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7화 : 천자의 꿈은 수춘성의 잿더미로
천자의 꿈은 수춘성의 잿더미로
이때 남양의 원술은 한창 세력이 강성했다. 땅은 넓고 곡식이 많 이 나 수십만 군대를 거느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가 전에 손 책에게서 맡은 옥새까지 있으니, 원래가 야심만만한 원술은 차차 참 람된 마음이 생겼다. 속으로 제호(帝號)를 쓰기로 생각을 굳히고 무 리를 모아 의논을 시작했다.
“지난날 한 고조(高祖)는 처음 사상(上)이란 곳의 한낱 정장( 長)에 지나지 않았으되 천하를 얻어 다스린 지 어언 사백 년이 지났 소. 그러나 이제 그 기수가 다해 해내(海內)가 마치 끓는 죽솥 같이 되었소이다. 우리 가문은 사세오공(四世)의 명가이며 바야 흐로 천하의 인심이 쏠리는 바이오. 이에 나는 위로 하늘의 뜻에 응 하고 아래로 사람의 원하는 바를 따라 구오(九五)의 자리로 나가려하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그러자 주부 염상(閻象)이 일어나 말했다.
“아니 됩니다. 옛적에 주나라는 후직(后稷)으로부터 덕을 쌓고 공 을 거듭하여 문왕(文王) 때에 이르면 천하의 셋에 둘을 차지하게 되 었으나 오히려 엎드려 은(殷)을 섬겼습니다. 명공의 가문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옛적 주의 번성함에는 미치지 못하고 한이 비록 쇠하였 다 하나 아직은 은의 주왕(紂王) 같은 포학함은 없습니다. 그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 됩니다.”
말인즉 마디마디 옳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원술이라 그 옳음을 알아들을 리 만무였다. 오히려 노한 기색으로 답했다.
“우리 원씨(袁氏)는 원래 진(陳)나라에서 나왔고 진은 또한 대순 (大舜)의 후예다. 오행(五行)으로 따지면 토(土)에 해당되니 내가 화 (火)에 해당되는 한을 이으면 그것은 토로 화를 잇는 게 되어 이치 에도 맞다. 또 참결(讖訣)에 이르기를 한을 대신할 자는 도고(塗高) 라 하였는데 내 자가 공로(公路)이니 로(路)는 곧 도(塗)와 통하는 바라 정히 그 참결에 들어맞는다. 뿐인가. 내게는 또 전국 옥새가 있 다. 이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 내가 제위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오히 려 하늘을 저버린 일이라 할 것이다. 이미 내 뜻은 정해진 바이니 그 대들은 여러 소리 마라. 굳이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목을 베 리라!”
원술이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나오자 아무도 더 말릴 엄두를 못 냈다. 이에 원술은 날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나아가는데 그 행사가 자못 볼만했다. 호(號)를 중씨(仲氏)로 하고, 용봉을 아로새긴 연(輦)에 올라 남쪽 교외에 나가 하늘에 제사한 뒤 데리고 살던 풍방(馮)의 딸을 비로 삼고 그 아들로 동궁(東宮)을 세웠다. 그리고 관부와 관등을 정하는데 한가지로 천자의 조정(朝)과 같았다.
그렇게 한참 신이 나 돌아가던 어느 날 날아든 것이 자기의 사자 를 여포가 죽이고 전에 보낸 한윤은 조조에게 묶어 보내 조조가 그 를 죽이게 했다는 소문이었다. 혼담이 깨어지고 자기가 보낸 사람을 함부로 죽인 것만도 화가 나는데 한술 더 떠 자신의 적인 조조에게 붙었다는 말을 듣자 원술은 견딜 수가 없었다.
원술은 곧 장훈(張勳)을 불러들여 대장군에 봉한 뒤에 이십여 만 의 대군을 이끌고 일곱 길로 나누어 서주를 치게 했다. 제일로는 대 장군 장훈이 이끄는 부대로 가운데를 막고, 제이로는 상장 교유(橋 蕤), 제삼로는 상장 진기(陳), 제사로는 부장 뇌박雷薄), 제오로는 부장 진란(陳蘭), 제육로는 항장(降將) 한섬(韓暹), 제칠로는 항장 양 봉(楊奉)이었는데 각기 좌우로 갈라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연주 자사 금상(金尙)으로 태위를 삼아 그들 칠로군(七路 軍)의 군량과 마초 대는 일을 보살피게 했다. 금상은 원래 원술의 사 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제는 황제까지 참칭하니 더욱 그 명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난 원술은 그를 죽이고 기령(紀靈)을 대신 칠로군의 도구응사(都應使)로 삼았다.
원술도 스스로 삼만 군을 이끌고 이풍(李), 양강(梁剛), 악취(樂 세 사람을 최진사(催進使)로 삼아 그들 일곱 갈래 대군의 진병을 재촉케 하는 한편 변화에 따라 뒤에서 호응하게 했다. 형식도 천자 의 친정과 비슷하고 기세도 대단했다.
