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0화 : 가련하다 백문루(白門樓)의 주종(主從)
가련하다 백문루(白門樓)의 주종(主從)
한편 조조는 손쉽게 서주를 얻게 된 걸 기뻐하면서 다음 날 다시 여러 장수와 함께 하비성을 칠 일을 의논했다. 모사 정욱(昱)이 나 서서 말했다.
“이제 여포에게는 하비성 하나가 남았을 뿐입니다. 만약 너무 급 하게 조이면 반드시 죽기로 싸우다가 원술에게 투항해버릴 것입니 다. 여포가 원술과 합세하면 그때는 참으로 치기 어렵게 될 것이니 먼저 그것부터 막아야 합니다. 싸움에 능한 장수를 뽑아 회남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십시오. 안으로는 여포가 그리로 달아나는 걸 막고, 밖으로는 원술이 여포를 구하러 오는 걸 지킬 수 있을 것입니 다. 뿐만 아니라 산동에는 아직 장패(臧), 손관(孫觀)의 무리가 귀 순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방비 또한 소홀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한치의 빈틈도 없는 헤아림이었다. 이에 더 논란 할 것도 없이 거기에 따르기로 하고 유비에게 말했다.
“나는 산동에 남은 여러 갈래의 적을 방비하며 하비성을 치겠소. 바라건대 현덕은 회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아주시오.”
유비도 기꺼이 그 말에 따랐다.
“승상께서 그렇게 영을 내리시는데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날로 미축과 간옹을 서주에 남겨둔 채 손건과 관, 장 두 아우를 데리고 회남으로 가는 길목을 막으러 떠났다. 조조 또한 한편으로 산동에 남은 여포의 졸개들을 방비하면서 하비성을 공격 하러 떠났다.
이때 하비성의 여포는 식량이 넉넉한 데다 성을 둘러싼 사수가 깊은 것만 믿고 마음이 느긋했다. 가만히 앉아 지키기만 해도 별걱 정 없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여포를 진궁이 깨우쳤다.
“조조의 군사는 이제 막 다다라 아직 진채며 목책을 제대로 갖추 지 못했습니다. 그 틈을 노려 치면 못 이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군사는 이미 여러 번을 거듭 패해 가볍게 성을 나가 싸울 수 없소. 오히려 적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 되받아치면 깨끗이 사 수로 쓸어넣어 버릴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진궁이 거듭 나가 싸울 것을 권해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조조의 군사들은 이미 진채를 다지고 목책 을 엄정하게 세워 자리를 잡고 말았다. 진궁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여포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었다.
대군이 아무런 방해 없이 진채를 내리고 안정되자 조조는 무리를 이끌고 성 아래로 와 큰 소리로 여포를 불렀다. 여포가 조조의 말에 대꾸하러 성벽 위로 몸을 드러내자 조조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가 듣기로 봉선(奉先)이 다시 원술과 혼인을 추진하려 한다기 에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오게 되었소. 원술은 스스로 존호(尊號)를 쓴 반역자로 큰 죄가 있고, 공은 오히려 전에 동탁을 토벌한 공이 있 소. 그런데 어찌하여 앞서 세운 공을 스스로 버리고 역적을 따르려 하시오? 만약 성이 깨뜨려지는 날이면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이오. 일찍 항복하여 함께 한실을 받드는 게 어떠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이미 봉해진 제후의 자리를 잃지 않고 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목소리는 부드러워도 속셈은 빤한 생트집이었다. 원술과의 혼인 은 바로 그 조조와 손잡음으로써 깨어지고 그 뒤로 다시는 거론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조는 난데없이 그 혼인을 구실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만한 이치였으나, 여포는 그 같은 조조의 타 이름에 슬며시 마음이 움직였다.
“승상께서는 잠시만 군사를 물려주시오. 여러 사람들과 의논해보고 답을 드리겠소.”
그리고 정말로 항복할 뜻이 있는 듯 좌우를 돌아보았다. 이때 여 포 곁에 서 있던 진궁이 그런 여포는 쳐다보지도 않고 한 걸음 나서 며 성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조조, 이 간사한 도적놈아! 무슨 개수작이냐?”
그런 다음 노한 기색으로 올려다보는 조조에게 화살 한 대를 쏘아 붙였다. 화살은 똑바로 조조가 둘러쓰고 있는 깃털 덮개(일산)에 내 리꽂혔다. 잘만 되면 힘들이지 않고 여포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젖었던 조조가 원한에 차 진궁을 가리키며 소 리쳤다.
“내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그리고 군사들을 몰아 급하게 성을 들이쳤다. 진궁은 조금도 두려 워하지 않고 뚱해 있는 여포에게 다시 권했다.
“조조는 멀리서 왔으니 그 기세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 께서는 보졸과 기마대를 이끌고 성을 나가 진세를 벌이십시오. 저는 나머지 무리와 함께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안에서 지키겠습니다. 조 조가 만약 장군을 공격하면 저는 군사를 내어 그 등을 치고, 반대로 성을 공격하려 들면 그때는 장군께서 뒤에서 그를 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보름이 지나지 않아 조조의 군사들의 식량이 다할 것이니 그 때는 북소리 한번으로 흙덩이 부수듯 조조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습 니다. 바로 사슴을 잡을 때처럼 앞에서 뿔을 잡고 뒤에서 다리를 붙 드는 형세[埼角之勢]가 그것입니다.”
여포도 싸움을 아는 자라 들어보니 그럴 법했다. 항복할 마음을 깨끗이 버리고 힘이 나 대답했다.
“공의 말이 옳소. 그렇게 하리다.”
