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3화
1428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게 어디 빛나는 심판자인 동시에 냉혹한 사신인 검후를 목전에 둔 사람이 할 소린가.
‘도대체 우리 이야기를 듣기는 한 거야?’
최악의 경우 오늘이 끝나기 전에 처형당할지도 모르게 생겼는데.
아무렴 그에게 검왕과 같은 현명한 대처를 바란 건 아니라지만, 최소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마르텔은 여유가 사라진 이들보다 위에 있었다.
쿵!
무어라 대책을 강요하려던 사람들은 제대로 말을 하기도 전에 대전에서 쫓겨났다.
자신이 검후와 접촉을 해 보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무어라 불만을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코랄 경은 무슨 일로 남으라 한 것일까요?”
“연락책으로 쓰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연락책은 물론, 설득을 위해서도 그만한 사람이 없지요.”
다수의 사람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회의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말솜씨가 훌륭해 봤자 코랄 한 사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낙관적인 사람이라도 현 상황은 좋게만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옳은 선택일까요?”
“그렇지 않으면요?”
“지금이라도 검후를 피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차마 대놓고 도망치자는 말은 하지 못하고, 애써 돌려 말하는 어느 기사의 말.
“흔들리는 건 알겠는데, 그런 문제는 혼자 결정을 하세요. 괜히 동지들을 흔들지 마시고. 떠나는 걸 막지는 않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꺼냈던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순간순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모두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듯 우울한 얼굴들 가운데, 극소수.
마치 오랜 숙제를 끝낸 듯 편안한 얼굴을 한 기사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숙인 남자를 불렀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건 정상입니다. 하지만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해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괴롭기도 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
어찌어찌 도망에 성공한다고 해도 과연 마음 편히 살 수 있을까. 도망자 인생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남자가 던진 말에 도망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몇몇이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다. 끈적끈적 달라붙는 미련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는 순간이었다.
끼익.
“아직 여기에 계셨습니까?”
그 순간, 굳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며 코랄이 나왔다. 그는 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모습이다.
“당연하지 않나. 검후와 접촉하겠다고 한 뒤에 자네만 남겼는데.”
“바로 우리 미래가 걸린 일인데, 조급증이 나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블러디 혼은 뭐라시던가? 우리 짐작대로 자네를 연락책으로 쓰시겠다던가?”
코랄은 자신을 잡고 매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내심 한숨이 나왔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다. 아무리 시야가 좁아졌다고 해도 그렇지, 적이 지척에 닿았다면 대응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인데.
아직도 갈팡질팡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말이다.
그래도 대전에 들었다면 나름 인정받는 기사들일 텐데, 그런 자들의 능력이 겨우 이 정도라니.
‘아니면 검후의 존재감이 너무 큰 것일지도.’
뭐,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수 시간 후면 자신이 직접 확인하게 될 텐데.
그런 현실을 다시 떠올린 순간, 입이 바짝 말라 왔다. 급한 일이 없음에도 조급한 마음이 들고,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상태를 깨달은 코랄은 헛웃음이 났다.
과연 심신의 상태가 이렇다면 눈앞의 인간들이 멍청하게 변한 것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
“어허, 답답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답을 해 주시게.”
“혹시 블러디 혼께서 비밀로 하라셨나? 하지만, 이건 우리도 알아야 할 일이지 않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일단은, 예. 맞습니다. 제가 검후께 블러디 혼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빌어먹게도 결단코 스스로 원한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코랄.
그를 정신없게 만든 것은 눈앞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모두를 내보낸 후 자신을 향한 마르텔의 한마디.
“검후의 죽음이 목적이냐.”
“흡!”
너무 충격적인 말에 코랄은 표정 관리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상황을 어떻게 읽으면 검후의 죽음이 목적이냐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린가. 방심하지 않은 검후를 자신들이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인가.
윗선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은 그런 맹세코 그런 상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
‘역시 우리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구나.’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면 저와 같은 터무니 없는 질문을 꺼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코랄은 잠시 갈등했다.
질문에 답할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 연기를 할 것인가.
짧은 고민 후 결정을 내린 코랄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다만 제게 내려진 임무에 그와 관련한 내용은 없습니다.”
“좋아. 부정하지 않는구나.”
흐흐.
맹수처럼 웃는 마르텔에 코랄이 마른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아시고 물으셨잖습니까.”
“그렇지.”
“만약 제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했다면.
