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80화
1315화
거칠 것 없다는 듯 시원한 웃음소리.
탑주는 그런 존 워스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멸종이라니.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
무슨 마지막 남은 희귀 식물을 뽑아 멸종시키겠다는 선언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존 워스의 말엔 농담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다. 반대로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눈에 진심이 비친다.
‘이 작자…… 진심으로 하는 소리잖아!’
순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존 워스의 초인 혐오가 심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맙소사. 설마 혐오가 진심으로 멸종을 말할 정도였다니.
저 정도면 혐오를 넘어 차라리 증오다.
자신의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 또는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나 가질 법한 그런 감정.
어쩌면 비유가 아니라 정말 초인의 손에 존 워스의 가족 중 누군가가 살해당하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존 워스라는 이름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탑주는 심각하게 그런 의심을 가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대가 보이는 광기를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초인을 멸종시키겠다니.
귀한 재료를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더욱더 멸종이 가지는 뜻이 피부로 다가왔다. 멸종, 세상의 테두리 안에서 말소시켜 버리는 것. 그런데 그 대상이 희귀 식물이나 동물도 아니고 인간이다. 초인으로 한정한다고 하지만 그 숫자가 어디 한둘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초인의 숫자도 적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사라졌을 때 일어날 파급력은 그야말로 제국 멸망에 버금가리라. 가장 먼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제정신이라면 지금 여기서 저런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정신 파탄의 증상인가.’
한때 무공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심마라고 하던가.
하지만 이런 추측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디 어리숙한 무인도 아니고 대륙의 많은 무인과 기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철벽의 검왕이라 불리는 인물이 심마라니. 그거야말로 경험 많은 기사가 어린아이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는 것 만큼이나 어림없는 소리다.
“끄응.”
어딜 어떻게 뜯어 봐도 존 워스가 진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자 탑주는 머리가 아파 왔다. 검후와 명예 후작까지 포함된 침입자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픈데, 거기에 난데없이 끼어든 철벽의 검왕이 한다는 말이 이런 미친 헛소리라니.
아, 헛소리는 아닌가? 그야말로 진심에 진심을 더한 마음에서 우러난 발언이니까.
아무튼!
어째서 이런 골칫거리들이 한 번에 닥쳐왔을까.
진리에 다가서려는 도전자에 대해 운명이 내리는 시련인가. 세상이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방해하는 것 같아 울컥 짜증이 치솟는다.
이러다 존 워스가 아니라 자신이 심마에 빠질 듯했다.
탑주는 심호흡으로 생각과 기분을 환기했다. 그와 함께 존 워스에 대한 관심과 의문도 거뒀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본다고 했다. 굳이 미치광이의 정신을 이해하려다 마음 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존 워스가 바이트 타블렛을 노리고 있지 않다는 것. 그걸 확인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전에 미리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차후에라도 존 워스의 태도가 돌변하지 않도록, 그리고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감사의 의미를 담아.
“좋소. 귀하의 뜻은 잘 알았소. 하지만 하나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소. 귀하가 바이트 타블렛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소만, 바이트 타블렛에는 초인을 멸종시키는 능력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소.”
말을 마친 탑주는 살짝 긴장했다.
상대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면 자신의 말에 반동이 있을 수 있기 때문.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존 워스는 탑주의 말이 재밌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하! 알고 보니 재밌는 사람이오, 탑주. 내가 말한 멸종을 그렇게 이해했다니.”
“……내가 귀하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거요?”
“뭐, 크게 틀리진 않소. 사실 내 맘이야 당장이라도 세상 초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니까.”
존 워스가 굶주린 늑대처럼 하얀 이빨을 번뜩였다.
“그러나 그러기 어렵다는 걸 잘 알지. 그대의 바이트 타블렛에 당장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다만,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되면 쥐새끼처럼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초인에 대한 각성을 조율할 수 있을거요.”
“……굉장히 잘 알고 있구려.”
“검왕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나도 모두 살피고 있으니까. 아무튼, 그거면 충분하다는 거요. 더 이상 아무도 초인으로 각성하지 못한다니. 그게 멸망과 다를 게 뭐겠소.”
“……”
탑주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존 워스를 달리 보았다.
멸종이라며 껄껄거리던 모습은 영락없이 미친놈이었는데, 지금 하는 소리는 또 영락없이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현자의 그것 같다.
초인은 핏줄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모, 조손 간에 연달아 초인이 나온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욱 많다.
그러니 명맥이 끊어진다면 초인의 맥이 끊기고 자연스럽게 초인은 소멸하게 되는 것은 맞다.
“・・・・・・・모르겠군. 내가 느낀 그의 멸망엔 피 냄새가 그득했는데.’
사실 웃기는 일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초인을 잡아 생체 실험을 일삼은 자신들이 초인을 멸종시키겠다는 존 워스에 대해 걱정하다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뒤로하고, 탑주는 존 워스의 눈을 직시했다.
