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9화 : 꿈은 다시 전진 속에 흩어지고
꿈은 다시 전진 속에 흩어지고
조조의 밀사가 소패에 이르렀을 때는 유비가 새로 얻은 예주에 기대어 다시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조조가 장수와 싸우러 갔다 는 말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원소가 허도를 넘보는 바람에 급히 회군했다는 전갈이 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원소와 조조가 맞서게 된 다면 당분간 유비는 강자들의 싸움에 동원될 필요 없이 자신의 힘을 길러갈 수 있었다. 원술은 아직 군사를 움직일 힘이 없고, 여포는 조 조가 원소와 싸우느라 동쪽을 돌볼 틈이 없음을 아는 한 원술 때문 에라도 유비와의 화평을 유지하고 싶어 할 터였다.
조조의 편지를 읽어본 유비는 적이 괴로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용히 군사나 기르고 싶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조가 여포를 치기로 결정하고 도움을 청해오는 터라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에 유비는 근간 여포의 사정을 알림과 함께 호응을 약속하는 답서를 그 밀사 편에 주어 보냈다.
이때 서주에는 이미 조조가 뿌려둔 독이 조금씩 여포를 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 독은 다름 아닌 진규와 진등 부자였다. 마음속으로 는 이미 조조의 사람이 된 그들은 먼저 아첨으로 여포를 녹였다. 여 럿이 모인 술자리마다 번갈아 여포를 추켜세웠고, 큰 잔치 때는 여 포의 덕을 칭송하는 데 부자 모두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여포 또한 그리 밝은 위인이 되지 못해 그걸 싫어하지 않았으나 진궁만은 그들 부자의 하는 일이 못마땅했다.
“진규 부자가 겉으로는 장군께 아첨하고 있으나 그 마음속은 헤 아릴 길이 없습니다. 마땅히 그들의 농간을 미리 방비하는 것이 좋 겠습니다.”
어느 날 진궁은 틈을 보아 여포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진규 부자의 아첨에 흠뻑 빠져 있는 여포는 오히려 성을 내며 진궁 을 꾸짖었다.
“그대는 까닭 없이 남을 모함하여 좋은 사람을 해치려 하시오?”
진궁은 어이가 없었다. 여포의 뒤끝이 보이는 것 같아 그 자리를 물러나며 홀로 탄식했다.
“충성된 말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니 우리들이 반드시 앙화를 입겠구나!”
그리고 여포를 버리고 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동
안 든 정도 정이려니와 또다시 주인을 버려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바람에 나날을 울적하게 보내던 진궁은 어느 날 수하 몇 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 울적함도 풀고 바람도 쏘일 겸 소패 쪽으 로 나간 것인데, 거기서 이상한 일을 보게 되었다. 관도 위에서 한 마리 역마가 나는 듯 그들을 앞질러 달려가는 것이었다. 얼른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말 위에 탄 자가 까닭 없이 허둥대는 것이 문득 진궁의 의심을 일으켰다.
“저자를 잡아라!”
진궁은 자신도 모르게 데리고 간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오 래잖아 붙들려온 자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사자이냐?”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사자였다. 자기를 붙든 것이 여포의 부하 인 걸 알자 갑작스레 당황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궁은 졸개들 을 시켜 그의 몸을 샅샅이 뒤져보도록 했다. 그러자 봉서 한 통이 나 왔는데 뜻밖에도 유비로부터 조조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진궁은 그 글을 뜯어보지 않아도 내용을 짐작할 만했다. 조조고 유비고 명목상으로는 모두 여포와 한편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 자가 여포의 사람인 자기를 그토록 두려워하며 피하려 한 데는 반드 시 까닭이 있었을 것이고, 또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여포 를 해치려는 음모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에 진궁은 사로잡은 사자를 끌고 여포에게 돌아가 빼앗은 밀서와 함께 바쳤다.
“이게 무엇이오? 그리고 저자는 누구요?”
여포가 의아로운 눈길로 물었다.
“유비가 조조에게로 보내는 밀서입니다. 오늘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저자를 만났는데, 거동이 수상쩍기로 잡아서 뒤져보니 이 글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여포도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던지 급히 끌려온 사자에게 물었다.
“이 글이 어디서 난 것이냐?”
그러자 사자가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조승상께서 저를 뽑아 유예주(劉豫州, 예주목 유비)께 글을 내리셨 기로 그 글을 전하고 답서를 받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무 엇이 씌어져 있는지는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여포는 피봉을 뜯고 유비가 조조에게 보내는 글을 세밀 히 읽었다.
‘밝으신 명을 받들었으니 여포를 도모하는 일에 어찌 주야로 마음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비가 군사는 보잘것없고 장수도 적어 감히 가볍게 움직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오나 만일 승상께 서 크게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비는 마땅히 그 선봉이 될 것입니다. 군사를 엄히 단속하고 싸울 채비를 다하여 오직 크신 명이 다시 이 를 때까지 기다릴 따름입니다.
글의 내용은 대강 그랬다. 읽기를 마친 여포는 놀람과 분노로 소리쳤다.
“조조 그 역적 놈이 감히 이럴 수 있느냐!”
그러고는 졸개들에게 명하여 그 사자를 목 베게 한 뒤 진궁과 장패를 시켜 먼저 자신을 도와 싸울 패거리부터 모으게 했다. 태산에 자리 잡고 있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 禮), 창희(昌) 등이었다.
