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4화 : 다져지는 또 하나의 기업
다져지는 또 하나의 기업
이때 경현의 태사자는 새로이 군사 이천을 뽑아 원래 거느리고 있던 군사에 보탠 뒤 유요의 원수를 갚고자 손책을 찾아 나서려는 참이었다. 손책이 제 발로 찾아온다는 말을 듣자 그 어느 때보다 투 지를 불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태사자와는 달리 손책은 어떻게든 태사자를 산 채로 잡고 싶었다. 그의 무용을 아껴 되도록이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까닭이었다. 주유가 한 계교를 내놓았다.
“경현을 치시되 남, 북, 서 삼면만 공격하고 동문은 비워두십시오. 그러면 힘에 부친 태사자는 그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때 다시 동문 밖 오십 리쯤에 세 갈래 복병을 두면 말과 함께 지칠 대로 지 쳐 있는 태사자를 사로잡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손책이 들으니 좋은 꾀였다. 곧 그 말을 따라 동문을 남겨두고 삼 면을 치열하게 공격했다. 태사자가 이천의 군사를 더 늘렸다 하나 원 래 그들은 싸움을 모르는 산야의 농민들이었다. 기율이 제대로 설 리 없고 군령이 싸움에 맞게 먹혀들 리 없었다. 거기다가 경현의 성 벽 또한 그리 높지 못해 처음부터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런 태사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손책의 장수 진무였다. 그날 밤 진무는 손책의 명을 받고 짧은 갑옷에 칼만 찬 채 군사들에 앞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태사자의 신병들이 어쩔 줄 몰라 허둥지 둥하는 사이에 여기저기 불을 놓았다.
태사자는 성에 불이 붙은 걸 보고 더 지키기 어렵다 생각했다. 급 히 말 위에 올라 공격이 없는 동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를 군사를 이끈 손책이 짐짓 모질게 뒤쫓았다. 태사자는 그 바람에 더욱 정신 없이 달렸다. 삼십 리쯤 가자 뒤따르는 군사의 함성이 들리지 않았 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한 태사자는 이십 리를 더 달렸다. 사람과 말이 함께 지쳐 갈숲을 지나는데 홀연 함성이 크게 일었다. 태사자는 놀라 더욱 급히 말을 몰았다. 그러나 양쪽 갈숲에서 말 을 잡는 데 쓰는 밧줄[馬索]이 빗발처럼 쏟아져 태사자가 탄 말을 얽었다. 다리가 얽힌 말이 쓰러지자 태사자도 곤두박질치며 갈숲에 처박혔다. 그러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우르르 덮쳐 지칠 대로 지친 태사자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렸다.
군사들이 의기양양하게 태사자를 묶어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던 손책은 짐짓 노한 목소리로 군사들을 꾸짖었다.
“내가 장군을 모셔오라 했지 언제 이리 함부로 묶어오라 했느냐? 모두 물러나라!”
그리고 스스로 진채 밖으로 나가 태사자를 풀어준 뒤 자신의 비 단옷을 입히고 진채 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나는 자의)가 참된 대장부임을 알고 있소. 유요 같은 하찮은 무리가 대장을 잘못 써서 오늘 이처럼 패하게 되었으니 너무 욕되게 생각하지 마시오.”
진채로 들어온 뒤 손책이 점잖게 태사자를 위로했다. 항복을 권하 는 적장이 아니라 귀한 손을 맞은 주인 같은 태도였다. 원래 자부심 이 강하고 의리 깊은 태사자였지만 손책이 그렇게 나오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스스로 항복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항복 역시 가볍고 하찮은 무리와는 달랐다.
“만약 지난번 신정(神)에서 서로 싸울 때 공이 나를 사로잡았다 면 해치지 않고 돌려보내주셨겠소?”
태사자가 항복하기를 청하자 손책이 반가워 그의 손을 잡으며 그 런 우스갯소리를 했을 때였다. 태사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 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비굴한 기색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손책은 그게 더욱 기꺼운 듯 큰 소리로 웃으며 태사자를 자신의 장막 안으 로 청해 들였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힌 뒤 크게 술상을 차려 대접했 다. 묵묵히 술잔을 받던 태사자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태수(유요)께서 이제 또 싸움에 지셨으니 그를 따르던 사면 명공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만 믿고 보내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힘들여 사로잡은 자기를 말만 믿고 놓아달라는 것이나 다름없었 다. 그러나 손책은 선뜻 허락했다.
“공의 그 같은 정성이야말로 이 책이 참으로 바랐던바요. 그럼 떠나시되 기한은 내일 정오까지로 합니다. 그때까지는 돌아와주시 기를 바라오.”
“명심하여 지키겠습니다.”
손책의 허락에 태사자는 그렇게 다짐하고 떠났다. 여러 장수들이 진문을 나서는 태사자를 보고 걱정했다.
