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4화 : 급한 불길은 잡았으나
급한 불길은 잡았으나
한편 조조의 명을 받고 유비를 견제하러 떠난 왕충과 유대는 서 주에서 일백 리쯤 되는 곳에 진채를 내렸다. 그러나 싸울 생각은 않 고 조조에게서 받은 승상기(丞相旗)를 중군 높이 꽂아둔 채 하북의 형세가 이롭게 되어 하루바삐 조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조조 쪽의 허실을 알 리 없는 유비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승상의 기치는 왔으나 정말 조조가 왔는지 알 수가 없어 그 또한 연 신 하복의 소식만 탐지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왕충과 유대의 진중에 조조로부터 빨리 군사를 내 라는 명이 전해져 왔다.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던 유대와 왕충은 그 뜻밖의 명에 당황했다. 어느 쪽도 유비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상께서 서주성을 공격하라고 재촉하시니 자네가 먼저 나가보는 게 좋겠네.”
지레 겁을 먹은 유대가 슬며시 선봉을 왕충에게 밀었다. 겁나기는 왕충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지 않으려고 뻗대었다.
“승상께서 자네를 먼저 꼽지 않았던가? 자네가 가게.”
“나는 명색이 주장(主將)인데 어떻게 먼저 나설 수 있는가?”
유대가 이번에는 그렇게 나왔다. 그러자 왕충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함께 군사를 내기로 하세.”
“그럴 수는 더욱 없네. 차라리 제비를 뽑아 정하는 게 어떤가? 선 (先)자를 뽑은 사람이 가도록 하세.”
유대가 또 다른 안을 내놓았다. 둘이 한꺼번에 나갔다가 풍비박산 이 되기보다는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에 남아 서로 호응하는 게 나으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왕충도 그런 제안까지 거절할 구실은 없 었다. 꺼림칙한 마음으로 제비를 뽑으니 재수없게도 선(先) 자가 나 왔다. 별수 없이 군마를 둘로 쪼개 그 한쪽을 거느리고 서주로 밀고 들어갔다.
“조조의 군사들이 드디어 서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같은 전갈을 받은 유비는 곧 진등을 불러 의논했다.
“원본초가 비록 여양까지 군사를 내었다고 하나 그 모사들이 서 로 뜻이 맞지 않아 아직까지 그 이상은 나오지 않고 있소. 그리고 조 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소. 듣기로는 여양에 있는 조조 의 중군에는 승상기가 꽂혀 있지 않다는데 지금 이리로 오는 군사들은 승상기를 앞세우고 있다 하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조조는 속임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북을 중하게 여긴 탓에 반 드시 그곳에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승상기는 세우지 않고 오히려 이곳에 보내 마치 자신이 이곳 에 온 듯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조조는 틀림없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다.”
진등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도 그런 생각 이 들었으나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문득 곁에 선 관우와 장 비를 돌아보고 물었다.
“아무래도 한번 그 허실을 알아보는 게 좋겠네. 자네 둘 중 누가 나가 그걸 알아보겠나?”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유비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장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런 장비를 유비가 짐짓 나무라듯 물리쳤다.
“너는 성질이 급하고 거칠어 보낼 수가 없다. 이 일은 그리 가벼 이 나설 일이 못 된다.”
그러고는 가만히 관우를 보았다. 유비의 마음을 헤아린 관우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나가 한번 저들의 동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자 유비는 기다렸다는 듯 허락했다.
“만약 운장이 가준다면 나는 마음을 놓겠네. 가서 정말로 조조가 왔는지 아닌지를 살펴봐주게.”
불퉁거리는 장비를 굳이 못 본 체하며 유비는 그 말과 함께 군사 삼천 명을 갈라 주었다.
이때 계절은 초겨울이라 검은 구름이 잔뜩 덮인 하늘에서 눈송이 가 어지럽게 날리기 시작했다. 관우에게 이끌려 서주성을 나온 삼천 군마는 모두 퍼붓는 눈을 무릅쓰고 진을 쳤다. 오래잖아 왕충이 이 끄는 이만여의 군사가 머뭇머뭇 다가왔다.
말 위에 높이 올라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기다리던 관운장이 적 진을 향해 소리쳤다.
“섰거라! 네놈들은 어디서 온 잡병들이냐? 이곳은 유황숙(劉皇) 께서 다스리는 곳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관우의 그 같은 물음이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인 줄도 모르고 왕충이 나와 허풍스레 대꾸했다.
“승상께서 여기 이르셨거늘 네놈들은 어쩐 연고로 나와 항복하지 않느냐?”
“승상께서 이르셨다면 잠시 진문 앞으로 나오시라 일러라. 이 관 운장이 할 말이 있다.”
숱한 맹장들을 제쳐놓고 왕충같이 이름없는 장수가 나온 걸 보자 관우는 대강 짐작가는 바가 있었으나 한 번 더 그렇게 물었다. 대답 이 궁해진 왕충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의 승상께서 어찌 너 같은 무리와 가벼이 마주하시겠느냐?
무례하구나!”
그러자 관우는 노기가 솟구쳤다. 왕충이 비록 허세를 피우고는 있지만 조조가 그 자리에 없는 것 또한 틀림없어 보였다. 이에 관우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아직 관우의 무예를 잘 알지 못하는 왕충도 지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두 말은 곧 부딪쳤다. 그러나 왠지 관우는 청룡도 를 들어 왕충을 베는 대신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왕충 은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나 그런 관우를 쫓기에 바빴다.
거니 쫓기거니 하며 두 사람이 어느 조그만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관운장이 돌연 말 머리를 돌리더니 청룡도를 휘두르며 왕충 을 맞았다. 원래 적수가 못 되는 데다 무턱대고 쫓는 데만 정신이 팔 려 있던 왕충에게 그런 관우의 반격을 받아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 다. 제대로 창을 들어 막아보지도 못하고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달아 나기 바빴다.
“이놈! 어디를 가려느냐?”
관우가 호통과 함께 왼손으로 청룡도를 옮겨 잡으며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왕충의 갑옷깃을 잡아 안장에서 덥석 집어올리더 니 그대로 겨드랑이에 껴버렸다. 마치 어린애를 잡아 옆으로 끼고 가는 형국이었다.
관우가 왕충을 사로잡아 자기의 본진으로 끼고 가는 모습을 보자 왕충을 따라온 군사들은 두렵다 못해 얼이 빠졌다. 아직 저쪽 군사 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절로 무기를 내던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 나버렸다.
관우는 사로잡은 왕충을 끌고 서주성 안으로 들어가 유비에게 바쳤다.
유비가 왕충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며 어떤 자리에 있는 자이기에 감히 조승상을 사칭했느냐?”