진궁과 장패가 그들을 꾀어들이자 여포는 먼저 그들로 하여금 동 쪽으로 나아가 산동과 연주의 여러 군들을 빼앗게 하고, 다음에는 고순과 장요에게 군사를 주어 유비를 치고 소패성을 빼앗게 했다. 송헌과 위속은 서쪽으로 나아가 여남과 영천을 치게 했으며, 자신은 친히 중군이 되어 그들 세 갈래 군마의 뒤를 받쳐주기로 했다.
고순과 장요가 군사를 이끌고 소패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곧 유비에게도 전해졌다. 조조에게로 보낸 밀서가 엉뚱하게도 여포 의 손에 들어간 줄 아직 모르는 유비는 의아스러운 가운데도 놀라 무리를 모아놓고 의논했다. 손건이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여포가 군사를 낸 것은 분명하니 먼 저 조조에게 위급을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여포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라 낯색까지 변하며 좌우에게 물었다.
“방금 서주의 군사가 몰려오고 있는데 누가 허도로 가서 위급을 알리겠소?”
그때 계단 아래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유비가 반가운 눈길로 보니 간옹(雍)이란 사람이었다. 유비와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 그 무렵 막빈(幕賓)으로 와 있었는데 스스로 그 일을 떠맡고 나선 것이었다.
유비는 간옹에게 급히 글 한 통을 닦아 그날 밤으로 허도를 향해 달려가게 한 뒤 농성할 준비에 들어갔다.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기 구며 무기를 정돈하고, 자신은 남문, 손건은 북문, 관우는 서문, 장비 는 동문 하는 식으로 각기 하나씩 문을 맡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미축과 그 아우 미방에게는 중군을 맡아 두 아내와 가솔들을 보호하 게 했다. 미축과 미방이 그의 둘째 아내인 미부인의 오라비들이니 남보다 나으리라 여겨 그들에게 가솔을 맡긴 셈이었다.
먼저 소패에 이른 것은 여포의 장수 고순이 이끈 군사들이었다. 유비는 성 위에 있는 누각에 올라 고순을 내려보며 소리쳤다.
“나와 봉선(奉先)은 서로 틈이 벌어질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렇 게 군사를 이끌고 왔느냐?”
고순이 성난 목소리로 맞받았다.
“네놈은 조조와 손을 잡고 우리 주공을 해치려 하였다. 이제 일이 이미 다 드러났으니 어서 내려와 포박을 받아라!”
그러고는 곧 군사를 몰아 거세게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비는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오직 지킬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조조의 구 원이 이를 때까지 기다리고자 함이었다.
이튿날 장요가 이끈 군사들도 소패에 이르렀다. 장요는 고순이 공 격하고 있는 남문을 버려두고 서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성 위에서 내려보던 관우가 점잖게 물었다.
“공은 보아하니 의표가 되지 아니한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에게 몸을 맡기시었소?”
그 말에 장요는 문득 머리를 수그리며 대답을 못했다. 관우도 그가 비록 여포 아래 있어도 충의가 남아 있는 사람임을 알아보고 더 는 나쁜 말로 장요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았다. 역시 유비처럼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안에서 지키기만 할 뿐이었다.
관우가 싸움을 받아주지 않자 장요는 다시 동문으로 군사를 옮겼 다. 동문을 지키고 있던 장비가 얼른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려 했 다. 한동안 싸움이 없어 온몸이 근질거리던 장비이고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관우가 급히 동문으로 달려가보니 장비가 막 성문 을 열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요는 이번에도 별로 싸울 생 각이 없는지 한번 공격하는 체만 한 뒤 다시 군사를 물리는 중이었 다. 그걸 뒤쫓으려는 장비를 관우가 급히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저놈이 내가 겁이 나서 달아나는데 왜 뒤쫓지 말라구 하슈?”
장비가 돌아와 말리는 관우에게 불퉁거렸다. 관우가 조용히 타일 렀다.
“저 사람의 무예는 결코 너보다 아래가 아니다. 다만 내가 한 바 른 말을 듣고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 우리들과 싸우려 들지 않을 뿐이다. 그런 사람을 구태여 핍박해서는 아니 된다.”
그 말을 듣자 장비도 깨달아지는 게 있는지 사들을 나가지 못 하게 하고 굳게 성문만 지키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는 더 나가 싸우려 들지 않았다.
한편 유비의 위급을 알리기 위해 몸을 빼쳐 허도로 간 간옹은 조 조를 만났다. 여포가 군사를 일으킨 일을 말하고 구원을 청하자 조조는 곧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사들을 불러들였다.
“나는 이 기회에 여포를 치고 싶소. 그런데 이번에 원소는 달래놓 았으나 다만 두려운 것은 형주의 유표와 남양의 장수가 우리 뒤를 노리는 일이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그 말에 순유荀攸)가 일어나 답했다.
“장수와 유표는 이번에 다시 졌으니 감히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포는 효용(驍勇)이 빼어난 데다 다시 원술과 연 결되어 회수와 사수 일대를 날뛰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쳐 없애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에 여포를 쳐 아예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곽가도 순유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제 승상께 거역하기 시작하니 때는 지금입니다. 오래되어 백성 의 무리가 따르기 전에 여포를 쳐야 합니다.”
