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2화 : 자옥한 전진, 의기를 가리우고
자옥한 전진, 의기를 가리우고
도성에서의 일이 대강 마무리되자 조조의 눈길은 마등과 유비에 게로 옮아갔다. 둘 다 의장(義)에 이름이 올라간 동승의 패거리였 으나 외방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도성 안에 있던 동승의 무리는 모두 죽였으나 밖에는 아직 도 마등과 유비의 무리가 남아 있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없애버리 지 않을 수 없구려.”
조조는 정욱을 불러놓고 의논조로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정욱은 조조와 뜻이 달랐다.
“마등은 멀리 서량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있어 가볍게 대적하 기 어렵습니다. 글을 보내 그를 달래 의심을 품지 않게 한 뒤 도성으 로 꾀어들여 죽이도록 하십시오. 유비도 지금 서주에서 군사를 길러 서로 의지하며 지키고 있으니 역시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더구나 원소가 관도에 군사를 두고 언제나 허도를 노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동쪽으로 유비를 치러 간다면 유비는 반드시 원소에게 구원을 청할 것입니다. 원소가 그 틈을 노려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같이 조조를 말렸으나 조조도 그 일만은 정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 않소. 마등의 일은 공의 말을 따른다 해도 유비만은 다르 오. 유비는 실로 인걸이외다. 만약 지금 치지 않고 그 날개와 깃털이 자라도록 버려둔다면 그때는 정말로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오. 일찍 쳐 없애야 하오. 공은 원소를 두렵게 여기고, 그 세력이 강한 것도 사실이나 그는 의심이 많고 일을 당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요.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니외다.”
조조가 그렇게 우기며 동정(東征)을 강행하려 했다. 정욱 또한 말 이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 둘의 논의는 길어졌다. 한참 서로 가 헤아리고 살핀 바를 주고받고 있는데 곽가가 밖에서 들어왔다. 조조가 문득 곽가에게 물었다.
“나는 동쪽으로 군사를 내어 유비를 치고 싶은데 아무래도 원소가 걱정이 되네. 그대 생각은 어떤가?”
곽가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선뜻 대답했다.
“원소는 결정이 느리고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그의 모사들은 서로 시기하여 꾀를 하나로 모으기 어려우니 걱정할 게 없 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때입니다. 지금 유비는 새로 군사를 모아들이는 중이라 아직 그들을 마음으로 따르게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친히 군사를 이끄시고 동으로 쳐나가신다면 한 싸움으로 결판을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 뜻과 같다네.”
곽가가 제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이나 찬성하고 나서자 조조는 크 게 기뻤다. 더 망설이지 않고 이십만 대군을 일으켜 다섯 길로 서주 를 향해 밀고 내려갔다.
첩자가 그 소식을 탐지하여 나는 듯 서주에 전했다. 그 소식을 들 은 손건은 먼저 하비에 있는 관우에게로 가서 알리고 이어 소패에 있 는 유비에게도 가서 전했다.
“큰일이로구나. 이 일은 반드시 원소에게 구함을 받아야만 어려움이 풀리겠다.”
유비는 손건과 그렇게 의논한 뒤 글 한 통을 써서 하북의 원소에게 보냈다.
하북에 이른 손건은 먼저 원소의 모사 전풍을 만나 사실을 말한 뒤 원소에게 인도해주기를 청했다. 전풍은 즉시 손건을 원소에게로 데 려갔다. 유비가 써준 글을 바치면서 손건이 보니 원소는 얼굴이 초 췌하고 옷과 관이 흐트러져 있었다. 전풍도 그게 이상한지 원소에게 물었다.
“오늘 주공께서는 무슨 일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내가 곧 죽을 것 같소.”
원소가 자못 처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풍이 놀라 물었다.
“주공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실은 큰 걱정이 있소. 나는 다섯 아들(정처에게서 난 아들은 원담, 원 희, 원상 셋이었으나 여기서는 첩에게서 난 아들까지 셈한 듯하다)을 두었는 바 그중에서 막내가 가장 나를 기쁘게 해주었소. 그런데 지금 그 아 이가 개창, 옴. 여기서는 대단찮은 피부병이란 뜻)이 나 다 죽어가니 다른 일에 어찌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소? 내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소리가 빈말이 아닐 게요.”
그렇게 말하는 원소는 정말로 만사가 다 귀찮다는 태도였다. 손건 이 바친 편지도 읽으려 않고 손건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일도 없었 다. 전풍이 보다 못해 원소에게 서주의 일을 말로 들려주었다.
