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1화 :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으로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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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1화 :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으로 나네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으로 나네

조조의 용병은 실로 재빨랐다. 장졸을 휘몰아 그날 밤으로 강을 건넌 조조는 유비가 미처 한진에 이르기도 전에 뒤를 따라잡았다. 홀연 등 뒤에서 크게 먼지가 일며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 하자 유비는 조조의 군사가 이른 것을 알았다. 유비는 절로 탄식이 났다.

“앞에는 큰 강물이요, 뒤에는 적의 대군이로구나.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 그는 숱한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남은 영웅다웠다. 아 무래도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지만 앉아서 죽거나 사로잡히느니 보다는 마지막까지 싸우는 쪽을 택했다.

“자룡은 어디 있는가? 어서 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

유비는 그렇게 영을 내려 조운으로 하여금 적의 예봉을 막게 한뒤 남은 사람들을 모아 결사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각오가 엄중하기는 조조도 마찬가지였다. 진격에 앞서 조조는 모 든 장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했다.

“이제 유비는 가마솥에 든 물고기요,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다. 하 지만 만약 이번에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 물고기는 놓여나 큰 바다로 들고 호랑이는 빠져나와 산으로 돌아가는 격이 된다. 여러 장졸들은 모두 힘을 다해 나아가 반드시 유비를 사로잡도록 하라!” 이에 모든 장졸들은 각오를 새로이 하고 유비 쪽을 향해 덮쳐갔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조조의 군 사들이 산굽이 하나를 돌았을 때였다. 산 뒤편에서 홀연 북소리가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조조는 어디를 가는가? 내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앞선 장수가 큰 종이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놀라 그쪽을 보니 그 장수는 다름 아닌 관우였다. 청룡도를 끼고 말 위에 높이 앉은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위맹스러워 보였다. 앞서 강하로 갔던 관우는 무사히 공자 유기로부터 일만의 군마 를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거리가 멀어 당양장판(長)의 싸 움을 대지 못하고 이제야 겨우 그곳에 이른 것이었다.

조조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관운장이 나타나 길을 막자 곧 말을 멈추고 자기편 장수들을 돌아보며 분한 듯 내뱉았다.

“또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들었구나!”

그러고는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영을 내려 대군을 급히 물렸다.

전에 데리고 있을 때는 숨막힐 듯하던 관운장에 대한 애정과 선망이 이제는 그만큼의 두려움으로 그를 무겁게 짓누른 데다 두 번씩이나 자신의 대군을 깨뜨린 공명의 지모가 새로운 두려움으로 조조의 전 의를 앗아간 것이었다.

관운장은 그런 조조의 군사를 십리나 쫓아버린 뒤에 군사를 돌 려 유비에게로 갔다.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사투를 벌이려던 유비의 기쁨이 어떠했을까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리라.

유비가 관운장의 호위를 받으며 한진에 이르니 이미 일행을 태울 배들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관우는 유비에게 청하여 감부인과 아두를 배 안으로 들여 자리 잡게 한 뒤 물었다.

“둘째 형수님께서는 어찌 아니 보이십니까?”

오는 도중에 당양장판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은 소문을 들 어 대강 알고 있었지만 미부인이 죽은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까 닭이었다. 유비가 어두운 얼굴로 당양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 려주었다. 다 듣고 난 관우가 원망 섞어 탄식했다.

“지난날 허전(田)에서 사냥이 있었을 때 내 말대로 조조를 죽여 없앴다면 오늘 이 같은 변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닐세. 그렇지는 않아. 그때 나는 쥐를 잡으려다 독을 깨게 되는 게 싫어서 그랬네. 또 자네가 손을 썼다 해도 반드시 우리 뜻대로 이 루어졌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유비가 변명하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그간 에 서로 궁금했던 일을 말로 주고받을 때였다. 문득 강 남쪽에서 북 소리가 크게 울리며 돛을 활짝 편 배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유비는 깜짝 놀라 다가오는 배들을 살펴보았다. 혹시 조조가 그새

수군을 낸 게 아닐까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유비의 지나친 기우였다. 다가오는 뱃전에서 흰 전포에 은투구를 쓴 장수 하나가 서 있다가 유비를 보고 소리쳤다.

