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26화
1161화
“결투에 나설 기사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양측이 준비를 마치자 피터가 두 기사를 불러냈다. 그러자 이드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기다리고 있던 라미아가 심문을 시작했다.
“그냥 열심히 하라고 응원한 것뿐인데?”
“기사 네이탠에게 뭔가 했잖아요. 우리도 눈이 있다고요. 그렇죠, 일리나?”
끄덕끄덕.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드 편을 들어 주던 일리나마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한 일이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인가.
이드가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특별히 수상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몰라요? 우리가 하루 이틀 붙어 있던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척 보면 그냥 아는 거지. 사랑의 힘이랄까?”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외려 당당하게 가슴을 활짝 펴고 말하는 라미아에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랑의 힘이 아니라, 눈치가 무서우리만치 빠른 거겠지.’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작은 행동에서도 상대의 의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만큼 이제 이런 간단한 일엔 굳이 이드의 생각을 읽으려 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리라.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재촉하는 두 사람 앞에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했어.”
“패배하게끔 어떤 장치를 한 건 아니죠?”
“설마. 당장 끌고 갈 것도 아니고. 지금은 카논무파보다는 저 돼지에 대한 응징이 먼전데. 오히려 응원해 줬다고. 좀 특별한 방법으로 말이지.”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게 조용히 말을 더한 이드는 일리나를 보았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죠?”
“흥분하면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혹시 저 기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건가요?”
“신경계 쪽에 약간 자극을 줬죠.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해서 쉽게 감정이 들끓도록. 아무래도 지켜보는 사람이 많고, 실력 차도 있으니 진짜를 보지 못하고 끝날까 싶어서 말이죠. 후후후.”
그리고는 악당처럼 음침하게 웃어 보이는 이드였다.
하지만 고백은 거기까지였다.
끝내 무엇을 노리는지에 대해선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은 그가 빙글거리는 사이.
피터의 부름을 받은 두 기사가 많은 사람 앞에서 마주 섰다.
여전히 파티복을 걸친 네이탠은 말할 것도 없고, 치마를 뜯어낸 대신 파츠 아머를 장비한 여기사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매혹적이었다. 검만 없다면 춤추기 위해 나선 파티의 주인공들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
하지만 두 사람이 뿜어내는 투기를 보면 절대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두 기사가 동시에 각자의 검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보일런 수칵 님을 모시는 기사 바인 오일렛, 나의 주군의 명예를 위해 이번 결투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자유 기사 네이탠 스로우. 나와 내 친구들의 명예를 위해 이번 결투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내가 이번 결투의 공증인이오. 양측의 명예가 걸린 만큼, 신성한 결투에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정정당당하게 임해 주길 바라오. 그럼 부디 비니블렌스 님의 가호가 있기를.”
말을 마친 피터가 은화를 허공에 튕기고는 뒤로 물러섰다. 땡그랑.
그리고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두 기사가 동시에 바닥을 차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차차차창!
그리고 바닥에서 튕겨 올라온 은화가 다시 떨어지기도 전, 여섯 번의 공방이 오갔다.
은색 파도처럼 길게 늘어지는 검신의 그림자와 그 위에 출렁이는 검기.
화려하지만 탐색의 의미가 강한 첫수.
“이야~ 처음부터 검기야? 사정없이 본격적이네.”
“당연하잖아. 이건 대련이 아니라, 결투라고.”
“둘 다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결투나 좀 봐. 저 여기사의 비범한 실력이 보이지 않는 거야?”
첫수에 우세를 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익히 유명한 네이탠의 강검을 어렵지 않게 흘려 내자, 그런 바인의 기술에 많은 관객이 단숨에 호감을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무공을 익혔다. 비록 교양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어울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사와 무인들이었기에 도리어 그 안목은 높은 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바인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절대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다…….아무튼 아니다.
그런 만큼, 의문도 깊어졌다.
‘저런 좋은 실력을 가지고서 왜 보일런 같은 놈의 호위 기사를 맡은 거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자 취향에 따른 다양한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사이, 탐색을 끝낸 기사들은 본격적인 결투에 들어갔다.
피를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바인 경! 힘내세요!”
“밀어붙여! 바인!”
바인! 바인! 바인!
일방적인 응원과 덩달아 구겨지는 네이탠의 얼굴은 덤이었다.
그를 본 이드가 말했다.
“슬슬 평정심이 깨지기 시작하는 모양이네.”
“이미 그 평정심 깨진 후에 시작한 거 아녔어요?”
“킥킥. 그렇긴 하지.”
이드 일가 세 사람이 점점 거칠어지는 네이탠의 검에 집중했다. 곧 터질 폭탄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터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았다.
그를 포함해서 몇몇은 이미 이 결투의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드가 저렇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
‘뭐지? 저 여기사에게 내가 보지 못한 감춰진 실력이라도 있는 건가?’