“제가 어찌 감히 승상을 사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명을 받들어 그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왕충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비는 속으로 짐작가는 바가 있었으나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명이라니? 누가 어떤 명을 내렸단 말이냐?”
“조승상께서 제게 승상기를 내리며 거짓으로 군세를 과장하라 했 습니다. 저는 그 명에 따라 의병(疑兵)으로 조승상이 몸소 여기 온 것처럼 꾸미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승상은 여기에 없습니다.”
왕충이 그렇게 실토했다. 내막을 안 유비는 문득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왕충에게 비단옷과 술을 내린 뒤 잠시 한 곳에 가두어두게 했 다. 그리고 다시 왕충과 함께 온 유대를 사로잡을 의논을 했다.
“저는 형님께서 조조와 화해하실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일부러 왕충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이제 그를 죽이시지 않고 비단옷과 술을 내리시는 걸 보니 제 헤아림이 옳았던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관우가 그렇게 말하자 유비도 그제서야 빙긋이 웃으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익덕이 거칠고 성급해 왕충을 죽여버릴까 두려웠다네. 그래 서 그를 보내지 않았어. 왕충 같은 무리는 죽여봤자 득될 것도 없으 니 살려두어 조조와 화해할 길을 열어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네.”
둘이서 그렇게 주고받는 걸 보자 장비는 더욱 부아가 났다. 자기 가가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은근히 자기의 어리석음을 빗대고 있지 않은가.
“작은형님께서 왕충을 사로잡아 오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가서 유 대를 사로잡아 오겠소!”
참지 못한 장비가 분연히 소리쳤다. 그런 장비를 유비가 한 번 더 격동시켰다.
“유대가 비록 조조의 전군 장수에 지나지 않으나 가벼이 대 적할 인물이 아니다.”
유비가 일부러 자신을 충동질하는 줄도 모르고 장비는 한층 격하게 대꾸했다.
“그따위 무리는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소! 얼른 보내기나 해주시 오. 나도 운장 형님처럼 그놈을 사로잡아 돌아오겠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유대의 목숨이 아니다. 자칫 그를 죽이면 우 리의 큰일까지 그르치게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느냐?”
유비가 한 번 더 장비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그 말에 장비가 맹세했다.
“만약 내가 그를 죽인다면 내 목숨을 대신 내놓겠소!”
그제서야 유비도 마음이 놓이는 듯 장비에게 삼천 군마를 주어 성을 나가게 했다.
장비는 후끈 달아 단숨에 유대의 진채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 무리 싸움을 돋워도 유대는 진채 안에 깊숙이 들어앉아 굳게 지킬 뿐 나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는 이미 쫓겨온 군사들로부터 왕충이 사로잡 힌 얘기를 들은 뒤였다. 거기다가 지난번 동탁을 칠 때는 잠시나마 가까이서 관우와 장비를 본 적도 있어 그들의 무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왕충은 사로잡혔으나 조조의 공격령은 흉내라도 낸 셈이라, 그대로 기다려도 될 것을 구태여 싸워 낭패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장비가 매일같이 진채 앞에 나와 욕설을 퍼부어대도 유대는 못 들은 체 상대조차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유대가 낯짝도 내보 이지 않자 장비 또한 그 속셈을 알아차렸다. 적은 군사로 든든한 진 채 안에 있는 많은 군사를 공격하기보다는 계략을 써서 유대를 진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유비의 충동질과 다짐이 아니 었던들 기대하기 어려웠던 장비의 머리씀이었다.
“듣거라. 아무래도 저놈들이 꼼짝 않으니 오늘밤은 야습을 한다. 모든 장졸들은 이경까지 채비를 마치도록 하라!”
아침 나절 그 같은 군령을 내린 장비는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장막 안으로 동이동이 술을 날라오게 하여 비워대니 가까 이 있는 군사들도 모두 장비가 크게 취한 걸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장비가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돌자 장졸들은 모두 걱정 이 되었다. 그러나 장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사까지 부리기 시 작했다. 비틀거리며 군막을 돌아 군사들의 사소한 잘못을 찾아내는 대로 매질을 시작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매질을 당한 군사들 을 따로 가두게 하고는 여럿 앞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공언했다.
“이놈들은 오늘밤 출병할 때 목을 베어 그 피로 군기(軍旗)에 제사 지내야겠다!”
대수롭지 않은 죄로 죽도록 얻어맞은 데다 이제는 목까지 날아가게 되었으니 갇힌 군사들은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날 밤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이 갇힌 군막 안으로 숨어들어와 그들 을 놓아주며 다급하게 말했다.
“얼른 달아나게. 함께 싸우던 정리로 놓아주는 것이니 장비 그 짐 승 같은 놈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게.”
꼭 죽은 목숨이라 여겼던 군사들은 그게 바로 장비가 몰래 보낸 사람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그리고 장비의 진채를 빠져 나오기 바쁘게 유대의 진채로 몰려갔다. 달리 갈 곳도 없을 뿐만 아 니라, 막상 살고 보니 새삼 사무치는 장비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장비가 오늘밤 이경에 장군의 진처를 야습하려 합니다.”
유대를 만난 그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일러바쳤다. 유대가 원래 의심이 적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항복해 온 졸개들의 몰골을 살피니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한결같이 혹독한 매질로 큰 상처 를 입고 있었을 뿐더러 언동이며 기색에도 거짓이라고는 털끝만큼 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유대는 몹시 기뻐하며 거꾸로 장비의 야 습을 이용할 계책을 세웠다. 거짓으로 사람이 있는 듯 꾸민 뒤, 진채 를 비운 채 장비의 야습을 기다렸다가 채 밖에 숨겨둔 군사로 역습 해 오히려 장비를 사로잡을 속셈이었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군사를 세 길로 나눈 장비는 먼저 서른 몇 명만을 유대의 진채로 들여보내 불을 지르게 하고 나머지 두 갈 래의 군사는 유대의 진채 뒤에 기다리다가 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달려와 치게 했다. 자신은 날랜 군사를 이끌고 먼저 유대가 달아날 길부터 끊은 뒤였다.
명을 받은 서른몇 명의 군사가 텅 빈 진채에 함성과 함께 뛰어들 어 불을 지르자 유대는 드디어 장비가 야습을 온 줄로 알았다. 채 밖 에 숨겨두었던 군사들을 일시에 몰아 채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채 안으로 들어온 적군이 얼마가 되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홀연 등 뒤에서 함성이 일며 다시 장비의 두 갈래 군사가 몰려들었다. 앞뒤 로 적을 맞아 어지러워진 유대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놀라고 당황하기는 장수인 유대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약간의 남 은 군사를 수습해 길을 뺏어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나 장비가 이 미 길을 끊고 기다리니 그마저 뜻대로 안 되었다. 좁은 길목에서 장 비와 마주치자 어쩔 수 없이 병장기를 내밀기는 하였으나 한 합을 부딪기도 전에 장비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비가 소리개 병아리 낚아채듯 저희 대장을 잡아가는 꼴을 보자 그나마 거기까지 따라왔던 군사들도 모조리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버렸다. 한 싸움에 크게 이긴 장비는 먼저 사람을 서주성으로 보내 유대를 사로잡은 일을 알리게 했다.
