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2화 : 오가는 사항계로 전기(戰)는 무르익고
오가는 사항계()로 전기(戰)는 무르익고
주유는 공명을 끌다시피 자기 장막 안으로 맞아들인 뒤 술상을 차려오게 했다. 마주 앉아 함께 마시는 품이 그 어느 때보다 은근했 다. 몇 순배 술이 돈 뒤 주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 주공께서 사람을 보내 빨리 군사를 내라고 재촉하시 었소. 그러나 이유는 아직 좋은 계책을 마련치 못해 걱정이외 다. 바라건대 선생께서 좋은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말은 간절하나 그 뒤에는 무언가를 감춰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른 그것을 짐작한 공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변죽부터 울려보았다.
“양(亮)은 물가의 자갈들만큼이나 흔하고 변변치 못한 재주를 가 졌을 뿐입니다. 제게 무슨 묘계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유도 더는 감추려 들지 않고 털어놓았다.
“내가 어제 조조의 수채를 살펴보았는데, 매우 엄정하면서도 법도 에 맞는 것이라 어지간해서는 쳐부수기 힘들어 보였소. 생각 끝에 겨우 한 가지 계책을 내보기는 했지만 그게 들어맞을지 안 맞을지를 모르겠구려. 선생께서 들어보시고 나를 위해 결단을 내려주신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소이다.”
그때 공명이 문득 손을 저어 주유의 다음 말을 막았다.
“도독께서는 잠시 말씀을 뒤로 미루십시오. 이 양도 한 계책을 생 각해본 게 있으니 각자 자기의 계책을 손바닥 안에 쓴 뒤 한꺼번에 펴보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의 계책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먼저 알아본 뒤 의논을 해나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공명은 이미 주유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짐작했으나 그걸 말해 다시 주유의 시기와 경계를 사게 되는 게 싫어 그렇게 말했다. 공명의 재주에 감복해 도움을 구하고는 있지만 아랫사람처럼 그로 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게 떨떠름하던 주유는 그 말에 기꺼이 따 랐다. 만약 둘의 계책이 같다면 자신도 공명에 못지않은 재주를 가 진 셈이 되고,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때 가서 둘을 견주어보며 보 다 나은 계책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붓과 벼루를 가져오너라.”
주유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붓과 벼루가 오자 자신이 먼저 손바 닥에 무언가를 썼다. 공명도 주유가 밀어준 붓을 들어 자신의 손바 닥 안에 글씨 한 자를 썼다.
“자, 이제는 가까이 오시오. 손바닥에 씌어진 글자를 나와 한번 맞추어봅시다.”
공명이 붓을 놓기가 바쁘게 주유가 공명 앞으로 주먹을 내밀며 재촉했다. 공명도 말없이 주먹을 내밀었다가 주유와 함께 뒤집어 폈다. 서로의 손바닥에 씌어진 글자를 본 공명과 주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유의 손바닥에도 공명의 손바 닥에도 다같이 ‘불[]’이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뜻이 같으니 이제는 더 의심할 게 없어졌 소. 처음에 생각한 대로 계책을 시행하리다. 다만 선생께서는 행여 라도 이 일이 밖에 새어나게 해서는 아니 되오.”
자신의 계책이 공명의 계책에 진배없다는 것에 기운을 얻은 주유 가 문득 공명에게 그렇게 다짐을 두었다. 공명도 선선히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동오와 우리 유황숙 두 집안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제가 어찌 함 부로 밖에다 누설하고 다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조조가 비록 두 번이나 우리 계책에 당하기는 해도 아직 이번 계책까지는 대비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도독께서 힘을 다해 계책을 베푸신다 면 반드시 이기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두 사람의 술자리는 거의 처음으로 가슴속에 따로 감춘 것이 없는 화기애애한 것이 되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각기 처소로 돌아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둘만의 술자리여서 동오의 장수들은 아무도 공 명과 주유가 무슨 의논을 했는지 몰랐다.
이때 조조는 귀한 화살을 십오륙만 개나 하루아침에 어이없이 잃어버려 기분이 울적해 있었다. 수전일수록 화살이 많이 드는데 오히려 자기의 화살을 덜어 적에게 더해준 꼴이 되었으니 그럴 법도 했 다. 순유가 그런 조조를 위로하려는 듯이나 한 계교를 올렸다.
“강동에는 주유와 제갈량 두 사람이 있어 계책을 쓰니 급하게 적 을 깨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뽑아 강동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이 간세가 되어 안에서 호응하며 그쪽 소식을 소상히 알려주면 머지않아 적을 도모할 수 있 는 길이 날 것입니다.”