하나같이 아끼는 모사들이 그렇게 주장하자 조조도 거기에 따르 기로 뜻을 굳혔다. 하후돈, 하후연, 여건, 이전에게 오만 군을 주어 먼저 떠나게 하고 스스로는 남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탐마가 나는 듯 조조의 대군이 이르고 있음을 고순에게 알리고 고순은 또한 시각을 지체 않고 저희 주인 여포에게 그 소식을 보냈 다. 여포는 조조의 그같이 신속한 출병에 은근히 놀라면서 후성(侯 成), 학생(), 조성(性)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이백 기를 끌고 고순에게로 달려가 합류하라. 그리고 소패성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군사를 맞으라.” 그리고 그 또한 스스로 남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유비는 성안에서 고순이 군사를 물리는 것을 보고 조조의 대군이 이른 줄 알았다. 이때다 싶어 손건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미축, 미방 형제에게는 가솔들을 맡긴 뒤, 관, 장두 아우와 함께 성을 나와 진 채를 세웠다. 조조의 군사들과 호응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조조군의 선봉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던 하후돈은 곧 고순의 군사와 마주쳤다. 맹장으로 이름난 하후돈이 고순 따위를 겁 낼리 없었다. 한 마디 수작을 붙여보지도 않고 대뜸 창을 끼고 나가 싸움을 돋우었다. 고순 또한 장수된 체면이 있는지라 걸어오는 싸움 을 피하지 못했다. 역시 자랑하는 대도를 휘두르며 마주쳐 나오니 곧 한바탕 싸움이 어우러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순의 무예는 하후돈을 당해내기에는 모자랐 다. 사오십 합에 이르자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말 머리를 돌려 저 희진 쪽으로 달아났다.
하후돈은 그런 고순을 곱게 놓아 보내려 들지 않았다. 역시 박차 를 가해 고순을 뒤쫓는데 홀연 화살 한 개가 날아와 왼쪽 눈에 박혔 다. 그 화살은 여포의 장수 조성이 쏘아 보낸 것이었다. 저희 대장 고순이 쫓기는 걸 보고 몰래 활에 살을 먹여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하후돈의 왼눈을 맞히고 말았다.
고순을 쫓는 데 정신이 팔려 방심하던 하후돈은 왼눈에 화살이 박 히자 한소리 아픔과 분노의 고함을 지르더니 그래도 손을 들어 화살 을 뽑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화살촉에 박혔던 눈알까지 한꺼번에 뽑 혀 나왔다. 남은 눈으로 그걸 본 하후돈은 다시 한소리 크게 외쳤다.
“이 눈알은 내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 내 어찌 버릴 수 있으랴!”
그러고는 화살 끝을 입으로 가져가 산적 빼어 먹듯 눈알을 빼어 씹어 삼킨 뒤 다시 창을 들고 말을 달려 활을 쏜 조성에게로 덮쳐들 었다. 한 눈으로는 붉은 피를 쏟고 한 눈에는 푸른 불길을 일으키며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 하후돈을 보자 조성은 그만 얼이 빠졌다. 손 발이 굳어 제대로 막아보지도 못하고 하후돈의 한 창에 이마빡이 뚫 어진 채 말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 광경을 본 양편의 군사들은 모두 하후돈의 그 엄청난 참을성 과 분발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조성을 죽 여 분풀이는 했으나, 심한 아픔과 함께 왼눈으로부터 샘솟듯 피가 흐르고, 갑작스레 외눈이 되어 싸움에도 어려움이 있어, 되돌아온 고순과 싸울 수가 없었다. 급히 말 머리를 돌려 자신의 진채로 달아 나니, 승세를 탄 고순은 총공격을 명해 조조의 군사는 첫 싸움에서 크게 지고 말았다.
하후연은 이미 제 몸조차 가누기 어렵게 된 하후돈을 구하여 간 신히 몸을 빠져나가고, 여건과 이전은 패군을 이끌고 제북까지 밀려 나 진채를 내렸다.
싸움에 이긴 고순은 군사를 돌려 성을 나온 유비를 치러 갔다. 때 마침 여포의 대군도 그곳에 이르러 여포와 장요, 고순은 군사를 셋 으로 나누고 각기 유비, 관우, 장비의 진채를 하나씩 맡아 일제히 쳐 들어 갔다.
고순과 장요는 유비와 함께 있는 관우의 진채로 쓸어가고 여포는 평소부터 미워하던 장비의 진채를 맡아 밀고 들자, 관우와 장비도 각기 말을 내어 그들을 맞고 유비는 남은 군사로 그들을 뒤에서 떠 받치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나 세력의 차이가 컸다. 관우 와 장비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여포가 군사를 나누어 등 뒤로부터 그들을 공격하자 앞뒤로 적을 맞게 된 관우와 장비의 군사들은 이내 부서지고 말았다.
이미 형세가 기울었음을 안 유비는 겨우 수십 기만 이끌고 급히 소패성으로 돌아갔다. 성 위의 군사를 불러 적교를 내리는데 어느새 뒤쫓던 여포가 등 뒤에 이르러 있었다. 성 위의 군사들이 활을 쏘려 해도 여포가 너무 가까워 자칫 유비를 상할까 봐 활을 쏠 수가 없었 다. 그사이 여포는 성문으로 뛰어들어 활짝 열어젖히니 그 뒤를 여 포의 대군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그렇게 되고 보면 원래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던 유비의 군사들 로서는 더 막아낼 길이 없었다. 남은 일은 기껏 사방으로 흩어져 한 목숨 건질 궁리가 고작이었다. 유비는 일이 위급함을 보고 가솔들이 있는 아성(城)을 그대로 지나친 후 서문 쪽으로 달아났다. 수하 군 사들은 물론 가솔들까지 버리고 홀로 소패를 빠져나온 셈이었다. 한편 소패성을 우려뺀 여포는 먼저 유비가 거처하던 집으로 가보 았다. 유비는 없고 그 가솔들을 보호하고 있던 미축이 나와 여포에 게 말했다.