소문을 듣고 놀란 여포는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원술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며칠 안 돼 속속 전갈이 들어왔다.
“적의 대장 장훈이 이끄는 군사는 큰길을 달려 서주로 오고 있습니다.”
“상장 교유의 군사는 소패를 취하려는 듯합니다.”
“상장 진기의 군사는 기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부장 뇌부의 군사는 낭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진란의 군사는 갈석 쪽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양봉의 군사는 준산입니다.”
“한섬은 하비 입니다.”
거기다가 원술이 직접 삼만 군을 이끌고 그들을 재촉하는 바람에 하루에 오십 리씩 달려오는데, 지나는 마을마다 노략질이라는 말까 지 들어왔다.
당황한 여포는 급히 여러 모사들을 불러들여 원술 막을 의논을 했다. 그러나 계책을 내기도 전에 진궁이 일어나 말했다.
“오늘 이 서주의 화는 진규(陳) 부자가 부른 것입니다. 조정에 아첨하여 자기들은 벼슬과 녹을 얻고 화는 장군께 옮겼으니 둘을 목 베도록 하십시오. 그 목과 함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원술에게 올린 다면 원술의 군사는 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귀가 엷은 여포는 그 말을 듣자 이내 진규와 진등 부자에게 원망 이 일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둘을 잡아내리라고 명했다. 진등 이 껄껄 웃었다.
“왜 웃느냐?”
워낙 그의 태도가 자신 있게 보여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든 여포가 물었다.
“천하의 영웅이 어찌 이만 일로 그토록 겁을 먹으십니까? 제가 보 기에 원술의 칠로병은 썩은 풀더미와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도 대체 걱정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게 적을 깨뜨릴 계책이라도 있단 말이냐?”
여포가 한 가닥 기대를 걸며 물었다.
“어려울 것 없지요.”
“만약 네게 적을 깨뜨릴 계책이 있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장군께서 이 어리석은 진등의 계교를 써주신다면 서주는 별 걱 정 없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등이 여전히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자 여포는 완연히 풀린 얼굴로 재촉했다.
“어서 말하라.”
그래도 진등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원술의 군사가 비록 많으나 모두 까마귀 떼를 몰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어 서로 믿고 친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병(正兵)으로 지키 는 한편 기병(兵)을 내어 적의 빈틈을 노리면 이기지 못할 게 없습 니다. 거기다가 또 제게는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서주를 지키는 것 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원술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계책인가?”
여포가 더욱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진등도 그제서야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양봉과 한섬은 원래 한나라의 신(臣)들입니다. 천자를 모시 고 낙양으로 돌아온 공이 적지 않으나 조조가 두려워 달아났던 것입 니다. 그들이 원술을 찾아간 것은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 이라, 원술은 반드시 그들을 가볍게 대접했을 것이고, 그들 또한 원 술에게 쓰이는 걸 별로 즐거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편지 한 장이면 틀림없이 저들로 하여금 안에서 호응케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다시 밖으로 유비와 힘을 합치면 원술을 사로잡는 것은 어렵지 않 습니다.”
여포가 들어보니 모두가 그럴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의심을 풀지 는 않고 덮어씌우듯 진등에게 말했다.
“편지는 그대가 몸소 한섬과 양봉에게 전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등도 어려울 게 없다는 듯 선선히 응낙했다. 자기뿐이 아니라 부친과 일가 권솔의 생사가 걸린 일이어서 그러지 않아도 처음부터 스스로 나설 작정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여포는 한편으로 조조가 있는 허도로 표문을 띄 우고, 한편으로는 유비가 있는 예주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한 뒤, 진등에게도 글을 주어 하비로 보냈다.
졸개 몇 기와 먼저 하비에 이른 진등은 길에서 한섬이 이르기를 기다리다가 한섬이 군사를 이끌고 와 영채를 세운 뒤에야 찾아 들어 갔다.
“그대는 여포의 사람인데 어떤 일로 이곳에 오시었소?”
방금 하채하여 한숨을 돌리고 있던 한섬이 진등을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진등이 태연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쳤다.
“나는 대한의 신하인데 어찌 여포의 사람이라 하시오?”
그러고는 표정을 바꾸어 간곡히 말했다.
“오히려 장군이야말로 한의 신하로서 어찌 역적의 신하가 되었 오? 지난날 관중에서 어가를 보호한 공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 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거기다가 원술은 천성이 의심이 많아 지금은 장군을 쓰고 있으나 뒷날에는 반드시 해치고 말 것이오. 일 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뒷날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다.”
진등의 예상대로 원술은 한섬을 그리 두텁게 대하지 않은 모양이 었다. 몇 마디 더 하기도 전에 한섬이 탄식처럼 말했다.
“낸들 그걸 왜 모르겠소? 그러나 한나라로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문이 없으니 그게 한스러울 뿐이오.”