곧 ‘거짓으로 항복하는 계책[降]’을 쓰자는 것이었다. 조조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이 내 뜻과 같네. 그대 생각에는 우리 편 군중에서 누가 그 계책을 맡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채모는 죽었으나 그와 함께 우리에게 항복해 왔던 채씨 일족들 은 아직도 우리 편 군중에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채모의 가까 운 동생뻘 되는 채중(中)과 채화(蔡和)가 있는데 지금 둘 다 부장 입니다. 승상께서 그들을 불러 은혜로 어루만져주신 뒤에 거짓으로 동오에 항복하도록 해보시지요. 채모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동오에 게도 잘 알려져 있어 그 피붙이들이 몰래 찾아가 항복한다면 그쪽에 서도 거짓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조가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이에 순유의 계교를 따르기로 하고 그날 밤 채중과 채화를 남몰래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너희 두 사람은 군사 몇 명을 데리고 강동으로 가 거짓으로 항복 을 하고 그곳에 특별한 움직임이 있거든 사람을 보내 이쪽에다 알리도록 하라.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날에는 크게 상을 내릴 것이니 두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
조조가 좋은 낯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려온 둘에게 일렀다. 그 러자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의 아내와 자식이 모두 형주에 있는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승상께서는 부디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주유와 제갈량의 목을 베어 승상의 발 아래로 갖다 바치겠습 니다.”
조조보다 한술 더 떠 어림없는 욕심까지 부렸다. 그러나 얼른 보 아서도 두 사람의 태도만은 진정에서 우러난 듯했다. 이에 조조는 몹시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무거운 상을 내리고 동오를 상대로 한 사항계를 맡겼다.
조조로부터 강동에 가서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행동 따위를 자 세히 일러받은 채중과 채화는 다음 날 일찍 조조의 군중을 떠났다. 오백 군사와 몇 척의 배를 이끌고 항복하러 온 것처럼 꾸며 강동으 로 건너가기 위함이었다. 마침 날은 맑고 바람도 알맞아 두 사람이 이끈 배와 군사는 곧 동오군의 진채가 있는 강의 남쪽 언덕에 이르 렀다.
이때 주유는 아직도 자신의 속마음은 접어둔 채 여럿을 불러놓고 군사를 내어 조조와 싸울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달리 좋은 계책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기보다는 은밀하게 자신의 계책을 진행시키기 위 해 건성으로 해보는 의논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나름대로 의견을 내 놓고 있는데 홀연 강 언덕을 지키던 군사들이 와서 알렸다.
“강북에서 군사를 태운 배 몇 척이 이르러 도독을 뵙자고 합니다.”
“누가 이끌고 온 군사와 배라더냐?”
무슨 일인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아 주유가 그 군사에게 물었다. “조조 아래서 부장 노릇을 하던 채중과 채화라 했습니다.”
“들게 하라.”
조조군에서 왔다는 말에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주유가 일렀다. 오 래잖아 두 사람의 장수가 들어오더니 주유 앞에 엎드리며 구슬픈 울 음부터 쏟아놓았다. 주유가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희들은 조조군의 수군 도독을 지내다 죽은 채모의 아우들입니 다.”
“여기는 어떻게 왔느냐?”
채모의 아우들이란 말만으로도 그들의 온 뜻이 대강 짐작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주유가 짐짓 그렇게 물었다. 두 사람이 더욱 슬피 울며 대답했다.
“저희들의 형 채모는 아무 죄 없이 조조 그 역적 놈에게 죽었습니 다. 우리 두 사람은 그런 형의 원수를 갚고자 특히 이렇게 찾아와 항 복을 드립니다. 거두어만 주신다면 선봉이 되어 목숨 걸고 싸우겠습 니다.”
겉만 보면 투항해 온 까닭도 그럴듯했고, 말투와 표정도 진정이 담긴 것 같았다.
채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은 오히려 주유가 더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울음도 아우 된 처지에서는 당연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과장되고 서두르는 듯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유는 전혀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크게 기 뻐하며 채중과 채화를 받아들이고 무거운 상을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감녕과 더불어 동오의 선봉을 맡게 했다.
채중과 채화는 주유가 자기들의 거짓 항복에 속은 것이라 생각했 다. 계책이 들어맞은 것을 기뻐하며 주유에게 절하여 고마움을 나타 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주유는 두 사람과 함께 있게 된 감녕을 가만히 불러 말했다.
“채중과 채화는 가솔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말로 항 복해 온 것이 아니다. 아마도 조조가 시켜 거짓으로 항복하고 간세 가 되어 우리의 허실을 저쪽에 알려주려고 왔을 것이다. 나는 오히 려 조조의 그 같은 계책을 거꾸로 이용하는 계책을 쓰겠다. 그 두 사 람을 통해 조조가 우리 편의 소식을 듣게 해두면 필요한 때는 그릇 된 소식을 흘려 조조를 크게 낭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는 겉 으로는 저들을 은근하게 대하되 속으로는 언제나 방비를 게을리 하 지 말라. 때가 와서 조조를 치러 가는 날은 먼저 저들을 죽여 그 목 으로 군기 앞에 제사 지낼 것이니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아 니 된다.”
