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23화
1158화
피터가 준비한 두 벌의 옷은 눈부셨다.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다른 옷을 새로 골라야겠어요.”
이드는 단호히 거부했다.
화려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
물론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옷감을 보면 피터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가 느껴진다.
귀한 신분일수록 옷이 고급스러워지기 마련이니, 이드의 정체를 알고서 신경을 쓴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옷은 아무리 못해도 백작은 되어야지, 고작 자작이 벌인 파티의 손님이 입기에는 너무 휘황찬란했다.
정체를 밝히고 싶어서 안달 난 게 아니라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은 지양해야 했다. 도리어 귀족들을 자극하기 쉬우니.
“대체 사람들에게 절 뭐라고 소개하려고 했던 겁니까?”
“…..”
짧은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은 피터였다. 그가 민망한지 입을 꾹 닫았다.
이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옷을 지나 라미아와 일리나를 살폈다.
라미아는 피터가 준비한 옷을 꽤 마음에 들어 하며 일리나의 옷을 골라 주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적당한 신분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고로 보물과 미녀는 다툼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라미아와 일리나는 최고 위험 등급일 것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수컷들이 얼쩡거리는 걸 막으려면 그들의 욕망을 내리눌러 줄 정도의 권력이 필요한 법이다.
“과연, 이해했습니다. 그나저나, 명예 후작님이 참 부럽습니다.”
“하하. 시간이 얼마 없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이 두 사람을 두고 자신만 파티에 참석한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경우는 입 밖에 내지도 않는 이드다. 애초에 라미아가 허락할 것 같지도 않았고, 이 이상 일리나를 뒤에 숨겨 두고 싶지도 않았다.
문제가 일어나도 조금 귀찮을 뿐, 해결이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여차해서 카논에서 쓸 수 있는 적당한 신분이 없다 해도,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요. 어느 쪽이라도 어중간한 놈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물건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걸.”
“뭐죠?”
“목표에 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한번 살펴보시는 게 좋을 듯해 준비했습니다.
피터가 내놓은 것은 일전에 라울이 입에 올렸던 세 사람에 대한 정보였다.
출신과 소속을 비롯한 인적 사항은 물론이고, 바벨에서 그들을 카논무파라고 의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드는 소파에 앉아 차근히 읽기 시작했다.
조사에 따르면 애셔 밴과 네이탠 스로우는 기사고, 스윔 브로우슨은 남작이라고 한다. 이들은 집안끼리 가깝거나 어릴 때부터 친분을 쌓지도 않았다.
이들과 이베인의 연결고리가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전까지 그들은 그저 주목받지 못하는 기사였고 힘없는 남작가의 후계자였다.
재미있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었다.
서로 인연이 없던 이들은 흥미롭게도 출신과 성장 배경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하나같이 변변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없는 재능에 검을 잡아 주목받지 못했고, 그러다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어 주변에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재능은 없었지만, 평소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기에 갑자기 늘어난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무엇보다 강렬한 검기와 매끄러운 검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간의 노력이 보답받았다며 축하하는 사람이 많았단다.
“인간관계는 나쁘지 않았나 보네.”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것이 언더도그니까 말이다.
조사에 따르면 이베인과의 연결점이 생겨난 것도 이쯤이라고 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세 사람이 수도에 진출했고, 그 유명한 황혼의 기사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 이후 한두 번 정도의 만남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접촉은 끝이었다.
친분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관계.
한데 이 관계를 중간에서 연결해 준 이가 바로 뱅커올슨이었다. 그가 본인의 재산 일부를 써서,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새롭게 커 나가는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접촉했다는 것이다.
은둔자처럼 영지에 박혀서 나가지 않는다고 알려진 인간이 후원이라니. 그야말로 헛웃음이 날 일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 버릴 만한 일. 그러나 이베인과 뱅커올슨의 관계를 알고 나면 그렇게 넘길 수가 없다.
또한 이들 다섯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검에 재능이 없어 고생하던 중 한 순간에 실력이 늘었다는 것.
물론 이베인은 그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같은 사람에게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서로 가까워진 후 지금까지 친분을 다지고 있다는 말이지.”
과연 이런 식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서류 끝에는 이들처럼 갑자기 성장한 기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내용이 덧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벨의 능력이 좋아도 단시간에 조사를 끝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무렴 카논 제국에 기사가 몇인데 그리 쉽게 끝날까.
더욱이 그중 갑자기 실력이 는 기사가 누구인지 정도에서 마무리되는 게 아니었다. 가진바 능력이 상승한 이유가 카논무파 때문인지, 혹은 정말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까지 확인해야 하니.
“조사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과로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그렇게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건강을 걱정할 때였다.
“이드, 이리 와요. 치수 재야죠.”
본인 드레스의 사이즈를 변경하고, 일리나가 입을 드레스까지 고르는 걸 마친 라미아가 팔을 잡아끌었다.