그러자 진등은 때를 놓치지 않고 여포의 글을 꺼내 보였다. 읽기 를 마친 한섬이 결심한 듯 말했다.
“잘 알겠소이다. 공은 먼저 돌아가 계시오. 나는 양봉 장군과 의논 하고 창을 거꾸로 겨누어 원술을 칠 것이오. 불이 오르는 것을 군호 (軍號)로 온후께서도 군사를 이끌고 밖에서 호응해주셨으면 좋겠소 이다.”
이에 진등은 한섬과 헤어져 여포에게로 돌아갔다. 진등에게서 한 섬과 양봉이 내응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듣자 여포는 힘이 났다. 곧 군사를 그들 둘을 뺀 나머지 적장 다섯에 맞추어 다섯으로 나누 고 각기 하나씩 맡게 했다. 제일로는 고순(高順)이 이끌고 소패로 가 적장 교유를 막게 하고, 제이로는 진궁이 이끌고 기도로 가 적장 진기를 막게 했다. 제삼로는 장요, 장패가 이끌고 낭야로 가 적장 뇌박 을 막게 하고, 제사로는 송헌과 위속이 이끌고 갈석으로 가 적장 진 란을 막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부대는 여포 자신이 이끌고 큰길 로 오는 원술의 대장군 장훈을 맡기로 했다. 각 대마다 군사 만 명을 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성안에 남김으로써 서주성의 방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사이 군사들을 재촉하여 진병을 계속한 장훈은 어느새 서주성 가까이 와 있었다. 여포는 성 밖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진채를 내리고 장훈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그곳에 이른 장훈은 뜻밖에도 여포가 친히 나와 섰는 걸 보자 더럭 겁이 났다. 그대로 이십 리나 군사를 물려 진채를 내리고 다른 길로 오는 군사들이 이르기를 기다 렸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먼저 장훈과 합류한 양봉과 한 섬이 돌연 군사를 나누어 영채 여기저기에 불을 지른 뒤 몰려온 여 포의 군사들과 합세하여 장훈의 진채를 휩쓸었다. 그 갑작스런 내응 으로 장훈의 군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금세 어지러워져 제대로 대항 하지도 못하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여포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불같이 몰아치니 마침내 장훈은 견뎌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여포는 그런 적을 날이 밝도록 뒤쫓았다. 그런데 홀연 기령이 나타나 쫓기는 장훈을 대신해 여포를 막았다. 곧 기령과 여포의 군사들 간에 싸움이 어우러졌다. 기령이 한동안 은 그럭저럭 버티었다. 그러나 다시 양봉과 한섬이 두 길로 나누어 여포를 도와 밀려오자 기령도 더 버텨내지 못했다.
기령이 져서 쫓겨가는 걸 보자 여포는 더욱 신이 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쫓고 쫓기기를 얼마나 했을까. 여포가 군사들을 몰아 한산 굽이를 도는데 갑자기 수많은 군마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문기가 열 리는 곳을 보니 그 안에서 한 떼의 인마가 나오는데 용봉과 일월을 수놓은 깃발을 앞세우고 사방에는 요란한 정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다시 천자의 의장儀仗)인 금과은부(金瓜銀斧)와 황월 백모(黄)가 벌려지고, 황라초금(黃羅鎖金)으로 된 일산(日傘)을 받쳐 쓴 원술이 나타났다. 원술의 모습은 한층 볼만했다. 온몸에 번 쩍이는 금갑을 두르고 겨드랑이 아래로는 두 벌의 보검을 걸고 있 었다.
“이 주인을 배반한 종놈아!”
원술은 진 앞에 나서기 무섭게 큰 소리로 여포를 꾸짖었다. 그 말 에 성이 날 대로 난 여포는 대답도 없이 화극을 끼고 원술을 덮쳐갔 다. 원술 쪽에서 이풍(李)이 또한 창을 꼬나들고 기세 좋게 달려 나 왔다.
제 주인이 보는 앞이라 이풍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애초부터 여 포의 적수가 아니었다. 겨우 삼합을 어울리고 여포의 화극에 손이 찔려 창을 버리고 달아났다. 여포는 틈을 주지 않고 군사를 휘몰아 원술의 진채를 덮쳤다.
원술의 군사들은 금세 큰 혼란에 빠졌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되돌아서서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금과은부고 황월백모고 챙길 틈이 없었다. 여포의 군사들이 거둬들여 보니 그 잘난 천자의 의장만도 여남은 수레가 넘었다.
한편 원술은 패군을 이끌고 정신없이 쫓기다가 어느 산기슭에 이르렀다. 여포의 추격이 느슨해진 걸 보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홀연 산 뒤편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길을 끊었다.
앞에는 한 장수가 서 있는데 대춧빛 얼굴에 봉의 눈이요, 긴 수염 에 팔십 근 청룡도를 비껴들고 서 있었다. 다름 아닌 관우였다.
“감히 존호(號)를 칭한 역적 놈아! 얼른 돌아와 죽음을 받지 못 하겠느냐?”