조조가 채중과 채화를 앞세워 쓰려는 사항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보고 하는 말이었다.
감녕이 명을 받고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노숙이 주유를 보러 왔다. 그도 채중과 채화에게서 미심쩍은 점을 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채중과 채화의 항복에는 거짓인 듯한 데가 많습니다.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노숙이 그렇게 걱정하자 주유가 꾸짖듯 노숙을 몰아세웠다.
“조조가 그 형을 죄 없이 죽인 까닭에 그 원수를 갚으려고 우리에 게 항복해 온 사람들인데 거짓은 무슨 거짓이란 말이오? 공은 그렇 게 의심이 많아서야 어떻게 천하의 의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이까?”
조금 전 감녕에게 영을 내릴 때와는 생판 딴소리였다. 그만큼 주 유는 자신의 계책을 은밀히 하는 데 철저하였다. 노숙은 더 할 말이 없는 게 아니었으나 주유가 워낙 성까지 내며 몰아세우니 더 입을 열지 못하고 주유 앞을 물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해 지지 않아 공명을 찾아보고 그 일을 말했다. 노숙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공명은 다만 빙긋이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공명은 어째서 웃으시오?”
노숙이 못마땅한 듯 공명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공명이 까닭을 일 러주었다.
“나는 자경이 공근의 계교 쓰는 법을 너무 몰라주는 게 우스웠을 뿐이오. 대강이 넓고 멀어 세작이 오가기 너무 어려우니 조조가 채중 과 채화를 거짓으로 항복시켜 우리 군중의 일을 엿들으려 한 게 아 니겠소? 그런데 지금 공근은 그 같은 조조의 계책을 이용하려 하고 있소. 이곳의 소식을 꼭 조조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을 때를 위해 길을 열어두려고 채중과 채화에게 속은 체하고 있는 것이오. 싸움하 는 마당에서는 속임수도 꺼리지 않는다[兵不厭詐]란 말이 있지 않소 이까? 공근의 꾀가 옳소.”
그 말을 들으니 노숙도 비로소 느껴지는 게 있었다. 자기에게까지 주유가 숨기는 게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하지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공명과 노숙이 주유의 일로 얘기를 주고받은 그 시간, 주유는 채 중과 채화의 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은 그다 지 쓸모 있어 뵈지도 않은 그들 둘이었지만, 주유는 그 뒤에서 조조 란 거인의 움직임을 느꼈다. 한동안 앉아 지키기만 하던 조조가 스 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동오와 주유 자신의 운명을 판가름 낼 결전의 날이 조금씩 가까워오고 있다는 조짐으로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주유 쪽에서도 대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수들의 결의와 믿음은 굳고 군사들의 사기도 그 어느 때보다 드높 았다. 결전에 대비한 전략도 대강은 미리 머릿속에 구성되어 있었 다. 하지만 아직 막연한 것은 그 전략을 실제적인 승리로 바꿀 수 있 는 구체적인 상황의 전개였다.
아무리 훌륭한 전략이라도 그때그때 살아 움직이는 상황과 정확 하고도 적절하게 부합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승리를 확보 하기 위해서는 그때그때의 상황을 주도하여 전략이 그 최대의 효능 을 드러내도록 이끌어가야 한다. 그런데 주유에게는 아직 그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채중과 채화의 거짓 항복이 오히려 한 계기 를 가져다준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서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해진 방책이 없었다.
황개가 불쑥 주유의 장막으로 찾아든 것은 주유가 거기에 대한 생각으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앉아 있을 때였다. 아무도 딸리지 않고, 그것도 밤이 깊기를 기다려 찾아온 것으로 보아 무슨 은밀한 의논거리가 있는 듯했다.
주유는 그런 황개가 까닭 없이 반가워 자리를 권하고 말했다.
“공복(公覆께서 밤늦게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틀림없이 조조를 깨칠 좋은 계책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런 게 있으면 부디 내게도 좀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황개는 무장답게 말을 쓸데없이 늘이지 않고 바로 털어놓았다.
“적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서로 오래 대치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오. 어째서 불을 써서 한번 공격해보지 않으시오?”
“불을 쓰자고요? 누가 그런 계책을 공께 일러줍니까?”
화공법을 쓰자는 말에 주유가 깜짝 놀라 물었다. 황개가 실쭉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지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게 아니외다.”