때는 마침 한창 추운 겨울이었다. 군사를 성 밖으로 내려고 보니 솜옷이 많이 필요했다. 여포는 성안에 영을 내려 갑옷과 솜옷을 거 두어들이는 등 성을 나갈 채비를 하게 했다.
여포의 아내 엄씨가 소문을 듣고 나와 여포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려고 그러세요?”
“군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가야겠소.”
여포가 그렇게 대답하고 진궁이 낸 꾀를 대강 일러주었다. 엄씨가 펄쩍 뛰며 여포의 소매를 잡았다.
“당신이 성과 처자를 모두 남에게 맡기고 많지도 않은 군사와 멀 리 나갔다가 만약 성안에 변이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번에는 결코 장군의 아내로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귀가 엷은 여포는 다시 마음이 떨떠름했다.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사흘이 지나가버렸다. 기다리다 못한 진궁이 다시 여포를 찾아와 재촉했다.
“조조의 군사가 성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빨리 나가 성 안과 기각의 세를 만들지 않으면 반드시 고단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 멀리 나가는 것보다 굳게 지키는 편이 나을 것 같소.”
그 말에 진궁은 애가 탔다. 한층 더 간곡하게 여포를 달랬다.
“근자에 들으니 조조의 군사는 양식이 모자라 허도에 사람을 보 내 거둬들이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정병을 이끌고 나가셔 서 그 양도(糧道)를 끊으신다면 실로 묘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여포도 다시 귀가 솔깃해지는 모양이었다. 곧 진궁의 말에 따르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 또한 운인지 군사를 내기 전에 먼저 아내 엄씨에게 그 일을 말했다. 엄씨가 울며 또다시 여포를 말렸다. “장군께서 나가고 없는 성을 진궁이나 고순 따위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어요? 만약 이 성을 잃게 된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을 거예요. 지난날 제가 장안에서 장군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는 요행히 방서(舒)가 제 몸을 숨겨주었기에 다시 장군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를 믿고 저를 버리려 하시는 거예요?”
엄씨가 울며 그렇게 옛일을 상기시키자 여포는 가슴이 찌릿했다. 동탁은 죽였으나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게 쫓겨 처자를 버리고 홀몸 으로 달아나던 때가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방서가 감추어주어 다행 히 아내와 딸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 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거기다가 엄씨는 한층 단수 높게 여포의 약한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하기야 장군께서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분이시니 어찌 소소한 처자의 일에 얽매여 천하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어요? 부디 첩의 일 일랑 잊으시고 큰 뜻을 이루세요.”
그리고 그대로 퍼질러 앉아 섧게섧게 울었다. 모처럼 다졌던 여포 의 마음은 다시 흔들렸다. 까닭 없이 울적해진 채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초선(貂蟬)의 방으로 건너갔다. 지난날 천하를 위해 꽃다운 몸 을 바쳤던 초선이었으나, 풍파에 부대끼며 여포와 살을 섞고 사는 동안 그 매서운 뜻도 나라를 위한 정성도 모두 스러지고 없었다. 그 녀 또한 여느 아낙과 다름없이 여포와 떨어지게 되는 것만 두려워 했다.
“장군께서는 이 몸의 주인이십니다. 부디 저를 버려두고 가볍게 성을 나가지 마세요.”
초선이 그렇게 속살거리며 매달리자 여포는 완연히 마음이 바뀌었다.
“걱정하지 마라. 아직 내게는 이 방천화극이 있고 적토마가 있다. 누가 감히 내게 덤벼들 수 있겠느냐?”
그렇게 큰소리를 쳐 초선을 안심시킨 뒤 방을 나갔다. 이미 진궁 의 말 따위는 마음 한구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진궁이 다 시 채근했으나 여포는 손바닥 뒤집듯 엉뚱한 소리만 했다.
“조조의 군량이 이르렀다는 것은 속임수요. 조조는 워낙 꾀가 많 은 자라 가볍게 움직일 수 없소이다.”
이제는 여포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짐작한 진궁은 그 앞을 물 러나와 홀로 탄식했다.
“우리들은 죽어도 묻힐 땅마저 없겠구나!”
한편 여포도 마음이 썩 밝지는 못했다. 처첩의 말을 듣고 진궁의 계책을 물리치긴 했으나, 그것이 옳지 못함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 었다. 그 바람에 여포는 종일 엄씨와 초선을 끼고 술로 마음속의 근 심을 달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모사 허사(汜)와 왕해(王楷)가 여포를 찾아와 계책 한 가지를 올렸다.
“지금 원술은 회남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전에 그와 혼약을 맺기로 한 적이 있는데 왜 지금 같은 때에 그에게 구원을 청하시지 않습니까? 원술의 군사와 우리 군사가 안팎으로 공격한다면 조조를 쳐부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여포가 들으니 귀가 번쩍 뜨일 소리였다. 그 자리에서 글을 닦게해 그 두 사람을 원술에게 보내려 했다. 허사가 그런 여포에게 청했다.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저희가 성을 나갈 길을 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여포는 장요와 학생에게 군사 일천을 딸려 허사와 왕해의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장요가 앞장을 서고 학맹이 뒤를 맡아 허사와 왕해를 보호한 뒤 여포의 일천 군마가 갑작스레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워낙 뜻밖의 일이라 조조의 군사들이 손 써볼 틈도 없이 성을 벗어난 그들은 길목을 지키던 유비의 진채마저 질풍처럼 지나가버렸다. 유비의 군사들이 급히 뒤를 따랐으나 어느새 그들은 험한 곳을 모두 빠져나가버린 뒤였다.
