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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95화


1130화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언제 돌아와 준비한 건지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마련해 준 마리 덕에 이드는 든든히 배를 채웠다.

이후 차로 입가심을 하고 있을 때.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명예 후작님.”

피터가 두툼한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마리 씨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그 서류는 남작을 심문해서 나온 겁니까?”

“으흐흐, 맞습니다. 이 안에 남작의 인생이 몽땅 들어 있지요.”

음침하게 웃어 보이는 피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심문과 서류 작업에 밤을 새운 모양이다.

서류는 얼추 보기에도 최소한 두꺼운 책 세권은 될 듯한 분량이었다.

“대단하네요. 이걸 진짜 하루 만에 끝내다니.’

그중 몇 장을 들춰 본 이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보통 전문적인 정보 수집이란 옆집 아저씨의 신세 한탄처럼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하. 이정도야 기본이지요. 그런데・・・・・・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밝혀진 사실 외에 특이사항은 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이 영지엔 더 이상의 비밀은 없는 것이 아닌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스피츠하비터 같은 걸 보고 나니, 존 워스가 비밀리에 뭔가 일을 벌여 놨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서요.”

“압니다. 그 점이 불안 요소긴 하지요.”

사실 피터에게 있어서는 이번 일에 존 워스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삼검왕이 대단하다는 거야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도대체 기사가 무슨 수로, 또 무슨 목적으로 던전과 스피츠하비터를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필히 이 차 보고서에 기입해야겠어.’

그리 마음먹은 피터는 곧이어 이드의 옆, 빈자리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후작 부인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그 말에 어제 일이 떠오른 이드는 내심 쓰게 웃었다.

보물을 다시 돌려놔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던 라미아였다. 그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증폭기의 설치 작업을 끝낸 직후 곧바로 던전에서 발견한 마법진의 연구를 시작했다.

“영감을 받아 방에서 마법 연구 중입니다. 어제처럼 조언을 얻기는 힘들 테니,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꼭 조언 때문은 아니지만・・・・・・ 아쉽군요. 그럼 전 이만…….”

속내를 들켰다고 여겼는지 피터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라미아의 조언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용무도 끝났으니 슬슬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다 돌연 무언가 생각났는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아, 가기 전에 이 말씀을 깜빡할 뻔했습니다. 아무래도 나가실 때 기사들이 좀 귀찮게 할 것 같습니다.”

“남작 때문이겠군요.”

남작이 사라지고 만으로 하루가 지났으니, 가신들과 기사들도 슬슬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리라.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당사자 중 하나인 피터는 이런 상황에 비웃음을 보였다.

“다른 영지였으면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출입을 막았을 겁니다. 그것도 영주의 부재를 알아차린 즉시 말입니다. 물론 출입 통제는 영주의 권한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융통성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지요. 이런 건 시골 영지 특유의 고루함이라고 해야 할지. 쯧쯧.”

그렇게 혀를 찬 피터가 장담했다.

“아무튼,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명예 후작님께서 따로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다음날, 이드는 성문이 보이는 골목에 서 있었다.

어제와 달리 굳게 닫힌 성문 앞에는 일을 나가지 못한 농부들과 상인들이 모여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막고 선 기사가 내력이 담긴 위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밖으로 나가려는 자는 출입 허가서를 가져와라. 출입 허가서가 없는 자는 성문을 지날 수 없다.”

그에 농부들과 상인들이 혼란스러워했지만, 기사는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루만 손대지 않아도 당장 산에서 놀과 고블린, 그 잡것들이 내려와 들판을 엉망으로 만들 텐데.”

“어쩔 수 없지. 이러지 말고, 빨리 그 출입 허가서라는 걸 받으러 가세. 신분 확인에 수색까지 한다니 오래 걸리지 않겠나.”

사정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 밖으로 나가자면 최대한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부와 상인들이 성을 향해 움직였다.

동시에 그들은 영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사달이 났음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이 땅에 살았던 농민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니까 출입 허가서 받는 김에 맡겨 둔 돈도 찾아 둘까?’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이후 몰려온 영지민과 상인들에게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팔짱을 끼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가 문득 옆에 선 피터를 돌아보았다.

어제 큰소리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입을 콱 다문 채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출입 허가서를 명목으로 가택 수색까지 시작하려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피터 씨 말 만큼 고루한 시골 영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하루 만에 태도가 완전히 바뀌다니.”

“그건 이후의 문제고, 괜찮은 겁니까?”

가택 수색을 시작하면 안가에 감금해 둔 이베인과 남작이 발견될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게 아니겠는가.