혹시 말이 새어나가 황개까지 자기의 중심되는 계책을 주워듣게 된게 아닌가 걱정했던 주유는 그 같은 황개의 대답에 비로소 마음 을 놓았다. 그 대신 황개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게 새삼 놀라 워 그의 늙어가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견 때부터 손씨를 섬겨온 노장, 어렸을 적 주유는 손책과 더불 어 그에게서 칼 쓰기를 배운 적도 있었다. 손견을 위해 목숨을 돌보 지 않고 싸움터를 누볐고, 손견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손책을 도와 강동에 터를 잡게 했으며, 다시 손책이 죽자 이번에는 그 아우 손권을 위해 일해왔다. 주유는 그런 황개의 충성을 높이 치기는 해도, 그무렵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은 늙고 머리는 굳어가는 장수로 보고 있었다.
그저 공 있는 원로로서 공경하며 대할 뿐, 장수로서는 이미 한창 때를 넘긴 이로만 여겼는데 그 밤에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눈빛 은 무언가 알지 못할 결의로 번뜩였으며 시들어가는 줄만 알았던 근 육도 어떤 투지 같은 것으로 팽팽하여 부풀어 있었다.
그 같은 황개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자 문득 주유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래전부터 머 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막연한 구상과 더불어 처음과 끝이 가지런한 한 계책으로 어우러졌다.
거기서 주유는 이상한 열기로 목소리까지 떨며 황개에게로 다가 앉았다.
“화공법은 바로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입니다. 그 때문에 채중과 채화가 거짓으로 항복해 온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 우리 편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해두었습니다. 화공법을 쓰려면 우리 중에 누군가가 방해받음 없이 조조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도 거짓으로 항복해야 하는데, 그때 조조를 믿게 하는 길은 채중과 채화를 통하는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 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아직도 거짓으로 항복하는 계책을 쓸 마땅 한 사람을 찾지 못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한번 그 계책(사항계)을 맡아보겠소.”
주유가 은근히 기다린 대로 황개는 미처 주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며 나섰다. 그러나 주유는 짐짓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 됩니다. 저쪽이 항복을 믿게 하려면 먼저 이쪽에서 그 만한 고초를 겪은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나라의 어 른 되시는 분으로서 몸도 젊은이들 같지 않으신 터에 어찌 그 같은 고초를 겪어내시겠습니까?”
거짓 항복을 상대편에 믿게 하기 위해 먼저 제 살을 괴롭히는 계 책[苦肉]을 쓸 작정으로 있는 주유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이기 도 했다.
황개는 주유의 말을 듣고도 뜻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 서보다 한층 격앙되어 자기를 보내줄 것을 고집했다.
“나는 삼대에 걸쳐 손씨네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사람이외다. 설 령 간과 뇌를 땅에 쏟고 죽게 된다 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하 는 일은 없을 것이오.”
처음에는 자기가 도맡아 치러야 할 싸움과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계책에만 마음이 쏠려 있던 주유였으나 황개가 그렇게 나오니 절로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황개에게 절하며 거짓 없는 마음으로 감사를 올렸다.
“장군께서 이 고육계를 맡아주신다면 실로 강동 백성들에게 그보 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나 또한 죽어도 아무런 원망이 없을 것이외다.”
황개도 마주 절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주유의 장막을 물러났다.
그 다음 날이었다. 주유는 북을 울려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동오의 장수는 아니지만 공명도 불려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유가 여럿 앞에 나서더니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조조는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와 삼백 리에 이르는 진채 를 벌이고 있다. 하루 싸움으로 깨뜨려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 제 도독으로서 군령을 내리는 바, 모든 장수들은 각기 이끄는 부대 의 석 달치 말먹이 풀과 군량을 마련하고 적과 맞서도록 하라!”
전날 마침 진병을 재촉하는 손권의 전갈이 주유에게 이른 터였다. 그걸 알고 있는 장수들에게는 주유의 그 같은 군령이 좀 엉뚱하게 들렸다. 아니나다를까, 미처 주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장수가 일어나 볼멘소리를 했다.
“석 달치 아니라 서른 달치 말먹이 풀과 군량을 마련한다 해도 일 이 제대로 될 것 같지는 않소. 만일 이달 안으로 조조군을 깨뜨려낼 수 있을 것 같으면 빨리 싸워 깨뜨려버리는 게 나을 것이오. 그러나 이달 안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그것은 영영 조조를 깨뜨 릴 수 없다는 뜻과 같으니, 차라리 장자(張布)의 말대로 갑옷을 벗은 뒤 창을 거꾸로 잡고 북쪽을 향해 엎드려 항복하는 길밖에 없 소이다.”
주유의 영이 못마땅한 장수들에게도 지나치다 싶게 맞받은 것은 다름 아닌 황개였다. 모두 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는데, 얼굴 이 시뻘게진 주유가 성을 이기지 못해 소리소리 지르며 황개를 꾸짖 었다.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쳐부수러 왔거 늘 어찌 감히 항복을 다시 말하느냐?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맞서고 있는 이 마당에 너는 그 같은 소리로 우리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 지게 하였으니 너 같은 자를 목 베지 않고서 어찌 무리를 명에 따르 게 할 수 있으랴!”