관우가 그렇게 외치며 청룡도를 겨누니 원술은 간이 콩알만큼 오 그라들었다. 맞싸워볼 엄두는커녕 뒤도 안 돌아보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나머지 장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 져 달아나다 태반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난 원술은 몇십 리를 더 가서야 다시 패 군을 수습했으나 이미 여포와 싸울 만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원술은 한을 머금은 채 자기의 근거지인 회남으로 돌아갔다. 싸움에 이긴 여포는 관운장과 양봉, 한섬 등을 데리고 서주로 돌아갔다. 그 리고 크게 잔치를 열어 싸움을 도와준 공을 치하하고 환대했다. 군 사들도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이고 골고루 상을 나눠주었다.
다음 날 관우는 여포를 작별하고 유비가 있는 예주로 돌아갔으나 갈 곳이 없는 양봉과 한섬은 그대로 서주에 머물렀다. 여포는 그런 그들을 자기가 쓸 양으로 한섬에게는 기도를 맡기고 양봉에게는 낭 야를 맡겨 두 사람 모두 서주에 머물게 하려 했다. 이번 싸움으로 다 시 크게 여포의 신임을 회복한 진등의 아비 진규가 그런 여포를 말 렸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섬과 양봉 두 사람을 산동으로 보내 십시오. 그러면 일 년이 되지 않아 산동에 있는 성곽은 모두 장군께 속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들을 기도나 낭야에 머물게 하는 것은 좋은 장수를 썩이는 셈이 됩니다.”
여포가 들으니 그럴 법한 말이었다. 한섬과 양봉을 기도와 낭야로 보내 잠시 머물면서 조정의 은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게 했다. 당장 산동으로 보내기가 좀 어색해서였다.
“왜 두 사람을 서주에 머물게 해서 여포를 뿌리 뽑게 하지 않았습 니까?”
일이 그렇게 결정된 뒤 진등이 가만히 그 부친에게 물었다. 자신 이 설득해 둘을 원술에게서 빼냈으니, 뒷날 필요하면 여포에게도 빼 내 오히려 그를 죽이는 데 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규는 그런 아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양봉과 한섬은 오래 여포를 돕게 하면 자칫 여포의 사람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위인들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호랑이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달아주는 격이 되고 만다. 멀리 산동에 떼어놓는 편이 낫다.”
그 말에 비로소 진등도 부친의 높은 식견에 탄복했다.
한편 회남으로 돌아간 원술은 날이 갈수록 분해 견딜 수가 없었 다. 그러나 다시 군사를 일으키려고 보니 아무래도 가진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옛날 손책이 빌려간 군사였다.
원술은 자기가 한 짓도 잊고 사람을 강동으로 보내 손책에게 군 사를 좀 빌려달라는 뜻의 글을 전하게 했다. 여포에게 원수를 갚는 다는 구실이었지만 은근히 옛날 일을 비추며 꾸어간 군사를 돌려달라는 투였다.
원술의 글을 받아 본 손책은 노했다.
“이놈이 내 옥새를 맡은 걸 기회로 황제의 칭호를 함부로 쓰고 한 실을 배반했으니 실로 대역무도라 할 만하다. 내가 지금 군사를 들 어 그 죄를 물으려 하는데 오히려 역적질을 도와달라고?”
그렇게 소리치며 같은 뜻의 글을 써서 원술을 꾸짖고 청을 거절 했다. 사자가 돌아가 그 글을 올리자 원술은 더욱 성이나 길길이 뛰 었다.
“이 주둥이 노란 어린 놈이 어찌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당장 군사를 일으켜라. 내 이놈부터 쳐야겠다.”
비록 여포에게 한차례 낭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허황된 천 자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한 원술에게는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이 제는 자신의 옛 장수로만 기억되는 손견의 아들이요, 더구나 갈 데 없이 떠도는 걸 몇 년이나 자식처럼 거두어주었던 손책이었다. 손책 이 그를 위해 세웠던 공이나 그가 손책에게 한 섭섭한 짓은 까맣게 잊은 채 배신감에만 몸을 떨었다. 장사로 있던 양대장(楊大將)이 여 러 가지 말로 달래지 않았더라면 원술은 또 한 번의 무모한 싸움으 로 불행한 종말을 훨씬 재촉했을 것이다.
한편 모진 글로 원술의 청을 거절하기는 해도 손책 또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기에 누구보다 원술의 세력이 강대함을 잘 아는 손책은 성난 원술이 힘을 다해 덤벼드는 게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아직 강동에 터를 잡은 지 오래지 않은 자 신으로서는 당해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막아낸다고 해도 커다란 손실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글을 보낸 즉시로 원술의 군사가 몰려오는 걸 막기 위해 군사를 점고한 손책은 강 어귀로 내려가 지켰다. 그런데 홀연 조조 의 사자가 이르러 손책에게 회계 태수를 내린다는 천자의 조서와 함 께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치라는 명을 전했다.