“숙부께서는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못난 조카가 늦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유비가 보니 바로 공자 유기였다. 이어 유비의 배로 옮겨온 유기 는 엎드려 울며 말했다.

“듣자니 숙부께서 조조 때문에 고단하시다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그가 관운장에게 선뜻 군사 일만을 빌려준 것만도 고마운데 몸소 배를 이끌고 그곳까지 마중나오니 유비의 기쁨은 컸다. 곧 두 편 군 사를 합쳐 함께 강을 내려가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서로 얘기했다. 두 사람이 한창 이런저런 얘기로 정을 나누고 있는데 다시 서남쪽에서 한 떼의 싸움배가 갑자기 나타났다. 한 일(一)자로 나란히 벌려선 채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기세가 한눈에도 만만찮아 보였다. 유기가 놀란 목소리로 유비에게 물었다.

“강하에 있는 군사와 배는 제가 모두 이리로 끌고 왔습니다. 그런 데도 이제 또 싸움배들이 길을 막으니 이는 틀림없이 조조의 군사들 이 아니면 강동 손권의 군사들일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에 유비도 놀라 뱃전으로 달려 나갔다. 먼저 조조 쪽인지 손 권 쪽인지부터 알아야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배를 보니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앞선 뱃머리에 윤건 쓰고 도복을 입은 사람이 하나 앉았는데 다름 아닌 제갈공명이 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손건이 단정히 시립해 있었다.

유비는 한편 반가우면서도 한편 궁금해 급히 배를 옮겨간 뒤 공명에게 물었다.

“군사(軍)께서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명이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양은 강하에 이른 뒤 먼저 운장을 한진으로 보내어 뭍에 올라 주 공과 호응케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보니 조조가 주공을 급 하게 쫓으면 주공께서는 반드시 강릉으로 가시지 않고 바로 한진으 로 오실 것 같았습니다. 이에 특히 공자께 청하여 먼저 주공을 맞으 러 가게 하고 나는 다시 하구에 들러 그곳 군사들을 모조리 거두어 온 것입니다.”

공명의 그 같은 말을 듣자 유비의 기쁨은 실로 컸다. 조금 전까지 도 겨우 수백의 군사로 조조에게 쫓기던 그이고 보면 공명까지 온 지금은 다시 천하를 되찾은 기분이라 해도 지나칠 것이 없었다.

공명이 이끌고 온 군사까지 합쳐 기세가 오른 현덕은 곧 여럿을 불 러모아 놓고 조조를 깨뜨릴 의논을 시작했다. 공명이 먼저 말했다. 

“하구는 성이 험하고 곡식과 돈이 넉넉해 지키기에 좋은 땅입니 다. 주공께서는 잠시 하구를 빌려 쓰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리고 공자께서는 강하로 돌아가셔서 싸움배를 손질하고 병기를 가 다듬으신 뒤 주공께서 지키시는 하구와 더불어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조조를 넉넉히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양쪽이 함께 강하로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세력을 외롭게 할 뿐입니다.”

“군사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제 어리석은 소견에는 숙부께서 잠시 강하로 드시어 군마를 정돈한 뒤에 하구로 가셔도 늦 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명의 말을 받아 유기가 그렇게 제안하자 유비가 선뜻 따랐다. 

“조카의 말도 역시 옳다. 그렇게 하자.”

공명도 그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리하여 관우만 군사 오천을 거 느리고 하구를 지키게 한 뒤 유비와 공명은 유기와 더불어 강하로 내려갔다.

