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36화
1171화
박수갈채가 비처럼 쏟아졌다.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하며 자신과 두 기사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 그 속마음이야 뻔하다.
그래 봤자 카논을 떠나면 다시 볼 일이 없기에 이드는 저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 너머로 톤 자작을 살폈다.
스윔 남작이 바벨을 언급할 때부터 구겨지던 얼굴은 이제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가득 차 있었는데, 특히 홀쭉하던 볼이 부풀어 있는 모습이 마치 터지기 직전의 심술보를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을까.
그가 바란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을 터. 그로선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복장이 뒤집히리라.
섬뜩하게 번뜩이는 저 눈이 그 증거다.
이쪽을 잠시 노려보던 톤 자작이 기사를 불러 무어라 속삭이자, 모종의 명령을 받은 그가 곧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얌전히 물러나진 않을 모양이네.’
아무래도 연극이 2부로 이어질 것 같다. 그래도 이왕이면 카논에서 손꼽히는 대상인인 만큼, 그 이름값에 어울릴 정도로 재미있는 무대를 준비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드는 스윔 남작과 두 기사에게 미리 말해 두었던 신호를 주고는, 다가오는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마주 잡았다.
연극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까.
현재까지 카논무파에 속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인원은 0.
“반갑소. 나, 보포란의 난두시라고 하오.”
하지만 그런데도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많고 많았다. 이젠 오히려 살짝 질리는 감마저 드는 이드였다.
여태 몇 명과 인사를 나눴는지.
장검으로 내리쳐도 상하지 않을 손바닥이 벌써 저릿저릿하다. 도대체 정치한다는 인간들은 이 짓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걸까. 이런 걸 보면 자신은 죽었다가 깨어나더라도 정치할 체질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렇게 정신없는 중에 톤 자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터 주는 길을 따라 이드와 두 기사 앞으로 다가왔다.
“내 기사들이 바벨의 사람이 될 줄은 몰랐소.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오.”
이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무엇이 말입니까?”
“오늘 떠나보내긴 해도, 그간 내가 키운 기사들이 아니겠소. 그런 만큼 저들의 실력 역시 내 가장 잘 알지. 저 스윔 남작 곁이라면 충분할 것이나, 아무래도 바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할 듯해 그게 걱정이오.”
짧게 혀를 차는 톤 자작의 모습에 이드는 잠시 말을 잊었다.
저게 어딜 봐서 걱정인가. 걱정을 가장해서 바인과 해쉬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깎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또 그런 실력조차 스윔 남작에는 넘친다는 헛소리도 더해서.
이드가 보기에 어쩐지 지금만큼은 두 기사를 향한 톤 자작의 앙심이 스윔 남작 일행에게 향하는 것보다 더 커진 듯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멍청하고, 눈치 없고, 제 욕심만 챙기는 더러운 년들.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바벨의 이름값에 홀랑 넘어가? 오냐, 어디 바벨이 네년들 따위를 지켜 줄지 두고 보자.’
사실 억지나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제 좋을 대로 떠나보낸 기사들에게 충성받기를 원하다니.
하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지배에 익숙한 권력자의 자세이기도 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최소한 내 영역 안에서는!
그러나 오늘은 그 ‘영역’ 안에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들이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이드는 바인과 해쉬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바인 경과 해쉬 경의 실력이라면 이미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바벨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보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전 결투에서 힘없이 패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오?”
“제 기준이 곧 바벨의 기준입니다. 잘못 볼 리가 없지요. 제가 보기에 그때 바인 경이 패한 이유는 네이탠 경의 실력이 평균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장비를 비롯한 준비가 너무 부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장비・・・・・・ 탓을 하는 거요?”
“탓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무엇이 말이오?”
“대상단의 주인인 자작님의 아드님을 호위하는 기사가 그렇게 단출한 장비를 가지고 다닐 줄 어디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다, 단출하다?”
말이 좋아 단출이지, 초라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른 이도 아니고 수칵 상단의 주인 되는 톤 자작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이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결투 때 바인 경이 당장 저기 저 기사 정도의 장비만 가지고 있었어도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겁니다. 아쉬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이 바벨에 들어선 이상,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 하하. 그것참 재미있구려.”
톤 자작이 황당함에 물든 광대를 꾹꾹 내리눌렀다.
수칵 상단의 주인인 자신이 호위기사의 장비 하나 챙겨주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당혹도 잠시, 그는 오히려 기꺼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혹 방금 그 발언에 대해 내기를 하는 것은 어떻겠소.”
“무슨 말입니까?”
“손님들을 위해 즐길 거리를 따로 준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쪽이 더 재미있을 듯해서 말이오. 감찰관과 나 중 누구의 말이 옳은가 가려 보자는 소리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좋습니다.”
“자작의 파티는 언제나 즐길 거리가 풍성해서 빠질 수가 없단 말이오.”
“아무렴 내기는 못 참지!”
“내 이럴 줄 알고 판돈을 넉넉히 챙겨 왔소. 자, 걸어 봅시다. 껄껄껄!”