지부장의 자존심이 있지.
모른다고 바로 물어보는 대신, 바인에게서 어떤 특이한 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직후.
쩌어엉!
“꺄학!”
진땀을 흘리면서도 빈틈없이 네이탠의 강검을 흘려 내던 바인이 비명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끝내 바닥을 구르지 않은 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 덕이었으리라.
충격에 활어처럼 펄떡이는 검을 억지로 쥔 그녀의 발아래, 두 줄기 깊은 고랑이 생겼다.
“뭐야! 왜 검력이 흩어지지 않는 건데?”
온 신경을 다해서 바인만을 응시하던 피터가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바인을 보느라 네이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집중한 덕분에 분명히 알아차린 바가 있었다.
상대가 뻗어 내는 힘을 능숙하게 잘만 흘리던 바인이 역으로 똑같이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네이탠의 검력은 흩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바인의 검을 타고 그녀를 때렸다.
바인이 뒤로 물러난 것은 그 검력에 당해서도 있지만, 내부로 스며드는 검력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어때요. 봤어요?”
그렇게 피터가 어리둥절한 사이.
네이탠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세 사람은 그의 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놓치는 것 없이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비등점까지 끓어오른 감정의 폭발과 그에 따른 기운의 상승, 그리고 마지막 해소까지.
일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흥미로운 현상이네요. 지금, 감정을 연료로 사용한 건가요?”
“비슷해요. 일종의 정신적 힘을 내력으로 전환한 것이죠.”
“버서커 같아요.”
당연하게도 그녀가 말하는 버서커는 초인의 폭주 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살기에 취해서 미쳐 버린 병사. 그리고 그것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흑마법에 의해 모든 감정을 분노로 바꾸고, 그 분노를 태워 강력한 힘을 발산하는 전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죠. 이쪽은 무공이고 버서커는 마법이라는 게 다를 뿐, 감정을 소모한다는 점은 같으니까요. 아,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도.”
버서커의 마지막은 대부분 죽음이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끝은 결코 좋지 못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인을 한 데다, 감당하기 힘든 힘을 발휘하는 사이 망가진 몸도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하는 힘이란 말인 거죠?”
“버서커 정도는 아니지만, 애초에 흥분이란 게 마음대로 조절되지는 않으니까요. 부동심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 지금도 그것을 목표로 정진하는 불문과 도문의 제자들을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카논무파가 빠르게 강해진 가장 큰 이유가 아마 저걸 거예요. 저들 안엔 최소 십 년 이상 쌓여 온 원망, 혐오, 질투, 자괴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했을 테니까요.”
“그게 카논무파의 특징이군요?”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죠.”
이드는 황소처럼 코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며 바인을 몰아붙이는 네이탠을 바라보았다.
일리나가 예측한 결과는 마흔한 번의 공방. 그러나 저런 기세라면 마흔 번까지 갈 것도 없이 바인이 찢겨 나갈 판이었다.
아무리 힘을 흘리는 기술이 뛰어나도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했고, 현재 네이탠의 힘은 그 밖에 있었다.
“제가 있던 곳에선 저런 무공을 마공이라고 불러요.”
그렇다. 마공.
카논무파에서 ‘무도’라 주장하는 저들 무공의 정체는 바로 마공이었다. 종류에 따라 재능의 유무는 물론, 짧은 수련 기간에도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무공.
그러나 엄청난 실력을 갖추게 되는 대신, 치명적인 약점과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바로 마공이었다.
수련법에 따라 스스로 희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남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각해져 만천하에 드러날 때, 무림에선 이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추살에 들어간다.
이런 간단한 설명을 들은 일리나가 무거운 눈으로 네이텐과 그 뒤에 선 카논무파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들이 마공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드가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존 워스가 있잖아요. 혼돈의 파편이라면 무공을 기반으로 마공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실제로 지금 많은 나라와 가문에서 사용하는 무공도 모두 제가 알려 준 건 아니잖아요.”
이드는 입맛이 썼다.
어떤 것에건 명암은 있기 마련이다. 무공이 알려진 이상, 그걸 왜곡하고 변형시킨 마공 역시 언젠간 나오리라 예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곳은 중원이 아닌 그레센이다. 문화와 생각의 기준이 다르고,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다른 흐름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는데, 하필 혼돈의 파편의 손에서 마공이 나오다니.
그리고 그 시작이 자신이라니.
물론 무공을 가르친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소드 팰러스의 수많은 수련생이 무공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누리는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모두 혼돈의 파편 탓이지. 빌어먹을 놈들.’
그와 동시였다.
“크아아압!”
떠엉!
“아악!”
거칠어진 네이탠의 고함과 함께,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한 바인이 검을 놓치고는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승패가 갈린 순간이었다.
“죽여 버린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네이탠은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