“태사자는 지금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중(中)이란 원래 속임수가 욕될 것 없는 데다 태사자가 손책과 있은 것이 겨우 반나절도 안 되었던 까닭이다. 그 러나 손책은 자신 있게 말했다.
“자의는 신의를 지키는 장부다. 반드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대로였다. 다음 날 손책은 막대기를 영채 앞에 세워 그 그 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며 태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 말 정오가 되기 전에 태사자가 흩어진 유요의 군사 천여 명을 모아 손책의 영채에 이르렀다. 손책이 기뻐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 람들도 모두 손책의 사람을 알아보는 눈에 감탄했다.
이후 손책은 세력이 점점 불어나 어느새 수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손책은 그 세력을 이끌고 강동으로 내려가 백성들을 지켜주고 그 어 려움을 돌보니 강동으로 몰리는 사람은 더욱 늘어났다. 백성들은 모 두 손책을 손랑(郞)이란 옛날의 애칭으로 부르며 우러러 마지않았고, 힘만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무리는 그 손랑의 군사들이 온다 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고 달아났다. 어디를 가더라도 손책의 군사 들은 한 사람도 노략질하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닭과 개조차 놀라 게 하지 않으매 백성들은 한결같이 기쁨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책이 자기가 거느리는 장졸들을 박하게 대하 는 것은 아니었다. 수고로움이 있으면 소를 잡고 술을 내려 군사들 을 위로했고, 세운 공이 있으면 금과 비단을 내려 보답했다. 그 때문 에 손책의 군사가 지나는 들판은 언제나 기쁜 함성으로 메워졌다. 유요의 옛 군사들도 그대로 남아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그 청을 들 어주었고 따르기를 원치 않는 자는 재물을 주어 농민으로 돌아가게 했다.
강남의 백성치고 우러르고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된 뒤에야 손책은 다른 곳에 피해 있던 어머니와 여러 아우들을 곡아 로 옮겨왔다. 그리고 아우 손권(孫權)과 장수 주태(周泰)에게 선성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오군(吳郡)을 취하러 떠 났다.
이때 엄백호(白虎)란 자가 있어 스스로를 동오(東吳)의 덕왕(德 王)이라 칭하며 오군을 근거지로 삼고, 부장들을 보내 오정과 가흥 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손책의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아우 엄여 (嚴輿)를 보내 막게 했다.
엄여의 군사와 손책의 군사가 부닥친 곳은 풍교라는 땅이었다. 엄 여는 큰 칼을 비껴들고 말을 탄 채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그 꼴을 본 손책이 얼른 말을 채찍질해 나가려 했다. 장굉이 말렸다.
“무릇 우두머리 되는 장수는 삼군의 명이 매인 몸이니, 가벼이 나가 보잘것없는 적과 함부로 창칼을 맞대는 법이 아닙니다. 장군께서 는 스스로를 무겁게 여기십시오.”
손책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는지 한마디 했다.
“선생의 말씀은 금같이 귀합니다. 하지만 제가 몸소 위태로움을 무릅쓰지 않으면 장졸들이 제 명을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다가 장굉이 거듭 말리자 비로소 한당을 내보냈다.
한당이 다리 위에 이르렀을 무렵, 손책의 다른 장수 장흠과 주태 는 미리 작은 배로 강변을 따라 올라가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저 쪽 언덕에 있던 엄여의 군사들이 그 두 사람에게 어지러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둘은 몸을 뒤집어 피하며 언덕에 오르더니 짚단 베 듯 적병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뒤가 찔린 셈이 된 엄여는 더 이상 다리 위에서 버티고 있 을 수가 없었다. 달려드는 한당을 버려두고 말 머리를 돌려 저희 졸 개들 쪽으로 달아났다. 한당이 군사를 몰아 그런 엄여의 뒤를 급하 게 쳤다. 그러자 엄여의 졸개들은 저희가 창문(門)이라 부르는 성 문 쪽으로 쫓겨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아 걸었다.
성 밖에서는 더 저항하는 적군이 없자 손책은 군사를 물과 뭍으 로 나누어 나아가게 한 뒤 그대로 오성(吳)을 에워싸버렸다.
엄청난 손책의 기세에 질렸는지 엄백호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성이 포위된 지 사흘이 되도록 아무도 나와 대적하는 사람이 없 었다. 손책은 군사를 이끌고 창문 앞으로 나가 성 위의 군사를 불러냈다. 항복을 권유하고자 함이었다.
엄백호의 장수 하나가 나타나더니 왼손바닥으로 문루의 기둥을 감싸듯 짚은 채 오른손가락으로 항복을 권하는 손책을 가리키며 욕했다.
“개수작 말아라. 우리 주공께서 낮잠만 깨시면 젖비린내 나는 네 놈의 주둥이를 한 발이나 찢어놓을 것이다!”
이때 태사자가 가만히 활을 끌어내 시위에 살을 먹이며 주위에 있는 장졸들에게 말했다.