“익덕이 늘 조급하고 황당스러운 데가 있더니 이제는 지략까지 쓸 줄 아는군. 내가 걱정을 안 해도 되겠네.”
소식을 들은 유비가 관우에게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 고 몸소 성 밖까지 나가 이기고 돌아오는 장비를 맞아들였다. 장비 가 어린애처럼 으쓱대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저를 거칠고 조급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어떻소?”
“우리가 말로 아우를 격하게 하지 않았던들 아우가 어찌 이런 꾀 를 부릴 줄 알았겠나?”
유비가 그렇게 반문하자 장비는 크게 웃으며 더 말하지 않았다. 뒤이어 멧돼지 옭듯 유대가 말에 실려 들어왔다. 그걸 본 유비는 황망히 유대를 말에서 끌어내린 뒤 밧줄을 풀어주며 말했다.
“제 아우 장비가 잘못하여 장군께 큰 욕을 끼쳐드렸구려. 바라건 대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오.”
그러고는 손님처럼 성안으로 맞아들인 뒤 미리 잡혀와 있던 왕충 까지 풀어주어 함께 잘 대접했다. 유비로부터 뜻밖의 대접을 받자 죽는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은 크게 감격했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유 비가 간곡하게 말했다.
“전에 서주 태수 차주(車胄)를 죽인 것은 그가 이 비(備)를 해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승상께서는 그 일로 내 가 승상을 저버린 줄 알고 두 분 장군을 앞서 보내 죄를 물으시려 하나 나는 이미 여러 번 승상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 은혜 를 갚지는 못할망정 어찌 감히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장군께 서는 허도로 돌아가시거든 부디 이 비를 위해 좋게 말씀드려주십시 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실로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습니다.”
“사군께서 죽이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땅 히 때를 보아 승상께 그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유대와 왕충은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는 그런 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뒤 다음 날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몸만 놓아보내 는 것이 아니라 원래 거느리고 있던 군마를 모두 되돌려주고 성 밖까지 나가서 배웅할 정도였다.
그런 유비에게 유대와 왕충은 더욱 감격했다. 진정으로 떠나기 싫 은 듯 작별했다. 그런데 채 십 리도 가기 전이었다. 갑자기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장비가 길을 막아서며 놋그릇 째지는 소리를 냈다.
“우리 형님은 도무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시는 분이군. 일껏 사 로잡은 적장을 어째서 놓아보낸단 말인가? 안 된다. 나는 네놈들을 놓아줄 수 없다!”
놀란 유대와 왕충이 애절하게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리눈을 부릅뜨며 금세 창을 들어 내려찌를 기세였다. 그때 누군가 저만큼 등 뒤에서 장비에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아우는 무례하지 마라!”
유대와 왕충이 보니 관우가 말을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였다. 둘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이미 형님께서 두 분을 놓아주셨거늘 아우는 어찌하여 그 영을 어기려드나?”
달려온 관우가 엄한 얼굴로 꾸짖듯 물었다. 장비도 지지 않고 불 퉁거리며 대꾸했다.
“지금 놓아보내면 다음에 또 올 것 아니오? 그런 걸 어찌 그냥 보낸단 말씀이오?”
“저들이 다음에 또다시 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 물러서라.”
관우가 그렇게 말하고 유대와 왕충도 입을 모아 맹세했다.
“승상께서 우리 삼족을 모두 죽인다 해도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그러나 장비는 다시 한번 무섭게 둘을 얼러댄 뒤에야 길을 비켜주었다.
“조조가 직접 온다 해도 죽어 갑옷 한 조각 돌아가지 못할 것이 다. 하물며 너희 따위겠느냐? 이번에는 잠시 너희 두 덩어리 머리를 그대로 붙여둘 것이니 반드시 그걸 잊지 말아라.”
유대와 왕충은 그 말에 대꾸조차 변변히 못하고 머리를 싸안은 채 쥐새끼 달아나듯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들이 산굽이를 돌아 완연 히 사라지자 관우와 장비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유대와 왕 충에게 준 은의의 빛을 두 배로 늘리려고 그들 형제가 꾸며낸 일이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로부터 그 일의 전말을 듣는 유 비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조조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유비가 탄식 섞어 그렇게 말하자 손건이 곁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서주는 사방이 트여 있어 적이 오면 막기 어려운 땅입니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됩니다. 군사를 하비와 소패에 나누어 서로 돕고 의지 하는 형세角之勢]를 이룸으로써 조조를 막도록 해보시는 게 어떻 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여포가 썼던 방식이었다. 그때는 소패와 하비가 각기 진등과 진규의 계략에 어이없이 떨어지는 바람에 실효를 거둘 수 없었으나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낸다면 그것도 한 방책일 수 있었 다. 이에 유비는 손건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 다. 하나는 관우에게 딸려 미부인, 감부인과 함께 하비로 가게 하고, 다른 하나는 손건, 간옹, 미축, 미방 네 사람에게 딸려 서주를 지키게 했으며, 나머지는 유비 자신과 장비가 이끌고 소패에 머무르도록 했다.
한편 허도로 돌아간 유대와 왕충은 입을 모아 유비의 허물 없음 을 조조에게 변호했다. 그 길만이 목숨을 살려준 유비의 은혜에 보 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싸움에 진 책임을 더는 길이기 도 했다. 그러나 조조는 보지 않고도 일의 앞뒤를 알 것 같았다. 그 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나라를 욕되게 한 무리들이다. 네놈들을 살려둔들 어디다 쓰겠느냐?”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차갑게 영을 내렸다.
“저 두 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그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공융이 말렸다.
“저 두 사람은 원래 유비의 적수가 못 됐습니다. 만약 지금 목을 베신다면 다른 장수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 조조도 치솟던 노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원래 이길 수 없 는 싸움에 내보내놓고 졌다고 목을 벤다면 누가 자신없는 싸움을 하 려 들 것인가. 이에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죽이는 대신 그 벼슬을 거 두고 내쫓는 것으로 일을 맺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괘씸한 것은 유비였다. 이미 자신이 아끼는 차주 를 함부로 죽이고 서주를 차지한 데다 원소까지 부추겨 큰 싸움에 몰아넣고도, 어리숙한 유대와 왕충을 이용해 발뺌을 하려 들었기 때 문이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유비에게 품고 있는 의심까지 발동하자 조조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가 유비가 더 세력이 크기 전에 잡아 죽이지 않으면 마침내 큰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조가 다시 대군을 일으키려 하자 이번에도 공융이 말리고 나섰다.