“지금 조조는 동쪽으로 유현덕을 치러 나가 허창은 텅 비어 있습 니다. 그 빈 틈을 타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위로는 천자를 보 호할 수 있고, 아래로는 만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얻기 어려우니 명공께서는 부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원소의 대답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나도 이번이 가장 좋은 기회란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 일에 이롭지 못할까 걱정이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마음이 어지러우십니까?”
전풍이 더욱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러나 원소는 전풍의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못난 소리만 거듭했다.
“내 말하지 않았소? 아들 다섯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막내가 지금 앓아 누워 다 죽어간다고. 만약 그 아이가 죽는다면 내 목숨도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어찌 마음이 어지럽지 않겠소?”
그러면서 끝내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전풍과 손건이 번갈아 권했으나 손건이 원소로부터 얻어낸 대답은 실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대는 현덕에게 돌아가거든 부디 내가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을 잘 말씀해주시오. 그리고 정 그곳의 일이 뜻 같지 못하면 내 게로 오라고 하시오. 나는 반드시 서로 도우며 지낼 만한 곳을 마련 해 드리겠소.”
원소의 뜻이 그러하니 손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원소의 방을 나서는데 문득 전풍이 지팡이로 땅을 치며 탄식했다.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어린아이의 병으로 놓쳐버리다니! 이 기회를 잃으면 큰일은 이미 틀려버린 노릇이다. 통탄스럽고 애석하 “구나!”
어찌나 마음이 상했는지 걸음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릴 정도였다. 여기서 또 한번 볼 수 있는 것은 조조와 원소의 대비이다. 조조는 장수에게 쫓길 때 아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나 목숨을 건 지고 뒷날을 기약했다. 그런데도 원소는 어린 아들의 병으로 마음이 흔들려 실로 얻기 힘든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조조가 던 져졌던 상황이 원소보다 더 극한적인 것이었고, 또 감상적인 이들에 겐 원소의 그 같은 다감함이 훨씬 인간적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천하를 다투는 싸움터에 발을 들여놓은 한 무리의 우 두머리라는 입장에서 볼 때 원소의 그 같은 다감함은 치명적인 약점 이 될 뿐이다.
원소의 거절을 받은 손건은 그 길로 소패에 있는 유비에게 달려가 일의 경과를 알렸다. 잔뜩 믿고 있던 유비는 그 뜻밖의 회답에 낙담했다. 침통한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탄식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때 장비가 씩씩하게 나서며 유비를 위로했다.
“형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조의 군사는 멀리서 온 터라 반드시 지쳐 있을 것입니다. 오자마자 조조의 진채를 들이쳐 그들이 지쳐 있음을 틈탄다면 조조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유비도 생각해보니 이왕 혼자 힘으로 싸워야 한다면 그 길밖에 없었다. 곧 표정을 밝게 고치고 먼저 장비를 크게 칭찬하여 그 기세 부터 돋워주었다.
“나는 네가 그저 힘꼴깨나 쓰는 자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법이 로구나. 전에는 멋진 계략을 써서 유대를 사로잡더니 지금 올리는 계책도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다. 좋다. 그대로 해보자. 언제까지나 남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그러고는 다시 군사들을 격려해 성을 나갔다. 장비와 함께 길을 나누어 조조의 진채를 급습할 작정이었다.
이때 조조의 군사는 거의 소패에 이르고 있었다. 한참 행군을 재 촉하고 있는데 홀연 미친 듯한 바람이 일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 기, 대장군의 기)가 둘이나 뚝 부러졌다. 조조는 까닭 없이 기분 이 좋지 않았다. 곧 행군을 멈추게 한 뒤 여러 모사들을 불러 모아놓 고 길흉을 물어보았다.
“바람이 불어온 방향이 어느 쪽이며 부러진 깃발의 색깔은 무엇이었습니까?”
순욱이 가만히 조조에게 되물었다.
“바람은 동남방에서 불어왔고 부러진 아기는 푸른색과 붉은색이었소.”
조조가 그렇게 밝히자 순욱이 잠깐 무엇을 헤아리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오늘밤 틀림없이 유비가 우리 진채 를 급습하러 올 것입니다.”
