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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09화


1144화

이드와 일리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인물은 마법으로 짠 하고 나타난 라미아였다.

“어디, 다친 곳부터 봐요.”

일리나의 왼손에 난 상처는 꽤나 깊었다. 오죽하면 뼈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라미아는 오히려 안도했다.

“이드가 어마어마하게 화를 내서 얼마나 크게 다쳤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이게 다라서 다행이에요.”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릴까요?”

“그럴리가요. 내 명예를 걸고 사흘 안에 흔적도 없도록 치료해 줄게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땅땅 큰소리치는 라미아. 그에 일리나는 안도하는 한편, 고마워했다.

사실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라미아가 강력한 마법사이니 가능한 발언이었다. 만약 제대로 된 마법이나 신성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최소가 장애이고, 최악의 경우 한쪽 손을 잃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즉, 이드가 괜히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가는 것이 아니었다.

데구르르ᅳ

그때, 두 사람 옆으로 근육질의 팔 하나가 굴러왔다.

그 뒤로 이드가 다가왔는데, 무언가 조치를 한 것인지 말끔한 절단면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축하해요, 일리나. 실력이 또 늘었네요.”

잘린 사람 팔을 중간에 놓고 축하의 말을 하는데도 이렇게 위화감이 없기는 힘들 거다. 어쩌면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시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리나 상처는 사흘이면 말끔해질 거예요.”

“좋은 소식이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할까요? 일리나가 정해요. 태울까요, 묻을까요? 그도 아니면, 오크 목에 쑤셔 넣어 줄까요?”

“……난 필요 없으니까, 이드에게 줄게요.”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에 이드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윽고 팔을 주워 천으로 둘둘 말고는 아공간에 처박아 버렸다.

“그걸 아공간에 넣어서 어쩌려고요?”

“나중에 팔 주인을 만나면 그 앞에서 태울 거야. 일리나를 다치게 했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

내 아내의 상처에 분노하는 남자. 감동해야 할 장면이지만, 어쩐지 그의 두 아내의 표정은 시큼한 걸 먹기라도 한 양 썩 달갑진 않아 보였다. 이런 세 사람의 대화는 곧 끊겼다.

한쪽에 서 있던 황제가 더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일행을 이끌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중 두 근위 기사의 검에서 방금 묻은 듯한 붉은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쓰러져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자들의 목숨을 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근위 기사 입장에선 죽기 직전의 적이 혹 자폭이라도 하면 퍽 곤란할 터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무사하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명예 후작과 두 분 부인의 도움 덕분이오. 그대들의 공을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말하는 모습이 꽤 큰 포상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제국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최강대국의 주인이 생명의 은인에게 내리는 포상이다. 과연 어떤 것이 나올지 제법 기대가 되는 이드였다.

“명예 후작은 혹시 이들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소? 감히 겁도 없이 제국의 황제를 노린 데다, 그 실력도 뛰어났소.”

“아뇨. 전혀 짐작되는 게 없습니다.”

이드가 고개를 젓자 황제도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느낀 바가 많소. 내가 너무 오랫동안 밖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가까이 있는 자도 꾸준히 의심해야 한다는 점 등이 그러하오. 슬픈 일이지.”

도대체 누가 배신자일까.

의문과 의심은 질척이는 핏물처럼 가슴 한편에 붙어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황제를 씁쓸하게만 만들었다.

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디 황궁만큼 음모와 배신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을까. 황제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업보와도 같았다.

그는 오히려 정말 그렇게 슬픈 게 맞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황제의 얼굴은 어떻게 봐도 애통한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느껴졌다.

그때 황제가 표정을 고치고는 물었다.

“그나저나 혼돈의 파편을 쫓아간 명예 후작이 안티로스에 돌아와 있을 줄은 몰랐소. 혹시 그대는…………… 처음부터 검후님의 사람이었던 것이오?” 

이드를 보는 황제의 눈빛이 복잡했다.

자국의 보배. 그런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명예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내렸다. 한데 알고 보니 이미 검후의 사람이었나.

황제가 생각하는 바를 표정으로 읽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 누구의 사람도 아니고, 어디에 소속된 사람도 아닙니다. 혼돈의 파편을 쫓은 건 사실이며, 검후님의 구출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물론 검후님의 실종이 제가 더 빨리 움직이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이드는 자질구레한 변명 대신 최대한 사실만 간단하게 답했다.

황제가 믿건 말건 상관없었다. 아무렴 섭섭하다고 해코지라도 할까. 무엇보다 검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점이 아니던가.

게다가 설령 무슨 짓을 벌인다고 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이드도 아니었다. 절이 싫다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었다. 명예 후작 정도의 작위 따위, 필요하면 어느 나라를 가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라일론에서 날 잡으려고 엄청 애를 썼었지.’

