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81화
1316화
이드는 좀 전까지 펠튼이 서 있던 빈자리를 내려다봤다.
처음 나타나서 사라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바닥에 박혀 있는 마나석과 소형 마법진.
펠튼은 이것을 중계기처럼 이용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그러고 이것을 이용한 중계가 제법 실감 나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드가 한 발 한 발 가까워짐에 따라 딱딱하게 굳어 가던 표정에 더해, 허둥지둥 자신의 흔적을 지우던 행동이라니.
꼬리 만 개처럼 등을 돌리던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도망이었다.
이드는 발끝으로 마법진을 슥 문질렀다.
가가각-
하얀 돌가루가 튀고, 마법진과 마나석이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갈려 나간다. 이제 이 마법진은 중계기로의 역할을 다시 하지 못하리라.
“그나저나, 아쉽네. 상황 판단이 빠른 만큼 잘만 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드는 모습을 감춘 펠튼의 행동을 비겁하다거나 겁쟁이라고 매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와 적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한 빠른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
아무리 본인이 아니라 마법을 통한 투영이라지만, 이쪽에 자신과 라미아가 있는 이상 펠튼은 절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펠튼은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연결을 끊고 숨었다. 작은 위험 요소조차 사단에 차단해 버린 것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펠튼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드가 보여 준 철황파산포의 파괴력은 펠튼에게 승산이라는 단어를 아예 삭제시켜 버리는
것이었으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이길 수 없는 전투를 계속할 이유도, 계속할 전력도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펠튼은 적에게 생포 당한 조셉의 경우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와 같은 상황이 될 가능성은 피하고 싶었다.
이런 요소들이 펠튼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명예보다는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아는 인간이라고 할까.
덕분에 이드로서는 정보를 얻을 기회를 잃었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드는 곧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자 모든 적이 쓰러진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백의 사망자가 있는 전장을 은색 기사단과 플레타 부대가 함께 정리 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은색 기사단은 뒤로 물러나 체력 회복을 겸한 정비 중이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플레타 부대다.
아무래도 직접 전투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아니지, 꼭 그렇지도 않은가?’
생각해 보면 이번 층에서 활약하진 못한 플레타 부대는 지나온 1층에서 몬스터를 상대로 활약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그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저 커다란 빚을 진 것 같은 태도는 무엇인가.
묘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드였다. 그러나 잠시 후,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모습에 눈이 가늘어졌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던 플레타 부대원들이 틈만 나면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부지런을 떨 만한 일도 없었다.
삼백이 넘는 적의 시신을 매장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전 잠시 쉴 공간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힘을 쓰는 모습이라니.
그건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지런함을 자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대상은 그들의 상관이 아닌, 뒤로 물러난 기사들이다.
혹시 은색 기사단의 활약에 감동한 것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기에는 부대원들의 눈이 향하는 대상이 제각각이다. 무엇보다 눈빛이 다르다.
존중과 존경이라기에는 너무 느끼해서 담백하지 못하다. 오히려 텁텁한 열기를 담은 눈빛이라니.
“하하하. 이것 참, 민망합니다. 우리 부대원들이 은색 기사단의 활약에 한눈에 반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빛이다.
오탄이 멋쩍은 표정이 되어 사과 아닌 사과의 말을 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기사들의 노고를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사랑에 빠진 눈길이라니. 그 모습은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보기에 모욕으로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힐끔거리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모른 척 넘어가기라도 하지.
심지어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멍청이도 한 손으로 다 세기 어려울 정도다.
자식들이 밀당이라는 말도 모르나!
오탄은 괜히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바벨의 정예 부대로 실력을 인정받아 나름대로 인기 있던 놈들이 저런 모습이라니. 누가 보면 한 십 년 여자 손목도 못 잡아 본 줄 알 것 아닌가.
“원래 저런 놈들이 아닌데, 은색 기사단의 활약이 퍽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스폴의 응답은 퍽 건조했다.
불쾌한 감정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담백한 반응.
그걸 느낀 오탄이 밝은 얼굴을 하고 스폴을 바라본다. 그와 반대로 이런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던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지. 저 스폴이 이 재밌는 순간을 저렇게 담백하게 넘길 리가.’
아니나 다를까.
오탄의 눈을 마주한 스폴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건 매우 온화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오만한 웃음이었다.