한편 조조는 관우가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자 복병이 두려워 감 히 뒤쫓지는 못했으나 다 잡은 유비를 놓쳐버린 일이 여간 분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또 하나 걱정은 물길로 내려간 유비가 먼저 강릉 을 빼앗아 새로운 근거로 삼는 일이었다. 형주의 곡식과 돈 태반이 강릉에 있어 만약 유비가 그곳에 자리 잡기만 하면 그를 잡기가 몇 배나 더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조는 밤길을 마다 않고 군사를 몰아 강릉으로 갔다. 이때 강릉을 지키고 있던 이는 형주의 치중 등의(鄧義)와 별가 유선(劉先) 이었다. 둘 다 양양성에서 일어났던 일은 이미 들은지라 조조에게 맞 서 싸울 수 없다고 여겨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해버렸다. 성안으로 들어간 조조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루 어준 뒤, 지난날 기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형주에서도 숨은 인재를 찾는 일에 들어갔다. 스스로 백성을 이끌고 항복해 온 형주의 이름난 선비 등의를 무겁게 씀은 물론 죄를 쓰고 갇혀 있던 한(韓) 같은 선비도 대홍로 벼슬을 주어 제 사람으로 삼은 일 같은 게 바로 그랬다. 그리고 그밖에도 형주에서 벼슬살이하던 높고 낮은 관원들 도 특별한 허물이 없는 한 각기 알맞은 벼슬과 상을 내려 주인이 바 뀌는 데 따른 동요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덕분에 강릉성을 비롯해 조조가 새로 손에 넣은 형주의 땅들은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자 조조는 다시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불 러놓고 의논을 꺼냈다.

“지금 유비는 이미 강하로 몸을 의지해 갔소. 그러나 정말로 두려 운 것은 유비가 강하의 유기뿐만 아니라 동오의 손권과 힘을 합쳐 내게 맞서오는 일이오. 이는 풀을 베되 뿌리를 뽑지 않아 다시 무성 하게 만드는 격이니 마땅히 서둘러 손을 써야 하오. 어떻게 하면 그 전에 유비를 깨뜨려 사로잡을 수 있겠소?”

순유가 얼른 일어나 말했다.

“우리 군사의 위세는 지금 세상을 크게 떨쳐 울리고 있습니다. 사 람을 보내 강동의 손권에게 글로 청해 보도록 하십시오. 사냥을 구 실로 강하에서 만나 함께 유비를 사로잡은 뒤 형주 땅을 나누어 가 짐과 아울러 서로 동맹을 맺어 영구히 화친하자는 내용이면 됩니다. 그 글을 받은 손권은 놀랍고 두려워 반드시 승상께 달려와 항복할 것입니다. 구태여 거친 말로 손권을 격동시키지 않고도 우리 일을 풀어갈 수 있으니 좋은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조조는 그 같은 순유의 계책을 옳게 여겼다. 그날로 사람을 뽑아 격문을 주어 동오로 보내는 한편 마군, 보군, 수군 팔십삼만을 일으켜 백만 대군이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동오로 향하게 했다.

조조군의 진병은 실로 볼만한 것이었다. 강을 따라 물과 뭍으로 함께 나아가는데 배와 말이 나란히 줄을 잇고 있었다. 행군의 폭은 서로 형), 섬() 두 곳에 미치고 동으로는 기蘄), 황(黃) 두 땅에 접했으며, 진채와 목책만도 삼백 리나 이어질 만큼 대단한 규모였다. 하기야 정사의 안목에서 보면 그 같은 조조군의 규모는 매우 과 장된 것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가(史家)들이 추정하는 조조군의 실제 세력은 이십오만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십만 가량은 유종이 항복한 뒤 급히 긁어모은 형주 군사들이라 팔십만 또는 백만이란 숫 자는 최소한 대여섯 배 이상 과장된 셈이다.

하지만 이십오만 또는 십오만이라 하더라도 계속된 전란으로 인 구가 격감된 삼세기 초 중국의 상황으로 보면 놀라운 대군임에는 분 명하다.

한편 동오의 움직임도 만만치는 않았다. 시상군까지 올라와 둔치 고 있던 손권은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양양으로 내려와 유종이 이미 항복했으며, 또 조조는 밤길을 달려 강릉까지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 었다.

