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803화


1238화

스케스틱은 비웃지 않았다. 애초에 저 무표정이 변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비웃은 것은 삐뚤어진 스스로의 마음이다.

까득.

라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릿한 통증에 이은 비릿한 피 냄새가, 눅눅한 패배 의식을 털어 내며 정신을 깨웠다.

자신이 품은 두려움을 깨달은 라울의 눈빛이 바뀌었다.

더 이상의 바보짓은 사양이다. 일단 고개부터 저은 라울이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끝까지 대련을 이어 가시지요.”

“원한다면.”

무심히 답하는 스케스틱이지만, 사실 그도 내심 바라던 바였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 중이긴 하나, 아직 라울의 초인기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드래곤의 능력이 대단해도,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수십 년을 달라붙어도 완벽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초인기의 비밀을 단숨에 파헤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대의 초인기는 제법 흥미롭군.”

“이거 영광이로군요.”

“영광인지는 모르겠고. 우선 입가에 흐르는 피부터 닦는 것이 어떤가.”

“아, 이런 피가 왜…… 하하하.”

라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가를 훔쳤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멍청했던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럴 때 최고의 방법은 역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라울은 피가 묻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카락, 카락. 카라락.

그러자 허공을 달리던 바퀴들이 그 손 위로 몰려들었다. 겹치고 겹친 그 모습이, 마치 이빨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톱니바퀴.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언제든 시작하시죠.”

마음을 달리 먹어서일까. 라울에게선 어떤 비장한 투지마저 보였다.

이젠 단순히 힘을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쓰러지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다는 그런 모습이다.

다만 이와 마주한 스케스틱은 라울의 투지에 같이 불탈 마음이 없었는지, 앞서와 달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가 와라.”

“무슨?”

“그대가 방어하는 모습은 잘 보았다. 이제는 골든아이의 공격 능력을 보고 싶다.”

싸움이란 본디 공격과 방어의 교환이다. 한쪽은 공격만 하고, 한쪽은 방어만 하는 것을 싸움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뭐, 애초에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긴 했지만. 아무튼!

라울이 스케스틱의 마법을 전이하고 복제해 공격에 이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의 연장선 진짜 공격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스케스틱은 라울이 어떤 식의 공격을 하는지 보이기를 요구한 것이다.

그에 라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움츠린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면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음을 굳힌 이상, 더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원하신다면 보여 드리죠.”

카락. 가각. 카라락!

라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톱니바퀴의 회전 속도가 변했다. 동시에 바퀴들이 복잡하게 위치를 바꿔 가며 이빨을 더하고 더해 기묘하고 복잡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네 개의 바퀴가 엑스자의 형태로 맞물리는 순간.

끼이이이잉-

회전하는 톱니바퀴의 중심에서 뜨거운 열기와 함께 작열하는 열선이 쏘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

뜨거운 열기에 눈이 깜빡이는 사이, 열선이 스케스틱에 가 닿았다.

뿌왕!

아니, 정확히는 그에게 가기 전 그 앞을 막고 있는 무형의 장벽에 막혔다. 하나 여인의 허리둘레만 한 열선은 장벽에 막혀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뜨거운 열 폭풍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열풍에 담긴 열기는 초고열.

스치는 것만으로 심한 화상을 일으키고, 나무에 불을 붙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

파라락. 파라라락.

연무장을 넘어가려던 열기는 모두 라미아가 설치한 탈로스의 성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나 나올 레이저가 저기서 나오네.”

“그러네요. 동반한 열량에 있어서는 레이 마법보다 위력이 큰 것 같아요.”

“사정거리가 굉장히 길어 보이는데, 저거, 위로 향해도 커버 되는 거지?”

산들바람으로 변해 버린 열풍을 느끼며 이드가 하늘을 가리켰다. 라울의 열선이 자칫 잘못 빗나가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꿰뚫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백색의 광선이 구름을 꿰뚫으면 그걸 보고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다.

물론 이런 걱정은 라미아 앞에서는 모두 하찮은 것이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는 그야말로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해 보였다.

“하늘뿐이겠어요? 탈로스의 성벽은 저 광선이 우주로 뻗어 나가려 해도 막을 수 있다고요. 무려 고대 신성의 일부를 소환하는 마법인데, 저런 열광선 따위는 그냥…….”

“아니, 자세한 설명은 이따 듣고, 일단 안전하다는 거잖아. 그럼 됐지.”

이드는 길어질 것 같은 라미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주까지 커버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 그걸로 충분하다. 말이 막혀 라미아의 기분이 살짝 상한 듯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결하면 될 일.

지금은 대련이 우선이다.

탈로스의 성벽의 안정성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열풍이 사라지기 전, 라울이 다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톱니바퀴가 다시 맞물려 돌아갔다.

카락. 가각. 카라락!

엑스자를 만들던 톱니바퀴가 십자로 방향을 틀자, 이번엔 굵기가 줄어든 대신 그 수가 더 많아진 광선이 다시 한번 뻗어 나갔다.