반대는커녕 곧장 내기판이 벌어졌다.
두 개의 탁자 위에 판돈이 수북하게 쌓였다. 미리 준비한 듯 익숙하게 주머니를 쌓아 올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톤 자작의 파티는 도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톤 자작이 말했다.
“보다시피 기대하는 손님들이 많은데, 어떻소? 설마 거절하진 않으시겠지.”
“어떤 내기인지 들어 보지요.”
허락이나 다름없는 이드의 말에 톤 자작이 흡족해 웃었다.
이 판의 주도권을 다시 잡았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나 그건 혼자만의 오판이다.
애초에 이 정도 사건은 예상 안에 있었다. 즉,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이드였다.
“내용은 간단하오. 감찰관의 기사와 내 기사의 시합을 통해 우열을 가리면 되는 거요. 아, 공정을 위해 장비가 모자라면 빌려 드리리다. 만약 그게 싫다면 서로 검 하나만 들고 싸우는 방법도 있소.”
“한 자루 검에 모든 것을 건다. 캬~ 역시 자작님은 로망을 아십니다.”
방정맞은 어떤 인간이 깨알같이 아부를 떨어 댔다.
반대로 기사로 보이는 이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긴장했다. 무공이 퍼지며 파츠 아머로 간소화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갑옷의 역할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검을 잡는 직업인 만큼, 파츠 아머 없이 맨몸으로 검 앞에 나서는 위험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이드는 톤 자작의 물음에 답하기 전, 갑자기 내기의 중심에 서게 된 바인과 해쉬를 보았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이드의 기사라고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즉 만약 내기에 나선다면 그녀들이 나서야 하는 만큼, 나갈지 말지 그녀들의 뜻을 묻는 것이다.
만약 그녀들이 거부의 의사를 보인다면 톤 자작의 내기는 거절하면 그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끄덕.
바인과 해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실력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더욱이 여기서 물러난다면 이드의 말이 틀리고, 톤 자작의 말이 옳은 것이 되어 버린다.
‘잠시지만 지금은 우리가 모실 주군이다. 그런 분께 망신을 안겨 드릴 순 없어.’
‘해고당한 복수심인가? 두 사람 다 투지가 보통이 아니네.’
물론 두 사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드는 그녀들의 눈에 어린 투지만 보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두 사람의 뜻을 확인한 이드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 내기, 받죠. 그리고 바인 경과 해쉬 경의 장비는 우리가 준비하겠습니다.”
“바벨의 감찰관이 기사 장비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그건 나중에 보시면 아실 테고. 그보다 자작님과 제가 무엇을 걸지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단하오. 각자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조건은 어떻소?”
어디서 시답지 않은 수작질을 하려고, 이드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흐리멍덩한 조건이 어딨습니까. 상인이라면 계약 내용이 분명해야지요. 혹시라도 바벨이 수칵 상단을 받아 가면 어쩌시려고.”
“….재밌자고 벌인 판이지만, 상인의 계약은 정확해야지. 감찰관의 말이 옳소. 그럼 내 조건은 언제든 내가 원할 때 감찰관을 부를 수 있는 권리요.”
“저를 말입니까?”
“물론 아무 때나 부를 건 아니오. 딱 다섯 번 정도요.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내기에 어울리는 가벼운 조건 아니겠소.’
그런 톤 자작의 말에 이드는 내심 콧방귀를 날렸다.
말로는 가볍다 하지만, 아무리 횟수의 제한이 있다 한들 바벨의 감찰관을 마음대로 소환할 권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바벨의 감찰관이라는 직책이 가지는 무게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무림맹의 감찰관이 가지는 막강한 권한에 대해서는 잘 알기에 그에 비교해 이해한 이드였다.
자세한 건 잠시 후에 피터에게 물어봐도 될 터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받아들이죠. 그럼 제 조건은 황궁 방문입니다. 발라파루에 왔으니, 황궁은 한번 방문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자작님이라면 충분히 길을 만들어 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저 관광이면 됩니다.”
황제 알현도 아니고, 관광이라면 자작의 힘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바벨의 감찰관이라는 확실한 신원도 있고.
“좋소. 너는 가서 솔론 단장을 불러와라.’
“예!”
결정을 내린 톤 자작이 또 다른 기사를 내보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본 후 일행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바인과 해쉬를 불렀다.
“정말 이 조건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사단 안에는 저희보다 강한 기사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을 상대하게 된다면 패할지도 모릅니다.”
투지를 불태우던 조금 전과 달리, 두 사람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패배에 대한 걱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조건이 너무 기울어지긴 했습니다. 무려 감찰관 소환권 반대에 걸린 게 고작 황궁 관광이라니요.”
피터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누구보다 감찰관의 권한을 잘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나 이드는 그런 반응에 태연하게 반응했다.
“조건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바인 경과 해쉬 경이 이길 테니까요. 아, 절대 두 사람에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그땐 정말 장비가 부실했다는 걸 확인시켜 드리죠. 그렇지?”
“물론이죠.”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기다렸다는 듯 탁자 위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올려 두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보물 창고가 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