북방의 세력과 동오 사이에 바람막이처럼 남아 있던 형주가 조조 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동오가 바로 조조의 칼끝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뜻임을 아는 손권은 곧 모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조조를 막을 의논을 했다.

먼저 노숙이 일어나 말했다.

“형주는 우리와 이웃해 있는 땅으로, 강과 산은 지키기 좋게 험하면서도 백성들은 모두 살이가 넉넉한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근거지 로 삼을 수만 있다면 제왕의 길에 이르는 밑천으로도 삼을 만한 땅 이지요. 그런데 지금 그 땅의 주인이던 유표가 죽고 그를 돕던 유비 는 조조에게 져서 쫓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이숙)을 강하로 보 내 유표를 조상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유비를 달래고 유표의 옛 장수들을 어루어 우리와 함께 조조를 치도록 만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유비가 기꺼이 우리 말을 따라만 준다면 조조를 막는 일은 그 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이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이에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그날로 노숙을 강하로 보냈다. 겉으로는 예를 갖추어 유표의 죽음을 조상하 는 동오의 사신으로서였다.

이때 유비는 유비대로 공명, 유기와 함께 조조에게 맞설 계책을 짜내고 있는 중이었다. 공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조의 세력이 너무 커서 급하게 맞서 싸우기 어렵습니다. 차라 리 동오로 의지해 가서 손권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겠습니다. 남과 북의 두 세력이 서로 맞서게 해놓고 우리는 그 가운데서 이득을 얻 는다면 안 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강동에는 인물이 매우 많아 반드시 멀리 내다볼 줄 알 것인데 어 찌그 같은 일을 용납하겠습니까?”

유비가 걱정스러운 듯 반문했다. 공명은 그런 유비를 안심시키듯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범처럼 강한에 웅크리 고 있습니다. 강동인들 어찌 가만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반드시 사람을 이리로 보내 조조의 허실을 탐지하려 할 것인즉, 그 사람이 오면 제가 한번 나서보겠습니다. 한 조각 돛배를 빌려 동오로 가서 세치 썩지 않은 혓바닥으로 남과 북의 두 군사가 서로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남쪽이 이기면 함께 조조를 없애고 형주 의 땅을 차지할 것이요, 북쪽이 이길 때는 그 승리를 틈타 강동을 차 지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유비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말씀이 매우 높은 식견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알겠습니다만, 강동 사람이 정말로 오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먼저 찾아 가면 저쪽에서 선뜻 믿으려들지 않을 테고……”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유비 를 공명이 다시 좋은 말로 안심시키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강동의 손권이 노숙을 시켜 조상을 보냈습니다. 그 배가 이미 나 루에 닿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큰일은 다 풀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반가운 듯 공명이 빙긋 웃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그러 나 유비는 노숙이 조상을 내세우는 바람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 다. 공명은 다시 자신의 헤아림이 맞아떨어진 것을 유비에게 확인해 주려는 듯이 유기에게 물었다.

“지난날 손책이 죽었을 때 형주에서도 사람을 보내 조상하였던가요?”

“아닙니다. 강동은 우리 형주를 아비 죽인 원수로 대했는데 어찌 경조사에 서로 예를 표할 리 있겠습니까?”

유기가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은 한층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노숙은 조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틀림없이 조조와 우리들의 허실을 살피러 온 것입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공명의 헤아림이 그대로 맞아떨어졌음을 알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명이 그런 유비에게 가만히 일러주었다.

“노숙이 와서 조조의 움직임에 대해 묻거든 주공께서는 다만 모 른다고만 하십시오. 그래도 두 번 세 번 물을 때는 이 제갈량에게 물 으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노숙을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노숙은 먼저 유기를 찾아보고 유표의 죽음을 조상한 뒤 손권이 보낸 예물을 전했 다. 유기는 그 자리에 유비를 불러들여 노숙과 서로 만나보게 했다. 예를 다한 뒤 후당으로 옮겨 술자리에 앉게 되자마자 노숙이 유 비에게 말했다.