그러고는 좌우에 있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호령했다.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 내게 가져다 보이도록 하라!”
황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성난 목소리로 주유를 마구 꾸 짖었다.
“나는 돌아가신 파로장군(破虜將軍, 손견)을 따라 동남을 휩쓸고 다니던 때부터 이제까지 삼대에 걸쳐 이 나라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 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온 놈이기에 주둥이 에 노란 털도 벗지 못한 것이 나를 이리 작게 보느냐?”
그 말에 주유는 더욱 펄펄 뛰었다. 한편으로는 황개를 꾸짖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사들을 재촉해 황개를 목 베려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장수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황개가 아무리 여러 대를 섬긴 노장(老將)이요, 공신이라 하나 상대는 이제 동오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도독 주유가 아닌가.
보다 못한 감녕이 나서서 황개를 위해 주유에게 빌었다.
“공복은 우리 동오의 오래된 신하입니다. 도독께서는 그 점을 보 아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주유와 황개가 짜고 벌이는 소동이란 걸 모르고 끼어들었으니 그 말이 간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유는 그런 감녕마저 내막도 모르는 연극에 끌어넣었다.
“너는 또 어찌하여 여러 말로 내 법도를 어지럽히려 드느냐?”
그렇게 감녕을 꾸짖은 뒤 좌우를 향해 매섭게 영을 내렸다.
“여봐라, 먼저 이놈부터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내쫓아라!”
감녕이 동오에서 그리 낮은 장수가 아니었으나 주유가 워낙 불같 이 설쳐대니 무사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황개는 제쳐놓고 감녕부터 몽둥이질을 해 내쫓았다. 주유로서는 감녕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개에게 떨어진 불이 감녕에 게 옮아붙은 것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쨌든 황개가 그만한 잘못으로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감녕이 몽둥이질을 당하고 쫓겨난 걸 보았으면서도 장수들이 모두 주유 앞에 나가 무릎 꿇고 빌었다.
“황개의 죄는 비록 죽어 마땅하나, 다만 그를 죽이는 것이 싸움에 이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도독께서는 너그러이 살피시 어 잠시 그의 죄를 기록만 해두고 목 베는 일은 뒤로 미루어주십시 오. 황개의 목은 조조를 깨뜨린 뒤에 베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를 받지는 못해도 우선 시간이나 벌어놓고 보자는 생각들이 었다. 그렇게만 되어도 손권에게 알리거나 주유 스스로 화가 풀어져 황개가 살 길이 생겨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주유는 성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모든 관원들이 한결같이 나서서 애걸하니 할 수 없이 져주는 척했다. 마음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나마 황개의 목숨만은 붙여주었다.
“모든 관원들의 낯을 보아 네 목을 베지는 않으리라. 네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오직 그 덕분인 줄 알아라.”
매섭게 황개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무사들에게 이미 내렸던 명을 고쳤다.
“목을 베는 대신 척장) 일백 대를 때려 황개의 죄를 밝히도록 하라!”
하지만 척장 일백도 가벼운 형이 아니었다. 늙은 황개가 죽지 않 고 받아넘길지가 걱정이었다. 이에 여러 관원들이 다시 주유에게 몰 려가 빌었다.
“척장 일백은 너무 과합니다. 황개의 나이를 헤아려주십시오.”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주유는 제 성을 이기지 못해 앞
에 놓인 탁자를 밀쳐 뒤집으며 몰려든 사람을 꾸짖어 물리쳤다.
사람들이 움찔해 물러나자 주유는 날선 목소리로 눈치만 보고 있는 무사들을 재촉했다.
“군령을 어기면 어찌되는 줄 모르느냐? 어서 형을 시행하라!”
그렇게 되니 무사들도 하는 수가 없었다. 황개의 옷을 벗긴 뒤 땅 바닥에 엎어놓고 매질을 시작했다.
주유가 내려다보며 다잡는 매질이라 단 한 대도 헛매가 없이 쉰 대를 채웠을 때였다. 보다 못한 장수들이 또 주유 앞에 엎드려 애걸 했다. 주유도 막상 황개의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걸 보자 어느 정 도는 속이 풀린 듯했다. 매질은 그치게 하였으나 그래도 분을 완전 히 삭이지는 못한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황개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네가 감히 나를 하찮게 보다니! 이제 여럿의 낯을 보아 몽둥이질을 그만두게는 한다마는 남은 쉰 대를 두었다가 뒷날 다시 태만하는 일이 있으면 그 두 배로 베풀리라!”
그러고는 자기 장막으로 들어가는데 그때까지도 분을 삭이지 못 한 꾸짖음이 끊이지 아니했다.