이드는 들고 있던 서류를 소파에 뒤집어 놓고는 일어서며 재단사에게 말했다.
“너무 헐렁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간단하고 빠르게 해치웁시다.”
“삐! 안 돼요. 저희 같은 미녀 옆에 서려면 이드도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야죠!”
그러나 이런 시도는 라미아에 금방 막혀 버렸고, 곧바로 다가온 라미아와 재단사의 손에 마네킹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주변과 달리, 저택 하나가 환하게 빛을 밝히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앞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화려한 마차들, 그리고 그 마차에서 내리는 더 화려한 차림의 귀족들까지.
피터는 인상 좋은 웃음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그 옆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마리가 그의 부인이 되어 함께하고 있었다.
“찰스 씨가 알면 질투하겠는데.
창을 통해 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드는 뱅커올슨에서 마리의 남편 역할을 하던 찰스를 떠올렸다. 그때 본 찰스는 분명 마리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다.
“임무에 그렇게 예민하게 굴진 않을 것 같던데요. 그리고 미안하지만, 찰스 씨보다는 피터 씨가 더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그에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에겐 미안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리의 생김새부터가 시골 아낙보다는 귀부인에 더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할 무렵, 어디선가 매화향이 은은하게 밀려왔다.
“향수 새로 뿌렸어?”
“새거 열어 봤어요. 우리 가족에 어울릴 만한 걸로..”
칙칙.
말과 함께 라미아가 이드의 목덜미에 향수를 뿌렸다. 이드는 차가운 액체가 닿는 느낌에 목을 문지르고는 말했다.
“향수는 보통 각자 따로 쓰지 않아?”
“보통은 그렇죠.”
“그럼 이건 보통이 아닌 거야?”
“일종의 영역 표시죠. 우리는 하나다.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마라, 하는.”
무슨 개도 아니고,
과연 이 인파 속에서 냄새로 그런 걸 구분해 낼 절도로 민감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이드는 생각과 달리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리나를 보았다.
그녀는 라미아와 비슷한 형태와 색을 가진 드레스에 화려한 보석보다는 은은한 주름으로 멋을 내, 이드와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리나는 드레스가 불편하거나 하지 않아요?”
“움직임에 제한이 있지만, 불편하진 않아요. 향수도 기분 좋고.”
드레스 자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상당히 기분 좋아 보였다.
이드는 내심 그녀와 라미아가 파티에 나오는 걸 막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을 테니.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의 옷을 주제 삼아 소소하지만 행복한 감정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저택의 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드디어 목표가 등장한 모양이다.
이드는 하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두 분 부인. 가실까요.”
그 말에 두 사람이 이드의 두 팔을 잡아끌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이 끼어진 것이다.
양쪽에서 전해 오는 부드러운 온기에 이드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파티를 시작한지 제법 된 듯, 세 사람이 도착한 파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은은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고, 파티의 꽃이랄 수 있는 춤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뒤늦게 파티장에 들어서는 이드 일행을 보고는 하나둘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드 일행에 관한 이야기가 파티장 안을 도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수수한 옷에 비해서 범상치 않은 느낌이야. 누구지?”
“그런 것보다, 저런 미인들이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하나둘 소곤거리는 소리에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예상대로의 말이 나올 줄이야.
그나저나 이 옷이 뭐가 어때서.
이드는 당신들이야말로 절제미라는 단어를 아느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아 냈다.
“아, 이제 오셨군요.’
그리고 누군가 나서기 전에 피터가 세 사람을 반겼다. 그에게선 주향이 풍겨 나왔는데, 사람을 상대하며 제법 마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맑고 선명했다. 하긴, 임무를 위한 파티에서 술에 취한다면 지부장이라는 직함을 떼야지.
아니, 그전에 자기가 부리던 부하들 보기 민망해서 수치사 하지 않을까.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닙니다. 딱 적당한 시간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서로 겸양의 말을 주고받을 때, 조금 전까지 피터의 상대를 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호기심을 보였다.
“자작, 나는 처음 뵙는 분들 같은데, 내게도 이분들을 소개해 줄 수 있겠소?”
“하하하. 백작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분들은 바벨의 외부 감찰을 하시는 분들로, 제가 작은 인연이 있어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바벨의 감찰부라니. 그게 정말이오?”
백작이라는 남자가 깜짝 놀랐다.
어느 조직이건 감찰부의 힘은 강력하다. 거기에 그 감찰부가 속한 조직이 바벨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벨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면 가장 두려워할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에 놀란 건 백작만이 아니었다.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이드 본인도 눈을 껌뻑거리며 놀라고 있었다.
‘외부 감찰? 바벨 소속? 우리가 언제?’
이드가 그런 의문을 담아 피터를 바라보자 그는 몰래 엄지를 펼쳐 보였다.
찡긋.
거기에 한쪽 눈까지 깜짝인다. 아무래도 준비한다던 신분이 이것이었나 보다.
‘이 사람아, 이건….. 적당이 아니라 과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