“지금은 겨울이 한창이라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내년 봄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전에 먼저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 부터 손을 쓰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조조가 갑작스러운지 공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수와 유표입니다. 서주의 유현덕은 그 둘을 끌어들인 연후 다 시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공융이 대답했다. 공자의 자손이요 당대의 재사로 한때는 조조와 같은 제후의 열에서 동탁을 치기 위해 싸운 적도 있었으나 그 무렵 은 거의 조조의 모사와 다름없었다.
공융의 말을 들은 조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엄동설한에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아무리 일이 급하다 해도 무리였다. 거기다 가 장수와 유표는 모두 서주와 접한 땅에 근거를 갖고 있어 그들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서주는 반 이상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조조는 공융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먼저 유엽을 양양으로 보내 장수를 달래도록 했다. 양양으로 간 유엽은 장수를 만나기 앞 서 그의 모사 가후부터 찾아갔다. 그가 장수의 머리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한 일이었다. 가후 또한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 어두운 사람이 아니었다. 유엽이 조조의 위세와 성덕을 다 늘어놓기도 전에 마음을 정했다.
“얼마간만 제 집에 머물고 계시오. 내 밖의 형편을 보아가며 이 일을 승상께서 바라시는 쪽으로 맺어보겠소.”
그렇게 말하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다음 날 일찍 장수를 찾아갔다.
“조공(公)께서 유엽이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가후는 장수와 마주앉아 조심스레 그 일을 꺼냈다. 하지만 몇 번 이나 조조를 궁지에 빠뜨리고 그 아들과 조카며 아끼는 전위까지 죽 인 장수로서는 아무리 가후의 말이라 해도 선뜻 투항할 마음이 내킬 리 없었다.
그래서 절로 의논이 길어지는데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하북 원소로부터 사자가 왔습니다.”
장수가 그 사자를 들게 하여 원소가 보낸 글을 읽어보니 역시 자 기를 끌어들이려는 글이었다. 한꺼번에 두 곳에서 사람이 와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후가 문득 사자에게 물었다.
“요즈음 원공(公)께서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조를 치셨다는데 승패가 어떠했소?”
“날씨가 추워 잠시 군사를 물렸소이다. 이제 장군과 형주 유표 두 분이 모두 나라를 근심하는 선비의 기풍이 있다 하여 특히 청을 드 리고자 왔습니다. 저희 주공과 힘을 합쳐 역적 조조를 치심이 어떠 할는지요?”
사자가 능란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가후는 한참을 껄껄거리더니 사자가 보는 앞에서 원소의 글을 찢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가서 원본초더러 말하시오. 그대는 형제도 서로 용납지 못했으면 서 어찌 국사(國)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고.”
그러고는 사자를 꾸짖어 내쫓았다. 장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원소는 강하고 조조는 약하오. 그런데 원소가 보낸 글을 찢 고 사자를 꾸짖어 내쫓았으니 만약 원소의 대군이 이른다면 어떻게 감당하실 작정이오?”
“조조를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요.”
가후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장수가 더욱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는 이미 그와 원수진 사이외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용납할 수 있겠소?”
“장군께서 조조를 따라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 릇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그 조서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고 있으니 그것이 장군께서 그를 마땅히 따라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 원 소는 강성하고 우리는 약해 그를 따라도 원소는 우리를 중하게 여기 지 않을 것이지만, 조조는 약해 우리를 얻은 걸 반드시 기뻐할 것이 니 그것이 조조를 따라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세 번째는 바로 장군의 기우를 덜어주는 것으로, 조조에게는 저 오패(五)와 같은 큰 뜻이 있으니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밝은 덕을 사해에 두루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가후가 하나하나 조리 있게 대답하자 장수도 알아들을 만했다. 가후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먼저 유엽을 만나보았다.
“승상께서 만약 지난 원한을 잊지 않고 계시다면 어찌 나를 사자로 보내셨겠습니까?”
유엽도 그렇게 장수를 안심시켰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장수는 곧 바로 가후와 함께 허도로 올라가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수는 계하에 엎드려 절하며 조조에게 항복의 뜻을 표했다. 조조 는 황망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게 작은 허물이 있소이다만 모두 잊어주시오.”
지난날 자신에게 대적해 싸운 장수의 허물은 묻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추며 잊어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장수를 양무장 군에 봉하는 한편 그를 따라온 가후도 집금오를 삼았다.
어떤 종류의 감상적인 인간에게는 그 같은 조조에게서 비정 이상 의 섬뜩한 계산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앙(昻)과 조카 안 민(安民),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맹스럽고 충직한 전위를 죽게 한 장 수였다. 육수가와 남양성 아래서 두 번이나 자신을 패주시키 고 몇 번이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던 그를 조조는 기꺼이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벼슬까지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 현실의 냉혹함과 당시의 천하 형세를 고려한다면 오 히려 돋보이는 것은 조조의 정신적인 크기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 매여 큰일을 그르친 일은 예와 이제를 통해 얼마나 자주 보는 정치 적 실패의 예인가. 그런데 조조는 그런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두 가 지의 큰 이득을 얻고 있다. 하나는 원소와의 싸움에서 부족한 자신 의 힘을 보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고 작은 적들에게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효과적으로 선전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혈육과 아끼는 부하를 죽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노렸던 장수도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조조를 보고 누구든 궁지 에 빠지기만 하면 항복을 생각해볼 것은 뻔했고 실제로도 조조는 그 뒤 군웅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항복을 받아낸 사람이 되었다.
장수를 끌어들인 조조 다음으로 손을 뻗친 것은 유표였다. 한때 그와 힘을 합쳐 싸운 적이 있는 장수에게 유표를 끌어들이기 위한 글을 짓게 하자 이제는 반 넘어 조조의 사람이 된 가후가 나서서 말 했다.
“유경승(景)은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이들과 사귀기를 좋아합니 다. 반드시 문명이 드높은 이를 한 사람 골라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 런 사람이 가서 달래야만 항복할 것입니다.”
조조도 세상의 이름을 중하게 여기는 유표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 다. 가후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순유에게 물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공문거(擧)를 보내십시오. 그라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유가 대뜸 공융을 추천했다.
조조도 그 말을 옳게 여겨 순유를 공융에게 보냈다.