“좋소. 존 워스 경의 생각은 알겠소. 사실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초인을 없앨 생각은 없소. 마스를 포함한 각국이 그걸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귀하가 말한 것처럼, 사방에서 이유 없이 각성한 초인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없어질 것이오. 그거면 되겠소?” “아주 충분한 대답이오.”
“그렇다면 좋소. 거래합시다. 귀하의 도움을 받겠소.”
“옳은 결정이오.”
탑주가 손을 벌리는 순간 존 워스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서 탑주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바로 그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
그러나 도움을 받기로 했기 때문일까. 탑주는 그 미소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도리어 든든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귀하는 내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소? 직접 나서서 영혼의 관에 침입한 검후나 명예 후작을 상대할 것이오?”
“그것도 방법 중 하나지. 하지만 그런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바이트 타블렛이 아니겠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바이트 타블렛을 다른 곳으로 옮겨 완성하는 건 어떻겠소? 방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 부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많고 많은 방어벽을 무시한 채 공간을 가르고 나타났던 존 워스였기에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탑주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오. 바이트 타블렛은 이미 이 땅에서 진리의 단말에 접속한 상태요. 이 시점에서 좌표 변경은 불가능하오.”
그게 가능했다면 침입자가 발생한 시점에서 탑주가 알아서 자리를 옮겼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에 있어 영혼의 관이라는 건물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정말 불가능하오?”
“지금 접속이 끊어질 경우 자칫 바이트 타블렛에 그 반동이 갈 수 있소. 이때 생겨난 오류를 수정하자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게 될지 알 수 없소.”
“흠, 그런 일은 피해야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오.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최대한 당겨 봅시다.”
“・・・・・・ 어떻게? 지금도 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소. 그런데도 아직 완성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오.”
“그러니 말하지 않소. 그 시간을 당겨 주겠다고.”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의도한 만큼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대략 백 배 정도는 단축될 거라고 예상하오.”
“・・・・・・ 하루로 끝낼 수 있단 말이오?”
탑주는 놀람보다는 의심과 의혹을 내비쳤다. 현재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 예상되는 시간은 백 일이다.
그것도 완성을 결판 짓는 마지막 의식을 제외했을 때, 그런데, 그 시간을 하루로 줄일 수 있다니.
무엇보다 바이트 타블렛의 제작자도 모르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충분히 가능하오.”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오? 그리고 바이트 타블렛에 그 방법이 적용 가능하다는 건 또 어떻게 확신할 수 있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공간을 넘어온 것과 같은 방법이라고 말하리다. 탑주도 알지 못하는, 매우 특별한 방법이지. 그리고 바이트 타블렛에 대해 어찌 아느냐고 물었소? 당연히 탑주보다 잘 알지는 못하오. 하지만 그에 관해 깊이 살펴볼 기회는 있었지. 탑주도 알 거요. 저 바이트 타블렛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콘티에롬을 내가 전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때 살폈소.”
“으음. 콘티에롬……..”
생명의 관 부관주 랜달의 유품이자 사라진 바이트 타블렛을 대체하고 있는 콘티에롬. 그것에 대한 언급에 탑주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진짜 바이트 타블렛을 대체하고 있는 콘티에롬이라면, 그것을 통해 진짜 바이트 타블렛의 특성이나 성질 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귀하는 기사가 아니오?”
“기사라고 마법에 무지하다는 편견은 버리는 게 좋소.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변에는 나만큼이나 초인을 부정하는 친구들이 있소. 그들은 하나같이 나만큼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당연히 마법사도 있겠구려.”
“그 친구가 말했소. 이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는 제작장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의지의 기둥이 천지를 가로지를 때 바이트 타블렛이 진리에 닿을 것이라고 했소.”
“의지가 천지를 가를 때!”
“내 알기로 탑주의 의지는 충분하오. 하지만 탑주의 의지와 바이트 타블렛이 하나가 되진 못했소. 내가 해 줄 것은 탑주의 의지와 바이트 타블렛을 이어 주는 일이오.”
“나와 바이트 타블렛을 잇는다.”
자세한 설명을 배제한 존 워스의 설명이었지만, 탑주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그가 쌓은 지식은 존 워스의 말이 충분히 성립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놨다. 다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물음표를 내밀었지만.
그러면 어떤가.
상대에게 그 방법이 있다는데.
탑주는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한마디 했다.
“침입자들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오? 검후와 명예 후작이 있으니, 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그 또한 걱정 마시오. 그들은 내가 직접 나서서 막을 테니까.”
“……그렇다면 좋소. 당신의 제안을 받겠소.”
“잘 생각했소. 이리 앉으시오.”
탑주의 승낙과 함께 존 워스가 한발 탑주에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탑주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 순간 주객이 바뀐 느낌이 들었지만 탑주는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도망갔네.”
이드는 빈자리를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