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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88화


1323화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쉴라.

그런데 그 반대편에 선 라울의 표정은 아리송하다.

아무래도 그를 이해시키기에는 설명이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무인과 초인이라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문제는, 이드도 이 이상 상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는데, 말로 하는 건 자신 없다고…………….’

라미아에게 당했던 수많은 패배가 머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일리나에게 패하는 일도 많아진 것 같은 기분. 재회 후 얼마간은 자신의 말을 온전히 따라 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정신을 차리면 일리나가 하자는 대로 하고 있다.

라미아가 그녀를 물들인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요즘이다.

아무튼.

자신의 말솜씨도 문제지만 지극히 주관적이고 형이상적인 설명법은 무공의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라미아가 알면 ‘이걸 무공 탓으로 돌려요?’ 하고 놀릴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진지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다.

소수점 아래 숫자까지 체계화된 마법에 비하면 무공은 단어 몇 개가 달라도 정답이 될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공부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익히는 사람마다 그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인기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렴 초인기는 이해의 선을 넘었지.

그리고 이런 무공의 특성은 대도무문이라는 글자로 잘 나타난다.

자연히 이런 무공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도 주관이 많이 섞일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이번에 이드가 감지한 기감이 그렇다. 이건 일종의 감각 기관과 비슷하다. 코와 귀, 눈 같은 것 말이다.

그 대상이 간단하면 설명도 쉽다.

몇 명이 보인다. 쇳소리가 난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이렇게 답하면 되니까. 반대로 감각 기관에 들어온 대상이 복잡하면? 당연히 설명도 어려워진다.

식당 안의 그 수많은 냄새를 어떻게 간단히 설명할 건가. 더욱이 상대는 이 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이다.

장님을 대상으로 대가의 그림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림에 사용된 그 오묘한 색과 선, 그리고 붓의 터치를 도대체 무슨 수로? 그걸 말로 온전히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언변에 있어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좌우간 변명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온전히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 이유가 있지도 않다.

방금의 설명도 따지고 보면 배려였다.

이미 라울로부터 이번 공격의 핸들링을 넘겨받은 자신과 검후다. 자신과 검후가 정하면 바벨은 그저 따라와야 한다는 말이다. 바벨 보고 없는 길을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 앞장서겠다는데. 거기에 제동을 걸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즉, 이해를 바랄 필요도 없다. 결과를 보여 주면 되니까.

라울도 이런 점을 알기 때문인가. 굳이 추가 설명을 바라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보다는 옆에 선 플레타가 오히려 더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라울 때문에 나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자 이드는 손짓을 해 주변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주변 십 미터가 텅 비었다.

다만 한 사람, 라미아는 물러나지 않고 옆에 서 있다.

“왜 일리나 옆에 안 있고?”

“내가 이드의 속을 몰라요? 내가 필요하잖아요.”

“흐흐, 들켰네.”

역시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라미아답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잘 알아주지 않는가.

“아무래도 일라이져로 하기에는 힘들고 섬세한 작업이니까.”

까딱 잘못하면 영혼의 관을 관통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나쁜 방법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이드의 목표인 바이트 타블렛이 파괴된다면 말이다.

문제는 바이트 타블렛과 탑주가 멀쩡할 경우다.

“당연하죠. 일라이져로는 무리라고요.”

에헴, 하며 가슴을 편 라미아가 자랑스러운 듯 말한다. 이제는 이드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검이라는 근원에 대한 자부심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거 문제없겠지?”

“문제가 없을 순 없죠. 하지만 큰 파도는 모든 걸 삼켜 버리는 법이죠. 강하게 쓸어버려요. 대신, 적당히 해야 해요.”

강하지만 적당하게.

극히 어울리지 않는 말. 그런 만큼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만은 없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해볼 만하다고 판단해서 하는

일이니까.

“강하게 쓸어버리는 거라면 자신 있지. 맡겨 둬.”

말과 함께 손을 내밀자 라미아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 손안으로 스며든다.

“12대식으로 할 거예요?”

“아니, 그쪽은 이런 일에 쓰기에 출력이 너무 강해.”

12대식을 사용할 것이었으면 도미노를 예로 들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상층으로 뻗어 나간 기감이 아니었다면 얌전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장을 뚫자고 한 건 즉흥적인 결정에 가깝다.

“그렇기는 하죠.”

“그럼 뒤로 물러나 있어. 뒤에서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까.”

사람들을 물려 놓고 두 부부가 갑자기 손을 잡고 가만히 있어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에 라미아가 작게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을 거둔다.