“황숙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랩니다만 인연이 없어 만나뵙지 를 못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이렇듯 뵙게 되니 실로 기쁘기 짝이 없 습니다. 요사이 듣자니 황숙께서는 조조와 여러 번 싸우셨다는데 어 땠습니까? 반드시 적의 허실을 잘 아시리라 믿어 감히 묻습니다. 도 대체 조조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유비는 미리 제갈량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바로 말해주지 않았다.

“저는 군사가 적고 장수가 모자라 조조가 온다는 말만 들으면 바로 달아났기 때문에 그 허실을 알지 못합니다.”

“듣기에 황숙께서는 제갈량의 꾀를 빌려 두 번이나 조조의 군사를 불태움으로써 조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데 어찌 모른다고 말하십니까?”

노숙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유비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대답을 슬쩍 공명에게 넘겨버렸다.

“공명에게 물으면 자세한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은 어디 계십니까? 바라건대 한번 만나보게 해주십시오.” 

궁금한 것부터 알아낼 욕심으로 노숙이 그렇게 청했다. 유비는 못 이긴 체 공명을 불러들이게 하여 노숙과 만나도록 해주었다. 노숙은 공명과 처음 보는 예를 끝내기 무섭게 물었다.

“선생의 재주와 덕망을 오래 사모해왔으나 여지껏 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이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천하의 큰일에 관해 선생의 말씀을 좀 듣고자 합니다. 그 위태 로움과 평안함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조조의 간사한 꾀는 이 양이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스 러운 일은 우리 힘이 그에게 미치지 못해 그때그때 피하기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탄식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노숙이 무얼 생각했는지 문득 물음을 바꾸었다.

“황숙께서는 앞으로도 이곳에 머물러 계실 작정이십니까?”

“우리 주공과 창오 태수 오신(吳臣)은 전부터 아는 사이라 하니 다음에는 그리로 의지해 가볼까 합니다.”

공명은 유비도 처음 듣는 소리를 해댔다. 노숙이 속을 드러내게 만들려고 짐짓 둘러댄 말이었다. 그러나 노숙도 얼른 속을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물어올 뿐이었다.

“오신은 양식도 넉넉하지 못하고 군사도 적어 스스로를 지켜가기도 힘드는데 어찌 다른 사람까지 받아들이겠습니까?”

“오신의 땅이 비록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나 이제 잠시 기댈 만은 하겠지요. 뒷일은 따로이 좋은 길이 날 것입니다.”

제갈량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마치 유비가 오래전부터 창오로 갈 뜻을 정해놓은 듯 말했다. 그러자 마침내 노숙이 먼저 제 속을 드 러냈다.

“우리 손장군께서는 강동 여섯 군을 범처럼 걸터 타고 계시는데,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또 우리 손장군께서는 어진 이를 우러르고 선비를 예로 맞으시니, 강동의 영웅들이 모두 그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께서 주군을 위해 베풀 수 있 는 계책으로는 믿을 만한 이를 보내 동오와 약조를 맺고 함께 큰일 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바로 공명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공명은 속으로는 기쁨을 감 추지 못하면서도 한 번 더 뜸을 들였다.

“우리 주공과 손장군은 예부터 서로 가까이 지낸 바가 없으니 가 봤자 공연히 언설(言說)만 허비하게 되지 않을는지요? 거기다가 동 오로 보낼 만큼 믿을 만한 이도 따로 없으니 걱정입니다.”

“선생의 친형님께서 지금 강동의 모사로 계시지 않습니까? 모르 긴 해도 틀림없이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따로이 믿을만한 이가 없다면 선생께서 몸소 가보도록 하시지요.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선생을 모시고 동오로 가서 손장군과 함께 큰일을 의논할 수 있도록 주선해보겠습니다.”

공명쪽에서 빌붙어야 할 일을 오히려 노숙 쪽에서 열을 올려 권 한 셈이었다. 공명은 어지간히 됐다 싶었으나 이번에는 유비가 또 능청을 부렸다.

