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1화
1406화
라울은 천천히 걸었다.
빌려 입은 옷이 스칠 때마다 햇살을 닮은 은은한 향이 올라왔지만, 정작 옷을 입은 그는 깨닫지 못했다.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의 손에 완성된 초인 마법.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명예 후작 부인이 초인 마법을 완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바보 같은 의문이었다.
라미아는 말했다. 한번 시작된 의식은 중간에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러나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혼자가 된 지금에서야 무겁게 떠오르는 의문.
그에 라울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진짜겠지. 명예 후작에게는 굳이 이런 일로 나와 바벨을 기만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어차피 찾으면 밝혀내지 못할 진실도 아니었다. 세상에 마법사가 명예 후작 부인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런 의심이 솟는 것은 아쉬움 때문이리라.
명예 후작 부인이 초인 마법의 완성을 막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녀에게는 꼭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은 없다. 더욱이 얼마나 클지 모를 대마법의 반동을 감당하면서까지는 더더욱이 그렇다. 초인 마법은 어디까지나 초인의 위치와 권익에 관련된 문제일 뿐.
명예 후작 부인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할 이유도 의리도 없는, 그야말로 남의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초인 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바벨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마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제는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일. 그러자 또 하나의 의심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명예 후작 부인이 완성한 초인 마법은 안전한가 하는 점이다.
그녀가 완성한 초인 마법에는 과연 미완의 마탑과 같은 독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한가.
차마 명예 후작 부인의 면전에 대고 내놓지 못했던 질문이다.
사실과 상관없이, 어차피 그녀가 들려줄 대답은 정해져 있을 테니까. 괜히 서로의 관계만 어색해질 뿐.
그렇기에 라울은 그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선명하고도 분명한 확인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그런 독이 포함되어 있다면…….’
가정과 함께, 여러 가지 대책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라울은 그런 잡념을 애써 털어 버리고는, 당장 자신과 바벨이 최선을 다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오늘 세상에 태어난 초인 마법에 관한 확인 작업.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도망친 부관주와 그녀가 데려간 초인 마법사들이 필요하다. 다른 놈들이 손대기 전에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확보해야 해. 반드시.’
후원자로서 그간 미완의 마탑의 연구 결과 일부를 공유받은 바벨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생명의 관 토벌을 통해 비밀리에 확보한 초인 마법사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런 어중간한 것에 기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철저하고, 철저하고, 또 철저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 초인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탑주가 죽어 버린 시점에서 초인 마법의 최고 권위자는 도망친 부관주 말고는 없다.
플레타가 잘 처리했다면 이미 추적대가 만들어졌겠지만, 이젠 그 규모를 최대한 확대할 필요가 생겼다.
‘이번에야말로 총수의 총동원령이 필요하겠어. 제국을 지원할 인원을 제외한 모두를 탐색에 투입한다.’
라울은 이미 한참 멀어진 저택을 돌아보고는 발길을 옮겼다. 할 일이 정해진 그의 걸음이 매우 빨랐다.
황제를 배웅하고, 라울을 쫓아낸 저택에는 거주자들만 남았다.
밤을 샌 거주자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은색 기사단의 대부분은 잠이 든 상태였다.
이드도 두 아내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끄아아~ 좋다.”
몇 날 며칠 잠자지 않아도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역시 침대가 좋다.
그런 이드 옆으로 일리나와 라미아가 냉큼 파고들었다.
이드는 사랑스러운 두 아내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고생했어요. 오늘 두 사람 다 굉장히 멋졌다는 것 알죠?”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어요. 고생은 이드와 라미아가 했죠.’
건조할 정도로 서로의 역할에 대해 평가하는 일리나의 모습에 이드는 바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처럼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진실을 기준으로 하는 그녀는 역시 엘프가 맞다.
그런데 이런 부분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은 역시 내 사람이기 때문일까.
“틀려요. 나와 라미아가 그렇게 걱정 없이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게 전부다 일리나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러니 일리나의 공도 절대 작은 것이 아니라고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손을 드는 라미아. 장난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일리나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다시 옆으로 파고드는 라미아의 어깨를 감싼 이드는 천장에 가득한 문양을 올려다봤다.
장미 넝쿨로 보이는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천장의 문양.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걸 저기다 새긴 건지 모르겠다.
보고 있으면 머릿속까지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낮에 침대에 누워 올려다볼 일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래서야 편히 잠을 잘 수 있을까?
“무슨 생각 해요?”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라미아가 묻는다.
“아무것도. 그냥 천장에 새겨진 문양을 봤어. 그나저나 당분간 제국은 소란스럽겠지?”
“그 정도겠어요? 검왕의 목이 떨어지는 날은 여기 안티로스가 뒤집힐걸요?”
“소드 팰러스 출신의 기사들이 많이 달려올 거예요.”