일단 성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자 학맹은 오백 군마를 이끌고 허사와 왕해를 보호한 채 내쳐 회남으로 떠나고, 장요만 나머지 절 반 군사와 하비성으로 되돌아섰다. 그러나 이때는 유비의 진채에서 도 대비가 있어 장요는 관우에게 길을 가로막혔다.
은연중 서로 흠모하는 사이였으나 그렇게 되고 보니 장요와 관운 장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장요는 창을 꼬나쥐고 관운장은 청룡 도를 휘둘러 막 싸움이 어우러지려 할 때 갑자기 함성과 함께 한 떼 의 군마가 나타났다. 여포의 명을 받은 고순이 장요를 구하러 온 것 이었다.
그러자 원래부터 별로 싸울 마음이 없던 관운장은 슬며시 길을 비켜주었다. 이미 원술에게 가는 사자를 놓쳐버린 이상 장요와 군사
몇 백을 구태여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무렵 원술은 한때 조조에게 빼앗겨 잿더미가 되었던 수춘성을 되찾아 다시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여포에게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자 지난 일이 떠올라 불쾌하게 맞아들였다. 허사와 왕해가 올린 여포의 글을 다 읽고 원술이 물었다.
“전에 내가 보낸 사자를 죽여가며 나와 혼인하기를 거절해 놓고 지금에 와서 그 일을 꺼내다니 무슨 속셈인가?”
허사가 송구한 듯 변명했다.
“그 일은 조조의 간계에 빠져 저지른 잘못입니다. 명공께서는 부 디 밝게 살펴주십시오.”
“조조의 군사로 고단하고 위급하게 되지 않았던들 네 주인이 어 찌 내게 그 딸을 시집보내려 하겠느냐?”
원술이 다시 빈정거리듯 허사의 말에 되받아 물었다. 이번에는 왕해가 대답했다.
“명공께서 지난 잘못을 따져 저희를 구해주시지 않는다면 이는 입술이 밉다 하여 이가 구하지 않는 격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 가 시린 법, 저희 주인이 망하는 것은 결코 명공께도 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원술이 그만한 이치도 모를 사람은 아니었다. 조조가 여포를 멸망 시키면 다음으로 칼끝을 들이댈 것은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 나 그래도 우선 못 미더운 것은 여포였다. 잠시 말이 없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봉선이 반복이 심하니 믿을 수가 없다. 먼저 그 딸을 내게 보낸 다음에야 군사를 보내겠다고 일러라.”
형편으로 보아서는 두말없이 여포를 구해놓고 볼 일이었으나 끝 내 지난날의 작은 감정을 씻지 못한 원술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허 사와 왕해로 보면 그만한 허락이라도 받아낸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 았다. 수십 번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뒤 수춘성을 나섰다.
하비성으로 돌아가려니 다시 유비의 군사들이 길목에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유비의 진채 부근에 이르러 허사가 다시 궁리 를 냈다.
“낮에는 이곳을 지나기 어렵겠소이다. 밤이 깊거든 우리 두 사람 이 앞서갈 터이니 학맹 장군은 뒤를 막아주시오.”
학명의 일이 원래 그들 둘을 보호하는 것이니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밤이 깊기를 기다려 셋은 낮에 의논한 대로 했다. 허사와 왕해가 먼저 말을 달려 유비의 진채를 지나가고 그 뒤를 학 맹이 거느린 오백 군마가 따랐다.
그런데 허사와 왕해가 무사히 빠져나간 뒤 학맹이 막 유비의 진 채를 통과하려는 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장수가 불쑥 나타나 길을 막으며 무쇠 솥 깨지는 소리를 냈다.
“이놈들, 어디를 함부로 지나려느냐?”
목소리만 들어도 학맹은 그가 누군지 알 만했다. 다름 아닌 장비 였다. 그러나 달리 길이 없는 학맹은 마음을 다잡고 창을 내밀었다.
“어림없는 수작.”
장비는 깍짓동 같은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그 창끝을 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손을 내뻗어 말 위에 앉은 학맹을 어린애 낚아채듯 사로잡아버렸다. 장수가 그 모양으로 사로잡혀 가자 그를 따르던 오 백 인마의 운명도 뻔했다. 모조리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하고 말 았다.
장비는 사로잡은 학명을 끼고 가 유비에게 바쳤다. 비록 사자는 놓쳤으나 학맹이라도 사로잡은 걸 다행으로 여긴 유비는 곧 그를 끌 고 조조의 진채로 갔다.
“너는 무엇 때문에 원술에게 갔더냐?”
조조가 엄하게 학맹에게 물었다. 학맹은 체념한 듯 허사와 왕해를 보호하여 원술에게 다녀온 일과 원술이 여포에게 한 말을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내막을 안 조조는 크게 노했다. 그 자리에서 학맹을 목 베 군문에 높이 걸게 한 뒤 각 영채에 영을 내렸다.
“만일 일후에 다시 방심하여 여포에게 길을 내어주는 자가 있으 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군법에 따라 목을 베리라!”
그 영이 얼마나 서릿발 같은지 모든 영채가 으스스하여 떨 지경이었다.
비록 조조에게 직접적인 추궁을 받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진채로 돌아온 유비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조용히 관우와 장비를 불러놓고 말했다.
“우리가 바로 회남으로 가는 길목을 맡고 있으니 너희 둘은 더욱 마음을 써서 지키고, 만에 하나라도 조공(曹公)의 군령을 범하는 일 이 없도록 하라.”
그러자 장비가 투덜거렸다.
“내가 적장 하나를 사로잡아 주었건만 조조는 상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엄한 군령으로 사람에게 겁만 주니 이게 무슨 꼴이오?”
“그렇지 않다. 조조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군령이 아니 고서는 어찌 모두를 따르게 할 수 있겠느냐? 아우는 그 군령을 어기 지 않아야 한다.”
