의념, 아무래도 초인들에게만 효과가 있나 봐. 난 아무렇지 않거든.”

시험 삼아 의념 속으로 신체 일부를 내밀어 본 이드의 말이었다. 물론 흙탕물이 묻는 것처럼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정확해요. 의념을 통해 초인기를 원래의 형태로 환원시키려고 한 듯해요. 그러니 초인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겐 효과가 없….”

“나 초인기 있잖아.”

순간 빈틈없이 오류를 짚어 내는 이드.

그에 라미아는 이드를 쏘아 보고는 스리슬쩍 말을 바꿨다.

“……지만. 특별히 초인기를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키거나, 이드처럼 초인기 외의 다른 방법으로 의념을 차단할 수 있다면 초인기가 있다 해도 효과가 없죠.”

“알았어. 그런데 미완의 마탑에나 있을 법한 마법이 왜 여기서 나왔을까?”

“미완의 마탑을 몰래 들락거리던 메르시오가 빼돌렸나 보죠.”

시니컬한 라미아의 반응에 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두 사람 모두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미완의 마탑에 이런 마법이 있다면 정신의 관에서 벌써 써먹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아나크렌 제국에서도 즉시 토벌을 멈추고 미완의 마탑을 손에 넣으려 했을 게 분명했다.

한순간에 초인들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이라니. 그 영향력은 실로 전 대륙을 떨어 울릴 거다.

실제 당장 피터만 해도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 지역을 관리하는 지부장으로서 이 마법이 공개될 때의 결과를 예상한 것이다.

그때, 그의 걱정을 더하는 말이 장막 안에서 들려왔다.

“요원 중 탈진으로 기절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충격이 강했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충격 때문이라면 그렇지만, 살펴본 결과 초인력이 완전히 소모되었습니다. 그건 기절하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의념을 뿌리는 마법의 또 다른 효과가 밝혀진 순간이다.

피터는 바짝 타는 속을 달래며 마리에게 쓰러진 요원들의 증상을 철저히 기록하도록 명령하고는 이드와 라미아 앞으로 다가섰다. 다른 요원들과 달리 그림자로 자신을 보호한 그는 장막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계속 짐만 되는 것 같아서 민망합니다만, 요원들은 계속 저 장막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네. 이 마법이 멈추지 않는 이상에는 어쩔 수 없어요. 의념이 모든 곳에 퍼져 있어요. 피하려면 이곳을 나가는 수밖에 없죠.” 

추적조가 완전히 쓸모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내심 이를 부득부득 간 피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러면 저 보호막은 얼마나 유지될까요?”

“기본 세 시간. 마나석으로 마나를 보충하면 며칠이라도 유지할 수 있죠.’

“그럼 마나석을 사겠습니다. 가격은 두 배로 나가면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마나 고마우셔라.”

손해될 것 없는 거래에 라미아가 기쁘게 마나석을 꺼내 놓았다. 쓸데없이 넉넉한 양으로 말이다. 과연 약삭빨랐다.

그걸 본 피터가 그림자 안에서 하얗게 질렸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그가 낼 돈도 아니고, 설마 바벨에 돈이 없을까.

그렇게 라미아가 재산을 불리고 있는 사이.

이드는 성을 노려보며 의문을 부풀리고 있었다.

“설마 이게 끝이야? 왜 추가 공격이 없지?”

사실 이 마법 한 번으로 초인들이 모두 쓰러지긴 했지만, 그 외는 멀쩡했다. 오히려 전력이 이탈하고, 부상자를 보호해야 할 지금 시점이야말로 공격을 밀어붙일 적기였다.

그런데 성으로부터 나오는 전력은 아무도 없었다.

“흔적에 따르면 남작 외 일인뿐이잖아요. 굳이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는 의미 아닐까요?”

마법사만큼은 아니지만, 지형이나 장비에 따라 이점이 있는 건 무인도 마찬가지. 성에 적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면 굳이 밖으로 나와서 전력을 깎아 낼 이유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성으로 향해도 여기 있는 추적조가 위험할 일은 없겠네. 아, 그러고 보니 문 앞에 남은 요원들은 어떻게 됐지?”

이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들을 떠올리고는 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따로 떨어진 요원들을 이어 주는 존재가 그녀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시선을 받은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상황이 안정된 후 연락을 시도했지만, 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통의 정도와 신체 말단이 터지는 현상으로 보아 모두 사망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임무를 시작한 후 첫 사망이었다.

그에 비해 사망을 예상하는 마리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아니, 최대한 담담하려 애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그들이니까.

“혹시 정신을 잃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도록 하죠.”

하지만 이드는 그런 훈련을 받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쉽게 단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곳엔 그런 그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파앗.

살아 있다면 일분일초가 급했다. 뇌령전궁보를 최대로 발휘한 이드는 한 줄기 번개가 되었다. 말 그대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쿠르릉,

이드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뇌령전궁보 특유의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이드는 천둥을 동반하지 않았다. 갈 때와는 달리 확연히 느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 일부러 확인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마리의 감사를 받은 이드는 라미아와 피터에게만 들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남아 있던 요원들의 시신 상태가 좋지 못했습니다. 둘은 핏물로 변했고, 다른 셋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깃덩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뿌득. 돌아가는 길에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성으로 가시죠. 이 이상 저희로 인해 두 분이 하시는 일이 방해를 받았다가는 정말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보란 듯 앞서 나가는 피터. 이드와 라미아도 서로를 돌아보고는 성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데, 피터 씨는 남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제 임무는 두 분을 돕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확인된 적 전력은 둘. 굳이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아 있는 요원들이 공격 능력을 잃은 것도 아니고요. 저 하나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설마 그럴까마는, 이드는 굳이 무어라 더 언급하지 않았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일단 페어리 프랑크 주변에 실드 마법도 걸어 뒀어요. 최소한 단번에 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곁에 그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라미아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말없이 성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그와 함께 점점 커지는 소리가 있었다.

삐이이이이-

그 발원지는 성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