“저놈의 왼손등을 뚫어놓으리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위 소리가 나더니 화살은 어김없이 적 장의 왼손등을 꿰뚫고 나무 기둥 깊숙이 꽂혔다. 외마디 비명과 함 께 나무 기둥에 달린 채 몸을 비틀고 있는 그 장수를 보자 성 위의 군사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성 아래 손책의 군사들은 한결같이 태사자의 귀신 같은 활솜씨에 갈채를 보냈다.
여럿이 달려들어 그 장수를 구했으나 그 꼴을 본 엄백호는 몹시 놀랐다.
“저쪽 군사에 이토록 무서운 솜씨를 가진 장수가 있으니 무슨 수 로 대적하겠느냐?”
그 같은 찬탄과 함께 사자를 손책의 진중에 보내 화평을 구하게 했다. 사자로 뽑힌 엄백호의 아우 엄여는 성을 나가 손책을 보기를 청했다. 손책은 엄여를 장막 안으로 맞아들이고 먼저 술을 내어 대 접했다.
“그래, 영형(兄)의 뜻은 어떠하시오?”
술자리가 익어갈 무렵 손책이 문득 물었다. 엄여가 별 생각 없이 제 형에게서 들은 대로 대답했다.
“형님께서는 장군과 강동을 나누어 가지시려 합니다.”
“뭐라고?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어찌 감히 나와 맞먹으려 하느냐!”
손책이 성난 목소리로 그렇게 꾸짖더니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 렸다.
“여봐라. 이놈을 끌어내어 목을 베라. 내 이놈의 목으로 엄백호의 방자한 말에 대한 답을 삼으리라.”
그 말에 엄여는 놀라 몸을 일으키며 제 몸이라도 보호할 양으로 차고 있던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손책이 더 빨랐다. 어느새 뽑아든 칼을 날려 엄여를 베니 엄여는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저놈의 목을 베어 성안으로 돌려보내라.”
손책이 피 묻은 칼을 씻으며 그렇게 영을 내렸다. 엄여를 따라온 자들은 제목 성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며 엄여의 목을 거두어 꽁 지를 싸 말고 성안으로 돌아갔다.
엄백호는 일이 글렀다 생각했다. 아우의 원수 갚을 생각은커녕 제 한 몸 살기에 급급해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손책은 그런 엄백호를 뒤쫓는 한편 사람을 보내 그의 다른 성도 거 두어 들이게 했다. 황개가 힘써 싸워 가흥을 빼앗고 이어 태사자도 오정을 떨어뜨리매 인근의 여러 주가 모두 손책의 깃발 아래 평정 됐다.
엄백호는 여항으로 달아나 백성들을 노략질하다가 거기서도 능조 (操)란 사람이 고을 사람을 이끌고 대항하는 바람에 한바탕 낭패를 보고 이번에는 회계로 달아났다. 능조 부자는 엄백호를 내쫓은 뒤 손책을 맞아들였다. 손책은 그들을 종정교위로 삼은 뒤 군사를 이끌고 엄백호를 쫓아 강을 건넜다.
엄백호는 근처의 도적 떼까지 모아 강나루에서 다시 맞서 보았으 나 정보에게 또 한 번 대패했다. 별수 없이 밤길을 달려 회계에 이르 렀다. 회계 태수 왕랑(王郞)은 엄백호와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거기 다가 손책의 야심이 자기라고 남겨둘 것 같지 않아 군사를 이끌고 엄백호를 구하려 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서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손책은 인의의 군사를 부리고 있고, 엄백호는 포악 한 장수입니다. 차라리 엄백호를 사로잡아 손책에게 바치는 것이 마 땅합니다.”
왕랑이 보니 회계의 여요 땅 사람으로 우번(虞翻)이란 군리였다. 그러나 이미 생각을 정한 왕랑은 우번을 꾸짖어 물리쳤다.
‘이제는 회계도 왕랑의 땅으로 남지 못하겠구나!’
우번은 그렇게 탄식하며 떠나버렸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을 보지 못한 왕랑은 군사를 이끌고 엄백호를 만나 산음의 들판에 함께 진을 쳤다. 두 군사를 합쳐놓으니 자못 기세가 드높았다.
이윽고 손책이 이르자 양쪽 군사는 원을 이루며 대진했다. 손책이 말을 몰고 앞서 나가 왕랑에게 소리쳤다.
“나는 인의의 군사를 일으켜 절강 땅을 평안케 하려 한다. 그런데 너는 어찌 도적을 도와 감히 내게 맞서려 하느냐?”
“이 속 컴컴한 놈아, 아직도 욕심이 차지 않느냐? 이미 오군을 얻 어놓고 다시 힘으로 나의 땅을 빼앗으려 드는구나. 이제 내가 엄씨를 위해 그 원수를 갚아주러 왔으니 그 목이 어깨 위에 붙어 있을 틈도 오래 남지 않았다.”