유비가 다시 그렇게 타이르자 관우와 장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조의 군령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각기 맡아 지키는 곳으로 돌아 갔다.
한편 무사히 하비성으로 돌아간 허사와 왕해는 여포 앞에 나아가 말했다.
“원술은 먼저 며느리를 본 뒤에야 군사를 내어 주공을 구해드리겠다 합니다.”
“지금 조조의 군사가 겹겹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데 어찌 딸아이 를 보낼 수가 있겠느냐?”
여포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한 듯 물었다. 허사가 나서서 말했다.
“이제 학맹이 사로잡혔으니 조조는 틀림없이 이쪽의 사정을 알아 내어 미리 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친히 나서서 호송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겹겹이 둘러친 조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겠 습니까?”
그 같은 허사의 말이 옳다 여겼는지 여포가 대뜸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당장 딸아이를 보내는 게 어떠하겠는가?”
“오늘은 흉신(神)이 든 날이라 아니 됩니다. 내일은 날이 좋으니 술시(戌時, 밤 아홉 시경)나 해시(亥時, 밤 열한 시경)쯤 해서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사가 일진까지 들먹여 여포의 조급을 막았다. 여포도 흉신이 들 었단 말에 꺼림칙한지 다음 날로 딸을 원술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 허사가 길한 시간으로 짚은 술시와 해시는 다음 날 밤 이경 무렵 이었다. 여포는 장요와 고순에게 삼천병마와 작은 수레 한 대를 내 어주며 말했다.
“내가 딸아이를 이백 리 밖까지 호송해줄 터이니 너희는 거기서 부터 그 아이를 수레에 태워 수춘성까지 데려다주고 오도록 해라.”
그런 다음 딸을 보호해 성을 나갈 채비를 하는데, 그 꼴이 볼만했 다. 먼저 딸에게 두꺼운 솜옷을 입힌 뒤 다시 그 위에 갑옷을 두르게 했다. 그리고 그 딸을 자기 등에 업으니 비록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서라 하나 채신머리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급한 여포는 자기 몰골에 마음 쓸 틈도 없이 방천화극을 꼬나쥐고 적토마 위에 올랐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자 여포가 앞장서 서 달리고 그 뒤를 고순과 장요가 삼천병마를 이끌고 따랐다.
조조의 진을 돌파할 때만 해도 여포는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되 는 줄 알았다. 그러나 유비의 진 앞에 이르러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진 가운데 관우와 장비가 길을 막고 소리쳤다.
“섰거라! 네놈들은 어디로 가는 누구냐?”
하지만 다급한 여포는 별로 싸울 마음이 없었다. 다만 한 가닥 길을 앗아 딸을 내보내려고만 들었다. 그때 다시 유비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관우와 장비를 도우러 달려왔다.
그렇게 되니 여포는 길을 뚫을래야 뚫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 이 혼전이 되어 양군은 한동안 정신없이 싸웠다. 여포가 비록 용맹 스럽다 하나 등에 업은 사랑하는 딸이 상할까 봐 함부로 적진 속에 뛰어들지 못한 탓이었다.
그때 다시 등 뒤에서 조조가 기별을 받고 보낸 서황과 허저가 대 군을 이끌고 달려들며 소리쳤다.
“여포를 놓치지 마라!”
“여포를 놓치면 군법을 시행하리라!”
일이 그 지경이 되고 보니 천하의 여포라도 뚫고 나갈 도리가 없 었다. 황급히 군사를 돌려 성안으로 쫓겨드니, 그제야 유비가 군사 를 수습하고 서황과 허저도 각기 진채로 돌아갔다. 결국 여포 쪽에 서는 단 한 사람도 조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한 꼴이었다.
성안으로 되쫓겨 들어온 뒤에야 여포는 비로소 사태가 생각보다 위급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달리 구원을 청할 데도 없고 청할 래야 사람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마음속에 느는 것은 근심 과 두려움이라 죽어나는 건 그저 술뿐이었다.
그렇지만 조조도 당장은 여포를 어쩌지 못했다. 성벽이 높고 주위 를 둘러싼 물이 깊은 데다 성안에는 곡식까지 넉넉해 달포가 지나도 록 공격을 퍼부어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하내 태수 장양이 동시로 군사를 내어 여포를 구원하려 하다가 그 부장 양주(楊醜)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장양의 목을 승 상께 바치러 오던 양추는 다시 장양의 심복 계고(固)에게 죽임을 당하고, 계고는 무리를 데리고 대성(大城)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언 제 우환거리가 될지 모르니 승상께서는 미리 대처하도록 하십시오.”
조조도 그대로 둘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곧 장수 사환(史)을 불 러 영을 내렸다.
“너는 즉시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계고를 뒤쫓아 후환이 없도록 하라!”
다행히 계고를 쫓아간 사환은 며칠 되지 않아 그 목을 베어 돌아 왔다. 그러나 조조는 더 이상 하비성을 치는 데 시간을 끌 수 없다 생각했다. 곧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불러놓고 엄숙하게 말했다.
“장양은 다행히 자멸했으나 북으로는 원소란 근심거리가 있고 남 으로는 장수와 유표란 우환이 남아 있소. 그런데 이 하비성 하나를 오래 에워싸고 있으면서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난감하 외다. 차라리 잠시 여포를 버려두고 허도로 돌아가 싸움을 쉬며 때 를 보는 게 어떻겠소?”