“듣기로 대장부는 남의 처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합니다. 지 금 장군과 천하를 두고 다투는 것은 조공(曹公)이지 제 주인 유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 주인께서는 지난날 장군께서 원문의 화극을 쏘 아 맞혀 원술로부터 구해주신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이번 일은 조공께 의탁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질러진 것일 뿐입니다. 장군께서는 부디 가련하게 여겨주십시오.”
간곡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어조였다. 여포도 마음이 움직이는 지 온화하게 대답했다.
“현덕과 나는 오래 사귀어온 사이다. 비록 지금은 창칼을 맞대게 되었으나 그 처자까지 죽일 리야 있겠느냐?”
그러고는 미축에게 영을 내려 유비의 가솔들을 거느리고 서주로 옮겨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게 했다.
소패성이 안되자 여포는 고순과 장요를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하 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산동과 연주의 경계까지 나아갔다. 조조 의 대군을 맞아 자웅을 결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유비 쪽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소패를 지키기로 했던 손 건은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성을 빠져나가고, 관우와 장비도 겨우 수백의 군사만 건져 각기 산중으로 흩어졌다. 둘 모두 그곳에 숨어 여포의 대군을 피하면서 유비의 거처를 수소문할 작정이었다.
유비는 더욱 한심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기로 한 두 아우는 물 론 가솔들마저 적군 사이에 버려두고 홀로 말 한 필에 의지해 경황 없이 달아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는데 홀연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뒤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돌아보니 다름 아 닌 손건이었다. 역시 한 필 말에 의지해 소패를 빠져나오다가 앞서 가는 유비를 보고 따라오는 길이었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두 아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고 가솔들도 모두 잃어버렸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손건이 가만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조조를 찾아가는 도리밖에 없겠습니다. 우선 그 아래 있으면서 뒷날을 기약하십시오.”
유비도 그밖에는 달리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손건의 말 을 따르기로 하고, 길을 골라 허도로 향했다. 둘 다 싸우다가 나온 처지라 먹을 게 있을 리 없었다. 가다가 마을을 만나면 내려가 얻어 먹어야 하는 구차한 처지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유예주가 왔다는 말 만 들으면 다투어 음식물을 갖다 바치는 바람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 다. 다른 무장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살이를 걱정할 줄 아는 그의 정 치적 식견과 온화한 인품이 어느새 백성들에게 널리 전해진 덕분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떤 집을 찾아드니 한 청년이 나와 공손하게 유비를 맞았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내는가?”
유비가 이상스레 마음이 끌려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저는 사냥으로 살아가는 유안(安)이란 자입니다.”
“나는 예주목 유비란 사람일세. 방금 여포에게 쫓겨 허도로 가는 중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나?”
유비가 그렇게 묻자 유안은 오히려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유비를 맞아들였다. 전부터 유비의 이름을 듣고 흠모해온 듯했다. 그러나 전란과 기근이 겹친 때인 데다 사냥으로 노모와 아내를 부양 하는 그리 반가운 것은 마음뿐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유 비에게 바칠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들판을 헤맸으나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유안은 그의 젊은 아내를 죽여 그 고기를 삶아 유비에게 올렸다. 유비가 그 때아닌 성찬에 놀라 물었다.
“이게 무슨 고기인가?”
“이리 고기올시다.”
유안이 태연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비는 그 말에 별의심 없이 내온 고기를 배불리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이었다. 다시 길을 떠나려고 말을 매둔 후원으 로 가는데 부엌에 한 젊은 부인네가 죽어 있었다. 유비가 놀라 그 시 체를 살피니 허벅지며 엉덩이에 살이 도려내진 게 보였다.
“이게 누군가? 어떻게 된 일인가?”
마침 뒤따라온 유안을 보고 유비가 물었다. 유안은 몇 번이나 재 촉을 받은 뒤에야 침울하게 대답했다.
“제 아내올시다. 실은 유예주께서 제 집에 이르신 데 감격해 힘써 공양하고자 했으나 제 집에 올릴 만한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내를 죽여 그 고기를 삶아 올린 것입니다. 귀한 분을 속인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비로소 굵은 눈물을 흘렸다. 유비도 그 갸륵한 정성에 감 격해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걸 보고 유안이 다시 말했다.
“원래 저는 이 길로 사군을 따라가려 했으나, 노모가 아직 살아 계 시니 차마 뒤따를 수 없었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은 날이네. 뒷날 때가 되면 나를 찾아오 게. 다행히 지금의 곤궁을 벗어난다면 반드시 자네의 정성에 보답하겠네.”
유비는 그렇게 다짐하고 그곳을 떠났다.