왕랑도 지지 않고 손책을 꾸짖었다. 분을 못 이긴 손책이 창을 꼬 나들고 나서려는데 태사자가 먼저 말을 달려 나갔다. 태사자의 용맹 을 모르는 왕랑 또한 칼춤을 추며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왕랑은 태사자의 적수가 아니었다. 몇 합 부딪기 도 전에 제 주인이 불리한 걸 알아본 왕랑의 장수 주흔(周昕)이 도우 러 달려 나갔다. 손책의 진중이라고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황 개가 말을 달려 나가 주흔을 가로막았다.
북소리 징소리 요란한 가운데 한동안 두 패의 싸움이 볼만하게 어우러졌다. 그러나 미처 승부를 가리기도 전에 왕랑의 진 뒤편이 먼저 어지러워지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졌다. 주유와 정보가 뒤로부 터 치고 든 때문이었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게 되자 왕랑은 놀라 군사를 돌렸으나 마침내 는 견뎌내지 못했다. 엄백호, 주흔 등과 한 줄기 혈로를 열어 간신히 성안으로 돌아간 뒤 적교를 달아 매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손책의 대군은 승세를 타고 성 아래까지 다가와 사면으로 에워싸 고 급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왕랑이 성안에서 보니 그 기세가 하도 엄청나 마침내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죽 기로 싸워볼 작정으로 성을 나서려는데 엄백호가 말렸다.
“손책의 병세가 몹시 사나우니 자네는 마땅히 성을 높이고 벽을 두껍게 하여 지키고 나가지 말게. 한 달이 못 돼 적은 양식이 다해 돌아가게 될 것이네. 그때 그 빈틈을 노려 뒤를 치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이네.”
왕랑이 들으니 옳은 말 같았다. 이에 굳게 회계성을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손책은 잇달아 며칠을 공격했으나 성이 워낙 튼튼한 데다 적이 굳게 지키기만 하니 성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잠깐 공 격을 늦추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숙부 손정(孫靜)이 한 꾀를 일러주었다.
“왕랑이 든든한 성에 기대 굳게 지키기만 하니 급하게 뺏기는 어 려울 것이네. 듣기에 회계의 돈과 곡식은 태반이 사독에 있다 하네. 그곳을 먼저 쳐서 빼앗는 게 어떤가? 이곳에서 몇십 리밖에 되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왕랑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 방비를 든든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니 그곳을 손에 넣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네. 그야 말로 출기불의 (出其不, 적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치고 나감)로, 만약 군 량이 없으면 왕랑 제 놈이 무슨 수로 오래 버티겠는가?”
그 말을 들은 손책은 크게 기뻤다.
“숙부께서 묘책을 주셔서 이제 적을 깨뜨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감사를 올린 뒤 즉시로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급하게 군사를 내어 성문마다 불을 지르게 하고 거짓으로 깃발 을 세워 대군이 성을 공격하는 듯 보이게 하라.”
이에 장졸들은 손책이 시킨 대로 했다. 성안의 왕랑과 엄백호는 거 기 놀라 사독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성을 지키는 데만 힘을 다했다. 그날 밤이 되었다. 손책은 가만히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려 남으 로 향했다. 적이 준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사독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주유가 그런 손책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크게 군사를 움직이시면 왕랑은 반드시 군사를 내어 뒤쫓을 것입니다. 그때 적이 예측하지 못한 군사[奇兵]를 쓰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손책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그 준비를 해두었네. 오늘밤에는 이 회계성을 얻게 될 것이야.”
그러고는 곧 영을 내려 군마를 움직이게 했다.
손책의 군마가 물러간다는 말은 곧 왕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 랑은 여럿을 데리고 몸소 성벽 위로 나가 살펴보았다. 성 아래에 연 이어 불길이 이르는데도 떠난다는 군사의 정기(旌旗)는 오히려 더 삼엄했다. 낮의 공격에 놀란 뒤라 더럭 의심이 일었다. 손책이 떠나 는 것이 아니라 유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 주흔이 그런 왕랑을 깨우 쳤다.
“손책은 이미 갔습니다. 짐짓 허장성세로 우리를 의심케 하고 있 을 뿐이니 어서 군사를 내어 치는 게 좋겠습니다.”
엄백호도 옆에서 거들었다.
“손책이 갔다고는 하나 틀림없이 사독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장군(周將軍)과 함께 뒤쫓아 치겠습니다.”
그 말에 왕랑도 놀랐다.
“사독은 우리의 군량을 갈무리해둔 곳이오. 반드시 지켜야 합니 다. 공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가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을 도와주시 오. 나도 곧 뒤따라 접응하겠습니다.”
급한 목소리로 엄백호를 재촉했다. 주흔과 엄백호는 그 말을 따라 군사 오천을 이끌고 급하게 성을 나갔다. 초경 무렵 성에서 이십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빽빽한 숲속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갑자기 횃불이 대낮처럼 밝게 사방을 비추었다.