“공명은 내게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니 잠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 먼 곳까지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노숙이 두 번 세 번 권해도 공명이 동오로 가는 걸 허락 하지 않았다. 실로 공명과 손발이 잘 맞는 능청떨기였다.

“일이 급합니다. 바라건대 명을 받들어 강동에 한번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이윽고 공명이 스스로 나서 유비에게 청했다. 그제서야 유비도 못 이긴 체 공명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노숙은 곧 유비와 유기를 작별하고 공명과 더불어 동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육십 년 가까운 세월을 반복, 무상하게 이어 갈 유씨와 손가의 동맹이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뒷날 조조는 「단가행(短歌行)」 또는 「횡삭부시(橫渠賦詩)」라고 불리는 노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달은 밝고 별 드문데 月明星稀

까막까치는 남으로 나네 烏鵲南飛

어떤 사람은 그 구절을 단순히 조조가 그 노래를 짓던 밤의 우연 한 풍경 하나를 읊은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달리 풀이한 다. 곧 달은 조조 자신이요, 달빛에 가리워 드물어 희미해진 별은 점 차 사라져가는 군웅들이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까마귀와 까치는 유 비와 손권을 가리키는 것이란 풀이이다.

이제 와서 조조의 원래 뜻을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적어도 당시 의 형세로 보면 조조의 엄청난 군세에 놀라 유비에게 다급하게 사람 을 보낸 손권이나 그런 손권에게 황망하게 달려간 유비는 달빛에 깨 어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나 까치에 견주어질 법도 하다.

시상으로 가는 배 위에서 공명과 노숙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먼 저 두 사람의 의논부터 맞추었다.

“선생께서는 우리 손장군을 뵙더라도 결코 조조의 군사가 많고 장수가 흔한 걸 바로 말씀하셔서는 아니됩니다.”

혹시라도 조조의 군세에 놀라 손권이 항복하려 들까 봐 두려운 노숙이 공명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아도 속 으로는 일이 그렇게 되는 게 노숙보다 열배 백배나 더 두려운 공명 이 빙긋 웃으며 노숙을 안심시켰다.

“자경의 당부가 아니라도 이 양에게는 미리 생각해둔 말이 있습 니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노숙도 마음이 놓이는 듯 그 일로 더 당부를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배가 시상에 이르자 노숙은 공명을 역관에서 잠시 쉬게 하고 혼자서만 먼저 손권을 보러 갔다. 그때 손권은 문무의 여러 관 원들을 모아놓고 당상에서 의논 중이었다. 노숙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급히 불러들여 물었다.

“그래, 자경께서 강하로 가서 허실을 알아보니 어땠소?”

“대략은 알아봤습니다만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숙이 그렇게 대답하자 손권은 조조에게서 온 글 한 통을 가져 오게 하여 노숙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제 조조가 사신을 통해 이 격문을 보내왔소. 나는 먼저 그 사 신을 돌려보내 놓고 앞일을 의논 중인데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 하지 못했소이다. 자경께서도 한번 읽어보시오.”

노숙은 손권이 내미는 격문을 받아 읽어보았다. 거기 담긴 뜻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조칙을 앞세우고 죄 있는 자를 치러 왔 소. 우리 군사의 깃발이 한번 남쪽에 나부끼니 유종은 스스로 두 손 을 묶어 항복했고, 형주, 양주의 백성들도 바람에 쓸리듯 모두 귀순 하였소. 이제 내게는 사나운 군사가 백만에 뛰어난 장수만도 천(千) 이나 있소이다. 장군께 바라는 바는 강하(江夏)에서 나와 만나 사냥 을 하면서 함께 유비를 치자는 것이오. 그런 연후 그 땅을 나누고 길 이 화친을 맺는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이 있겠소이까? 부디 멀찍이서 보고만 계시지 말고 속히 좋은 회답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한편으로는 겁을 주고 한편으로는 달래는 글이었다. 읽기를 마친 노숙이 손권에게 물었다.

“주공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여럿과 의논해보았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소.”