그 말을 듣자 순유가 급히 일어나 조조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여포는 이미 여러 번 싸움에 져서 그 날카로운 기 세가 많이 꺾였습니다. 원래 군사들이란 장수에 의지하는 바니 장수 의 기력이 떨어지면 군사들 또한 싸울 마음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여포의 모사인 진궁이 비록 꾀가 많다 하나 그 씀이 더디고 여포는 아직 기운이 회복되지 못해, 진궁의 꾀가 미처 정해지기 전에 속히 공격하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제 와서 여포를 버려두고 돌아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때 곽가가 순유를 거들고 나섰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하비성을 세워둔 채 깨뜨리는 데 이십만 대군보다는 더 나을 것입니다.”
곽가의 그 말을 받아 순욱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혹시 기수와 사수의 물로 하비성을 결딴내려는 건 아닌가?”
“바로 그렇소이다. 문약)께서 용케 알아보셨소.”
곽가가 소리 높여 웃으며 대답했다. 조조도 그 말을 듣자 떠오르 는 게 있었다. 지금까지 하비성을 치는 데 장애로만 여겼던 사수(泗 水)의 물이었지만, 거꾸로 성을 공격하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은 미 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좋은 가르침이오. 그렇게 해보겠소.”
조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말한 뒤 다음 날로 곧 대군 을 풀어 기수와 사수의 물을 가두게 했다. 수십만이 달려들어 둑을 막고 물길을 돌리자 금세 하비성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높은 곳 으로 진채를 옮긴 조조가 내려다보니 겨우 동문 하나만 남겨두고 나 머지 문들은 모두 물이 흘러들어 성안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성만 믿고 있던 여포에게 놀란 군사 하나가 달려가 그 사실을 알 렸다. 하지만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던 여포는 오히려 그 군사를 꾸 짖었다.
“내 적토마는 물 위를 평지 걷듯 한다.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방 정을 떠느냐?”
그러고는 아내 엄씨와 첩 초선을 끼고 내쳐 술만 마셔댔다. 어쩌면 그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에 물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 니었다. 오히려 불어난 물 때문에 성을 공격할 수 없게 된 조조가 막 연히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에 다시 여러 날이 지나갔다.
그동안에도 여포는 연일 술을 퍼마시고 생각나는 대로 처첩을 희 롱하며 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몸이 주색에 곯아 몰골이 말 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맑은 정신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 여포는 형 편없이 초췌해진 자기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 옛날 장안의 호남으 로 흠모를 받던 그의 얼굴은 간곳없고 주색에 찌든 낯선 중년의 모 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여포는 분연히 거울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내가 주색으로 몸을 상했구나. 오늘부터는 마땅히 경계해야겠다!”
그러고는 곧 성안에 엄명을 내렸다.
“오늘부터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는 자는 모 조리 목을 베리라!”
갑작스럽긴 했지만 성안의 장졸들은 오히려 반가워하며 그 명을 받들었다. 여포가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어떻게든 조조쯤은 막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만큼 장졸들은 여포의 용맹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포의 장수 후성(侯)에게서 먼저 일이 벌어 졌다. 그에게 말 열다섯 필이 있었는데 누가 그 말을 훔쳐 유비에게 바치려다 들킨 일이었다. 후성이 뒤쫓아가 말을 훔쳐가던 자들을 죽 이고 말을 되찾아 오자 다른 장수들이 모여 그 일을 치하하러 왔다. 그때 마침 후성에게는 전에 담가둔 대여섯 말의 술이 있었다. 모처럼 찾아준 동료 장수들과 함께 그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문득 여포의 금주령이 두려웠다. 후성이 그 말을 여럿에게 하자 그중 하나가 말했다.
“먼저 주공께 아뢰고 마시면 되지 않겠소?”
후성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술 다섯 병을 들고 여포를 찾아갔다.
“장군의 위엄에 힘입어 잃은 말을 되찾게 되었던바, 여러 장수들 이 그 일을 치하하러 제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마침 집에 전에 담가 둔 술이 약간 남았기로 그들과 함께 마시고자 하였으나 장군의 엄명 이 두려워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먼저 올리고 꾸짖음을 받은 뒤 돌 아가 남은 술을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실까 합니다.”
후성이 공손하게 술을 바치며 말했다. 그러나 여포는 그런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얼굴이 벌게지도록 성을 냈다.
“내가 방금 술을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바 있는데, 너희들이 함부로 술을 담그고 또 모여 마시려 들다니 무슨 뜻이냐? 함께 의논 해 나를 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꾸짖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비록 후성이 여포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장수라 하지만 워낙 여 포가 눈이 뒤집혀 펄펄 뛰니 좌우가 감히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소식을 들은 송헌과 위속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달려와 용서를 빌었다. 모두 후성과 함께 술을 마시려 하던 자들이라 후성이 그대 로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끼는 장수들이 모두 달려와 용서를 빌자 여포의 노기는 약간 수그러졌다. 그러나 그대로 용서할 수는 없다는 투였다.
“내 명을 알고도 어겼으니 그 죄죽어 마땅하나, 여러 장수들의 낯을 보아 매 백 대로 낮추리라!”
여포는 그렇게 형을 낮추었다가 다시 여러 장수들이 간절히 빈 뒤에야 쉰 대로 낮추어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후성의 등에 매 쉰대 를 때린 뒤에야 놓아주니 그 꼴을 지켜본 장수들치고 맥빠져 하지 않은 자 없었다. 돌아가면 한 부대를 이끌 장수를 사소한 잘못으로 여럿 앞에서 말 안 듣는 마소 때리듯 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송헌과 위속은 후성이 맞은 일이 자기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싶어 후성이 누워 있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 하는 양도 살피고 위로도 할 겸해서였다.
후성이 울며 말했다.
“공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오늘 죽고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그 말하는 품이 깊이 한 맺힌 듯했다. 송헌이 그런 후성에게 맞장 구를 쳤다.