놀란 엄백호는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한 장수가 앞서 달 려나오며 그런 엄백호를 가로막는데 불빛 중에 보니 다름 아닌 손책 이었다. 주흔이 말을 몰아 달려 나갔으나 손책의 한 창에 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엄백호는 더욱 놀라 한 줄기 혈로를 뚫어 달아나기 바빴다. 자기들을 이끌고 온 두 장수가 그 모양이니 나머지야 말할 것도 없었다.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고 모조리 손책에게 항복해버렸 다. 엄백호만 간신히 몸을 빼내 다시 여항을 바라고 달아났다.
이때는 왕랑도 이미 성을 나온 뒤였다. 급하게 사독을 향하는 중 에 엄백호와 주흔이 이끌고 간 전군이 이미 깨져버렸다는 소식을 들 었다. 가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나 회계성으로도 또한 돌아갈 엄 두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졸개들과 함께 바닷가로 달아났다.
손책은 대군을 이끌고 돌아와 비다시피 한 회계성을 공격했다. 주 흔과 엄백호, 왕랑이 차례로 군사란 군사는 모조리 끌고 나간 뒤인 데다 승세를 탄 손책의 군사들이라 성은 어렵잖게 떨어졌다. 성안으 로 들어간 손책은 전처럼 군사를 단속하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 시켰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군사 하나가 와서 알렸다.
“한 장수가 엄백호의 목을 가지고 주공을 뵙고자 합니다.”
손책이 반갑게 그 장수를 맞아들여 보니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은 모지고 입이 넓었다.
“그대는 어디서 온 누구시오?”
손책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저는 회계의 여요 땅에 사는 동습(董이올시다. 자는 원대(元代)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기품이 자못 늠름했다. 손책은 기뻐하며 그의 공 을 치하한 뒤 별부사마로 삼았다.
엄백호가 죽고 왕랑이 달아남으로써 동쪽도 완전히 평정이 되었 다. 손책은 숙부 손정으로 하여금 왕랑을 대신해 회계 태수 자리에 앉게 하고, 주치로는 엄백호를 대신해 오군 태수를 삼았다. 그리고 자신은 군사를 되돌려 강동에서 회군하였다.
이때 강남의 선성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책이 강 동으로 떠나고 손권이 주태와 함께 남아 선성을 지키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부근에 있던 도둑 떼가 몰려들었다. 깊은 밤을 기다려 사 방으로 성을 에워싸고 도둑 떼가 몰려드니 많지 않은 군사로 주태 혼자서는 당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주태는 우선 그곳을 피하기 로 하고 손권만 보호해 말 위에 태웠다. 급한 김에 자신은 갑옷도 꿰 지 못한 맨몸으로 걸어서 뒤따르는 판이었다.
도적 떼가 그런 손권과 주태를 에워싸고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상태가 얼마나 위급한지 도적들의 칼날에 손권의 안장이 찍힐 정 도였다. 주태는 맨몸에 칼 한 자루로 손권을 보호하며 길을 뚫었다. 말이 없어 더딜 수밖에 없었으나 워낙 무서운 기세로 여남은 명이나 베어 죽이니 도적들도 주춤주춤 길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 탄 도적 하나가 급하게 내달으며 창을 내밀어 주태를 찔렀다. 창을 등판에 맞은 주태는 아픔을 참고 재빨리 몸을 돌려 그 창 자루를 거머쥐었다. 잠시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가 벌어 졌으나 마침내 말 위의 도적이 견뎌내지 못했다. 주태가 한번 힘을 주어 떨쳐버리니 도적은 마침내 창 자루를 놓치고 말 아래로 굴러떨 어졌다.
주태는 잽싸게 몸을 날려 임자 잃은 말 위로 뛰어올랐다. 그사이 에도 곁에서 저희 편을 돕는 도적들이 있어 주태는 온몸에 창을 받 았지만, 아직도 몸을 돌볼 틈이 없었다. 말에 박차를 가하며, 빼앗은 창을 휘둘러 손권을 돌보고 몰려드는 도적들을 쫓기에 바빴다.
마침내 도적들도 더는 그들의 길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간신히 선성을 빠져나와 살펴보니 주태는 온몸에 열두 군데나 창상을 입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손권은 급히 의원을 불러 상처를 돌보게 했다. 의원이 달려와 상처를 씻고 고약을 붙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상처가 덧나고 곪아 터져 목숨 마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손책은 몹시 놀랐다.
“권(權)이 무사한 것은 불행 중에도 다행한 일이나 그를 구하려다 주태가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싸움터에서는 범 같은 장수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손책이었다. 거기다 주태는 누구보다 아끼는 장수라 손책은 답답하 고도 애가 탔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동습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전에 해적들과 싸우다가 몸에 여러 군데 창을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회계의 군리로 있던 우번이 한 의원을 추천하여 겨우 보름 만에 깨끗이 나은 적이 있습니다. 우번을 불러 그 의원을 찾게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번이라면 우중상 아닌가?” 이
“그렇습니다.”