주유가 돌아가자 남은 장수들이 우르르 달려가 황개를 부축해 일 으켰다. 황개의 모습은 실로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모 진 매로 살껍질은 찢어지고 드러난 속살에서는 붉은 피가 샘솟듯 했다. 떠메고 황개의 진채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늘어지니 곁에서 본 사람들은 물론 그 일을 전해 들은 사람들 조차도 눈물을 금치 못했다.
여럿과 함께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노숙은 속이 답답 했다. 주유의 재주를 믿고 있기는 하였으나 삼대에 걸친 황개의 공 또한 적은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미 늙어가는 원로 장수를 대 단찮은 죄로 초죽음을 시켜놓았으니 앞일이 어찌 될까 걱정이었다. 정보를 비롯한 황개 또래의 오래된 장수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으려니와 그 같은 장수들의 다툼이 군사들의 사기에도 적잖이 영 향을 미칠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머지 공명을 찾아보고 푸념했다.
“오늘 공근이 성나 황개를 꾸짖을 때 우리는 모두가 그의 아랫사 람 된 처지라 감히 맞대놓고 다그쳐 말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 생은 손님된 처지로서 어찌 소매에 두 손을 찌르신 채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선생께서 한마디만 해주셨어도 황개가 그 지경에 이르 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경께서는 나를 속이려 하시오?”
“이 숙과 선생은 함께 강을 건너온 이래 한번도 서로 속인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숙이 알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공명을 살피며 되물었다. 공명 은 그제서야 깨우쳐주듯 말했다.
“자경께서는 어찌 오늘 공근이 짐짓 모질게 황개를 때리도록 한 게 바로 그의 계책인 줄 모르시오? 그런데도 나더러 공근을 말리라 고 권하신단 말씀이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노숙도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자신의 헤 아림이 모자란 것을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말을 잊고 있는데 공명이 다시 주유의 속셈을 넌지시 풀이해주었다.
“고육계같이 힘든 계책이 아니고서야 어찌 조조같이 꾀 많은 인 물을 속일 수 있겠소이까? 오늘 한 일은 반드시 황개로 하여금 조조 에게 의심받지 않고 거짓 항복을 할 수 있도록 공근이 일부러 꾸민 것이오. 우리 진중에 역시 거짓으로 항복해 와 있는 채중과 채화가 이 일을 조조에게 알린다면 아무리 조조라 해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소? 하지만 자경께서는 결코 내가 그 같은 계책을 미리 알고 있 더라고 공근에게 말하지 마시오. 다만 나 또한 도독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다고만 해주시면 고맙겠소.”
몇 번이나 겪어 주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노숙은 그 같은 공명 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주유가 정말로 그런 계책을 품 고서 한 일인지가 궁금했다. 이에 공명과 헤어지기 바쁘게 주유를 찾아보았다.
주유는 노숙이 찾아가자 대뜸 그를 장막 안 깊숙한 곳으로 맞아 들였다. 낮과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노숙이 아무것도 모르는 체 물었다.
“오늘 도독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모질게 황개를 꾸짖으셨습
“니까?”
“모든 장수들이 그렇게 나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주유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노숙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공명은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았소?”
“그 사람도 도독께서 너무 박정하게 하셨다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주유가 껄껄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그도 속일 수 있었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노숙이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주유가 비로소 은근히 뽐내 는 듯한 말투로 털어놓았다.
“오늘 황개를 아프게 때린 것은 실은 모두가 계책이다. 나는 그 를 조조에게 거짓 항복시키기 위해 먼저 고육계를 베푼 것이오. 그 렇게 하여 조조를 속이기만 하면 불로 공격하여 이길길이 날 것이 기 때문이오.”
바로 공명이 말한 그대로였다. 노숙은 속으로 다시 한번 공명의 귀신 같은 헤아림에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주유가 또 공명을 죽이려 들까 봐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한편 황개는 자기 진중으로 돌아가자마자 앓아 누웠다. 목숨을 건 진게 다행이라 싶을 만큼 심한 상처였으나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마 음인 듯싶었다. 여러 장수가 번갈아 찾아보고 좋은 말로 위로했지만 황개는 길게 탄식할 뿐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택이 찾아보러 왔을 때였다. 황개는 문득 좌우를 꾸짖어 물리치고 감택만 병상 곁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벼슬자리는 그리 높 지 않았으나 감택은 황개와는 특히 가까운 사이였다. 단둘이 남게 되자 감택이 먼저 물었다.
“장군께서는 전에 도독과 원수진 일이 있습니까?”
무언가 살피는 듯한 눈길이었다. 황개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소.”
그러자 감택이 문득 모든 걸 알았다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공께서 받은 고초는 바로 고육계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황개가 놀라 물었다. 감택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 도독께서 하는 양을 보니 열에 여덟아홉은 짐작이 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해서 특별히 찾아와 물어본 것이지요.”