“여포는 처자만 아끼고 우리들은 짚 검불만큼도 여기지 않소.”
“조조의 군사는 성을 둘러싸고 물은 점점 불어나니 우리는 꼼짝 없이 죽고 말 것이오!”
위속도 한층 격하게 둘의 불평을 거들었다.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 가자 셋은 한동안 거침없이 여포의 욕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송헌이 목소리를 죽이며 둘에게 말했다.
“여포는 어질지도 못하고 의롭지도 않으니 좋은 끝을 바라보기 어렵게 되었소. 우리 차라리 그를 버리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소?”
그 말에 위속이 한술 더 떴다.
“그냥 도망치는 것은 장부의 할 노릇이 아니오. 오히려 여포를 사로잡아 조공에게 바치는 게 어떻겠소?”
의논이 거기까지 발전하자 드디어 듣고 있던 후성도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을 했다.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은 잃은 말을 되찾은 데서 발단이 됐 소. 결국 나는 말을 뒤쫓아 찾은 까닭에 매를 맞은 꼴이외다. 여포가 믿고 뽐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적토마 덕분이오. 만약 그대들 두 사 람이 여포를 사로잡아 바칠 작정이라면, 나는 먼저 적토마를 훔쳐 타고 조공께로 도망가 그 일을 아뢰겠소.”
“그렇다면 달아날 때는 동문으로 오시오. 내가 그 문을 지키고 있 으니 공을 내보내줄 수 있을 것이오.”
위속이 후성의 말을 받아 그대로 그 의논을 매듭지어 버렸다. 그날 밤이 이슥해서였다. 후성은 몰래 마구간에 숨어들어 여포가 제 몸처럼 아끼는 적토마를 끌어내 타고 동문으로 달렸다. 미리 약 속된 대로 그쪽을 지키고 있던 위속이 슬쩍 성문을 열어주니 후성은 나는 듯 빠져나갔다. 그 뒤를 위속이 겉으로만 요란스레 쫓는 체하 다가 어물쩍 놓아주고 되돌아왔다. 당장 있을 여포의 추단에 구실을 만들어두기 위함이었다.
무사히 조조의 진채로 도망간 후성은 곧 조조에게 타고 온 적토 마를 바치며 말했다.
“성안에 아직 송헌과 위속이 남아 승상을 위해 일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 위에 백기가 꽂힌 것이 군호가 되오니 그때에는 힘써 성을 공격해주십시오.”
여포가 그토록 아끼는 적토마를 훔쳐 온 후성의 말이라 조조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성안의 민심도 흔들고 송헌과 위속에 대한 은 근한 격려도 겸해 방문 수십 장을 만든 뒤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방 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대장군 조조는 밝은 조서를 받들어 특히 여포를 치러 왔다. 천자 께서 보내신 대군에 항거하는 자는 성이 깨뜨려지는 날 그 일족과 더불어 주륙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하되 위로는 장교부터 아래로는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여포를 사로잡아 오거나 혹 그 목을 베어 바치는 자는 높은 벼슬과 큰 상을 내리리라. 이 방문이 말 하는 바를 모두 바로 알아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튿날 날이 새기 무섭게 함성으로 기세를 돋우며 하비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던 여포는 조조의 군사들이 지르는 함성에 놀라 깨어났다. 화극을 들고 성 위에 올라 각 성문을 돌아다 보다가 위속이 지키던 동문을 통해 후성이 빠져나간 걸 듣고 위속을 꾸짖었다. 그러다가 후성이 적토마까지 훔쳐 달아난 걸 알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그 자리에서 위속에게 군법을 시행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한쪽 성벽에는 누가 꽂았는지 모를 백기가 펄 럭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조조는 한층 급하게 군사를 몰아 성을 들 이쳤다. 일이 화급하게 되니 여포는 위속을 벌할 여유조차 없었다.
위속은 잠시 버려두고 스스로 성벽 위에 나와 개미 떼처럼 기어오르는 조조의 군사들을 찍어 내리기에 바빴다.
새벽부터 시작된 조조의 공격은 한낮이 되자 조금 수그러들었다. 한숨을 돌린 여포는 문루(門樓)에서 잠시 쉬다가 자신도 모르게 의 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새벽부터 잠을 설친 데다 한나절을 쉬지 않고 싸워오는 동안 쌓인 피로 때문이었다.
아직 여포의 의심을 받지 않아 곁에 있던 송헌은 이때라 생각했 다. 좌우를 물리친 후 먼저 여포의 화극을 훔쳐 감춰버렸다. 그리고 저만큼 있는 위속을 불러 밧줄을 든 채 두 사람이 일제히 덤벼들었 다. 둘 모두 장수로 뽑힐 만큼 힘깨나 쓰는 데다 잠든 채 기습을 당 한 터라 여포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밧줄에 꽁꽁 묶이고 말 았다.
그제야 놀란 여포는 거푸 좌우를 불렀으나 송헌과 위속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여포의 부름 소리에 놀라 달려온 군사들을 험한 기 세로 두들겨 쫓아버린 그들은 미리 준비한 백기를 크게 휘둘렀다. 그걸 본 조조의 군사들이 다시 일제히 성 아래로 몰려들었다.
“이미 여포를 사로잡았소! 어서 성으로 드시오.”