“그는 전날 회계 태수 왕랑 아래서 일하던 사람이지 않소?”
“하지만 주공께서 오심을 듣고 왕랑에게 항복을 권하다 쫓겨나 지금은 향리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나도 그가 어진 선비란 말을 들었소.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마땅 히 내가 불러 쓰리다.”
손책은 그렇게 말한 뒤 장소와 동습을 함께 보내 우번을 청해오게 했다.
우번이 막하에 이르자 손책은 그를 두터운 예로 대한 뒤에 공조 (曹)일을 보게 했다. 그런 다음 주태의 일을 말하고 좋은 의원을 구해주기를 청했다. 우번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주공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마땅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이름은 화타(華)요, 자를 원화元化)라 하는 데 실로 당세의 신의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우번은 그렇게 말하고 하루도 안 돼 화타를 데리고 왔다. 손책이 그 인물을 보니 얼굴은 아이처럼 맑고 깨끗한데 머리는 학의 털빛처 럼 흰 것이 흔한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손책은 그를 상빈(上賓)으로 대우한 뒤 주태를 살펴보게 했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태의 상처를 살피고 난 화타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과연 주태는 화타가 상처를 매만지고 약을 쓴 지 한 달도 안 돼 거뜬히 일어났다. 손권은 물론 손책의 기쁨은 컸다.
“참으로 하늘이 이 손아무개를 위해 보내주신 신의외다. 무엇으로 은공을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책은 그렇게 감사하고 후한 상을 내려 보답했다.
화타는 일명 화부(華敷)라고도 하는데 그의 의술은 정사의 기록으 로도 거의 신비한 데까지 있다. 조조와 고향이 같은 그는 일찍이 서 토(徐土)란 이에게 배워 유학뿐만 아니라 수리(數理)와 경학(經學)에 도 통했다.
패군의 상(相)인 진규)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효렴에 천 거하였고 태위 황완(琬)도 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쓰고자 하 였으나 화타는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당시로서는 방문(門)에 가까운 양생(養生術)과 의약에만 전심했다. 그의 양생술은 놀라 워 머리가 희어진 뒤에도 얼굴은 아이처럼 맑고 깨끗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백 살이 넘어도 오히려 젊은이의 힘참이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한 것은 의술이 었다.
그는 약(藥)과 뜸[]과 침(鍼)에 모두 통해, 약을 쓰면 서너 종의 약재만 합쳐 달여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었으며, 뜸도 침도 두 곳 [一兩處]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내과 중심의 그 같은 치료 외에 외과 분야에도 거의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었다.
화타는 마비산(麻沸散)이란, 아마도 삼麻)에서 추출한 것으로 짐 작되는 마취제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걸 마신 사람은 즉시로 취한 듯 죽은 듯 아픔을 모르게 되는데[須叟便如醉死無所知] 이때 그가 째 서 수술한 부위는 사지뿐만 아니라 복개(開) 수술이며 뇌 수술에 까지 걸쳤다.
화타의 신비한 의술을 말하는 일화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몇가지만 추려보자.
감릉의 상(相)으로 있던 사람의 아내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는 데 복통이 심해 견디기 어려웠다. 화타를 불러 보였던바 맥을 짚어 본 그가 말했다.
“태아가 이미 죽었소.”
그리고 시중드는 여종을 불러 부인의 배를 만져보게 하며 말했다.
“죽은 태아가 어느 쪽에 있는지 말하라. 왼쪽에 있으면 남자아이 일 것이고 오른쪽에 있으면 여자아이일 것이다.”
만져 본 시비가 왼쪽이라고 말하자 화타는 곧 부인에게 약을 달 여 먹여 죽은 아이를 쏟아내게 했는데, 과연 남자아이였다.
또 현리(吏) 윤세(世)란 자가 사지가 쑤시고 입안이 마르며 잘 듣지를 못하고 오줌을 누지 못했다. 진맥을 마친 화타가 말했다.
“뜨거운 음식을 먹여보시오. 땀이 흐르면 나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오.”
그런데 뜨거운 음식을 먹여도 땀이 나지 않았다.
“이미 내장의 기운이 끊어졌소. 소리 내어 흐느끼다 죽을 것이오.”
화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는데 정말 그대로 되었다. 부리(府 吏) 아심(兒)이란 자와 이연(李延)이란 자가 똑같이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이나 화타를 찾아왔다.
“아심은 설사약을 먹고 이연은 땀을 내도록 하라.”
같은 병에 화타의 처방이 그렇게 다르니 듣는 사람이 이상해 물었다.
“아심은 밖이 든든하고 이연은 안이 든든하니 치료가 다를 수밖 에 없지 않은가.”
화타가 그렇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똑 같이 나았다. 염독 땅의 엄흔(嚴昕)이란 사람이 여럿과 함께 화타를 보러 왔다. 화타가 건장한 엄흔을 보고 말했다.