그러자 비로소 마음을 놓고 황개는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삼대에 걸쳐 오후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기에 이제 그 계책을 올려 조조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일세. 따라서 비록 내 몸은 고초를 겪었으나 한될 것은 아무것도 없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마음으로 깊이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공을 만나니 만 가지 걱정이 다 스러지는 듯하네. 공이 평소부 터 가슴 가득 충의를 품고 있음은 내가 잘 아는 바라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보고 싶으이.”
“장군께서 제게 하시려는 말씀은 혹시 저를 시켜 조조에게 거짓 으로 항복하는 글을 보내려 하심이 아닙니까?”
감택이 얼른 황개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을 받았다. 감택의 자는 덕윤潤)으로 회계 산음 땅 사람이었다. 집이 가난한 중에도 배우기를 즐겨하여 매양 남의 책을 빌려다 읽었는데 한 번만 읽으면 잊는 법이 없었다. 거기다가 말솜씨가 좋고 담력이 있어 일찍부터 널리 이름을 얻었다. 손권은 그를 불러 모사로 썼는데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황개와 가장 친했다.
“실로 내 뜻이 그러하네. 공이 한번 그 일을 해주겠는가?”
감택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황개는 그의 물음에 더 말을 둘러 대지 않고 바로 물었다. 감택이 흔연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지요.”
황개는 감택의 재주와 말솜씨라면 틀림없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기쁨을 이기지 못해 몸의 아픔도 잊고 병상에 서 내려와 감택에게 절하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큰일을 이루지 못 한다면 나무나 풀처럼 헛되이 죽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 까? 또 장군 같은 분께서도 이렇듯 몸을 내던져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시는데 이 감택이 어찌 목숨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감택은 그렇게 겸양의 말을 한 뒤 제 편에서 오히려 서둘렀다.
“일을 늦추었다가는 어떤 변이 날지 모릅니다. 얼른 떠나게 해주 십시오.”
“글은 이미 닦아두었네그려.”
황개가 더욱 감격한 얼굴로 감춰두었던 글 한 통을 찾아 내밀었 다. 일이 되려고 그러는지 절로 손발이 척척 맞는 판국이었다.
황개의 편지를 받아 갈무리한 감택은 그날 밤 고기잡이 늙은이로 꾸민 뒤 작은 배를 훔쳐내어 강을 건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북쪽에 있는 조조의 진채를 향해서였다.
차가운 밤하늘엔 별만 가득한데 강을 가로지르는 감택의 배는 삼 경 무렵하여 조조의 진채에 이르렀다. 강을 지키고 있던 조조의 군 사들이 감택을 붙들고 한밤인데도 조조에게 그 일을 알렸다.
“간세가 아니던가?”
조조가 그렇게 묻자 알리러 온 군사가 대답했다.
“다만 한 사람 고기잡이 늙은이 같은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스 스로는 말하기를 동오의 모사 감택이라고 했습니다. 중한 기밀이 있 어 승상을 뵈오러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긴장한 조조는 곧 감택을 불러들이도록 했다.
감택이 군사의 인도로 조조의 장막에 이르러 보니 촛불이 휘황하 게 밝혀진 가운데 조조가 등받이에 기대어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었 다. 조조가 감택을 보고 대뜸 물었다.
“그대는 동오의 참모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 여기로 왔는가?”
“내가 듣기로 조승상은 어진 이 구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한다더니 터무니없는 말이었구나, 황공복(黄公覆), 실로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했구려!”
감택은 대답 대신 그런 한탄부터 앞세웠다. 조조의 사람 맞는 태 도가 겸손하지 못함을 걸고 드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크게 동 요되는 기색 없이 실눈을 지어 감택을 살피며 대답을 재촉했을 뿐이 었다.
“나와 동오는 아침저녁으로 군사를 맞대 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대가 이렇게 홀로 왔으니 어찌 그 까닭을 묻지 않겠는가?”
자신을 격하게 만들려는 감택의 수작쯤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조조의 말투였다. 감택은 그토록 매서운 조조의 헤아림에 은근히 놀 랐다. 쓸데없이 격동시키느니보다는 먼저 솔깃한 말부터 들려주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온 까닭부터 밝혔다.
“황개는 동오를 삼대째나 섬기고 있는 오래된 신하였습니다. 이번 에 주유로부터 여러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큰 잘못도 없이 모진 매 를 맞았습니다. 이에 그 분함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승상께 투항하여 원수 갚을 계책을 꾸미고 있는 바, 특히 저를 보고 함께 일 을 꾀해보자고 했습니다. 저와 황개는 비록 성이 다르나 정은 골육 에 못지않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밀서를 바치러 왔는데, 승상께 서는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역시 조조는 달랐다. 적의 이름난 장수가 항복을 하러 사람을 보냈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볼 일이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변하 지 않았다.