그 말에 조조도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옛 병서에서 그 같은 말 을 읽은 듯도 하거니와 설령 그것이 황당한 예측이라 할지라도 하룻 밤 적의 기습에 대비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자기의 군 사는 천리를 행군해와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적을 본적 이 없어 약간 방심한 기색도 있었다. 거기다가 그 지역은 이미 유비 의 군사가 기습을 나올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때 다시 모개(毛)가 들어와 조조에게 물었다.
“방금 동남풍이 거세게 일더니 푸른색과 붉은색 아기 둘을 부러뜨렸습니다. 주공께서는 그 길흉을 어떻게 보십니까?”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조가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모개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오늘밤 반드시 우리 진채를 야습해 오는 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조조도 껄껄 웃으며 좌우를 둘러보고 말했다.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오. 마땅히 미리 막을 채비를 해야겠소.”
그리고 병사를 아홉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만 진채에 남기고 나머지 여덟 부대는 진채 둘레에 팔면으로 매복하게 했다. 진채에 남은 한 부대가 기치(旗幟)와 화톳불로 마치 모든 부대가 다 진채에 있 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몄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날 밤은 마침 달빛이 희미하여 야습에는 알맞았다. 조조가 미리 대비하고 있는 줄을 짐작도 못한 유비는 장비와 함께 좌우로 길을 나누어 조조의 진채를 야습하러 떠났다. 소패는 손건이 남은 군사들 과 함께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
장비가 조조의 진채에 이르러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 이 없었다. 파수도 별로 세워놓지 않고 대군이 한 진채에 머물러 마 음 놓고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장비는 자신의 계책이 다시 한번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싶었다. 차 림이 가벼운 기병을 앞에다 세우고 그 뒤에 보군을 따르게 하여 기 세 좋게 조조의 진채를 덮쳤다.
그러나 조조의 진채 깊숙이 뛰어들자마자 장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말과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기치와 화톳불만 휘황할 뿐이었다. 장비는 놀라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 다. 사방에서 크게 불길이 일며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비로소 거꾸 로 조조의 계략에 떨어졌음을 깨달은 장비는 급히 진채를 빠져나가 려 했지만 쉬울 리가 없었다. 동에서는 장요가 달려 나오고 서에서 는 허저가 달려 나왔으며 남에서는 우금이 달려 나오고 북에서는 이 전이 달려 나왔다. 뿐만이 아니었다. 동남에서는 서황이, 서남에서는 악진이, 동북에서는 하후돈이, 서북에서는 하후연이 각기 한 떼의 인마를 이끌고 달려 나왔다.
장비는 그들 여덟 갈래 군마와 좌충우돌 싸웠으나 앞이 막히는가하면 뒤에서 밀어와 형세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가 거느린 군사란 게 또한 거의 원래 조조에게서 빌려온 군사들이었다. 사세가 기우는 걸 보자 모두 조조 쪽으로 투항해버렸다.
하지만 워낙 무예가 빼어난 장비였다. 서황을 만나 한바탕 크게 싸움을 벌여 기세를 꺾어놓고 다시 뒤에서 덮치는 악진을 맞아 가까 스로 한 가닥 길을 열었다. 그러나 간신히 포위를 뚫고 보니 뒤따르 는 것은 겨우 수십 기에 지나지 않았다.
장비는 우선 소패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 길은 이미 조조에게 잘 려 있었다. 다시 서주나 하비로 가려 해도 역시 조조가 길을 끊고 기 다리고 있을까 두려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선 망탕산으로 가자. 거기서 잠시 몸을 숨 기고 형세를 살핀 뒤에 형님들을 찾아야겠다.”
마침내 장비는 그렇게 작정하고 가까운 망탕산으로 의지해 갔다. 한편 유비는 장비보다 늦게 조조의 진채에 이르렀다. 막 군사를 몰아 덮쳐가려는데 갑자기 크게 함성이 일며 등 뒤에서 한 떼의 군 마가 일었다. 황급히 군사를 돌려 맞섰으나 오히려 기습을 당한 꼴 이 되어 거기서 벌써 인마의 태반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하후돈의 군마가 이르렀다. 꼼짝없이 적병 속에 갇힌 유비는 죽을 힘을 다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으나 이번에는 다시 하후 연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귀 큰 놈아, 달아나지 말라!”
“승상의 대은을 저버린 표리부동한 놈아, 어디로 가려느냐?”
그 같은 적병의 함성에 쫓기며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는 것은 겨우 서른 기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틀렸다. 소패로 돌아가자.”