“자네 몸이 괜찮은가?”
“아무렇지 않네.”
엄흔이 어리둥절해 대답했다. 화타가 어두운 얼굴로 주의를 었다.
“자네 얼굴에 급한 병이 나타나고 있네. 술은 너무 마시지 말게.”
그래도 엄흔은 믿지 않았으나 과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죽었 다. 독우 벼슬을 하던 돈자헌(頓獻)이 병이 났다가 나았으나 마침 화타를 만났기에 진맥을 해보았다.
“아직도 몸이 허하오. 다 나은 것이 아니니 힘드는 일은 하지 마 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인 바, 죽을 때에는 혀를 몇 치 빼물게 될 것이오.”
그런데 돈자헌의 아내가 남편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듣고 백리를 걸어 보러 왔다가 그만 동침을 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돈자헌 은 사흘 만에 다시 병이나 화타가 말한 것처럼 혀를 몇 치나 빼물 고 죽었다.
그밖에도 화타의 의술을 보여주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비록 그가 동오로 가 주태를 치료했다는 기록은 그의 정전에는 남아 있지 않으 나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한편 주태가 완쾌되어 한시름을 덜게 된 손책은 강남 일대에 남 아 있는 도적 떼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유요를 비롯해 엄백호, 왕랑 등 한때는 강동과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을 모조리 격패 시킨 손책의 날카로운 기세를 골짜기에 숨어 백성들이나 노략질하 던 산적 떼가 당해낼 리 만무했다. 군사를 보낸 지 보름도 안 돼 강 남 일대에서 도둑 떼는 물론 손책에게 맞서는 세력은 모두 비로 쓸 듯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할 일은 무엇이오?”
강남이 평정되자 손책은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장소가 나와 대답했다.
“먼저는 장수와 군사를 요해처마다 나누어 보내 이미 얻은 땅을 지키는 일이요, 다음은 조정에 표문을 올려 강동에 주공이 계심을 알림과 아울러 힘으로 얻은 것을 제실로부터 승인받도록 하는 것입 니다.”
장소의 뒤를 이어 주유가 또 권했다.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화친을 맺어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왜 꼭 조조인가?”
손책이 주유에게 물었다.
“물론 힘 있는 제후는 여럿 있습니다만 조조만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손찬은 너무 멀고 대국을 살필 안목 과 포부가 모자랍니다. 원소 또한 공손찬과 크게 나을 것 없는 데다 지금 조조와 손잡고 있으니 구태여 가까운 조조를 두고 그와 화친할 까닭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또 조조는 천자를 끼고 있어 형님에게 당장 필요한 명분과 조정의 승인을 마음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술은 그래도 어려울 때 나를 받아주었고, 이번에는 군사까지 빌려주지 않았는가?”
“원술이 군사를 빌려준 것은 전국 옥새가 탐나서이지 형님을 위 해서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의 사람됨이 오래 손잡고 일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형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전국 옥새 또한 언젠가는 찾아와야 할 선대의 보물이니, 오히려 원술과 창칼을 맞댈 날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자 한동안 생각에 잠기던 손책이 결연히 말했다.
“공근(公)의 말이 옳네.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화친을 청해보게. 나는 이 기회에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되돌려 달라고 해야 되겠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원술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이니 조조 도 훨씬 더 우리를 믿지 않겠나?”
그렇게 계책이 정해지자 그날로 세 갈래의 사자(使者)가 각기 길 을 나누어 강동을 떠났다. 하나는 표문을 가지고 조정으로 가고 하 나는 밀서를 가지고 조조의 부중으로 떠났다. 나머지는 원술에게 옥새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사자였다.
길이 가까운 만큼 원술에게 가는 사자가 가장 먼저 수춘에 이르 렀다.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제위를 넘봐오던 원술이 호락호 락 옥새를 내어놓을 리 없었다. 아직은 좋은 말로 돌려주기를 청하 는 손책에게 그 역시 적당한 구실을 대어 사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뒤 급히 장사(史) 양대장(楊大將)과 도독인 장훈(張勳), 기령(紀靈), 교유(橋), 상장인 뇌박(薄), 진란(陳蘭) 등 서른 몇 사람을 불러 의논했다.
“손책은 내게 군마를 빌려 오늘날 강동의 땅을 모두 차지했다. 그 런데도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맡기고 간 전국 옥새를 내놓으라 하니 무례함이 지나치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이 배은망덕한 어린 것을 쳐 없앨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양대장이 일어나 말했다.
“손책은 험한 장강에 의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넉넉합니다. 아직 도모할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먼 저 유비를 쳐서 지난날 까닭 없이 남의 지경을 침범한 죄를 물으십 시오. 손책은 유비를 쳐 후환을 없이 한 뒤에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 입니다.”
“유비를?”
원술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양대장을 쳐다보았다. 양대장이 한 층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주공께서 따라만 주신다면 며칠안으로 유비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계책인가?”