낑! 낑! 끼이이잉!

열선에 대기가 타오르며 낮고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이어지는 폭음에 금방 지워졌다.

콰르르릉!

콰과과광!

이번에는 스케스틱에 막히지 않았다. 대신 스케스틱이 아닌, 엉뚱한 연무장 바닥을 시원하게 두드려 녹여 버렸다.

블링크.

단거리 공간 이동으로 열선을 피한 스케스틱이 녹아 버린 바닥을 바라보았다.

“태양열선이라면 제법 위력이 있지. 하지만 단순하군.”

그야말로 객관적인 평가.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분명한 실망이었다. 타인의 공격을 전이, 복제시키는 수법에 비교해 빛을 응축시켜 쏘아 내는 수법은 확실히 너무 단순하기는 했으니까.

“단순하다, 라, 그럼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골든아이의 눈을 더 크게 뜨도록 해야겠군요.”

카락, 가각, 카라락!

맞물려 있던 바퀴들이 떨어지더니 또다시 회전을 시작했다. 엄청난 빠르기에 잔상이 생겨나며 네 개이던 바퀴가 순식간에 열여섯 개로 늘어났다.

특이한 점도 있었다. 바퀴들의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큰 것은 바이첼로만큼이나 크고, 작은 것은 손바닥만큼이나 작았다.

카락. 가각. 카라락!

그런 바퀴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열여섯 개나 되는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였다. 다만 문제라면 톱니바퀴가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을 챙겨 줄 정도로 얌전한 녀석이 아니라는 점일까.

그렇게 이가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거대한 마름모 형태를 완성했을 때다.

번쩍!

그곳에서 눈을 뜨기 힘든 광량이 터져 나왔다. 눈을 감아도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의 폭발.

끼이이이잉!

그 속에서 어느새 익숙해진 열선의 발사음이 들려왔다. 소리는 끊어짐이 없이 길었다. 특이하게 폭발음도 없고, 열풍도 없었다.

“하. 하…… 기가 막혀서..

대신 무언가 허탈한 라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줄어든 광량에 눈을 뜬 기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멀쩡하게 서 있는 스케스틱. 그리고 어느새 거대한 수레바퀴 뒤에 몸을 숨긴 라울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건지 본 사람?”

“그걸 무슨 수로 봐? 억지로 뜨려고 했으면, 눈이 멀어 버렸을 거라고.’

“그럼, 목숨이 오가는 싸움 중에 맹인이 되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

“그건・・・・”

누군가의 말에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가 검후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강력한 빛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는 건 아쉬운 점이네요. 경험 부족일까.”

검후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이드는 어쩐지 은색 기사단 훈련 매뉴얼이 새로 추가될 것 같다는 것을 느끼며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기사들과 요원들은 보지 못한 대련.

그건 라울이 저렇게 허탈해할 만한 내용이었다. 강력한 빛으로 시야를 빼앗고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채찍처럼 이어졌던 열선의 연속 공격.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빛에 당황한 순간 허리가 잘려 나가고 말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라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스케스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니, 그저 통하지 않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설마 골든아이. 제 초인기를 모방한 겁니까?”

그 말대로였다. 열선 공격은 스케스틱에 닿기 직전,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무언가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그 모습은, 스케스틱의 마법을 전이시키던 라울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결과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사라진 열선이 라울과 스케스틱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라울의 허리를 잘라 버리려 했던 것.

다행히 광폭탄의 주인답게 빛에 시야가 가려지지 않은 라울은 수레바퀴를 움직여 해당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다만 전이를 이용한 방어는 아니었다. 스케스틱의 공격이 너무나 의외였기에 그럴 정신이 없었으니까.

이런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라울에 스케스틱이 간단히 답했다.

“흉내일 뿐이다. 초인기에 대한 해석은 완전하지 않다. 다만 마법을 이용해서 그대의 반격 방법을 따라 해 보았다. 마법과 초인기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

“마법으로 따라 했다니………… 그게・・・・・・ 마법으로 가능한 거였단 말입니까.”

“마법은 한계가 없다. 세상의 모든 법칙을 비틀어 내는 것이 마법이다. 그대의 초인기 역시 세상이 만들어내는 현상 안에 있는 것. 온전히 같지 않은 까닭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해서일 뿐이다.”

“하. 하하.”

라울이 식은땀이 솟아오른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야말로 마법으로 초인기를 정복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여느 마법사의 발언이었다면 잘해 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초인이 무엇인지도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 마법계니까. 하지만 드래곤의 말이 주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라울은 내일이라도 자신의 초인기가 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압박감을 받아야 했다.

“터무니없다. 터무니없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자신의 초인기가 그렇게 쉽게 바닥을 보일 정도의 수준이었던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게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지!’

카락, 가각. 카라락!

두 주먹을 불끈 쥔 라울의 의지를 따라 길게 늘어선 톱니바퀴들에서, 수십의 열선이 불규칙적인 선을 그리며 뿜어졌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