유비 또한 그렇게 결정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저만큼 소 패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성안에서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솟고 있 는 게 보였다. 이미 소패가 떨어진 것으로 짐작한 유비는 할 수 없이 말 머리를 서주와 하비 쪽으로 돌렸으나 그 또한 뜻 같지 못했다. 이 미 조조의 군사들이 산과 들을 뒤덮으며 그리로 가는 길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유비는 돌아가려야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참을 지향 없이 달리다 가 문득 원소가 손건을 통해 전해온 말을 떠올렸다.
‘일이 뜻 같지 못하거든 내게로 오시오.’
마치 그럴 줄 미리 알고 한 말 같아 새삼 원소가 원망스러웠으나 도리가 없었다. 잠시 그에게 가서 의지하다 따로이 좋은 방도를 내 보기로 마음 먹고 청주(州)로 가는 길을 찾아 달렸다.
그런데 조조의 헤아림은 거기까지 미쳐 있었다. 청주로 가는 길로 접어든 지 얼마 안 돼 유비는 다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전을 만 났다.
“은혜로운 주인을 저버린 천한 종놈아. 내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어서 말에서 내려 목을 바치지 못하겠느냐?”
이전이 그렇게 꾸짖으며 유비를 사로잡으려 들었다. 거느린 군사 도 적으려니와 이미 싸움에 져 쫓기던 뒤끝이라 이전에게 맞서 싸울 기백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니 그나마 뒤따르던 서른 기는 모조리 이전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패도지(地)라더니 유비가 그랬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그것도 야습 실패 한 번으로, 서주를 바탕 삼아 한창 뻗어가던 유비 의 세력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겨우 말 한 필에 의지해 조조 의 포위를 뚫고 나온 유비는 하루에 삼백 리씩이나 달려 청주에 이 르렀다.
“문을 열라, 어서 성문을 열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유비가 성 위를 향해 소리쳤다. 성문을 지키던 군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자사께 서주의 유비가 왔다 이르라.”
유비가 얼른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때 청주자사는 원소의 맏아 들 원담(袁譚)이었다. 평소부터 공경하던 유비가 말 한 필에 의지해 달려왔다는 말을 듣자 성문을 열게 하고 몸소 나가 맞아들였다.
“유황숙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초라한 행색으로 보아 유비의 사정이 짐작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 으나 그 자세한 경과가 궁금해 원담이 물었다. 유비는 자세한 경과 와 더불어 원소에게 의지하려는 뜻을 밝혔다.
원담은 유비를 역관에 하룻밤 쉬게 한 뒤 한편으로는 원소에게 글을 올려 유비가 온 것을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주의 인마로 하여금 평원 경계까지 유비를 호위케 하였다. 원소는 몸소 무리를 이끌고 업성 밖 삼십 리까지 나와 유비를 맞아들였다. 유비가 절하며 고마움의 뜻을 나타내자 원소가 황망히 답례하며 변명했다.
“지난번에는 아이가 병이나 구원을 가지 못하였소.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리더니 이제 다행히 만나게 되어 평생 그리워하던 정을 달 랠 수 있게 되었구려.”
“외롭고 궁한 유비는 오래전부터 원공(公)의 문하에 몸을 의지 하고 싶었으나 아직 그럴 인연과 때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조 조의 공격을 받아 처자를 모두 잃고서야 명공께서 사람을 가림이 없 이 받아들이심을 떠올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이렇게 달려와 의 지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 몸을 거두어주신다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유비가 원소에게 다시 한번 그렇게 다짐했다. 완연히 원소의 막하 로 드는 항장(降將)의 태도였다. 원소는 기뻤다. 원래 원소는 유비의 미천한 출신을 깔보았으나 그 몇 년 천하의 조조를 상대로 한 싸움 에서 유비를 다시 보게 되었다. 굽힐 때 굽히고 맞설 때 맞서면서, 이제는 완전히 조조의 사람이 되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만만찮은 세 력으로 그에게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원소를 뿌 듯하게 한 것은 원소의 허영심이었다.
‘조조, 너는 결국 이 사람을 잡아두지 못했지만 보아라, 나는 반드 시 이 사람을 수족으로 부리게 될 것이다.’