원술도 귀가 솔깃해졌다. 금방 손책의 일을 잊어버린 듯 은근하게 물었다. 양대장은 잠시 뜸을 들인 뒤 가장 지모 깊은 체 떠벌렸다.
“유비의 군사들은 소패에 머무르고 있어 깨뜨리기 어렵지 않으나 두려운 것은 서주에 호랑이처럼 버티고 있는 여포입니다. 전날 주공 께서는 여포에게 금과 비단과 양식과 말을 약속해놓고 주지 않으신 일이 있어, 그 일로 틀어진 여포가 유비를 돕고 나서면 큰일입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먼저 사람을 시켜 전날 여포에게 약속한 물품들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주어 군사를 움직이 지 않도록만 하면, 유비를 사로잡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또 먼저 유비를 사로잡으면 나중에는 여포까지 엿볼 수 있으니 서주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술이 들어보니 자못 그럴듯했다. 이에 급히 조 이십만 석을 갖 추어 여포에게 보내고, 이어 한윤(韓胤)을 시켜 밀서를 가지고 여포 를 찾아보게 했다.
‘지난날 장군께 약속을 드리고도 이토록 늦어 실로 죄스럽고 부끄 럽소이다. 이제 곡식 이십만 석을 실어 보내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 라오. 나머지는 전일에 까닭 없이 내 지경을 침범한 유비를 쳐서 한 을 푼 뒤에 마저 보내리다. 유비를 사로잡는 일은 장군께서만 그를 돕지 않으신다면 쉽게 이루어질 것이오.’
그 같은 원술의 밀서와 함께 생각지도 않은 군량 이십만 석이 생기자 여포는 입이 떡 벌어졌다. 진궁의 권유로 간신히 회복해둔 유 비와의 우의 따위는 깨끗이 잊고 원술의 요청을 응낙해버렸다.
원술 또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자 시각을 지체하지 않았다. 그날로 기령을 대장으로 삼고 뇌박과 진란을 부장으로 삼아 수만 군 을 일으켰다. 강동에 인 바람이 뜻밖에도 유비에게 몰아치게 된 것 이다.
소패로 진군하는 원술군의 기세는 높았으나 사실 원술의 실패는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조조와 원소의 결속이 아직 강하게 유지 되고 있는 데 비해 원술과 공손찬의 결속은 이미 느슨해진 지 오래 였다. 거기에다 강동에 새로운 적이 생겼으면, 약간의 원한은 있더 라도 아직은 공손찬과 친분이 유지되고 있는 유비와는 협력 관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여포와의 화친이 맺어진 것을 원술이 새로 얻은 힘으 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도 믿을 것은 못 되었다. 여포의 사람됨을 헤 아려 말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매수이지 장구한 화친이 아니었다. 결국 원술은 유비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눈앞의 작은 이익과 조급으로 사방을 모두 적으로만 남겨두게 된 셈이었다. 그 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의 그늘에서 자란 손책의 기업을 더욱 다져주 는 셈이기도 했다. 그가 중원에서 한 방파제마냥 좌충우돌하는 동안 강동의 손가(家)는 뒷날 천하를 삼분할 기틀을 갖추게 되기 때문 이다.
“원술이 군사를 일으켜 유비를 친다니 이때 우리는 원술의 뒤를 치는 게 어떤가?”
처음 원술의 소문이 들어왔을 때 여럿을 불러들인 손책이 그같이 성급한 의견을 내놓았다. 주유가 말렸다.
“원술이 비록 용렬하나 그 세력은 자못 뿌리가 깊고, 병마며 군량 도 아직 우리가 함부로 넘볼 처지가 못 됩니다. 또 유비를 치기 위해 군사를 냈다고는 하지만, 상장 하나에 군사 만여 명이니 원술이 거 느린 장졸의 열에 두셋도 되지 않습니다. 그를 치는 것은 우리의 힘 을 좀더 기른 뒤에라도 늦지 않습니다.”
주치도 주유와 뜻이 같았다.
“주공, 아직 장강 남쪽에는 그 절반의 힘을 들이고도 백배의 땅을 얻을 곳이 많습니다. 먼저 그런 곳부터 거두어들여 근거지를 넓히고 병마를 늘리는 것이 옳습니다. 일의 앞뒤를 바꾸어 뒷날의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나오자 손책도 선선히 뜻을 바꾸었다. 그들의 권유 에 따라 가까운 지역을 평정하여 근거지를 늘리고 그렇지 않은 때는 군사를 조련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도 게을 리 하지 않았다. 생업을 권장하고 세금을 적게 하니 강동 일대는 곧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소문이 퍼지자 유민들까지 몰 려들었다.
머릿수가 늘어나다 보면 재사)도 늘고 장수감도 많아지는 법. 거느린 인구에 있어서도 병세에 있어서도, 이미 손책은 중원의 군웅(群雄) 그 누구에게 비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손견의 남다른 야망과 포부는 이제 그 아들에 이르러 형체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