“승상께서 한 사람의 글로 이름 있는 이를 뽑아 유표에게 보내고 자 하시오. 공께서 이 일을 한번 맡아보지 않으시겠소?”
“내 친구 중에 예형(禰)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재주가 나보다 열 배나 낫습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황제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니 이번에 가는 일뿐만 아니라도 폐하께 추천하려 했소. 그가 오거든 한번 보내보시지요.”
공융은 그 말과 함께 순유를 보내고 곧 헌제께 예형을 추천하는 표를 올렸다.
‘신이 듣자오니 홍수가 넘쳐흐르자 요(堯) 임금님께서는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 어질고 뛰어난 이를 사방에서 구해 불러 들이셨고, 지난날 세종(世宗, 한무제)께서도 대위를 이으시자 기업을 굳건히 하 시고자 유능한 인재를 널리 물어 쓰셨으니, 많은 선비들이 이에 호 응하여 모여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밝고 어지시어 나라를 이어받 자 액운을 만나셨으나, 해가 기울도록 애쓰시고 스스로를 낮추시니, 산마다 신이 내려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이들이 아울러 나고 있사옵 니다.
가만히 보니 평원 사람 예형은 나이 스물넷에 자는 정평이 라 하는데, 자질이 맑고 뜻이 곧으며 빼어난 재주 있어 누구보다 뛰 어납니다. 처음에는 예문을 익혔고, 학문이 경지에 들어서는 오묘함 을 보아, 한번 본 것은 바로 외울 수 있고 귀로 언뜻 들은 것도 마음 으로 잊지 아니합니다. 성품은 도와 합치하고 생각은 신이라도 내린 듯해서, 홍양(弘, 한의 재상 암산을 잘해 열세 살에 시랑이 되었다)의 곱 셈이나 안세(世, 한무제 때 기억력으로 유명했던 사람)의 묵지(默識)와 예형의 재주를 견주어도 실로 괴이할게 없사옵니다.
충성되고 과단성 있으며 바르고 곧아 뜻에는 서리와 눈을 품은 듯하고, 착한 것은 놀라하며 악한 것은 원수처럼 여기니 임좌(座, 춘추 시절 위나라의 바른 말 잘하던 사람)의 매서운 절개도 그보다 나을게 없사옵니다. 새매가 수백 마리라도 독수리 한 마리보다 못하옵니 다. 예형을 조정에 세우면 반드시 볼만한 게 있사오니, 펄펄 나는 말 과 내닫듯 하는 글은 샘솟고 넘치는 듯 의혹을 풀고 막힌 걸 틔워 적을 맞이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옛날에 가의(賈誼)가 일부러 흉노의 관리가 되어 그 선우(單于)를 가르치려 했고, 종군(終軍, 한무제 때 스물 몇 살에 간의대부가 되어 사신으 로 월왕을 달래러 갔다가 죽은 사람)은 긴 갓끈으로 남월왕(南越王)을 묶 어오려 하였던바, 젊은 나이로 강개(慨)함은 옛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던 일이옵니다. 근일에 노수(路粹)와 엄상(嚴象) 또한 특이한 재 주로 뽑히어 대랑(臺郞, 상서랑)에 올랐으니 예형도 마땅히 그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용이 하늘에 오른다면 날개를 은하에 펼치고, 소리는 자미 (紫薇, 북두칠성. 천자의 거소를 상징)에 떨치며, 빛은 홍예(虹蜺, 무지개. 대궐을 상징)에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예형을 쓰면) 대궐 안에서 벼슬 하는 많은 선비들을 밝히고 더하여 도성의 네 대문까지 빛나게 할 것이니, 하늘의 음악[樂]처럼 신기하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반 드시 있을 것이옵니다.
제실과 황궁에는 비상한 보물이 많을 것이오나 예형 같은 무리는 많이 얻을 수 없사옵니다. 격초(激楚)와 양아(陽阿)의 절묘한 곡은 음악을 맡아하는 이가 탐내는 바이고, 비토(飛兎)와 요뇨(腰裏)같이 빼어나게 빨리 닫는 말은 왕량과 백락(王伯樂, 두 사람 모두 춘추전 국시대 말을 잘 알아보고 또 잘 부리던 사람)이 급하게 구하는 바이옵니다. 저희[]가 감히 무엇을 더 구구하게 아뢰겠습니까마는, 폐하 께서는 신중히 선비를 받아들이셔야 하오니 반드시 비교하고 시험 해보셔야 할 것인즉, 바라건대 예형을 입은 대로[褐衣, 비천한 옷] 불 러보소서. 만약 그에게 볼만하고 뽑아 쓸 만한 것이 없으면 저희들 은 폐하를 속인 죄를 달게 받겠나이다.’
그 같은 공융의 표문이 올라오자마자 조조는 천자로 하여금 예형 을 불러들이게 했다.
천자의 부름이라 예형이 어기지 못하고 나오니 천자는 그를 조조 의 승상부로 보냈다. 그런데 일생을 통해 조조에게 한 특징으로 나 타나는 것은 학식 많고 재주 있는 이들에 대한 까닭 모를 적의이다. 뒤로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아마도 그 첫 번째 희생이 예 형일 것이다.
떠들썩한 이름 때문에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예형을 본 조조는 그 의 꼿꼿한 태도와 쏘아보는 듯한 눈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서로 처음 보는 예를 끝낸 뒤에도 예형에게 앉으란 말조차 없 었다.
예형도 이내 그 같은 조조의 속마음을 읽었다. 재주 있는 이 특유 의 오기가 솟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며 한소리 탄식을 내뱉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넓다 하나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예형의 그 같은 탄식에 조조가 괴이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밑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당대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바라건대 어떤 사람들인지 들려주십시오.”
예형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조가 하나하나 손을 꼽기 시작했다.
“순욱, 순유, 정욱, 곽가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혜가 많으니 옛적 소하(蕭何)나 진평(陳) 같은 이도 오히려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 다. 또 장요, 허저, 막진, 이전 등은 그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 저 무제(武帝) 때의 명장 잠팽(彭)이나 광무제(武帝) 때의 명장 마 무(武)가 되살아난다 해도 그에 미치지 못하리라. 여건, 만총 등은 종사(從事)를 보는 데 따를 사람이 없고, 우금, 서황 등은 선봉장으로 특히 뛰어났다. 하후돈 또한 천하의 기재)이며 조자효(孝, 조인)는 세상이 다 아는 좋은 장수다. 어찌 사람이 없다 하겠느냐?”
그러자 예형은 가소롭다는 듯 웃다가 거침없이 말했다.