일리나가 라미아의 말에 덧붙인다. 그리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혹시 반역이 있을까 봐 걱정되는 건가요?”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지구에서 봤던 유명한 고양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역만큼 명분이 중요한 일이 어딨다고 그걸 걱정하겠어요. 무엇보다 황제와 검후인데. 걱정 같은 거 전혀 하지 않아요.”
“그럼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한동안 복잡할 안티로스에서 같이 정신없기보다는 잠시 떠나 있는 게 어떨까 하고.”
“시르피가 싫어할 것 같은 말이네요.”
“싫어도 어쩔 수 없죠. 어차피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존 워스를 잡았으니, 더 이상 이 제국에는 볼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정확히는 제국에 숨어 있는 혼돈의 파편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혼돈의 파편이 넷. 남은 놈들을 찾기 위해서는 제국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음, 어쩐지 이드가 어딜 가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카논이죠?”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미소로 답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나라가 문제의 핵심이니까요. 결국 계약의 이행을 위해서는 카논이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그런 거대한 제국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심이 필요하죠.”
“존 워스 같은?”
“음, 그보다는 존 워스의 전력에 검왕의 야망을 탑재한 인물이 적당하겠네요. 그래 봤자 껍데기일 뿐이겠지만요.”
“틀린 말은 아닌데, 과연 그렇게 티 나게 전면에 나설 것 같아요?”
콕! 코코콕!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 눈빛을 쏘아 보내는 동시에,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대는 라미아.
이드는 찔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라미아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노린 것이 이런 반응인 모양이다. 오히려 키득거리며 좋아하는 라미아.
“저라면 우선 조용히 이드의 움직임을 살필 것 같아요. 벌써 둘이나 소멸당했잖아요. 어쩌면 이제는 놈들도 이드를 두려워하고 있을지 몰라요.”
이전까지 혼돈의 파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는 낮잠과 같은 것일 뿐이었다. 아니, 기절에 가까운가?
아무튼, 부활이 정해진 그들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이드는 달랐다.
차원의 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드가 내리는 죽음은 혼돈의 파편에게 더 이상의 ‘부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정한 죽음. 삶의 끝.
존 워스는 자신이 존 워스로 살아가며 너무 인간을 닮아 버렸다고 말했다. 다른 혼돈의 파편에는 그런 영향이 없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원 같은 시간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삶다운 삶을 살아 본 혼돈의 파편에 있어 죽음이 과연 두렵지 않을까.
물론 이드의 생각도 같았다.
“난 다르게 생각해. 삶에 대한 집착, 두려움. 그런 감정적인 부분이 조급함을 만들어 내는 법이거든.”
삶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혼돈의 파편.
이드의 생각은 그것이 두려움이 되어 숨으리라는 라미아의 의견과 반대였다.
살고 싶기 때문에 도리어 더욱 매달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이 세계는 그들에게 안전하지 않아. 현재 그들에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계약을 이루고, 이 세계를 파괴한 후에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는 거지. 이런 모든 과정에서 굳이 나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
혼돈의 파편이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드뿐이다. 혼돈의 파편 입장에서는 굳이 이드에 집착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굳이 찾자면 이드의 손에 죽은 메르시오와 존 워스인데 과연 그들에게 동료로서 그만한 애정과 의리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
“흐음. 분명 이드의 말대로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드의 생각에는 한가지 오류가 있어요.’
말과 함께 검지를 펼쳐 까딱거리는 라미아. 마치 풀이 과정 중에 하나의 실수를 저지른 학생을 앞에 둔 선생의 모습과 비슷하다.
“선생님, 제 오류가 뭔가요?”
“잘 들어요, 이드 학생, 학생의 생각도 틀리진 않아요. 그 대상이 일반인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혼돈의 파편은 어떻죠? 우선 인간이 아니에요. 오히려 마족이나 드래곤에 가깝죠. 과연 그들에게 인간과 같은 조급함이 있을까요? 혼돈의 파편 입장에선 그냥 한 천 년 정도 숨어 버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봐요.”
“……그건 매우 곤란합니다. 선생님.”
이드는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수십, 수백도 아니고, 시작부터 천 년 단위로 숨바꼭질을 한다고? 인간의 입장에선 그건 영원이나 마찬가지다.
몇 번의 환골탈태를 거치고 그레이드론으로부터 드래곤의 인자를 받은 이드다.
하지만 그도 과연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는가에는 자신이 없다. 신체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과연 그 영원과 같은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이드가 불쌍했던지 라미아가 진정하라며 이드의 가슴을 두드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니까. 너무 놀라지 말아요. 사실 이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해요. 우리만 그들을 쫓는다면 또 모를까, 머지않아 드래곤들이 돌아온단 말이죠.”
“그렇지!”
잊고 있던 사실에 이드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