손책은 마침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싸워야 할 것이라면 조정의 후원을 업고 싸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급히 사람을 모아들 여 의논했다. 빨리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칠 작정이었으나 장사(長 史)인 장소가 말렸다.
“원술이 비록 이번 싸움에 졌으나 군사는 많고 양식은 넉넉합니 다. 가볍게 적으로 맞으셔서는 안 됩니다. 주공 혼자서 맡지 마시고 먼저 강한 동맹군을 얻으십시오.”
“그런 군사가 어디 있소?”
“조조의 군사입니다. 먼저 조조에게 글을 보내 그쪽에서 남쪽으로 쳐내려오면 이쪽에서도 뒤에서 호응하겠다고 하십시오. 두 군사가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면 원술은 반드시 패하고 말 것입니다. 거기다 가 만약 우리가 잘못되어도 조조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으니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손책이 들어보니 옳았다. 곧 장소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뽑아 조조에게 남정(南征)을 권하는 글을 보내게 했다.
이때 허도로 돌아와 있던 조조는 새삼 전위에 대한 추모의 정이 이는지 그를 기려 크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 전만 (典滿)을 중랑(中郞)으로 삼고 자기의 부중으로 거두어들여 길렀다.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고 그 아들을 거둠에는 인정을 다하니 장수들 은 다시 한번 감복하여 조조를 위해 죽는 일을 마음속으로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뒷날 법령의 형태로까지 나타나는 전몰자 원호정책의 시작인 셈이 었다.
손책의 사자가 편지를 받쳐들고 허도에 이른 것은 전위를 제사하 고 그 아들을 거둔 일로 조조 휘하의 군심이 장수를 치러 가기 전만 큼이나 다시 사기를 회복한 뒤였다. 하지만 손책의 글을 다 읽도록 조조는 얼른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손책 또한 만만치 않은 호걸 임을 헤아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원술이 식량이 모자라 진류 땅을 넘보고 있습니다. 틈을 보아 노 략질할 뜻임에 분명합니다.”
그 말을 듣자 드디어 조조도 마음을 정했다. 아무래도 원술을 먼 저 없애지 않으면 다음에는 허도까지 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이왕에 손책이 군사를 일으킨다 하니 힘을 합쳐 먼저 원술을 없애기로 했다. 자신의 최후를 재촉하기라도 하듯 거듭되는 원술의 실수도 조조의 승산을 더 크게 했다.
원술의 실수란 비슷한 시기에 너무도 많은 적을 만든 일이었다. 충분히 자기 사람으로 잡아둘 수 있던 손책을 잃은 것으로부터 원래 공손찬과 함께 자기편이었던 유비를 적으로 삼은 데다 다시 여포와 원수가 되고 이번에는 조조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물론 난세에 있어서는 친함과 멀어짐이며 모이고 흩어짐이 한가 지로 무상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원칙은 있다. 마지막 둘이 남을 때까지는 적보다 친구가 많아야 한다는 것과, 강한 적 하나보다는 약 한 적 여럿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술은 그걸 어기고 말았 다. 세력이 커지면서 생긴 오만과 섣부른 칭제가 가져온 화였다. 이 제 그의 동맹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북방에서 원소에게 묶여 있 는 공손찬과 남쪽에서 스스로를 지키기에만 급급한 유표 정도였다. 조조는 조인에게 허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전 병력을 들어 남 하하는 한편 원술의 그 같은 약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유비와 여포 까지도 싸움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실로 원술로서는 생각지도 못했 던 결과였다. 조조만 해도 마보병 합쳐 십칠만에, 따르는 수레만도 천여 채나 되는 데다, 강동에서는 손책이 올라오고 서주에서는 여포 가, 그리고 예주에서는 유비가 모조리 조조의 편이 되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조와 유비가 만난 것은 예장의 경계 부근이었다. 군사가 적은 유비가 먼저 와 조조를 맞았다. 조조가 유비를 자신의 영채로 불러 들여 만나는 예를 끝내기 바쁘게 유비가 사람의 목 둘을 바쳤다.
“이게 누구의 목이오?”
조조가 놀라 물었다. 유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한섬과 양봉의 목입니다.”
“어떻게 얻으셨소?”