위속이 조조의 군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거기에 섞인 하후연이 못 미더운 듯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여포의 방천화극 을 성 아래로 던져보이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장수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무기까지 빼앗긴 걸 알고는 조조의 군 사들도 드디어 여포가 사로잡힌 걸 의심하지 않고 활짝 열린 성문으 로 덩어리져 몰려들었다. 그때 고순과 장요는 서문 쪽에 있었으나 물 때문에 밖으로 달아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조조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진궁은 다행히 남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조조의 그물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쪽을 지키던 서황에게 사로잡혀 조조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성을 손에 넣은 조조는 즉시 명을 내려 성안에 든 물이 빠지도록 사수와 기수의 물줄기를 돌리게 하는 한편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정 시켰다. 그런 다음 백문루(門樓) 위에 높이 자리 잡고 사로잡힌 천 여 명을 차례로 끌어오게 했다. 그 곁에는 관우와 장비의 시립을 받 은 유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첫 번째로 끌려나온 것은 여포였다. 크고 건장한 여포였으나 밧줄 로 이리저리 얽어놓으니 둥근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더욱 볼썽사나운 것은 벌써 애원의 기색이 도는 그의 표정이었다.
“밧줄이 너무 죄어 있소. 제발 좀 헐겁게 해주시오.”
여포의 그 같은 애원에 조조가 차갑게 대답했다.
“범을 읽는 데 어찌 꽉 죄게 옳지 않겠느냐?”
그러자 여포는 다시 한번 애원하려다가 문득 조조 곁에 서 있는 후성과 송헌, 위속 셋을 보았다. 아무리 사로잡힌 몸이라 하나 한때 그들의 주인이었음을 생각하고 위엄을 지키려 애쓰며 물었다.
“내 일찍이 그대들을 대함에 박하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반했는가?”
그러자 송헌이 꾸짖듯 대답했다.
“처첩의 말만 듣고 장수들의 계책은 들어주지 않았는데 어찌 우리에게 박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송헌의 그 말이 가슴에 와닿는지 여포는 더 대꾸를 못했다.
조조는 그런 여포를 잠시 미뤄두고 뒤이어 끌려온 고순에게 물었다.
“너는 달리 할 말이 없느냐?”
조조는 그 물음을 통해 고순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솔직한 항복이든 대담한 저항이든 한가지로 살아날 길이 될 수 있 었으나 딱하게도 고순은 우직한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끝내 입을 다물어 답하지 않으니 성난 조조는 그를 끌어내 목을 베게 했다. 그다음에는 서황에게 끌려온 진궁이었다.
“공대(臺)는 그간 별일 없으시었소?”
조조가 빈정거리듯 진궁에게 물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태 도로 진궁이 대답했다.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너를 버렸거늘 그 무 슨입에 발린 문안이냐?”
“내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하오만, 그러면 그대는 왜 여포를 섬겼 소? 여포가 나보다 더 마음이 바르다고 믿는 것이오?”
“여포는 비록 꾀가 없으나 너처럼 거짓과 속임수와 간교함과 흉 험함을 지니지는 않았다.”
진궁이 다시 꼿꼿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조조는 표정을 바꾸지 않 고 묻기를 계속했다.
“공은 스스로 지모가 깊은 사람이라 일컬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꼴이 되었소?”
그 말에 진궁이 원망 서린 눈길로 여포를 돌아본 뒤 대답했다.
“저 사람이 내 말을 따라주지 않은 것이 한이다. 내 말대로만 따랐다면 틀림없이 오늘처럼 네게 사로잡히는 욕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조조는 구차하게 목숨을 빌겠다는 뜻이 진궁에게는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상한 애착으로 물었다.
“이제 오늘의 일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오늘 내게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역시 조조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에게는 더 기대할 게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조는 다시 한번 진궁의 아픈 곳을 건드려보았다.
“공은 그렇다 치고, 공의 노모와 처자는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태연하던 진궁의 얼굴에도 한 가닥 수심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궁은 여전히 꼿꼿하게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이는 남의 어버이 를 죽이지 않고, 인으로 천하를 바로 하려는 이는 남의 처자를 죽여 제사를 끊어지게 하지 않는다 했소. 노모와 처자의 목숨은 다만 명 공에게 달렸소이다. 나는 이미 사로잡힌 몸이니 어서 죽여주기를 바 랄 뿐 달리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소.”
앞서와 달라진 게 있다면 비로소 조조에게 존대를 쓰는 일이었다. 조조는 그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의 노모와 처자 를 위한 간절한 부탁으로 받아들였다.
죽음 앞에서조차 품위와 개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진궁에게 조조 는 또 한번 망설임에 빠져들었다.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진 궁은 제 할 말을 이미 다했다는 듯 그대로 일어나 문루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좌우가 붙들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스스로 죽을 곳으로 찾 아갈 뿐이었다. 차라리 그를 죽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생각하 는 것이라 여긴 조조는 몸을 일으켜 울면서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목이 떨어졌단 말을 듣자 부리는 자에게 엄숙하게 일렀다.
“지금 당장 진궁의 노모와 처자를 허도로 돌려보내고 잘 돌봐주도 록 하라. 조금이라도 이 일에 태만한 자는 목 위에 머리를 남겨두지 않으리라!”
실로 그 순간만은 간웅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미의 극치였다.
욕된 삶을 바라지 않고 깨끗이 죽어간 진궁에 비해 여포는 아무 래도 그 주인된 자로서는 모자람이 많았다. 조조가 몸을 일으켜 눈 물로 진궁을 문루 아래의 형장으로 보낼 때였다. 여포가 그 틈을 타 문루 위에 있는 유비에게 처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공은 상좌에 앉은 손님이 되고 나는 계단 아래 무릎 꿇은 죄수가 되었구려. 어찌하여 한마디 너그러운 말씀조차 내려주지 않으시오?”
그 말에 현덕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제청을 받 아들인 걸로 여겼던지 조조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기 무섭게 큰 소리로 말했다.