보통 아내를 삶아 바친 유안의 일은 옛사람의 과장이거나 속임수 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대수롭지 않은 음식물을 유비에게 바친 걸 극도로 미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원래 미워하던 아내를 유비 핑계로 살해한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과장이나 속임수가 아니라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지금에조차도 행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사람이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이 아끼는 것일 수록 더 귀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 시절의 대의는 그것이 충성의 일종이건, 아니면 단순히 어떤 위대한 인간에 대한 흠모이건, 어쨌 든 한 사람을 섬기면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내란 가축이나 소유물처럼 여겨지고 또 식인의 예조차 그리 희귀 하지 않던 전란의 시대였던 만큼 그런 일이 반드시 없었던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대 의의 내용은 달라졌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 아내나 자식들을 죽음보다 고통스런 처지에 빠뜨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운 예를 들어, 자유 또는 평등의 대의에 몸 바친 사람의 경우에 도적의 손에 떨어진 그의 처자가 겪어야 할 고통은 종종 순간적인 죽음 뒤에 그 시체의 허벅지살 몇 근이 도려진 유안의 아내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유비로서는 그 일이 커다란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유안과 작별하고 한동안을 그 감격에 빠져 있던 유비는 양성(城)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갑자기 저만치서 먼지가 자옥이 일며 한 떼의 말 탄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아보니 다행히도 그것은 바로 조조 편의 군마들이었다. 거기다 가 조조 자신도 그 속에 있다는 걸 듣자 유비는 손건과 함께 곧장 조조가 있는 중군기(中軍旗) 아래로 말을 몰았다.
조조를 만난 유비는 패성 잃은 일과 아울러 두 아우와 가솔 들까지 생사를 모르게 된 걸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듣고 있던 조조 또한 눈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유안이 아내를 죽여 그 고기로 유비를 공양한 얘기를 듣자 감격하여 손건에게 금백 냥을 내리고 유안에게 전하게 했다.
그런 다음 조조는 유비를 중군에 머물게 한 채 군사를 재촉하여 여포를 찾아 나아갔다. 대군이 제복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하후연이 군사 약간과 함께 조조를 맞았다. 왼쪽 눈을 잃은 하후돈은 아직 몸 을 움직이지 못해 자리에 누워 있었다. 하후연으로부터 첫 싸움의 경과를 자세히 들은 조조는 몸소 하후돈이 누운 곳으로 가서 그를 위로한 뒤 먼저 허도로 돌아가 몸조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하후 씨 형제가 거느렸던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탐마를 놓아 여포가 있는 곳을 알아보게 했다.
“여포와 진궁, 장패 등은 태산의 도적 떼들과 연결하여 함께 연주 의 여러 군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래잖아 탐마가 그 같은 전갈을 가지고 왔다. 조조는 즉시 명을 내려 조인으로 하여금 삼천 군마를 이끌고 패성(城)을 치게 하고 자신은 유비와 함께 여포와 싸우러 갔다.
조조의 대군이 미처 산동에도 이르기 전이었다. 소관(蕭關) 가까 운 길을 지나는데 태산의 도적 떼인 손관, 오돈의 무리가 삼 만여의 세력으로 길을 막았다.
“허저는 어디 있는가? 어서 나가 저 좀도둑들의 머리를 베어 오라.”
조조가 그렇게 소리치자 허저는 평소에 자랑하는 큰 칼을 휘두르 며 말을 달려 나아갔다. 허저의 용맹을 들은 적이 있었던지 도적 떼 의 우두머리인 네 장수가 한꺼번에 나와 허저를 쳤다. 그러나 허저 가 죽기로 힘을 다해 싸우니 넷이 오히려 당해내지 못했다.
적장 넷이 허저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뿔뿔이 쫓겨가는 꼴을 보 자 조조는 대군을 휘몰아 적을 쳤다. 대장이 쫓겨 기세가 꺾인 도적 떼들은 변변히 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조 조는 소관까지 쫓으며 마음껏 적을 죽였다.
그 무렵 여포는 이미 서주로 돌아와 있었다. 조조의 대군이 소패 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진등과 함께 소패를 구원하러 떠날 참이었 다. 아직도 그들 부자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여포라 서주성을 지키 는 일은 진규에게 맡긴 채였다.
여포의 군사들이 서주를 떠날 무렵 진규가 그 아들 진등을 불러 말했다.
“지난날 조공께서는 네게 동쪽의 일을 모두 맡긴다 하셨다. 그런 데 이번에 나가면 여포는 반드시 조공에게 지고 말 것이다. 너는 서 둘러 일을 꾀하라.”
그러자 진등이 조용히 대답했다.
“밖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여포가 져서 돌아 올 때의 일이 어려우니, 그때 아버님께서는 미축의 무리에게 청하여 성문을 닫아걸고 여포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되면 조공 께는 이 서주성을 빼앗는 수고로움을 덜어드릴 수 있고, 여포를 오 직하비(下) 하나를 의지해야 하는 궁박한 처지로 몰아넣을 수 있 습니다.”
“그렇지만 여포 곁에는 네가 있으니 내가 만약 이 서주성을 조공 께 바쳐버린다면 여포는 반드시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 일은 어 떻게 할 작정이냐?”
진규가 걱정스런 얼굴로 아들을 보며 물었다. 진등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그때쯤 여포로부터 몸 을 빼낼 계책이 따로 서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 서주성에는 여포의 처자가 있다. 여포는 반드시 많 은 심복을 남겨 지키게 할 것인데 어떻게 미축과 나의 힘만으로 이 성을 손에 넣을 수 있겠느냐?”