조조가 유비에게 들인 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원소 는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유비를 두텁게 대 하면서 기주에 함께 머무르게 하였다. 조조는 물론이고 수십 년에 걸쳐 도우고 보살펴준 공손찬이나 이따금씩 파격적인 대우로 유비를 붙잡아두려 했던 여포가 못한 일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결단이 더디고 의심이 많은 데 비해 지나치다고 할 수밖에 없 는 믿음이요 정신적인 허영일 수도 있었다.
한편 조조는 유비를 깨뜨린 그 밤으로 소패를 손에 넣고, 이어 군 사를 내몰아 서주를 치게 했다. 미축과 간옹이 힘써 대항했으나 이 렇다 할 장수 하나 없는 성을 조조의 대군으로부터 지켜내기는 어려 운 일이었다. 아직 조조의 대군이 에워싸기 전에 성을 버리고 달아 나니 진등이 남아 서주성을 조조에게 바쳤다.
연의란 글 형식의 성격 탓이겠지만 재미를 위해 후세에 아름답지 못한 의심을 받게 된 이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으로는 진등도 몇 손 가락 안에 들 것이다. 난데없이 유비에 대한 충성의 토막을 지어 넣 음으로써 진등은 도겸에서 유비로, 유비에서 여포로, 여포에게서 다 시 조조로, 조조에게서 또 유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또다시 유 비에게서 조조에게로 돌아간 지조 없는 모사가 되고 말았다. 적어도 『연의상으로는 가후(賈詡)보다 더한 변신의 명수가 되어 있다. 그러 나 정사를 살피면 그의 주인은 오직 한이요, 그 한의 권위를 현실로 대행하는 조조뿐이었다.
어쨌든 진등의 힘으로 이렇다 할 싸움 없이 서주까지 손에 넣은 조조는 백성들을 안돈시킨 후 다시 모사들을 불러모아 하비(下邳마 저 떨어뜨릴 의논을 했다.
“운장은 그 성안에서 현덕의 처첩과 일가 노소를 보호하고 있어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급히 성을 빼앗지 않는다면 원소가 손에 넣 게 될까 두렵습니다.”
순욱이 일어나 급히 싸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조조의 생각은 달랐다. 순욱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운장의 무예와 사람됨을 아껴왔소. 그 사람을 얻어 쓰고 싶 소이다. 사람을 보내 항복하라고 달래보는 게 어떻겠소?”
“운장은 의기가 깊고 무거운 사람이라 결코 항복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냈다가 오히려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조조의 물음에 곽가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장막 아래서 한 사 람이 나서며 말했다.
“저는 일찍이 관공과 한번 만나 사귄 적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저 를 보내 달래보도록 하십시오.”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모두 돌아보니 다름 아닌 장요였다. 정욱이 그런 장요를 보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문원)이 비록 운장과 전에 사귄 적이 있다 하나 내가 보니 운장은 다른 사람의 말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외다. 내게 한 가지 좋 은 계책이 있소. 그걸 써서 운장을 앞으로도 뒤로도 나갈 길이 없게 한 뒤에 문원이 가서 달랜다면 그도 마침내는 승상께로 오고 말 것 이오.”
“그 계책이 무엇이오?”
조조가 반가운 얼굴로 정욱에게 물었다. 정욱이 가볍게 수염을 쓴 후 대답했다.
“운장은 만 사람이라도 맞서 싸울 만한 힘이 있는 자라 지모를 쓰 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로 유비 아래 있다가 항복해 온 군사들을 뽑아 하비성 안으로 들여보내십시오. 우리들에게서 도망쳐 돌아간 것처럼 꾸미면 틀림없이 운장은 속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을 성안에 남아 내응하도록 하고, 다시 이번에는 운장을 끌어내시되 거짓으로 싸움에 진척 쫓겨 되도록이면 그를 성에서 리 떨어지도록 꾀어내십시오. 그래 놓고 날랜 군사를 내어 그가 돌 아갈 길을 끊는다면 아마도 운장을 달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관우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한곳에다 붙잡아두고, 먼저 하비 성을 손에 넣은 뒤 관우의 절박한 심경을 이용해 항복을 권해보자는 말이었다.
조조는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항복한 군사 중에서 믿을 만한 수십 명을 뽑아 하비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돌아가 관우에게 조 조로부터 도망쳐 온 경위를 그럴싸하게 지어서 말하자 관우는 그들 을 별로 의심하지 않고 그전처럼 수하에 거두어 성안에 머무르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하후돈이 선봉이 되어 군사 오천을 이끌고 하비성 앞에 나타나 싸움을 돋우었다. 관공은 유비의 일가 노소를 보호하고 있는 터라 절로 신중해져 쉽게 나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에 하후돈은 졸개들을 시켜 성 아래서 관우에게 욕설을 퍼붓게 했다.