“바벨의 회수조가 오늘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시골 기사에게 발견될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고요. 다만, 지금 시급한 문제는 어째서 갑자기 저들의 태도가 바뀌었냐 하는 겁니다. 누군가 뒤에서 지시를 내리지 않고서야…”

혼자서 끙끙거리던 피터가 결국 알아봐야겠다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이드는 골목 안으로 휑하니 사라지는 등을 바라보다 성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 사이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더 늘어 있었다.

“무슨 시골 영지가 이렇게 버라이어티한가 몰라.”

뭔가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뭔가가 설마 안에서도 튀어나올 줄이야.이드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성문이 아닌 성벽을 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일 떠나려던 일정도 변경해야 했다.

아무래도 며칠 더 머물며 상황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일 끝나면 일리나에게 연락부터 해야겠네.”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성벽을 넘은 이드는 동쪽에 이어 영지 서쪽까지 탐색을 이어 나갔다.

탐색 방법은 영지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무한 왕복. 기감과 차원의 인에 기댄 무데뽀식 탐색이지만, 숨겨진 공간을 찾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 외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 곳이 있었다면 마리와 그녀의 팀이 찾아내도 벌써 찾아냈을 테니 말이다.

하나 저녁까지 이어진 탐색에서 별달리 나온 건 없었다.

차원의 인이 갑자기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이 땅, 뱅커올슨에 더 이상 숨겨진 던전 같은 건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바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

라미아가 말했다.

“피터 씨가 확신하고 있으니 결과는 봐야지. 그러니까 통신 열어 줘. 내일 못 간다고 일리나에게 알려 줘야지.”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흥얼거리며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되면 돌아갈 때 마법진을 연구해서 나온 공간 수식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뭐가 좋은데?”

“여기서 안티로스에 있는 저택까지 곧장 갈 수 있죠. 환승 없는 논스톱 직행!”

보물을 다시 토해 내게 생긴 데 기인한 우울은 어제로 떨쳐 버린 모양인지, 라미아가 잔뜩 신이 나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마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드는 열심히 귀를 기울여 줬다. 비록 절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게 바로 사랑받는 남편의 자세였으므로.

그리고 잠시 후, 일리나와 함께 평소 집무실과 이드 방에 자주 모이던 얼굴들이 수정구 위로 나타났다.

이틀 전에도 봤던 얼굴이기에 이드는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눈 뒤, 곧바로 현재 뱅커올슨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과 더불어 며칠 늦어질 것을 알렸다.

“빨리 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으니 참을게요.”

“그런 일이라면 이드 님을 도와 드릴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살짝 실망한 일리나 옆으로 검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움? 카논에 올 땐 그런 말 없었잖아.”

이드는 스폴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편히 말을 놓았다.

“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니 섣불리 언급할 수 없었죠. 하지만 멀쩡한 무공에 무도라는 이름을 붙여서 속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요. 엘라임 백작은 제가 직접 가르친 수련생이니까요.”

“수련생 때라면 이미 오래전 이야기 아냐? 지금도 믿을 만할까?”

“소드 마스터로 졸업할 만큼 재능 있고 심지가 굳은 이예요. 또, 불과 삼 년 전까진 안부도 주고받았으니 믿으셔도 좋아요.”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라는 것일까.

마치 자신이 엘라임 백작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검후는 그를 옹호하는 동시에 견고한 믿음마저 보였다.

‘혹시 얘, 엘라임이라는 백작한테 흑심 있는 거 아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제 간의 사랑 이야기는 많고, 검후도 나이와 관계없이 외모만은 아름답지 않은가.

물론 당장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정할 게 뻔하니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안 그래도 바벨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바벨 쪽에는 엘라임 백작보다 힘 있는 협력자들도 많을 것이다.

카논의 귀족임과 동시에 바벨의 초인인 사람들. 저 발터 백작처럼 말이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엘라임 백작의 협조를 얻으면 더 대단할 거예요. 그는 황족이거든요.”

“황족? 그럼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하는 거잖아.”

설마 검후가 카논의 황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을 줄이야. 뒤에 선 쉴라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잖아요. 그는 과거, 제국이 혼돈의 파편에 조종받았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혼돈의 파편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발 벗고 나설 거예요.”

이드는 이어지는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향은 둘째 치고, 혼돈의 파편에 대해 알고 있다면 적절한 협조를 얻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피터 씨를 통해서 바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한 다음 도움을 받을지를 결정할게. 만약 찾아가게 된다면, 네 이름을 팔면 되는 거지?”

“호호. 네, 왜 작년엔 안부 인사가 없었냐는 말이나 전해 주세요.”

그렇게 통신이 마무리되고 라미아가 확신했다.

“분명 두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터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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