진규는 아무래도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등은 가벼운 웃 음으로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 또한 제게 생각해둔 계책이 있습니다. 잠시 후면 여포는 처자 와 함께 심복들을 함빡 이 성에서 빼내 하비성으로 옮기게 될 것입 니다.”
그러고는 그 길로 여포를 찾아가 말했다.
“서주는 지형이 사면으로 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인 데다가 주공의 근거지라 조조는 또 반드시 힘을 다해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 는 마땅히 싸움이 이롭지 못해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될 경우를 미리 생각해두어야 합니다. 이곳의 곡식과 돈을 하비성으로 옮겨두면 이 서주가 포위를 당하게 되어도 그곳에 양식이 있으므로 구해낼 수 있 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일찍 계책을 세워두십시오.”
여포가 들어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털끝만큼도 의심하기는커녕 제발로 진등이 쳐놓은 그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룡)의 말이 옳다. 곡식과 돈뿐만 아니라 가솔까지도 그곳 으로 옮김이 마땅하리라.”
그리고 심복인 송헌과 위속을 시켜 처자와 전량(錢糧)을 보호해 하비성으로 옮기게 했다. 사랑하는 처자와 귀한 전량을 지키는 일이 니 송헌과 위속 외에도 많은 심복들과 오래된 군사들을 하비성으로 딸려 보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제 딴에는 뒤를 든든히 해두었다는 기분으로 여포가 막 소패로 군사를 내려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태산의 도적 떼인 손 관, 오돈의 무리가 조조에게 대패하여 소관으로 쫓겨 들어갔다는 내 용이었다. 이에 여포는 먼저 소관부터 구할 양으로 군사를 그쪽으로 돌렸다.
소관으로 가는 길을 반쯤 지났을 때였다. 진등이 문득 여포에게 청했다.
“제가 먼저 소관으로 가서 조조의 허실을 탐지해보겠습니다. 주공 께서는 그런 연후에 군사를 움직이십시오.”
여포가 들으니 또한 그럴듯했다. 곧 거기서 행군을 느리게 하고 진등을 먼저 소관으로 보냈다.
진등이 소관에 이르니 그곳에서 도적 떼의 머리 노릇을 해주고 있던 진궁이 손관의 무리와 함께 나와 맞았다. 진등은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온후(溫侯)께서는 여러분께서 나아가 싸우기를 꺼리는 걸 심히 괴이쩍게 여기고 있소이다. 이곳에 이르시면 반드시 꾸짖음과 벌이 있을 것이오.”
그 말에 진궁이 난처한 듯 대답했다.
“지금 조조가 이끄는 군사의 세력이 커서 함부로 가볍게 맞설 수 없소. 그래서 우리들은 험한 관(關)에 의지해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 오. 돌아가거든 주공께 권하시오. 먼저 패성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 될 것이라고. 이곳은 구태여 나가 싸우지 않더라도 조조는 스스로 물러갈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진등은 뜨끔했다. 정말로 여포가 진궁의 말대로만 한다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먼 길을 온 조조는 먹을 것이 없어서라 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등은 건성으로 대답 하고 소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날 밤 날이 저문 뒤였다. 진등이 관(關) 위에서 보니 조조의 군 사들이 관 아래까지 몰려와 공격을 했다. 진등은 좋은 기회라 생각 하고 편지를 매단 화살을 세 통이나 조조의 군사들 쪽으로 쏘아보냈 다. 관 위에 불빛이 비치거든 일제히 공격하라는 내용이 쓰인 편지 였는데 어둠 속이라 아무도 진등이 그러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진등은 이튿날 태연한 얼굴로 진궁과 작별하고 여포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여포에게 한 말은 진궁의 당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손관 등 도적의 무리는 모두 마음이 변해 조조에게 관을 바칠 궁 리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진궁에게 그들을 잘 지켜보라 해두고 왔 으니 장군께서는 저물 무렵 일시에 관을 들이치시어 안에 있는 진궁 등과 구응(應)하십시오.”
콩을 팥이라 해도 곧이 들을 만큼 진등을 믿고 있는 여포는 이번 에도 의심은커녕 칭찬부터 했다.
“공이 아니었더라면 이 관을 고스란히 잃을 뻔했소.”
그리고 계책을 쓴답시고 진등에게 일렀다.
“공은 날랜 말로 얼른 소관으로 돌아가 진궁더러 안에서 호응하 라 하시오. 관 위에 횃불을 밝히는 걸 신호로 삼는 게 좋겠소이다.” 모든 게 그저 진등이 바라는 대로만 되었다. 여포의 명을 받고 나 는 듯 소관으로 달려간 진등은 다시 황망한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했다.
“조조의 군사들이 이미 샛길로 빠져 관 안으로 들어왔소. 서주를 잃을까 두려운 마당이니 공들은 급히 서주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주 공의 명이오.”
아무리 진궁이라고 하지만 여포의 신임을 받는 진등이 그렇게 말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소관을 버리고 밤을 틈타 무리 와 함께 서주를 향해 내달았다. 하지만 진등은 이미 그들 무리에 섞 여 있지 않았다. 어수선한 중에 슬쩍 몸을 빼 관 위에다 불을 질렀다. 그 불길을 보고 약속된 군호라 믿은 여포는 지체없이 소관으로 군사를 몰아갔다. 여포는 소관으로 달려들고 진궁이 이끄는 무리는 서주로 향하고 있으니 두 편이 도중에 만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어둠 속이라 양쪽 다 저희 편을 조조의 군사로 오인하고 한바탕 싸 움을 벌였다.