조조가 뜻밖이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자신이 처음 낙양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반발하고 떠난 게 그 들 둘이었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여포의 사람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한편인 유비에게 목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무슨 일로 그들을 죽였는지는 모르나, 미워하면서도 여포의 사람이라 그들 둘을 죽일 수 없었던 조조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포가 저들 두 사람을 시켜 기도와 낭야 두 현에 가 있게 하였 던바, 저들이 함부로 군사를 풀어 백성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원망이 자못 높았습니다. 이에 비備)는 술자리를 열고 의논할 일이 있다는 구실로 저들을 청해 들인 뒤, 술잔 던지는 걸 군호로 관우와 장비 두 아우를 시켜 둘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들이 거느리던 졸개들도 모조 리 항복을 받아 백성들의 원망은 가라앉게 하였으나, 여포가 제사 람이라 믿고 있는 저들을 함부로 죽여 승상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 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특히 찾아와 죄를 청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 일을 계략으로 본다면 실로 간흉계독(奸凶計毒)이 다 포 함된 무서운 계략이었다. 유비는 그 둘을 죽임으로써 조조의 환심을 사는 한편, 그대로 두면 여포의 힘을 더할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졸개를 거두어 자기의 힘에 보탰다. 거기다가 살해의 방식도 자기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악용한 비열한 암살이었 다. 유일하게 유비를 변호해줄 수 있는 것은 그들 둘이 백성들을 약 탈한 일이었지만, 그것도 당시로서는 반드시 죽을 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은 한결같이 유비의 그 같은 행동을 의롭게 해 석하고 믿는 것이었다. 평소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환한 품격에 서 비롯된 것이리라. 조조도 그랬다. 마음 한구석에는 석연치 못한 데도 있었으나 그를 사로잡는 것은 유비를 믿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대는 국가를 위해 해로운 것을 없앴으니 실로 큰 공을 세운 것 이오. 어찌 그 일을 죄라 말할 수 있겠소? 여포에게는 내가 잘 말씀해드리리다.”
오히려 그렇게 유비를 치하하고 수고로움을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유비가 이끌고 온 군사들과 자신의 군사를 합쳐 여포 가 기다리는 서주로 향했다.
여포 역시 군사를 이끌고 서주 경계까지 조조를 마중 나왔다. 조 조는 좋은 말로 여포를 얼른 뒤에 선심이라도 쓰듯 덧붙였다. “이번에 폐하께서는 공께 좌장군(左將軍)을 내리셨소. 역적을 치 러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 길이라 인수를 전해드리지 못하나 허도로 돌아가면 곧 사람을 시켜 보내드리겠소.”
여포는 조조의 그 같은 말에 몹시 기뻤다. 자기가 원한 것은 서주 목에 지나지 않았는데 좌장군이란 높은 벼슬이 내려졌기 때문이었 다. 거기다가 조조의 엄청난 군세를 보자 역시 원술을 버리고 조조 와 손잡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유비가 한섬과 양봉을 죽인 일은 조조의 말 한마디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조조는 여포의 군사까지 아우른 뒤 한 커다란 연합 세력을 형성 했다. 여포는 좌에 두고 유비는 우에 둔 뒤 자신은 스스로 이끌고 온 대군과 함께 중군이 되었다. 그리고 하후돈과 우금을 선봉으로 삼아 기세도 드높게 수춘성으로 짓쳐들었다.
조조의 군사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소문은 곧 원술에게로 날아들 었다. 천하를 꿈꿀 만한 세력을 가졌던 원술이었던 만큼 가만히 앉 아서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먼저 대장 교유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 오만을 이끌고 조조의 예봉을 막게 했다.
두 군사가 맞부딪친 곳은 수춘으로 접어드는 경계 부근이었다. 교유는 선봉장답게 먼저 말을 몰아 나아갔다. 조조 쪽에서도 역시 선봉장인 하후돈이 창을 끼고 말을 달려 나왔다.
양편 군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두 선봉장은 거세게 부딪쳤다. 그러나 애초부터 교유는 하후돈의 적수가 못 되었다. 겨우 삼 합을 어우르기도 전에 하후돈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조조의 엄청난 세력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원술의 군사들은 자기들의 대장이 한 싸움에 죽는 걸 보자 싸울 마음이 없 었다. 한결같이 창자루를 거꾸로 쥐고 성안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그 뒤를 조조의 군사가 기세를 올려 쫓으니 원술의 군사는 대패하고 말았다.
첫 싸움에 낭패를 보고 성안에 갇힌 원술은 심란했다. 그런데 또 다시 반갑잖은 파발이 날아들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온 손책의 군사가 수춘성 서편에서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급한 전갈이 꼬리를 물었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성 동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장졸을 몰아 성 남쪽을 기어오르려 합니다.”
“조조는 자신의 십칠만 대병으로 성북쪽을 휩쓸고 있습니다.”
원술은 놀라다 못해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급히 문무 여러 수하들을 불러모으고 물었다.
“지금 조조의 형세가 대단한 데다 여포, 손책, 유비까지 한통속이 되어 이 수춘성을 에워싸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경들은 좋 은 계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라.”
그래도 황제라고 억지로 위엄을 갖추고는 있으나 목소리는 다급 함을 숨기지 못했다. 장사 양대장이 다시 나서서 한 계책을 올렸다.