손권이 무거운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적잖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기색이었다. 허울좋은 말뿐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욕스런 항 복이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싸움이 아닌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게 그 까닭인 듯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뭇사람들 속에서 문득 장소(張昭)가 일어나말했다.

“조조는 백만의 무리를 거느린 데다 천자의 이름까지 빌려 사방 을 평정해 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는 것은 천명과 이치에 따르 는 일이 못됩니다. 거기다가 주공께서 큰 세력으로 조조에게 맞설 수 있게 해준 것은 장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조가 이미 형주 를 얻었으니, 장강의 험난함은 그와 우리가 함께 하게 되어 맞싸우 기 어렵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어리석은 계책일지 모르나 지금 으로서는 항복하는 게 가장 나을 듯합니다.”

동오의 원로로서 손책의 고명)까지 받은 장소가 그렇게 말하 자 그때껏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모사들도 속을 드러냈다.

“자포)의 말씀이 바로 하늘의 뜻에 맞습니다. 그대로 따르십 시오.”

그러나 손권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부형 삼대에 걸친 창업의 어려움이 말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짓누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장소가 그런 손권에게 다시 말했다.

“주공께서는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조조에게 항복 하는 것이 곧 동오의 백성을 평안케 하고 강남의 여섯군을 보전하는 길입니다.”

그래도 손권은 깊게 머리를 수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로는 드문 침착함과 아울러 만만찮은 수성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말없이 일어난 손권은 갑자기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을 나 갔다. 노숙이 얼른 그런 손권을 뒤따랐다. 아무도 없는 외딴 방에 둘 만 있게 되자 손권이 문득 노숙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경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어느 정도 노숙의 뜻을 짐작하고 있는지 손권은 무언가 다른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노숙이 결기 어린 목소리로 물음에 대답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주공을 그르쳐도 크게 그르 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할 수 있어도 주공 께서는 결코 항복하실 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반가운 중에도 영문 모를 소리라는 듯 손권이 다시 물었다. 노숙 이 열 올려 까닭을 설명했다.

“이 노숙 같은 무리가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조조는 저의 벼슬을 올려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곧 주도 군도 잃지 않게 되는 셈 이지요. 그러나 주공께서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다릅니다. 어찌 주공 께서도 돌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작위자 겨우 후侯)에나 봉해질 것이고, 수레 한 대에 말 한 필, 시중들며 따르는 자랬자 서 넛일 것입니다. 남면(面)하고 앉아 스스로를 고(孤, 왕이 자기를 가리 켜 하는 말)라 부르기는 영영 틀린 일입니다. 저 사람들의 말은 모두 자기만을 위한 것이니 결코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공께서는 어서 대계를 정해 저들이 딴소리를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손권이 탄식하듯 말했다.

“저들의 말이 내 바람에 크게 어긋나는 것도 사실이오. 자경께 서 말씀하신 대계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소. 아마도 하늘이 내게 자경을 내려주신 것 같소………. 그러나 조조는 얼마 전에 원소 가 이끌던 무리를 모두 얻은 데다 이번에는 또 형주의 군사들까지 아울렀소. 그 세력이 너무 커서 맞싸워도 당해내지 못할까 실로 두 렵소.”

노숙이 그런 손권을 격려하듯 그때껏 미뤘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그 일은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번에 강하에 갔다 가 제갈근의 아우인 제갈량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에게 물 으시면 조조군의 허실을 쉽게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와룡선생이라 불리는 그 제갈량이 여기 와 있단 말이오?” 

손권도 제갈량의 소문을 이미 들었는지 반갑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역관에서 쉬고 있습니다.”

노숙이 그렇게 대답하자 손권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갈량을 보는 일만은 그리 서둘지 않았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어가니 불러볼 수가 없겠소. 내일 문무의 관원들을 모두 모아 장하에서 먼저 우리 강남의 빼어난 이들을 만나 보게 한 뒤에 그를 당상으로 불러 일을 의논해봐야겠소.” 

어떤 면에서는 나이 든 노숙보다 더 신중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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