한편 여포가 관 위의 불길을 보았을 무렵 조조도 그것을 보았다. 간밤에 군사들이 주워온 화살 끝에 매달린 진등의 편지에 쓰인 그대 로였다. 낮부터 채비를 시키고 있던 장졸들을 일제히 내몰아 여포의 군사들이 저희끼리 엉겨붙어 싸우고 있는 곳을 급습했다.
그제서야 여포 쪽에서도 일이 괴상하게 뒤틀린 걸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먼저 손관을 비롯한 태산의 도적 떼들부터 풍비 박산이 되어 흩어지고 이어 여포도 어찌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 렀다.
“할 수 없다. 서주로 돌아가자.”
여포는 그렇게 말하며 난군 가운데서도 용케 다시 만난 진궁과 함께 서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간신히 서주성 아래 이르러 성문을 열라고
외치자 난데없이 성 위에서 비 오듯 화살이 쏟아졌다.
“이놈들아! 정신이 빠졌느냐? 너희 주인 여포가 왔다.”
여포가 분통이 터져 그렇게 소리쳤다. 그 말에 화살비가 걷히며 성벽 위에 한 사람이 나타나 큰 소리로 여포를 꾸짖었다.
“네놈이 어찌하여 서주의 주인일 수 있겠느냐? 원래 서주는 우리 주인의 것이었는데 네놈이 뺏었으니, 이제 마땅히 우리 주인에게 돌 려주려 한다. 두 번 다시 이성에 들 생각을 말아라!”
여포가 성난 눈을 부릅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미축이었다. 하지만 여포는 아무래도 어찌해서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
다. 한동안 망연히 성 위를 바라보다 다시 노한 목소리로 미축에게 물었다.
“내가 떠날 때 이 성을 맡긴 것은 진규였다. 진규는 어디 있느냐?”
“이미 내가 죽였다.”
미축이 그렇게 거짓으로 대답했다. 혹시라도 진등이 여포의 곁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그렇지만 여포도 드디어 이상한 느낌이 든 듯했다. 문득 진궁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등은 어디 있소?”
그 말에 진궁이 한심한 듯 반문했다.
“장군께서는 아직도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하셨습니까? 이 모든 일이 그 간사한 도적이 꾸민 것인데 어찌 여기 남아 있겠습니까?”
“아니다. 어딘가 군사들 틈에 섞여 있을 것이다. 어서 그를 찾아보 아라.”
진궁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여포는 다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진등을 찾아보게 했다. 이미 소관에서부터 몸을 빼친 진등이 거기에 있을 리 만무였다. 그제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등에게 속은 것을 안 여포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차라리 소패성으로 가 거기 의지해 조조를 막는 편이 낫겠습니다.”
진궁이 펄펄 뛰는 여포를 달랜 뒤 그렇게 권했다. 분통은 터지지 만 여포도 달리 길이 없다 여겨 진궁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패에 이르는 길을 반쯤 갔을 무렵 여포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한 떼의 군마와 마주쳤다. 소패를 지키고 있을 줄 알았던 고순과 장 요가 앞장선 군사들이었다.
“소패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나왔느냐?”
여포가 묻자 둘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눈으로 여포를 보며 입을 모아 말했다.
“주공께서는 어떻게 위급을 벗어나셨습니까?”
“뭣이라구? 위급이라니 무슨 위급이란 말이냐?”
여포가 한층 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다.
“진등이 달려와 말하기를 주공께서 적의 포위를 당해 몹시 위태 롭다 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주공의 명을 전하기를, 소패를 버려 두고 어서 빨리 달려와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화가 꼭뒤까지 솟은 여포가 할 말을 잊 고 있는 사이 진궁이 다시 말했다.
“이 또한 진등 그 간사한 도적놈의 계책입니다.”
“내 이 도적놈을 반드시 잡아 죽이고야 말겠다!”
여포가 분노를 넘어 한 맺힌 어조로 소리쳤다. 그리고 급히 말을 몰아 소패로 앞장서 달려갔다.
짐작대로 성 위에는 이미 조조의 깃발이 높이 걸려 있었다. 원래 진등이 쏘아 보낸 글을 통해 고순과 장요가 성을 비울 것을 안 조조 는 미리 조인을 부근에 숨겨두었다가 성이 비기 무섭게 뺏어버린 것 이었다.
여포의 화를 돋우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 아래 이른 여포가 큰 소리로 진등을 부르며 욕하자 진등이 성벽 위로 나타나더니 도리어 여포를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나는 대한의 신하이다. 어찌 너 같은 역적 놈을 오래 섬기겠느냐?”
진등의 밉살맞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노기가 길길이 솟구치는 데 욕까지 얻어먹으니 여포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모든 장졸들은 힘을 다해 이성을 깨뜨리도록 하라. 특히 진등을 사로잡는 자는 이 싸움의 으뜸가는 공으로 상을 내리리라!”
