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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88화


1123화

그럼에도 라미아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드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앞장설 테니, 남작은 피터 씨가 확실히 챙겨 주세요.”

괴수에 대한 일은 그새 날려 버린 듯, 꼼꼼히 주변을 챙기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쪽 사정을 모르는 괴수는 자신에게 유리한 간격을 만들기 위해 굉장한 기세로 거리를 좁혀 오는 중이었다.

놈도 아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하고, 가장 힘들게 했는지를.

그렇기에 작은 산이라고 해도 좋을 석검을 들고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게 아니겠는가. 괴수는 일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순식간에 줄여 나갔다. 하지만 신사가 아니라 야수에 불과했던 놈은 한 가지 매너를 몰랐다.

“쯧, 돌아가는 사람 함부로 잡는 거 아닌데.”

바로 떠나는 여자를 잡을 때는 조심에 또 조심을 더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끈질기면 미움받는다고. 어스퀘이크!”

아니나 다를까. 라미아의 눈꼬리는 하늘로 치솟았고, 그와 대조적으로 멀쩡하던 땅은 폭삭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미친 듯 달리던 괴수는 전방에 갑자기 생긴 싱크홀을 비웃었다.

이딴 것으로는 자신을 막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날린 다음 순간.

“커허허허엉!”

화끈한 열기와 함께 불벼락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괴수는 석검을 휘두르며 그대로 싱크홀로 떨어져 내렸고, 그 후에도 쉬지 않는 불길에 싱크홀은 용광로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저놈・・・・・・ 석검 하나 던지기만 했지, 태어난 직후부터 쭉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네. 멍청한 거야?’

그렇다고 불쌍하단 생각은 1도 없는 이드였지만 말이다.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괴, 굉장한 화염이군요. 말로만 듣던 헬파이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맞아요. 그 한 방으로 죽이지 못하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요. 어쨌든, 이제 가시죠.”

말을 마친 라미아는 이드에게 무언가를 던지고는 성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보통은 즉사할 높이임에도 그녀는 가볍게 착지해 보였다. 로브 자락마저 요란히 휘날리지 않는 것이, 만점짜리 착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낙하할 때 페더 폴이나 부유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본을 좀 받았으면 할 정도의 모습에, 피터는 내심 그럴 수 있다며 납득하고 있었다.

‘명예 후작의 부인이면 저 정도는 기본이라는 거지.’

저 불타는 용광로를 보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이기에 헬파이어 같은 고위 마법을 저렇게 쉽게 사용하는지,

그것도 수성을 할 때 가장 두려운 범위 마법인 어스퀘이크에 바로 이어서 말이다. 실로 화끈한 뒤끝이었다.

“피터 씨. 안 오고 뭐 해요?”

“넵! 지금 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기합이 들어간 피터. 그는 앞으로 라미아가 하는 일엔 그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기로 다짐하며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는 알까. 그가 본 어스퀘이크와 헬파이어 말고도 그 중간에 괴수를 떨구기 위해 그래비티 웨이브라는 마법이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무려 변동 중력원을 형성하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된 마법은 무려 7클래스,

그런 수를 쓰지 않고서야 고작 한 번 공중에 떴다는 이유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피터로서는 차라리 모르는게 약이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할 참이었을 텐데. 라미아에겐 미안한걸. 이런 거까지 챙겨 주고 말이지.”

라미아가 던진 건 보석 뭉치였다. 다만 색감이나 광채가 최상급인 데 반해, 조형미는 전혀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보석에게 죄송한 정도랄까. 그 용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이드로서는 대충 짐작이 갔기에 대충 품속 깊이 집어넣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라미아가 나서면 적당히 끝나지 않는 데다, 나도 오랜만에 손맛을 좀 보고 싶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만 나와라. 그 덩치에 두더지 흉내라니, 전혀 귀엽지 않다고.”

그런 이드의 눈이 향한 곳은 발아래 연무장.

선명히 드러난 하얀색 거검, 무형대천강이 연무장과 함께 땅을 갈라 냈다.

아무리 좋은 돌을 쓰고, 단단한 땅이라도 검강 앞에서는 두부나 다름이 없기 마련이다. 한데, 이상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쩌엉!

그건 단순히 단단한 벽 같은 것이 아니라, 충격파를 줄기줄기 뻗어 내는 반탄력이었다. 검강과 같은 기운이 충돌한 여파는 그 자체가 위험 수위 최고 등급이었다.

서걱. 서거거거걱!

무형의 기운에 연무장이 쩍 갈라졌다.

동시에 그 사이에서 그 폭만 해도 이드의 키만 한, 거대 석검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통나무 같은 팔이 따라 나오며 석검이 휘둘러졌다.

바람 소리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갈랐지만, 이드는 이미 참격 범위를 벗어난 뒤다.

대신 조금 전까지 이드가 서 있던 성벽의 일부가 잘려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드러난 단면은 유리처럼 반질반질해진 채 뜨거운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석검은 농담이라도 날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돌덩이나 다름없었거늘, 그런 것으로 베어 냈다고는 믿기 힘든 흔적이었다.

무기의 성능이 아닌, 오로지 순수한 속도와 힘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것이다.

“이래서 힘센 놈이 최고라는 말이 나오는 거라니까. 그렇지 않냐?”

짧게 혀를 찬 이드가 땅속에서 걸어 나온 괴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분명 싱크홀에서 이곳까지는 못해도 팔백 미터 이상 땅을 팠을 터였다.