“우리 은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은 하나같이 매우 뛰어나죠. 덕분에 이런 눈길에는 익숙합니다. 남자라면 우리 예쁜이들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 그렇습・・・・・・ 니까?”
“물론입니다. 외부 행사가 있을 땐 항상 고백이 넘쳐납니다만, 받아들여진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희 예쁜이들의 눈에 들려면 실력과 인성, 외모, 가문 등 어느 하나 모자라서는 허락받을 수 없으니까요.”
“・・・실례지만, 누구 허락을 말씀하시는 건지?”
당장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따지는 것이 뭐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설마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두 그렇게 속물이란 걸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당연히 상급 기사들과 수석 기사인 저. 그리고 우리들의 단장과 최종적으로 주군이신 검후님의 허락이 있어야죠.’
그런데 차라리 당사자가 속물인 게 낫지 않을까?
고백을 허락받기 위해 통과해야 할 벽들이 하나같이 너무 높다. 더구나 최종적으로 검후의 허락까지 필요하다고?
‘이거 고백에 성공한 놈이 있기는 한 거야? 검후는 자신의 기사들을 모두 노처녀로 늙어 죽게 할 생각인가!’
오탄이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폴은 조금 더 짙어진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그래서 전 오히려 귀 부대원들이 걱정입니다. 애만 끓이다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이게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아니다. 오탄의 귀에는 ‘어디 플레타 부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명찰을 단 놈들이 귀한 은색 기사단에 찝쩍거리냐’는 말로 해석되어 들릴 뿐이다. ‘우리 부대원들이 어디가 어때서!’
물론 은색 기사단이나 같은 오색 기사단, 혹은 그와 같이 거론될 정도로 명성 높은 기사단처럼 유명하진 않다. 그러나 유명세 대신 가진바 실력에 있어서는 어디에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 속한 플레타 부대였다.
그런데 이런 무시라니!
오탄은 기분이 나빴다. 매우 나빴다. 이건 면전에 대고 실력이 모자란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 더 짜증이 났다.
실력, 외모, 인성 등을 본다고 하지만 결국 호감을 만드는 건 그 사람의 매력이다. 매력이 있다면 일단 눈이 가고, 그 후에 부차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게 순서.
그런데 스폴은 단호히 단장과 검후라는 선을 그어 버렸다.
다시 말해 스폴의 눈에는 플레타 부대원들이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한 명의 전사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스폴을 향해 반박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다.
여자 쪽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만큼 병신같은 짓거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녀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먼저 반한 쪽이 약자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약자들의 대표다.
‘이 욕망에 충실한 놈들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꼴이야!’
뭔가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기분에 부하들을 대한 원망을 품은 오탄이었다. 그렇게 흥분한 덕분에 그는 알지 못했다. 약자들의 대표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약자들의 대표는 마치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라울과 함께 이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물러간 모양이군요.”
라울이 파괴된 마법진을 보고는 말했다.
“마법사답게 판단이 빠른 자였습니다. 잡을 수 있었다면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애초에 여기 있던 그는 진짜도 아니었으니까요.’
아쉬워하는 이드에 반해 라울의 반응은 담백했다.
애초에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 와중에 플레타가 대단하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말했다.
“마법사를 잡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다시 보게 될 놈인데. 그보다는 명예 후작님의 활약이 놀랍습니다. 왜 최근 명예 후작님에 대한 소문이 대륙을 진동시키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네트나라는 괴물을 죽인 마지막 일격은, 정말이지. “
“……크으!”
플레타는 엄지를 쭉 내밀었다.
“별말씀을. 일 층에서 보여 주신 플레타 대장님의 기개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초인기를 억제하는 마법만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제가 나설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하하. 천하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동인데요?”
껄껄 웃는 플레타 옆으로 검후가 다가왔다.
그녀는 부상을 입은 기사들을 하나하나 살피느라 합류가 조금 늦었다.
그 모습을 봤던 이드가 물었다.
“은색 기사단의 부상자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중상자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부상은 있었지만 대부분 포션으로 대처가 가능했고, 조금 심한 부상은 여기 명예 후작 부인께서 마법을 사용해 주신 덕분에 깔끔히 나았습니다. 기사들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쉽네요. 1층에서처럼 마법사를 잡았다면 좋았을 텐데.”
깔끔히 포기한 라울과 달리, 검후는 파괴된 마법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라울보다 이드와 라미아의 능력을 더 잘 이해하고 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