“공의 말씀은 맞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내가 모두 알고 있으니 한 번 들어보십시오. 순욱은 초상집 문상과 병든 사람 문병이나 시킬 만하고, 순유는 묘지기 노릇이 알맞을 것입니다. 정욱은 관(關)의 문 지기로 삼아 관문이나 여닫으면 될 것이고, 곽가는 글이나 외고 짓 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장요는 북이나 치게 하고, 허저는 마소나 기 르게 하며, 이전은 편지나 격문을 나르게 하면 되겠지요. 여건은 칼 이나 벼리고 갈며, 만총은 술지게미를 안주로 술이나 마시면 되고, 우금은 널빤지를 지고 담장이나 만들 사람이지요. 하후돈은 겉보기 가 그럴듯하니 완체장군(完醴將軍)이라 부르면 되고 조자효는 인색 하니 요전태수(要錢太守)라고 이름하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 두 옷을 걸쳤으니 옷걸이요, 밥을 먹으니 밥주머니요, 술을 마시니 술독이며, 고기를 먹으니 고깃자루라 부르면 될 자들뿐입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을 모두 보잘것없이 깎아내리자 조조는 성 이 났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예형에게 물었다.
“그럼 그대는 무엇을 잘하는가?”
예형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문과 지리에 두루 통하지 못함이 없으며, 세 가지 큰 가 르침과 그 아홉 가지 갈래三流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막힘 이 없습니다. 위로 임금을 섬기면 요, 순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아 래로 짝하면 그 덕이 공자나 안연에 미칠 수 있습니다. 어찌 속된 무 리들과 함께 섞어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마침 장요가 조 조 곁에 있다가 예형의 그 같은 언동에 더 참지 못했다. 칼을 빼어 찔러 죽이려 하자 조조가 말렸다.
“마침 내가 북 치는 자가 필요하다. 머지않아 조정에서 연회가 있 을 것인즉, 예형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해야겠다.”
그리고 예형에게 물었다.
“어떠냐? 그래도 북잡이는 벼슬아치니 네가 한번 해보겠느냐?” 조조의 내심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형을 조정의 웃음거리로 만들 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셈인지 예형은 그 하찮은 벼슬자 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해보지요.”
그 한마디로 응낙하고 조조 앞을 물러났다.
“저놈의 말투가 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째서 죽이지 못하게 말리셨습니까?”
예형이 나간 뒤 장요가 불쾌한 얼굴로 조조에게 물었다. 조조가 뜻깊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작자가 그래도 헛된 이름이 높아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알려 져 있네. 오늘 만약 그를 죽였다면 천하 사람들은 내가 그를 쓰지 못 해 그랬다고 말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저만 잘난 인물로 추앙받게 만들어줄 뿐이야. 그래서 일부러 북 치기 같은 하찮은 일자리를 주 어 그를 욕보이려 한 것이네.”
그 말에 장요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대궐 안성청(省廳)에다 크게 잔치를 열고 북 치는 벼슬아치에게 북 치기를 명했다. 다름 아닌 예형을 욕뵈기 위해서였다. 예형이 서슴없이 북채를 들고 나서는데 먼저 있던 북잡 이들이 일러주었다.
“북을 치러 나갈 때는 반드시 새 옷으로 갈아입는 법이오.”
그러나 예형은 들은 체도 않고 입던 그대로 북 앞에 섰다. 예형이 두들긴 곡은 어양삼과(漁陽三過)란 노래였다. 세 마디를 두드리는데 그 음이 절묘했다. 예형이 치는 것은 북이되 나는 것은 금석의 소리 로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주니 모두 강개에 젖어 절로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그 자리가 원래 예형을 욕보이기 위한 자리였다. 마냥 감 동에 젖어 있을 수 없어 트집거리를 찾던 조조의 수하들은 예형이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걸 물고 늘어졌다.
“원래 이 자리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야 하거늘 너는 어찌하여 그대로 나왔느냐?”
그러자 예형은 아무 대꾸 없이 홀홀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속옷까지 모두 벗어 던지니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자 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보기가 민망해 얼굴을 돌렸지만 예형은 한 참을 태연하게 서 있다가 이윽고 속옷 하나를 다시 걸쳤다.
“묘당(廟堂)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또다시 조롱당한 기분이 든 조조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것이오. 나는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몸을 그대로 드러냈으니 희고 깨끗한 걸 보여드렸을 뿐이오.”
“그렇다면 네가 희고 깨끗하다는 뜻인데 더럽고 흐린 건 누구란 말이냐?”
예형의 말 속에 들어 있는 가시가 한층 조조를 노하게 했다. 안색 까지 변하며 매섭게 물었다. 예형도 지지 아니했다. 이제는 말투까 지 불손해지며 오히려 꾸짖듯 말했다.
“바로 승상인 듯싶소. 그대는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을 구별하지 못 하니 그것은 눈이 흐린 것이요, 시서를 읽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입 이 깨끗하지 못한 것이요, 충성스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귀가 흐린 것이며, 예와 지금의 일에 아는 바가 적으니 몸이 흐린 것이요,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뱃속이 흐린 것이며, 언제나 찬역할 뜻 을 품고 있으니 마음이 흐린 것이라 할 수 있소. 나는 이미 세상이 알아주는 선비인데도 그대는 한낱 북잡이로 만들었소. 이는 지난날 양화(陽貨)가 공자를 욕보이고, 장창(臧倉)이 맹자를 헐뜯은 것과 무 엇이 다르겠소? 왕패(王)의 위업을 이루려고 하면서 어찌 이렇게 사람을 가볍게 여기시는 거요?”
이미 목숨을 내던지고 대드는 예형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공융은 성난 조조가 예형을 죽일까 두려웠다. 얼른 조조 앞에 나아가 노기를 달래려 들었다.
“예형의 죄는 서미(胥靡, 일종의 노역수)로 끌려가야 될지언정 밝은 임금[明王]의 꿈을 이끌어낼 정도는 못 됩니다.”
여기서 밝은 임금은 은나라 무정(武)으로 꿈에 부열(傅)이라 는 현인이 죄수로 일하는 것을 본 뒤 실제 노역장에서 그를 찾아내 신하로 썼다 한다.
공융이 걱정이 되어 옛사람까지 끌어들였으나 쓸데없는 걱정이었 다. 조조가 문득 성난 기색을 걷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으나 큰소리 친 만큼의 재주는 보여 주기 바란다. 너를 형주에 있는 유표에게 보낼 터이니 가서 그를 달 래도록 하라. 만약 그가 내게 항복해 온다면 너를 공경(公卿)으로 삼 으리라.”
드디어 조조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었다. 방향은 달라 도 조조와 예형 그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기재(奇才)였다. 두 비상 한 정신들이 만나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그때 까지는 조조 쪽이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조조 쪽이 점 차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너무 쉽게 목숨을 던지려는 데 서 예형의 어떤 한계를 본 것이리라.