여포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도 투구 끈을 고쳐매며 성으로 돌진 할 채비를 했다. 그때 등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더니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앞선 장수는 고리눈에 밤송이 같은 수염을 단 장비였다. 여포는 고순을 내보내 싸우게 했으나 고순이 장비를 이겨내지 못 했다. 할 수 없이 스스로 장비와 싸우기 위해 성을 공격하려던 군사 들을 되돌려 세웠다. 그런데 싸움이 채 어우러지기도 전에 다시 한 소리 큰 함성이 오르더니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세찬 기세로 부딪쳐 왔다.
분노로 눈이 뒤집힌 상태이기는 해도 여포는 역시 전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성안에 있는 군사들까지 몰려나오는 날이면 자기의 군 사들은 고스란히 독 안에 든 쥐 꼴이 날 것임을 얼른 깨우쳤다.
“모두 비어 있는 동쪽으로 물러나라!”
여포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앞장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여포를 보자 조조의 군사들은 부쩍 힘이 났다. 기어이 여포를 사로잡겠다는 듯 기를 쓰고 추격했다.
여포의 군사가 그렇게 쫓기다보니 간신히 추격을 벗어났을 때는 사람과 말이 한가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군데 외진 길목에서 한 떼의 인마가 갑작스레 나타나 앞을 막았다.
“여포는 달아나지 마라! 관운장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앞선 장수가 청룡도를 비껴들고 말 위에서 소리쳤다. 난데없이 나 타난 장비에게 쫓기는 터에 이제는 관운장까지 나타나 길을 막은 것 이었다.
여포는 황망한 중에도 화극을 들어 관운장의 청룡도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는 조조의 대군과 장비가 쫓아오고 있어 앞으 로 길을 뚫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여포에게는 힘들 여 싸울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짐짓 기세를 올려 몇 번 관운장을 공격한 뒤 한 가닥 길을 열어 달아나기 바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하비성을 향해서였다. 다행히 후성(侯)이 군사를 이끌고 접 응한 덕분에 여포는 물론 진궁도 겨우 하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 었다.
한편 소패에서 뿔뿔이 흩어진 뒤 서로 생사조차 모르다가 다시 만나게 된 관우와 장비는 비 오듯 눈물을 뿌리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날 소패성을 빠져나간 뒤 해주(海州)의 길가에서 몇 안 되는 군사들과 함께 머물렀네. 그러면서 사방으로 알아본 바, 형님 께서 조조와 함께 여포를 치러 온다는 소식이 들리기에 이렇게 달려 온 것이네.”
관우의 목메인 말에 장비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는 망탕산(山)에 들어가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오늘 다시 형님을 만나게 되고 다시 큰형님께서도 무사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기다린 게 헛되지 않았군요.”
“하늘이 우리 삼형제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이네. 자, 여기서 지체 할 게 아니라 어서 현덕 형님을 뵈러 가세.”
관우가 장비의 등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자 장비도 군 사를 이끌고 유비가 있는 조조의 본진으로 향했다.
생사를 모르는 채 헤어졌던 삼형제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야 오죽했겠는가. 땅에 엎드려 울며 절하는 두 아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유비 또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함께 조장군을 뵈러 가세.”
이윽고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둘을 데리고 조조를 만나러 갔다. 조조도 둘을 반가이 맞고 유비와 함께 자신을 따르도록 했다.
유비와 관, 장 삼형제가 조조를 따라 서주성으로 들어가니 이번에 는 미축이 다시 눈물로 맞았다. 그러나 미축을 통해 가솔들이 모두 무사한 걸 알자 유비의 기쁨은 컸다. 근거가 되는 성을 빼앗기고도 두 아우는 물론 처자와 노소까지 아무 탈 없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라 여겼다.
그러나 누구보다 기쁨이 큰 것은 조조였다. 두려워했던 손실을 입 지 않고 소패와 서주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여포를 하비성에 가두 어놓을 수 있게 된 까닭이었다.
조조는 그 같은 성과를 얻게 된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진규와 진 등 부자가 찾아들자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자신은 가운데에 앉고 왼 쪽에는 진규를, 오른쪽에는 유비를 앉힌 뒤 다른 장수와 모사들도 각기 자리를 정해 앉게 하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런 다음 진규 부자의 공을 기려 열 개 현(縣)의 녹을 내리고, 진등은 벼슬을 높 여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삼았다.
그 잔치가 끝난 뒤 유, 관, 장 삼형제는 따로 모여 다시 그간에 쌓 인 회포를 풀며 밤새워 술을 마셨다.
“형님,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 삼형제가 다시 만난 데 다가 두 분 형수님과 집안의 노소까지 무사하니 실로 하늘이 돌보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장비의 그 같은 말에 유비도 환한 얼굴로 받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처음 말 한 필에 의지해 소패를 빠져나올 때만 해도 나는 일이 모든 일이 글러버린 줄 알았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원래 그러한지 두 아우와 가솔들이 모두 무사한 걸 알자 유비의 가슴에는 차츰 어둠이 일기 시작했다. 또다 시저 탁현을 떠날 때와 다름없이 영락한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탓 이었다.
조조가 나서서 얻어준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 예주목의 자리를 얻 었을 때만 해도 유비는 은근한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일단 조조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근거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오래전부터 꿈꿔 온 자립의 기반을 다질 수 있으리라는 예상에서였다.
그러나 미처 그 꿈을 펴보기도 전에 조조와 여포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자신은 그 와중에서 다시 모든 걸 잃은 채 조조에게 더부 살이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싸움의 흙먼지에 휩쓸려 겨우 움 트던 꿈은 산산이 흩어져버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