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82화
이드는 앞에 서 있는 중년 차레브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자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저런 말투와 분위기로 어떻게 외교에 재능이 있다는 건지, 바하잔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마 저 딱딱함으로 상대를 굳혀버린 후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건가?
“네, 처음 뵙겠습니다. 차레브 공작님. 제가 이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뚝뚝하다 못해 돌덩이가 말하는 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음, 바하잔이 어리다고는 했지만…”
이드는 그 말에 싱긋 웃으며 바하잔에게서 받았던 봉투를 꺼내 차레브에게 건넸다.
“어리다고 못하는 건 없죠. 그리고 그건 바하잔 공작님이 전하는 메시집니다.”
“음, 그것도 그렇군.”
차레브 공작은 다시 한번 이드들을 굳혀버릴 듯 딱딱한 말을 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봉투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들었다.
원래는 조용한 곳에서 읽어야 했겠지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지 봉인도 되어 있지 않은 편지였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뜯었다.
게다가 타국에 도움을 청하러 온 처지에서 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차레브 공작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집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던 샤벤더 백작이 다가왔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들 가세나. 차레브 공작께서도 들어가시지요.”
그 말에 차레브 공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말아 쥐었다. 그러자 주홍빛의 빛이 일렁이는 것과 함께 편지가 재 한 톨 남기지 않고 소멸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크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차레브가 보여준 재주는 소드 마스터 중 하위 급에 속한 자라면 가능한 기술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정도 수준은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드의 옆에서 대단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카리오스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시종들은 예외였다.
원래 이 기술은 검기 사용자들이 손에 쥔 물건에다 검기에 검기를 형성시키듯 마나를 불어넣어, 물건이 가진 고유의 마나 한계량을 한꺼번에 넘겨버리는 기술이다.
그렇게 되면 물건은 넘쳐나는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거나 가루로 부서지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차레브처럼 재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존재는 그를 제외하고 둘뿐이지만 말이다.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 게다가 내공력 역시 청정해 보이고, 정파 쪽에 가까운 내공력이라고 해야 하나?
허기사, 그게 저 아저씨 성격하고 딱이겠구만. 무뚝뚝한 정파와…’
이드가 차레브를 보며 그의 실력을 평가하고 있을 때, 이드 옆에 걷던 지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분 대단한데, 마스터 오브 파이어(Master of Fire)를 사용해서 재도 남기지 않다니… 저 기술 몇 번 보긴 했지만, 저렇게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처리하는 건 처음 봐. 저 차레브라는 공작이라는 사람도 그레이트 실버겠지?”
이드는 지아의 물음에 이미 생각하던 것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의 삼매진화의 수법과 힘이라면, 화경(化境)의 극의를 깨우친 사람이거나 현경(玄境)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드가 보아온 그레이트 실버들 중 몇몇의 실력도 화경과 현경에 속했다.
지아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의 모습에, 이드와 지아 뒤에서 걷던 칸이 일행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그레이트 실버라…. 지난 8, 900년 동안 공식적으로 두 명밖에 기록되지 않은 그레이트 실버가 지금은 내가 본 수만 해도 5, 6명이라니. 이번 전쟁은 어떻게 된 게 이런지. 진짜 목숨 부지하려면 실력보다는 운을 믿어야겠는데… 날 잡아서 메이소우(평안과 명상, 행복을 다스리는 신)님의 신전에 들러야겠어.”
장난스러운 칸의 말에 모리라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렇지. 괜히 이런 스케일 큰 전투에 멋모르고 잘못 끼여들면 진짜 우습게 죽을 수 있다니까.”
일행인 용병들의 말에 이드 옆에 있던 카리오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카리오스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칸과 모리라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기사도를 배우며 자란 공작 가문의 아이인 데다가, 그레이트 실버 간의 전투를 직접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검을 들었으면 기사답게 정정당당히 싸워야지.”
세상물정을 모르는 풋내기 기사 같은 카리오스의 말에 라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카리오스님, 그것도 어디까지나 서로 실력이 비슷하거나 덤벼서 가능성이라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보여야 하죠. 평범한(?) 소드 마스터 녀석들이라면 어찌 해보겠지만, 그레이트 실버 급이라면…”
라일이 말을 끊자, 어느새 이쪽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샤벤더 백작이 은근히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카리오스 역시 무슨 말인가 하고 라일을 재촉했다.
주위의 재촉에 라일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건데… 카리오스님, 비록 저희가 그레이트 실버와 싸워 보지는 못했지만, 옆에서 그들의 전투를 관전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땠는지 아십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라일 역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지만, 그때 그레이트 실버 급이 싸우는 전투 현장에서 2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 쇼크 웨이브에 죽을 뻔했습니다. 아, 그렇게 황당한 표정 하지 마십시오. 정말이니까요.
그때 일행에 소드 마스터가 7, 8명 정도 있고 마법사가 세 명이나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쇼크 웨이브에 멀리 날아가거나 몸이 부서졌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그레이트 실버와 정정당당히 싸우라고요? 그건 용기나 기사도가 아니라 미친 짓입니다.”
라일의 말이 끝나자 카리오스는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혹시, 그거 고 서클의 마법사들을 말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검사들끼리 싸우는데 그 쇼크 웨이브로 날아갈 뻔하고 죽을 뻔했다는 거야?”
카리오스의 말에 옆에 있던 지아와 칸이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실 그들도 그 전투를 보기 전에는 검사들끼리의 싸움에서 발생하는 쇼크 웨이브로 죽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느 용병은 그때 죽었으면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가일라의 용병 조합에 갔다가 그 말을 처음 했을 때도 엄청난 웃음거리가 됐다고 하니 말이다.
라일 역시 그런 카리오스를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으려 했다.
그때, 라일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백작이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하려던 순간,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정원으로 뛰어들어왔다.
기사는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덕분에 기사는 간단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샤벤더 백작 역시 기사의 얼굴에 떠 있는 다급한 표정을 보고는 그의 행동을 탓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손님이 계시는데.”
샤벤더의 말에 기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카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샤벤더 백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교전 중인가?”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곧바로 벌어질 듯합니다. 카논 측은 그리프 베어 돌(슬픈 곰 인형)의 움직임에 맞추는 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으니 아마도…”
기사가 말을 마치자 샤벤더에 이어 차레브 공작의 딱딱하던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스톤 고렘이 보면 아마도 형제라 할 정도였다.
“그리프 베어 돌, 그녀가 움직였단 말인가.”
샤벤더가 급하게 물었다.
“예.”
샤벤더는 그 말을 듣고는 곧바로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급히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자네들이 여독을 풀 시간이 없겠구먼.”
샤벤더의 말에 토레스들이 가지고 있던 약간의 짐을 하인들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게다가 여독이랄 것까지야. 먼 거리긴 하지만 모두 텔레포트로 왔으니 전혀 피곤할 것 없습니다.”
이드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카리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 저으며 샤벤더와 차레브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카리오스에게 남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앞서가는 붉은 갑옷의 기사를 바라보는 카리오스를 보고는 포기했다.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도 말리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눈을 초롱초롱히 빛내는 때라면 아마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샤벤더를 향해 토레스가 물었다.
“백작님, 그런데 그 그리프 베어 돌이라는 게 누굴 지칭하는 겁니까?”
토레스의 말에 샤벤더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급히 발을 옮기며 대답했다.
“곰 인형을 품에 안고 다니는 소녀, 바로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이며 현 상태의 저희 최대의 적입니다.”
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작게 되뇌었다.
“여섯 혼돈의 파편 중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