“유비의 개는 어서 나오너라!”
“네 주인은 이미 죽어 목이 떨어졌는데 어찌 너는 항복하지 않느냐?”
“청룡도는 치장으로 들고 다니는 물건이냐? 풍채가 아깝다. 어서 나오너라!”
하후돈의 군사들은 별별 욕을 다 퍼부었다. 듣고 있던 관운장은 마침내 참아내지 못했다.
“이 쥐 같은 무리가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
그 한마디 성난 외침과 함께 삼천의 군마를 이끌고 성을 나왔다. 하후돈은 그런 관운장을 맞아 십여 합을 싸우다가 못 견디는 척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관운장은 기세를 올려 그런 하후돈을 뒤쫓았 다. 한참을 달아나던 하후돈이 문득 뒤돌아 서서 맞섰다. 그러나 미 처 대여섯 번도 창칼을 부딪지 못하고 다시 달아났다.
몇 번이나 그렇게 싸우고 쫓는 사이에 관운장은 어느새 하비성 밖 이십 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그제서야 관운장은 자신이 성에서 너무 멀리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사이 하비성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얼른 군사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소리 포향이 들리더니 왼쪽에서 서황이 달 려 나오고 오른쪽에서는 허저가 달려 나와 돌아갈 길을 막았다. 관 운장은 길을 앗아 달아나려 했으나 서황과 허저가 이끈 복병은 강한 쇠뇌 [弩]를 백 장이나 펼쳐 쏘아대니 화살이 마치 메뚜기 떼 뒤덮 이듯 날아와 다가들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군사를 돌려 다른 길로 가려는데 서황과 허저가 거꾸로 달려들었다.
관운장은 힘을 다해 그들 둘을 물리쳤다. 겨우 숨을 돌리고 하비 로 돌아가려 할 때 이번에는 하후돈이 나타나 다시 길을 끊고 시살 (殺)해 들어왔다.
관우는 날이 저물 때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하비성으로 돌아갈 길 을 얻지 못했다. 조조의 장수들이 번갈아 정병을 이끌고 나타나 길을 막으니 지치고 겁먹은 군사 약간을 거느린 관우 혼자서 길을 앗는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가 조조의 치밀한 계책에 이 미 옭혀든 터이니 어찌 그 일이 관우의 뜻 같을 수 있으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던 관우는 겨우 작은 토산(山) 하나를 어 그 산등성이에다 진을 쳤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조조 의 군사들은 그 토산을 겹겹이 둘러쌌다. 관우는 암담한 가운데 눈 을 들어 멀리 하비성을 바라보았다. 성안에서는 불길이 하늘을 찌르 듯 일고 있었다.
그 무렵 하비성 안에서는 전날 거짓말로 성안에 든 항병(降兵)들 이 불을 지름과 함께 성문을 열어 조조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조조 는 몸소 앞장서서 성을 손에 넣은 다음 더욱 불길을 크게 하여 멀리 서 보고 있을 관우의 의혹을 돋우었다.
과연 관공은 성안에서 크게 불길이 이는 것을 보자 놀랍고 황망 스러웠다. 자기를 믿고 맡겨둔 유비의 가솔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 이었다. 몇 번이나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 아래로 부딪쳐 가보았 지만 비 오듯 어지러이 쏟아지는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도로 산 위 로 쫓겨 올라갔다.
그러는 사이 날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관공이 다시 한번 산을 내려가 부딪쳐보려고 군사를 정돈하고 있는데, 홀연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눈길을 모아 살펴보니 이제는 조조의 사람이 되어 있는 장요였다.
“문원은 나와 싸우러 왔는가?”
장요가 아직 여포의 장수로 있을 때부터 이상스레 마음이 끌리던 관공이었다. 그 때문에 죽게 된 것을 조조에게 허리까지 굽혀가며 구해주었던 만큼 장요에 대한 정은 남달랐으나 이제 적으로 맞서게 되었으니 절로 목소리가 엄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공과 지난날의 정을 생각하여 특히 이렇게 뵈러 온 것입니다.”