아마 작위를 받겠다고 하면 붉은 카펫을 깔고 꽃비를 뿌리며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좌우간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그게 누구라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는 이드였다. 아마도 그건 검후 역시 마찬가질 터. 그런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하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황공하오나, 폐하. 곧 수도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어찌할지요. 아무렴 눈이 있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 무시무시한 도강을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터였다. 그땐 이갈이 설치한 은폐 결계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최근 발터 저택이 습격당한 일도 있었던 만큼 한껏 예민해진 상태인지라, 미친 듯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경우 정체불명의 적에 황제가 습격당한 사실이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건 여러모로 곤란했다.

황제는 길게 생각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황녀는 가까이 오너라.”

“네. 아바마마.”

“오늘 네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먼저 황궁으로 돌아가겠다. 너는 나를 대신해 할마마마를 뵙고 사정을 말씀드려라. 오늘은 가지 못하지만, 내일 다시 방문하겠다는 뜻도 전하고.”

“그게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황녀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려 제국의 황제가 습격당했다. 또한 앞뒤 상황을 미루어 보아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도 기정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최소 며칠은 붙들고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황제에겐 습격 이상으로 검후와의 관계 회복이 중요했다.

“가능하게 만들 것이니, 그리 말씀드리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명예 후작과 두 분 부인도 내일 다시 보도록 합시다. 하퍼, 그대는 이곳에 남아 도착할 기사와 병사들을 지휘하라.”

“명을 받듭니다. 충!”

하퍼가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께 덱스터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황제가 곧 자리에서 사라졌다. 황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드 일행도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퍼가 서둘러 떠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티로스와 황궁은 꽤나 어수선한 밤을 보내게 될 것 같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스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서 들어가시죠. 검후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무사한 듯 보여 다행입니다, 황녀님.”

스폴은 바로 문을 열고 일행들을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에는 검후와 쉴라가 일어나 이드 일행을 맞이했다.

“할마마마!”

“습격 소식을 듣고 걱정했는데, 무사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이 할미의 마음이 놓입니다. 황녀.”

검후는 황녀를 꼬옥 안아주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일리나로부터 갑작스레 습격 소식을 전달받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급히 달려 나가려는 찰나, 지하실에서 달려 나오는 이드와 라미아를 보고는 또 얼마나 기뻤는지 말도 못한다.

-황녀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이드.

이드는 전음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검후에 마주 웃어 보였다.

잠시 후, 사람들은 거실에 둘러앉았다. 일리나와 황녀로부터 습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이드와 라미아도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몰랐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각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조용해졌다. 그런 가운데 쉴라가 난감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습격 사건은 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 정도로 개성 있는 실력자들이라면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전혀 들은 바가 없네요.”

스폴도 그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와 함께 이번 사건을 조사해야 할 이들을 동정했다. 딱 봐도 미궁에 빠질 요소들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성과는 없을 거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정체불명의 고수라…….”

다만 이드는 한 가지 요소에 마음이 쓰였다. 정체불명까진 아니지만, 최근 만난 알려지지 않은 고수 둘 때문이었다.

뱅커올슨 남작과 이베인.

하지만 이 둘과 이갈 사이의 연결고리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중간에 ‘혼돈의 파편’을 끼워 넣으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닐 뿐. 이드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황녀와 검후는 황제의 전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검후 역시 황제의 안전부터 챙기라고 말했다. 그때, 라미아에게 치료를 받는 중이던 일리나가 이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이드는 언제 온 건가요? 연락도 없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지하실에서 나왔잖아요. 비올라 마법사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이드와 라미아가 달려간 후에 살펴봤지만, 연구실은 여전히 닫혀 있는 것 같던데.”

검후가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드가 궁금해서 지하실에 내려가 본 모양이다.

“비올라에게 맡겨 뒀던 바이트 타블렛에서 갑자기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바로 달려왔던 건데, 마침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났더니 일리나에게 지원 요청이 오더라고요.”

이드의 말에 모두는 깜짝 놀랐다.

“카논에서 여기까지 바로 날아오는 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아니, 그전에 그런 초장거리 공간 이동이 가능해요? 차원진은 어쩌고?”

“설마 차원진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낸 건가요? 그런 거예요?”

그들이 놀란 이유는 바로 공간 이동의 한계 때문이었다. 바이트 타블렛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알기 힘든 바이트 타블렛보다 그 편리함을 몇 번이나 경험해 본 공간 이동에 더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황녀 때문에 일부러 피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비올라가 마무리는 잘했나 모르겠네.’

이드는 일리나의 손을 치료 중인 라미아를 보았다.

아무래도 일차적인 조치가 끝나면 다시 한번 비올라의 연구실에 내려가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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