퍼석!
“뻔한 걸 묻는군. 대가리가 부서졌겠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대답에 코랄은 다리에 힘이 풀릴뻔했다.
맹렬한 역도가 스치고 지나간 어깨는 저릿저릿했고, 뒤쪽에 석벽의 일부가 부서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코랄의 귀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 어떤 식의 공격이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마르텔이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미동조차 없다는 것이다. 삼검왕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넌 꽤 감이 좋다, 애송이.”
“감사…… 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내가 필요해서 살려 둔 것뿐이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까?”
바짝 긴장한 코랄이 물었다.
과연 마르텔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 모습에 마르텔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거부할 테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사단이 맡은 임무를 방해하는 일이라면 따를 수 없습니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답하는 코랄.
기개가 엿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코랄에게 돌아온 것은 마르텔의 차가운 코웃음이었다.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네놈들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라 줬을 성싶나. 밖에 있는 저 멍청이들을 끌고 온 것이 너라는 사실을 벌써 잊은 모양이지?”
“………”
마르텔의 조롱에 코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이다. 마르텔의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임무는 자신이 아닌 마르텔이 성공시킨 것이라고 봐야 옳았다.
만약 그때 마르텔이 나서기라도 했다면, 기사단의 계획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코랄의 기세가 꺾이는 걸 확인한 마르텔은 그제야 미루고 있던 질문 하나를 꺼내 놓았다.
“검후를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라고 했겠다. 그러면 검후의 발을 묶는 것이 목적이냐?”
“일단은 그렇습니다.”
“네가 몰고 온 놈들은 대부분이 쭉정이들이었다. 진짜는 따로 빼돌릴 셈이겠지?”
“그렇・・・・・・ 습니다.”
“진짜를 위한 눈가림용이라. 불쌍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구나.”
“………”
코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단숨에 간파한 것도 놀랍지만, 기사단의 목적을 이렇게 속속들이 꿰뚫고 있을 줄이야.
눈앞의 성난 황소가 사실은 교활한 오우거라는 걸 알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 쭉정이들 속에 내가 들었다는 것도 눈물이 날 정도로 재밌어. 그렇지?”
“………”
도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인가.
코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마르텔은 상관없다는 듯 자기 말을 이어 나갔다.
“당연히 페시딘의 명령이겠지?”
“………”
코랄은 이번에도 답을 포기했다. 오늘 들었던 질문 중 가장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냉정한 놈이야. 아무리 내가 남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뼛속까지 이용해 먹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명백히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이다.
그에 계획의 실패를 예감한 코랄이 즉시 마르텔의 기분을 돌리기 위해 나섰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주군께서 결코 그런 뜻에서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만, 헛소리를 하려거든 문밖에 있는 멍청이들에게나 하고. 너는 내 옆에서 일을 하나 해야겠다.”
“명령하십시오.”
“그래. 좋은 자세다. 페시딘이 빈기사단의 주군으로 불리지만, 빈기사단을 만드는 일에 나 또한 힘을 더했음을 잊지 마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군이 둘일 수는 없는 법이라는 사실도.
“좋다. 그럼 너는 이대로 검후를 찾아가서 이 말을 전해라. 내 죄를 청산할 기회를 달라고.”
“그게 무슨!”
“질문을 허락한 적 없다. 그냥 들어라. 계획을 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네놈들이 원하는 대로, 여기 모여 있는 쭉정이들과 함께 장렬히 산화되어 주겠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고?
코랄은 마르텔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죄의 청산’이라는 말부터 기묘하지 않은가. 그건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는 소리다.
더욱이 ‘청산할 기회’라 하면 보통 자신이 벌인 잘못을 정리하고 스스로 벌을 받는 것을 일컫지 않는가.
마르텔의 죗값을 따지면 죽음 말고는 제대로 치를 수 없다.
다시 말해 조금 전 말의 의미는 자결하겠다는 뜻인데, 그렇게 될 경우 자신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마르텔이 죽어 버린다면 여기 남은 놈들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다. 모르긴 몰라도 마르텔의 시체 앞에서 죽도록 욕설을 퍼붓고는 검후의 발아래 엎드려 엉엉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마르텔은 이럴 코랄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미리 말하지만, 네놈의 하찮은 대가리로 날 재단하지 마라. 나는 한 번 한 말은 지킨다. 그러지 못한 적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친구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용맹한 죽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