장요가 말 아래로 칼을 던지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말에 관공 도 엄한 기색을 약간 풀며 묵묵히 장요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서로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는 예를 끝내기 바쁘게 물었다. “그렇다면 문원은 나를 달래러 온 것이 아니오?”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옛정을 잊지 못해 왔습니다. 지난날 형 께서 이 아우의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이제 이 아우가 어찌 형을 구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문원이 나를 도우러 왔단 말이오?”
“그 또한 아닙니다.”
그러자 관공이 다시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나를 돕지 않겠다면 이렇게 와서 무얼 하려는 것이오?”
꾸짖음 같은 관공의 물음이었으나 장요는 조금도 움츠러듦이 없 었다. 한층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다.
“현덕공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고 익덕 또한 마찬가집니 다. 그런 가운데 조승상께서는 어젯밤 이미 하비성을 깨뜨렸습니다. 다행히 군민이 모두 상하지 않았고, 특히 현덕공의 가권들은 승상께 서 사람을 뽑아 호위케 하여 놀라고 두렵게 하는 것조차 막아주셨습 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기에 혹시 형께서 근심하실까 봐 이 아우가 알리러 온 것입니다.”
“그 말은 바로 나를 달래러 왔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비록 지금
위태로운 처지라 하나 나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대는 속히 돌아가라. 이제 곧 나는 산을 내려가 죽을 때까지 싸우리라!”
관운장이 문득 노한 목소리로 장요를 쫓으려 들었다. 하지만 장요 는 오히려 껄껄 웃었다.
“형의 그 말을 듣는다면 천하가 다 비웃을 것입니다.”
“나는 충의를 짚고 죽으려 하는데 어찌 천하가 나를 비웃는단 말인가?”
“형이 지금 죽으면 그 죄가 셋이나 됩니다.”
“죄가 셋이라니? 그렇다면 그게 무엇 무엇 무엇인지 그대가 말해보라!”
관운장이 여전히 노기를 거두지 않고 장요를 다그쳤다. 장요가 하 나하나 손꼽아 가며 대답했다.
“처음 현덕공과 형제의 의를 맺을 때 형께서는 생사를 함께하시 기로 맹세했습니다. 지금 현덕공은 싸움에 져 생사를 알 수 없으나 형께서 급히 싸워 죽는다면 현덕공이 다시 나타나 도우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곧 함께 죽고 살지 못함을 뜻하니 어찌 지난 날의 맹세를 저버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죄가 하납니다. 그다음 현덕공께서는 가권을 모두 형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께서 싸워 죽는다면 현덕공의 두 부인은 믿고 기댈 데가 없어지는 것입니 다. 이는 현덕공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니 그 죄가 둘입니다. 또 형께서는 무예가 남달리 빼어나고 경전이며 사서에도 두루 통해 있습 니다. 그 재주와 학식으로 현덕공을 도와 쓰러져가는 한실을 붙들려 하시지는 않고, 헛되이 끓는 물 타는 불에 뛰어들어 필부의 용기만 보이려 하시니 어찌 의롭다 하겠습니까? 그 죄가 바로 셋에 해당됩 니다. 이와 같이 형께서는 지금 세 가지 죄를 지으려 하시니 이 아우 가 깨우쳐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말에 관운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마디마디 옳
은 말이었다.
“그대는 내게 세 가지 죄를 말해주었소. 그렇다면 그 죄를 짓지 않는 수는 없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윽고 관운장이 무겁게 입을 떼어 물었다. 장요가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지금 사방은 조공(曹公)의 군사들로 뒤덮여 있어 형께서 항복하 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헛되이 죽는 일은 결 코 천하를 위해 이로움이 되지 못하니 차라리 조공에게 항복하여 뒷 날을 기약함이 어떻겠습니까? 우선 조조 밑에 몸을 굽히고 있다가 현덕공으로부터 소식이 있을 때 계신 곳이 어디라도 즉시로 찾아가 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첫째로 현덕공의 두 부인을 보전 할 수 있고, 둘째로는 도원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으며, 세 번 째는 몸을 남겨두어 천하에 이롭게 쓰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더러 조승상을 속이란 말씀이오?”
“세 가지 죄를 면하기 위한 임시변통입니다.”
그러자 관운장은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결연히 말했다.
“형은 내게 임시변통을 말했으나 그럴 수는 없소. 그보다는 오히 려 승상께 말해 세 가지 약조를 받아주시오. 만약 승상이 들어준다 면 나는 즉시로 갑옷을 벗고 항복하겠지만 들어주지 않는다면 설령 그 세 가지 죄를 짓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다 죽겠소.”