“수춘 부근은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겹쳐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 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난번에 군사를 움직여 번거롭게 하였으니 백성들에게는 이미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을 것입니다. 적병이 성 밖 까지 이른 지금 이곳에서 항거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군사들을 수춘에 남겨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게만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저쪽의 군량이 다하기를 기다리면 반드시 변화가 있을 것입니 다. 그동안 폐하께서는 어림군(御林軍)을 이끌고 회수(淮水)를 건너 시어 한편으로는 그곳의 익은 곡식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의 날카로운 칼끝을 잠시 피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천자의 자존심으로는 용서할 수 없으나 사태가 사태인지라 원술 도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원술은 이풍, 악취, 양강, 진 기네 장수에게 군사 십만을 나누어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그 나머지 장졸들과 모아두었던 금은보석을 수습해 회수를 건넜다. 뜻밖의 대군으로 힘을 다해 길을 앗으니 강한 조조의 군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보내주어라. 제까짓 놈이 이 수춘성을 잃는다면 가봐야 어디겠느 냐? 먼저 이 성이나 떨어뜨리자.”
조조는 추격을 주장하는 장수들을 그렇게 말리고 여전히 포위를 풀지 않았다. 함부로 추격하다 성안의 십만 군이 쏟아져 나와 협공 을 당할 염려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대장의 예측은 맞았다. 조조의 군사는 자신이 거느리고 온 것만도 십칠만이나 되니 매일 먹는 곡식의 양이 엄청났다. 허도를 떠나올 때 천 수레의 치중을 딸리었다 해도 오래갈 수 없었고, 인근의 여 러 군도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뒤를 댈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다급해진 조조는 연신 싸움을 재촉했지만 굳게 지키기만 하라는 명을 받은 이풍은 성문을 닫아걸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원래가 원 술의 거성(城)이었던 만큼 성은 두껍고 높아 조조의 파도 같은 공 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달포가 지나갔다.
그렇게 되자 조조는 대군을 먹이기가 힘에 겨웠다. 양식이 다 되 어간다는 말을 듣고 손책에게 글을 보내 십만 곡(斛)을 꾸어왔으나 그것도 며칠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군량을 맡고 있는 관리 임준아래서 창고 일을 보는 왕후(王)가 조 조를 찾아와 걱정스레 물었다.
“군사는 많고 남은 양식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쨌으면 좋겠습니까?”
조조가 잠깐 생각다가 귀띔하듯 말했다.
“앞으로는 작은 말을 써서 곡식을 나눠주게. 한때의 급함을 넘길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일세.”
“그러면 군사들의 원망이 일 것입니다. 그것은 또 어떻게 하시렵니까?”
왕후가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조조를 보며 다시 물었다. 조조가 가벼운 웃음으로 왕후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게. 내게 다 생각이 있네.”
주군인 조조가 그렇게 보장하는 데야 왕후는 더 망설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곧 창고로 돌아가 군사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데 전과 달리 작은 말을 썼다. 갑자기 양식이 절반으로 줄어드니 군사들의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왕후는 조조의 말만 믿고 항의하는 군사들에게 그것이 조조의 명임을 밝히니 자연 불만은 조 조에게 몰렸다.
“승상께서 우리를 속이셨다. 큰 말 대신 작은 말을 써서 우리를 주리게 한다.”
곧 그런 불만이 공공연히 떠돌고 험한 기세로 군막마다 번져갔다. 몰래 사람을 풀어 군사들의 그 같은 원망을 알아낸 조조는 가만히 왕후를 불렀다.
“내가 자네에게 물건 하나를 빌릴 게 있네. 그걸로 군사들의 원망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하는 것이니 자네는 꼭 좀 빌려줘야겠네.”
조조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 왕후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승상께서 제게 무슨 물건을 빌릴 게 있으십니까?”
“자네 목일세. 그걸 여럿에게 보이면 원망하는 마음이 가라앉을거야.”
조조가 여전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왕후는 놀랐다. 하지만 아직도 조조의 참뜻을 몰라 부들 부들 떨며 다시 물었다.
“저는 실로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자네가 죄 없다는 것은 나 또한 알고 있네. 그러나 자네를 죽이 지 않으면 군사들의 원망을 가라앉힐 길이 없고, 또 군사들의 원망 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반드시 변이 생길 것이니 어찌하겠나? 천하를 위해 한번 큰일을 해주게. 자네가 죽은 뒤 처자는 내가 잘 돌볼것이니 그 일은 걱정하지 말게.”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왕후는 아무 래도 억울했다. 다시 무어라고 입을 떼려 했으나 이번에는 조조의 차가운 명이 먼저였다.
“아무도 없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라!”
그리고 달려 나온 도부수들을 시켜 왕후를 군문 밖으로 끌어낸 뒤 여러 군사가 보는 앞에서 한칼에 목 베게 했다.
“왕후는 일부러 작은 말을 써서 군사들에게 나누어줄 양식을 도 적질했다. 이제 그 죄가 밝혀졌기로 군법에 따라 목을 베고 여럿에 게 경계로 내건다.”
그것이 장대 위에 높이 걸린 왕후의 목 아래 써서 걸어둔 방문이 었다. 불만과 원망에 차 웅성거리던 군사들도 그걸 보자 일시에 가 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승상께서 우리를 속이실 리가 있나?”