스르르릉.


플레타가 라울의 팔을 툭 친다.

“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 같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는 들을 수 있으니까. 분명 이 정도 거리면 들려야 하는데, 아무리 해 봐도 나는 안 들리거든.”

플레타의 말에 라울의 시선이 한심하다는 듯한 모양새가 된다.

“들을 수 있어도 그럴 것 같냐? 몰래 엿듣다가 들키면 참 분위기 좋겠다, 그치? 이 자식아,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궁금하니까 그렇지. 어? 손은 또 왜 잡아?”

라울의 타박에도 눈치 없이 궁금증만 키워 가는 플레타. 어떻게든 뭐 알 수 있는 게 없을까 눈을 가늘게 뜰 때다.

스르르릉,

쇳소리보다는 악기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이드의 손에 검 한 자루가 들려졌다. 은은한 붉은색에 기품 있고 화려한 검.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운 모습에 검의 외형이 뇌리에 와서 박힌다.

“허!”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트리는 플레타. 그뿐 아니다.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슨 저주받은 마검처럼 사람들을 잡아끄는 검.

초인인 동시에 한 사람의 검사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플레타는 그래도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이라고 곧 정신을 차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젠장, 어마어마하네. 직접 잡아 본 것도 아닌데, 손이 저릿저릿할 지경이야. 그런데 방금 저 검, 명예 후작 부인의 손에서 나온 거 같은데. 봤냐?” 

“못 볼 수가 없지.”

“마법이겠지?”

“명예 후작 부인이 초인이라는 말은 못 들었으니, 마법이겠지. 아마 저 검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 두고 있는 걸 거다.”

삐딱한 라울의 말에 오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플레타는 대장을 우습게 보는 부대장에 눈을 부라려 준 후 말했다.

“저런 마법은 부럽네. 그나저나, 검은 왜 굳이 새로 꺼낸 것 같냐? 이미 가지고 계신데. 좀 작긴 하지만.”

플레타의 눈이 허리에 걸린 일라이져를 스친다.

분명 작긴 하다. 플레타의 대검에 비하면 정말 단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단검조차 쉽게 본 적이 없다. 묘하게 밝고 성스러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게, 아무리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저 단검도 그렇고 지금 꺼내 든 장검도 그렇고.

평범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할까.

“쓸 데가 있으니까 꺼낸 거겠지. 왜, 부럽냐?”

“솔직히…… 부러워 죽을 거 같다.”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심정이 절절히 나타나 있는 얼굴.

그 꼴을 본 라울이 혀를 차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행여나 엉뚱한 소리 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싯펄, 내가 무슨 병신인 줄 아냐. 그 정도 분별은 있거든.”

사실 어지간한 상대라면 바벨의 이름을 앞세워 압력을 넣으면 그럭저럭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눈앞의 인물은 그런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다. 무려 제국의 명예 후작이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다.

거기에 더해 바벨과는 협력 관계에 있으며, 지금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 상대에게 검을 팔라고 강요한다?

그야말로 사리 분별을 하고 못하고 이전에 인간이 안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플레타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닥치고 준비나 해라. 저런 특별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면 정말 최상층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뒤로 처지는 추태는 보이지 말아야지.”

가벼운 헛소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라울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플레타는 입을 꾹 다물고 검자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언제라도 뽑아 휘두를 수 있도록.

그런 한편으로 두 눈을 이드와 그 손에 들린 검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천장을 뚫어 낼 것인가.

그리고 저 검은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내 똑똑히 지켜보고 만다.’

플레타는 그 과정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지금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상대도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가능하다는 소리인데, 그 방식이 무엇일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 만큼 보나 마나 무공일 것이다.

더욱이 검을 손에 들었지 않은가. 과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어떤 마법같은 검기를 보줄 것인가. 같은 검사로서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은가.

지금부터 상대가 보여 줄 무공에서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지.

‘시작된다.’

때마침 이드의 손에 든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체를 꺼내 놓고 껍데기만 남은 라미아가 일리나 옆으로 이동한 후,

이드는 라미아를 가볍게 휘둘렀다.

사악.

사아아악.

오랜만이지만 익숙하게 손에 감기는 감각.

그와 함께 공기를 베어 내는 감각.

기분 같아서는 흥이 나는대로 좀 더 휘두르고 싶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시작할게.”

라미아에게만 작게 속삭인 이드가 허공을 그었다.

휘잉-

그 자리를 따라 붉은 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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