“승상께서는 관대하고 도량이 넓으시니 무엇인들 받아들이지 않 겠습니까? 그 세 가지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장요가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첫째로 나와 유황숙은 함께 쓰러져가는 한실을 받치기로 맹세했 으니 내가 지금 항복하는 것도 한의 천자에게이지 조조에게가 아님 을 밝히는 것이오. 둘째는 두 분 형수님께 황숙의 봉록을 내릴 뿐만 아니라 상하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문전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외 다. 셋째는 황숙께서 계신 곳을 알게 되면 천리가 되건 만리가 되건 내가 가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하오. 이 셋 중에서 단 하나가 빠져도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바라건대 문원께서는 급히 돌아가 승상께 이 일을 알리고 그 답을 들려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요는 운장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고 산을 내려갔다.
“나는 한의 승상이다. 그런즉 한은 나를 갈음할 수 있으니 그 일 은 들어줄 수 있다.”
장로부터 관우가 한에 항복할지언정 자기에게는 항복하지 않겠 노라는 첫째 조건을 듣자 조조는 그같이 말하며 선선히 들어주었다. 장요가 다시 둘째를 말했다.
“운장은 현덕의 가솔들에게 황숙의 봉록을 내리고 일체 잡인의 출입을 금해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황숙의 봉록에다 다시 배를 더해주겠다. 뿐만 아니라 안팎으로 드나듦을 엄히 막아 현덕의 가법(法)이 지켜지도록 할 것이다. 또 의심스런 것이 있다더냐?”
조조가 다시 허락하고 세 번째를 물었다. 장요가 대답했다.
“현덕이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하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반드시 그를 찾아가리라 했습니다.”
그 말에는 어지간한 조조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운장을 길러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 일만은 들어주기 가 어렵구나.”
“명공께서는 옛적의 협객 예양(襄)이 한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 까? 예양은 그를 여느 사람[人]으로 대해준 이에게는 그도 여느 사람이 망하는 주인 보듯 하였지만 국사(國)로 알아준 이에게는 목숨을 바쳐 그 원수를 갚아주려 했습니다. 유현덕이 운장에게 베푼 것은 그저 두터운 은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승상께서 이제 다시 두 터운 은의로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운장이 어찌 승상을 따르지 않 겠습니까?”
장요가 그런 조조를 부추겼다. 조조도 그 말을 듣자 조금 자신이 생겼는지 이내 시원스레 말했다.
“문원의 말이 옳으이 가서 운장에게 말하게. 그 세 가지를 모두들어주겠다고.”
조조의 허락을 받자 장요는 나는 듯 말을 몰아 산 위로 되돌아갔다. 당연히 감동할 만한 일이었으나 관공은 감동을 나타내는 말 대신 새로운 청을 했다.
“그렇다면 조승상께 청해 잠시 군사를 물려달라 해주시오.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두 분 형수님께 이 일을 알린 뒤에 승상께 항복하 러 가겠소이다.”
장요는 다시 조조에게 돌아가 그 말을 전했다. 따지고 보면 어렵 기 짝이 없는 청이었다. 하지만 이왕 내친김이라 그런지 조조는 선 선히 응낙하고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그 산에서 십 리 밖으로 물러나도록 하라!”
그때 순욱이 나서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속임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관우가 그 틈을 타서 길을 앗아 달아나면 어쩌시겠습니까?”
“운장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오.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외다.”
조조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 거듭 장졸을 재촉하여 길을 내주게 하였다.
관우에 대한 조조의 그 같은 믿음과 애정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상 반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조조를 나쁜 쪽으로만 몰아가는 쪽은 그 또한 관우를 얻기 위한 계략과 술수의 측면으로 몰아갈 것이다. 다 른 한편으로 조조가 거기서 무릅써야 할 위험의 크기를 헤아린 쪽은 그 결정이 조조의 넓은 도량과 대담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같은 결정 뒤에 숨은 조조의 내면 동기이다. 젊은 날의 때묻지 않은 이상, 충성과 의리에 대한 티없는 열정이 이미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냉혹한 투쟁의 현장에 던져진 그때까지도 조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욱하리 만큼 그 이상과 열정에 매달려 있는 관 우를 보자 그토록 앞뒤 없는 믿음과 애정으로 되살아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조조의 인간적인 매력이 다시 한번 찬연하게 빛을 뿜고 있 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