“이제 보니 왕후 그놈이 도적질은 제가 하고 이름은 승상을 팔았군.”
일반으로 조조의 간교함과 표독스러움을 말할 때 먼저 손꼽는 게 전에 여백사의 가족을 몰살한 일과 창관(官)왕후를 죽인 일을 든 다. 자신의 안전이나 이득을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 그것 도 특히 자기편을 죽였다는 데서 온 섬뜩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에는 전쟁보다 더한 게 없고, 권력 추구의 길이란 자기편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 법이다. 뒷사람이야 이러니저러니 말을 달리해도, 권력 추구를 위한 전쟁에 나선 사람이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 조조와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어떤 때는 거창한 대의로 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실 자체를 말살시 키거나 거꾸로 미화하여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조조처럼 번득이는 임기응변의 재능이 있고 그때같이 필요에 쫓길 때 과연 그 같은 수 단을 쓰지 않을 동양적 영웅이 몇이나 되겠는가.
만약 있었다면 그런 계책이 떠오르지 않아서였고, 떠올라도 자신 을 억눌러 쓰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잘못되어 권력 추구의 길에 들어선 성자거나, 그 한순간의 감상 때문에 몰락해버렸을 범부일 것 이다. 요컨대 간교함과 표독스러움이 있었다면 권력 추구의 길 자체 에 있고, 굳이 조조를 비난하려 든다면 그 같은 방도 외에 다른 방도 가 또 있었을 때에 한해서이다. 대저 영웅이란 간교함과 흉포함과 꾀많음과 표독스러움을 다 품어야 한다던가.
거기다가 조조가 왕후를 죽인 일에서 보인 비정함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것은 뒤이어 보인 예사 아닌 분기)이다. 조조는 그날 로 각 영채의 장수들에게 전에 없이 매서운 영을 내렸다.
“앞으로 사흘 안에 이 성을 깨뜨리지 못하면 남김없이 목을 벨 것 이니 모든 장수들은 힘을 다하라!”
그리고 스스로 성 아래로 달려가 싸움을 독려했다. 죄 없는 왕후 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결의였으리라.
조조가 친히 맨 앞에 나서자 장졸들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싸 우기 시작했다. 흙을 퍼 나르고 돌을 굴려 성 밖의 물길과 참호를 메 우고, 흙더미를 높여 성벽으로 기어오르기 쉽게 만들었다.
성안에 있는 원술의 군사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개미 떼 처럼 몰려드는 조조의 군사들에게 화살과 돌을 날려보내니 마치 소 나기가 퍼붓는 듯하였다. 워낙 화살과 돌이 심하게 쏟아지자 아무리 조조의 독려를 받았다고는 하나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조군의 비장(裨將) 둘이 되돌아 물러서다 조조와 마주쳤다.
“이놈들, 어디로 달아나느냐!”
매서운 외침과 함께 조조가 칼을 뽑아 둘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 목을 베어 둘러싼 군사들에게 쳐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누구든지 비겁하게 물러나는 놈은 이 꼴이 되리라!”
그런 다음 다시 스스로 말에서 내려 흙으로 성 아래 파둔 구덩이 를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장졸들은 한편으로는 물러서 도 죽고 나아가도 죽을 바에야 나아가겠다는 생각에다, 다른 한편으 로는 승상이 직접 몸을 돌보지 않고 흙부대를 나르는 데 감동이 되 었다. 한결같이 몸을 돌보지 않고 내달으니 군사들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아무리 굳은 성에 의지해 싸운다고는 하나 조조의 군사가 죽기로 덤비자 원술의 군사는 당해내지 못했다. 혹은 다투어 성벽 위로 뛰 어오른 조조의 군사들에 의해 빗장이 벗겨지고 혹은 바깥에서 들이 치는 힘에 돌쩌귀가 내려앉아 성문이 열리자 수춘성은 끝장이 났다. 쏟아진 조조의 대군에 이풍, 악취, 양강, 진기 네 장수는 모두 사로잡 히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저놈들은 역적을 도와 천조(天朝)에 항거한 놈들이니 용서할 수 없다. 모두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달도록 하라.”
조조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사로잡은 적장 넷을 모조리 목 벤 뒤, 원술이 궁궐을 본떠 지어놓은 전각들을 남김없이 불사르게 했다. 뿐 만 아니라 장졸에게도 전에 없이 약탈을 허용함으로써 한때 원술의 수도로 번성했던 수춘성은 천자의 꿈과 함께 일시에 잿더미로 변한 채텅 비어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읽을 수 있는 것은 죽은 왕후를 잊지 않 는 조조의 마음이다. 그 앞으로도 그 뒤로도 조조가 항장(將)을 남 김없이 죽이거나 빼앗은 성을 그처럼 철저하게 파괴하고 약탈한 적 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틀림없이 죄 없는 부하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까지 자기를 몰아간 그들 네 장수의 저항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미움 탓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