“아니 가겠소. 내가 무엇 때문에 그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겠소?”
예형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미 그의 정신은 극단한 파탄을 보이 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설 조조가 아니었다.
“너는 가야 한다. 말 세 필과 사람 둘을 딸려줄 터이니 반드시 유표를 달래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사람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공들은 모두 사자로 떠나는 예형을 동문 밖까지 배웅 나가도록 하시오.”
예형이 가지 않으려 했으나 조조가 보낸 두 사람이 좌우에서끼 고 말 위에 태우니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형주로 향하는데 동문 밖에 이르니 문무의 여러 신하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배웅을 나와 있었다. 그러나 예형이 탄 말이 술자리 앞에 이르러도 누구 하나 일 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의 명에 못 이겨 배웅은 나왔지만 자리 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지는 말자는 순욱의 주장에 따른 까닭에 그렇 게 된 것이었다.
예형은 말없이 그런 좌중을 훑어보다 갑자기 목을 놓아 울기 시 작했다. 순욱이 앉은 채로 물었다.
“어찌하여 곡을 하는가?”
“시체 사이를 지나면서 어찌 곡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형이 잠시 울음을 멈추고 그렇게 되물었다. 무더기로 예형에게 욕을 본 꼴이 된 조조의 사람들은 약이 올랐다.
“우리가 시체라면 너는 모가지 없는 미친 귀신이다.”
여럿이 입을 모아 그렇게 응수했다.
“나는 한조의 대신으로 조조의 패거리도 아닌데 어찌 머리가 없다고 하느냐?”
예형이 더욱 뒤틀린 소리로 여럿의 분을 돋우었다. 조조에게서 받은 정신적인 타격으로 사귀(死鬼)에 홀려 있는 예형으로서는 어서 바삐 오탁한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듯싶다.
예상대로 좌중은 분이 오를 대로 올랐다. 성미 급한 무장들은 칼 자루에 손을 대며 금세라도 예형을 찔러 죽일 듯 일어났다. 순욱이 그런 무장들을 급히 말렸다.
“저따위 참새나 쥐새끼 같은 자 때문에 칼에 피를 묻혀 무엇하 겠소?”
“나는 참새나 쥐 같아도 사람의 본성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 들은 인성(性)마저 잃었으니 뒷간의 구더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형이 다시 그렇게 약을 올렸다. 모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조조가 사신으로 보내는 자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모두 깊이 한을 품은 채 흩어졌다.
며칠 뒤 예형은 무사히 형주에 이르렀으나 그의 정신은 파탄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자기가 바라는 죽음을 유표에게서 구하 려 들었다. 겉으로는 유표의 덕을 칭송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비꼬고 놀리는 말만 늘어놓았다. 유표는 화가 났으나 별 내색 않고 예형을 강하(夏)를 지키고 있는 황조(祖)에게로 보냈다.
“예형은 주공을 비꼬고 놀렸습니다. 그런데도 왜 죽여버리지 않으 셨습니까?”
예형이 강하로 떠나가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유표에게 물었다. 유표가 생각 깊은 체 까닭을 말했다.
“예형은 몇 번이나 조조를 욕했지만 조조는 인망을 잃을까 두려 워 죽이지 않고 일부러 내게 보냈다. 나의 손을 빌려 예형을 죽임과 아울러 나를 지혜로운 선비를 죽였다는 욕을 먹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이제 내가 예형을 살려 황조에게로 보낸 것은 조조로 하여금 내 게도 식견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자 모두 유표의 뛰어난 식견을 칭송했다.
그 무렵 원소 또한 유표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했다. 유표는 여러 모사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원본초도 사신을 보내오고 조맹덕도 사신을 보내 나를 저희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소. 어느 쪽을 편 들었으면 좋겠소?”
그러자 종사요 중랑장인 한(韓)이 일어나 말했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맞서 있으니 만약 장군께서 큰일을 하시고 자 한다면 이 틈을 타 저들을 깨뜨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지 가 못하다면 둘 중에 더 나은 자를 가려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고를까 의논하는 게 아닌가?”
“지금 조조는 군사를 잘 부리고, 그 아래는 지혜롭고 뛰어난 인물 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 기세로 보아 반드시 먼저 원소를 치고 다음에 군사를 강동으로 돌릴 것인즉, 그때 장군께서 능히 막아내지 못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장군께서 형주를 들어 조 조 편을 든다면 조조는 반드시 장군을 무겁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유표는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가 먼저 허도로 가서 그 동정을 살핀 뒤에 다시 의논해보는 게 어떤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유표가 그렇게 대답했다. 한숭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임금과 신하는 각기 그 본분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장군을 받들 고 있어 끓는 물, 타는 불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습니다만 허도로 가 는 일은 다릅니다. 즉 장군께서 위로 천자를 받들고 아래로 조조를 따르실 작정이라면 제가 허도에 가는 것은 무관합니다. 그러나 장군 께서 의심을 품고 뜻을 정하지 못하신 때에 제가 허도에 갔다가 만 약 천자께서 제게 벼슬자리라도 내리게 된다면 일은 달라집니다. 그 리 되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어 두 번 다시 장군을 위해 죽을 수 는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대가 허도로 가서 살피고 오라. 나도 따로 생각해 보겠다.”
한숭의 솔직한 걱정에도 유표는 그렇게 우겼다. 한숭은 마음속에 한가닥 불안이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허도로 가야 했다.
한숭을 맞아들인 조조는 과연 그에게 시중 벼슬과 영릉 태수를 내렸다. 그러나 유표에게서 온 사람인 줄 알면서도 형주의 일은 조 금도 묻지 않았다.
“한숭이 허도로 온 것은 우리의 동정을 살피기 위함이요, 또 아무 공도 세운 바 없건만 승상께서는 한숭에게 그토록 중한 벼슬을 내리 시니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유표를 달래려고 간 예형은 아직 껏 소식이 없는데 승상께서는 그를 보내놓고도 한숭에게 뒷일을 전 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어인 일이십니까?”
보다 못한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조조가 차갑게 대답했다.
“예형 그놈은 나를 매우 심하게 욕보였소. 차마 내 스스로 죽이지 못해 유표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형주로 보냈는데 무얼 다시 물을게 있겠소?”
그러고는 오히려 한숭을 형주로 되돌려 보내 유표를 달래게 했다.
조조의 세력을 제 눈으로 본 데다 높은 벼슬까지 얻은 한숭이라 유 표에게 조조의 편을 들기를 권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조조의 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 뒤에 유표의 아들을 허도로 보내 벼슬살 이를 시키라는 말까지 했다.