한데 가죽이 좋아서 그런가, 흙덩이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깔끔한 모습은 참 부럽다.

이윽고, 과연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괴수의 입이 열렸다.

“그르릉. 침입자. 적. 말살 대상.”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은 단어의 나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의 눈이 분명한 적의를 가지고 이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놈을 땅에서 끌어올리기 전까지 괴수의 최우선 목표는 라미아였을 텐데, 그게 바뀐 것이다.

‘냐하하하하. 멍청한 사자 머리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네요. 저는 이걸로 기분이 풀렸으니까, 나머지는 이드가 마무리해 줘요.’

그와 함께 지금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달받은 라미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충돌로 놈의 관심이 자신을 가장 괴롭히던 상대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인 이드에게로 넘어왔다. 라미아는 아무래도 그걸로 만족한 듯했다.

“아무렴 라미아만 쫓으면 섭하지. 거기 가슴에 구멍은 내가 뚫었는데.”

“적 말살.”

말하기 능력은 모자라도 듣기는 되는 모양이다. 괴수에게서 살기가 뭉클 피어오른다.

살기의 원인은 보나 마나 빗장뼈 아래쪽에 있는 구멍. 붉은 살덩이가 구멍을 메우고 있지만, 아직 사람이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 바로 이드의 금환에 당한 흔적이었다.

마법진에 의해 충격이 전이된 라미아의 공격과 달리, 극도로 일점 집중된 이드의 금환은 충격 전이를 넘어 괴수의 몸에 직접 닿은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 때문일까.

“그 짧은 사이에 다이어트라도 했나 봐? 몸이 좀 줄었다.”

강인해 보이는 근육. 라이칸보다는 인간을 닮은 몸에 맹수의 손톱, 용맹한 사자 머리를 두른 갈기와 등을 따라 누워 있는 깃털까지 모습은 변한 것이 없지만, 단 하나.

최소 이십 미터가 넘어 보이던 키가 오 미터 이상 줄어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끌어모았던 마나의 일부와 함께

아마 놈에 대한 환영 인사를 넘길 수 있었던 이유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정확해요. 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과 공간의 연결을 조금 더 이어 놓고 충격을 넘긴 거죠.’

‘머리가 돌아간다는 증거지. 완전한 야생 살쾡이는 아니라는 거네.’

‘그래 봤자 이드에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조심해요. 쓸데없이 다치지 말라고요.’

그녀의 말엔 마치 이후 이드가 뭘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드도 내심 생각이 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제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직이요. 남겨 놨던 초인들을 수거 중이에요.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간단히 힘으로 해결했죠.’

힘? 낙오 병력 회수에 왜 힘이?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부상자나 사망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그 사정은 나중에 들으면 된다.

이드는 끝까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끊고는, 괴수와 마주섰다.

기실 놈의 키가 좀 줄었다고 해도 마주 설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지만.

“……”

괴수는 이드를 쉽게 보지 못했다. 마나의 존재는 그들의 신체 사이즈 이상으로 큰 영향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 이드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는 오히려 괴수의 그것보다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겁먹지 말라고. 그나저나 금강지력 부서진 기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테니, 제대로 한번 어울려 보자. 괴수 놈.”

이제 검이 나설 때다.

그렇게 이드가 성벽을 박차는 순간, 살기로 번들거리는 괴수의 눈이 살짝 맑아졌다.

“괴수・・・・・・ 아니다. 나는 스피츠하비터.”

“무슨 뜻이야?”

스피츠하비터. 정령의 황혼이라는 뜻이며, 다르게는 정령의 말살자라는 뜻을 가진 엘프어와 고어의 합성어다.

어지간히 언어학을 파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단어이지만, 이종족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 정도는 기본 사양인 이드였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맑아졌다 싶었던 괴수의 눈이 어느새 붉게 변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스피츠하비터라고 주장한 놈은 석검을 든 것이 우연이 아닌지, 석검을 적극적으로, 또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석검이 휘둘러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나마 남아 있던 성과 콜로세움은 볼품없는 돌무더기로 변했다. 물론 지금 이곳에 그걸 아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치지지지직!

이드는 자신을 다진 육전으로 만들려는 석검 위를 검강으로 미끄러져 오르며 스피츠하비터의 어깨를 베어 냈다.

서로 간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쑤시개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지만, 결과는 딴판이다.

무형일절의 검기(劍技)에 두꺼운 가죽이 쩍 갈라지며 끈적한 피가 팍 하고 튀어 올랐다. 검이 가진 크기의 문제 따위, 검강으로 해결하면 간단했다. 휘리리릭.

그런 이드를 향해 너울거리던 갈기가 독사처럼 쏟아진다.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가 성인 손가락 굵기의 털.

이드는 수라섬광의 그물로 갈기를 끊어 낸 다음 사자 머리를 직접 노렸고, 스피츠하비터는 그걸 읽어 낸 듯 입을 벌려 독을 토하고 거리를 벌렸다.

“역시 눈에 익은 몸 다루기.”

단 일 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벌어진 공방. 이드는 그 속에서 분명히 읽어 낼 수 있었다. 야수 같았던 황혼의 기사의 흔적을 말이다.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마법진이 황혼의 기사를 괜히 흡수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살덩이로만 채워진 스피츠하비터가 짧은 단어로 된 의사 표현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그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스피츠하비터를 향해 하얗게 이를 번뜩인 이드는 곧 하늘 위 균열과 연결되면서 붕괴가 빨라진 공간의 상태를 보고는 내력의 운용을 가속했다. 슈퍼 카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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