“명공께서 항시 걱정거리로 여기던 게 바로 이 여포였습니다. 그 런데 지금 이미 저는 항복을 했으니, 명께서 대장이 되시고 제가 곁에서 돕는다면 천하를 평정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저를 살려 명공의 한 팔로 써주십시오.”
그래도 한때 일방에 웅거했던 호걸치고는 너무도 비루한 애걸이었다. 사람은 미워도 그 용맹은 아까웠던지 조조가 유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여포도 은근히 믿는 눈길로 유비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유비의 대
답이 뜻밖이었다.
“공께서는 정건양(丁建陽)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한결같이 자신이 배반하여 죽인 옛 주인을 유비가 들먹이는 걸 보고 여포는 놀랍고도 분했다. 더구나 자기는 소패에서 사로잡은 그 의 처자까지 살려주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더욱 분통이 터진 여포 는 대뜸 유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이야말로 가장 신의가 없는 놈이다! 처음에는 공손찬을 버 리고 내게 왔다가 이제는 나까지 배반하려 드느냐?”
그때 조조가 차갑게 명을 내렸다.
“여포를 끌어내라. 그래도 한 무리의 우두머리였으니 그 시신은 온전하도록 하겠다. 목을 매어 죽이도록 하라!”
조조의 명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여포를 누각 아 래로 끌어내렸다. 여포는 끌려가면서도 유비에 대한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귀 큰 놈아, 지난날 원문(轅門)에서 화극의 가지를 쏘아 맞혀 너를 구해주던 때를 잊었느냐?”
그때 누군가가 그런 여포를 소리쳐 꾸짖었다.
“여포, 이 하찮은 작자야! 죽으면 죽었지 무엇이 두려워 그 발광이냐?”
사람들이 보니 마침 도부수들에게 끌려오던 장요였다. 조조도 다시 한번 재촉했다.
“어서 여포를 목매달아 죽이고 그 머리를 내걸도록 하라.”
그런 다음 장요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로구나.”
“복양성에서 일찍이 만난 적이 있거늘 어찌 잊겠느냐?”
장요가 조금도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지난날 진궁의 계교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일이 생각나며 조조도 장요를 알아보았다.
“그랬군. 이제 그대를 기억하겠다.”
그 말에 장요가 다시 한스러운 듯 대답했다.
“다시 한번 애석할 뿐이다.”
“무엇이 애석한가?”
“그날 불길이 더 거세지 못해 너 같은 역적을 태워 죽이지 못한게 애석하다는 말이다!”
장요가 조조의 물음에 그렇게 답하자 조조의 안색이 홱 변했다.
“싸움에 져서 사로잡혀 온 주제에 네놈이 감히 나를 욕보이려 드느냐?”
그리고 칼을 뽑아 제 손으로 죽일 듯 다가갔다. 장요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길게 목을 늘여 기다렸다.
그때 현덕이 나서서 조조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저 사람은 마음이 곧은 사람이니 부디 살려서 쓰도록 하십시오.”
좀처럼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는 관우도 조조 앞으로 나아가 무 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이 관아무개도 문원(文遠, 장요의 자)이 충의의 남아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목숨을 보존케 해주십시오.”
그러자 조조가 돌연 칼을 내던지며 껄껄 웃었다.
“나 또한 문원의 충의를 알고 있소. 한번 장난을 쳐본 것뿐이오.”
그러고는 친히 그 밧줄을 끌러준 뒤 입은 옷을 벗어 입혀주고 윗 자리로 끌어올렸다.
뒷사람이 그날 백문루 아래서 죽은 그들 주종(主從)을 위해 각기 시를 지었다. 특히 여포를 위한 시를 옮겨 본다.
누른 물 거세게 하비성을 적셔 洪水滔滔淹下邳
그해 여포 사로잡히던 때. 當年呂布受擒時
천리를 닫던 적토마 소용없고 空如赤兔馬千里
방천화극 한 자루 간수도 허술했네. 漫有方天戟一枝
묶인 호랑이 살려 하니 참으로 나약해 뵈고 縛虎望寬今太懦
매 배불리 기르지 말란 옛말 틀림없네 養鷹休飽昔無疑
계집에 빠져 진궁의 말은 따르지 않고 戀妻不納陳宮諫
귀 큰 아이 은혜 모름만 꾸짖는구나. 罵無恩大耳兒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것은 유비가 그를 구해주지 않은 점이다. 여포와 유비 사이를 냉정히 살피면 그들은 의에 있어 서도 불의에 있어서도 주고받음이 비슷했다. 여포가 유비의 은덕을 배신하고 서주를 빼앗은 것에 못지않게 유비도 때로는 거의 파격적 인 여포의 호의를 저버리고 그를 파멸시키는 데 가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지막 서주성에서는 여포가 호의로 살려준 미축과 유비의 사람들이 진규와 합세하여 여포의 발밑에 함정을 팠다.
부드러움과 너그러움과 의의 사람으로 불리는 유비에게는 조조에 게 여포를 죽이도록 충동한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옛사람들이 오히려 유비를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여포의 반 복무쌍함과 표리부동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떤 때는 음험하다고 느 껴질 만큼 깊은 유비의 심지를 감안할 때 반드시 그것이 천하 사람 과 함께하는 공분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유비가 두려웠 던 것은 여포의 사람됨이 아니라 조조의 사람됨일 수도 있었다. 다 시 말해, 여포가 살아나 조조를 배신하고 자립함으로써 자신의 앞길 을 가로막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니라 끝내 조조의 치밀한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용맹으로 조조의 무서운 어금니나 발톱 노 릇을 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비가 조조의 사람됨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허도로 돌아간 뒤의 행동에서도 잘 드러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