“네놈이 조조에게서 높은 벼슬을 받더니 두 마음을 먹는구나. 나 를 저버릴 셈이냐?”
아들을 입시(侍)시키라는 말을 듣자 유표가 불같이 노했다. 말 이 좋아 입시지 실은 조조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는 것과 다름없 는 일인 까닭이었다. 한숭도 지지 않았다.
“장군께서 저를 저버리셨을지언정 저는 장군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리쳐 대꾸했다. 그때 곁에 있던 유표의 모사 괴량) 이 유표를 진정시켰다.
“한숭이 떠나기 전에 먼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장군께서 지나 치게 사람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자 유표도 문득 허도로 떠나기 전에 한숭이 한 말이 떠 올랐다. 자기가 억지로 보내 한숭이 천자의 벼슬을 받게 되고 더욱 조조를 크게 보게 된 것이니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히고 한숭을 용서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황조가 예형을 죽인 일을 알렸다. 예측은 했지만 그 경위가 궁금한 유표가 물었다.
“황조가 왜 예형을 죽였다더냐?”
“황조와 예형이 술을 마셔 둘 다 몹시 취해 있을 때라고 합니다.
황조가 예형에게 허도에 어떤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예형은 공문거 (孔文擧, 공융)란 큰 아이와 양덕조(楊德禮, 양수)란 작은 아이 둘을 빼 면 이렇다 할 인물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조는 문득 자 기는 어떤 사람인가고 물었습니다. 예형은 그를 사당[廟]의 귀신으 로 비유했으나 제사는 받아먹어도 영험이 없는 귀신이라고 말했습 니다. 그러자 황조는 벌컥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끌어내 목을 베게 했습니다. 예형이 자신을 나무나 흙으로 빚은 귀신상[土木偶人]이라 고 한 데 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형은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 지황조를 욕해 마지않았다 합니다.”
불쾌하기 짝이 없던 예형이었으나 막상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유표는 문득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예형의 놀라운 재주는 그도 일 찍부터 들어온 까닭이었다. 이에 유표는 사람을 보내 예형의 시신을 수습한 뒤 앵무주(鸚鵡州)에 장사 지내주었다.
예형이 죽었다는 소문은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는 그 소리 를 듣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썩은 선비의 칼날 같은 혀가 오히려 스스로를 죽게 하였다. 마땅 히 경계할 일일진저!”
그런 조조에게서는 슬퍼하거나 아깝게 여기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도 거듭되듯 재사, 특히 빼어난 문사에 대한 조조의 비정과 냉혹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자신은 거기에 관해 말한 적이 없으나 그 같은 이상심리(異常心理)의 바탕을 헤아려볼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글[文學]의 독기(氣)이다. 조조는 여러 방면에 걸쳐 재능을 보였으나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글에 있어서의 성취이다. 당시는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는 달리 중국 문학으로서는 한 특이한 융성을 보인 때로 소위 건안 칠자(建安) 또는 업하칠자(鄴下七子)로 불리는 뛰어난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건안(安) 문단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손 꼽아야 할 것은 조시(曹詩)라 할 만큼 조조와 그의 피를 이어받은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 삼부자의 글은 뛰어난 데가 있었다. 어 떤 평자(者)는 조조가 일생을 통해 달성한 정치적 위업보다 그의 시(詩)를 더 높이 치기도 할 정도였다.
조조는 평생을 싸움터를 누볐으나 한번 창을 기대놓고 붓을 잡으 면 호연한 기백과 높은 품격의 시들을 쏟아냈다. 그러니만큼 글에 대한 조조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고 또 대개는 무장들과 병략 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라 그 자부심은 실제 이상으로 자랐을 것 이다. 그런데 이따금씩 나타나 그의 문학적 자부심을 건드리는 부류 가 바로 재사, 특히 문사들이었다.
세상에서 사람을 상처 입게 만드는 일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 서도 가장 음험하고 치열한 원한을 품게 하는 것은 문학적인 인간의 글에 대한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만약 작가 나 시인에게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권한이 있다면 평론가, 특히 엄 격한 평론가나 작가의 문학적 자부심에 상처를 입힐 만한 천재는 종종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리라.
그다음 조조가 예형을 죽게 한 또 하나의 감정적 배경이 될 수 있 는 것은 정치의 독기이다. 조조의 일생은 그대로 정치적 투쟁의 연 속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투쟁은 철두철미하게 힘의 원리에 지배 되고 승리는 통상으로 상대를 제거하는 형태로 확인되었다. 그런 원 리와 형식에 익숙해온 조조가 은연중에 글의 무력함에 대한 경멸과 문학적 도전에 대한 정치적 대응의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고 해서 그 리 이상할 것은 없다. 즉 조금이라도 자기의 문학적 자부심을 건드 리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정적처럼 제거해버렸는데 그 같은 예는 예형뿐만 아니라 뒷날에도 몇 번이고 거듭 볼 수 있다. 역시 건안칠 자의 하나였던 공융을 죽인 일이나 천하의 재사 양수(楊修)를 죽인 일도 같은 예가 될 것이다.
여기에 비해 서둘러 허망한 죽음으로 줄달음쳐 간 예형의 내면도 음미해볼 만하다. 좋게 해석하면 그의 죽음은 지성인의 결백이 빚어 낸 비극이었다. 그때까지 학문과 이상의 고고한 세계에 있다가 갑작 스레 정치 무대로 끌려나온 그에게는 조조를 비롯한 당시의 관료 사 회가 보인 적의와 냉대가 견딜 수 없이 치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그들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도 절망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거의 정신적인 파탄이라고 할 만큼 외곬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 그의 행위는 나약한 지성의 한계일 수 도 있다. 그의 눈에는 조조와 그의 집단이 지닌 정의 없는 힘이 단순 한 두려움이나 불안 이상의 전율이었으리라. 그리고 아울러 거기에 대처할 길 없는 지성의 나약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 그게 삶 전체에 대한 절망으로 번졌다고 이해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요컨대 힘으로 맞설 자신이 없어지자 그때부터 그는 살아서 불의를 보 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죽음의 길만 찾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조조는 예형의 죽음마저 그대로 두지 않았다. 유표가 항복 해오지 않는 데다 어쨌든 자신이 사자로 보낸 예형이 죽었다는 소 식이 들리자 그걸 핑계로 유표를 치려들었다. 미워해 죽게 만든 인 간의 죽음마저 정치적 목적에 활용할 수 있는 게 또한 조조였다. 순욱이 나서서 그런 조조를 말렸다. 원소와 유비를 놓아두고 형주 로 군사를 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조도 곧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유표 치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서주의 유비로 보면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으나 더 뜨겁고 거센 불 길이 머지않아 그를 휩쓸리라는 예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