“그 편지가 어디 있는가?”
그렇게 목소리도 차갑게 들릴 만큼 차분했다. 감택이 품안에서 황 개의 밀서를 꺼내 말없이 조조에게 바쳤다. 봉함을 찢은 조조는 등 불을 당겨놓고 안에 든 글을 읽어나갔다. 거기에는 대략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이 황개는 손씨네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온 터라 본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세事勢)를 논하자면, 지 금강동은 겨우 여섯 군의 얼마 안 되는 군세로 중원의 백만 대군을 맞서려 하고 있으니, 적은 군사가 많은 군사를 당할 수 없음은 천하 가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동오의 장수와 벼슬아치들도 어리석고 슬기로움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그 같은 일의 불가함을 알고 있는 데, 오직 주유 어린것만이 얕고 어리석은 고집에 빠져 스스로의 재 주만 믿고 계란을 들어 바위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 유는 임금이라도 된 양 함부로 아랫사람에게 벌과 복을 내리어 죄 없는 사람이 형을 받고 공 있는 사람이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황개 또한 동오의 여러 대를 섬긴 오랜 신하임에도 까닭 없이 욕 을 보았으니 마음으로 한스럽기 실로 그지없습니다.
엎드려 듣건대 승상께서는 정성을 다해 사람을 맞고 옛일을 마음 에 끼는 법 없이 선비들을 받아들이신다 했습니다. 이 황개 비록 동 오의 녹을 먹으며 여러 번 승상께 대적한 일이 있으나 이제 무리를 이끌고 승상께 항복하여 공을 세움과 아울러 주유 그 어린것에게 당 한 욕을 씻고 싶습니다. 군량과 말먹이 풀이며 수레 병장기까지 배가 나는 대로 바치고자 하는 바, 피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아뢰오니 부디 저를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조조는 앞에 놓인 탁자 위에 황개의 편지를 얹어놓고 여남은 번 이나 뒤적이며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탁자를 치며 눈을 흡떠 감택 을 노려보고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황개는 고육계를 써서 너로 하여금 거짓으로 항복하는 글을 전 하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걸려들면 다시 딴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겠지. 이놈,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렇게 와 놀리고 욕 뵈려 드느냐?”
그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여봐라, 무엇을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 목 베지 못할까!”
감택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전혀 뜻밖은 아니었다. 어떤 조조라고 몇 마디 달콤한 말과 글 한 통에 넘어가겠는가. 오히려 감택의 대비 는 조조가 그렇게 나올 때를 위해서 더 잘 마련되어 있었다. 무사들 에게 끌려나가면서도 낯색 하나 변함 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껄껄 거렸다.
“내가 이미 네놈의 간사한 계책을 알아보았는데 넌 무엇이 좋아 그렇게 웃느냐?”
이상히 여긴 조조가 감택을 다시 끌어오게 해놓고 물었다. 감택이 웃음을 그치고 한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무엇이 좋아 웃은 게 아니외다. 다만 황개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비웃었을 뿐이오.”
“어찌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냐?”
조조가 다시 물었다. 너무도 태연스런 감택의 언동에 자신의 짐작 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것 같았다.
“죽이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웬 물음이 그리 많으냐? 어서 나를 죽여라!”
감택은 짐짓 허세를 부려 조조의 궁금증을 돋우었다. 이제는 말까 지도 함부로 했다. 조조도 더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매섭게 몰아댔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어 간사한 속임수를 꾸민 계책 은 다른 사람이라면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속이지 못한다.”
“네가 읽은 그 책에서는 도대체 어떤 게 간계(奸)라고 하더냐?” 감택은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조조를 비웃듯 물었다. 그래도 조조는 냉정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너희들의 간계가 어디서 드러나게 되었는지 알아야 네놈이 죽어 도 한이 없으리라 여겨 일러준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항복해 올 뜻 이 있다면 어찌 이 글에 그 날짜와 시각을 밝히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도 네놈이 이렇듯 뻗댈 수 있느냐?”
그 말을 듣자 감택이 문득 크게 웃은 뒤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다.
“너는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병서 많이 읽은 것을 스스로 높이 치 고 있구나. 이 못 배운 것아, 차라리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라! 그렇 지 않고 싸우다가는 반드시 주유에게 사로잡히고 말리라. 너 같은 것의 손에 욕되게 죽는 게 참으로 원통하구나!”
“배운 것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조조가 다시 발끈해서 물었다. 감택은 그런 조조를 더욱 심하게 건드렸다.
“너는 꾀를 쓸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세상일의 이치에조차 밝지 못하다. 어찌 배움이 있는 자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내 말에 어디가 틀렸기에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느냐?”
“너는 어진 이를 예로 대하지 않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대답하겠느냐? 나는 다만 여기서 이대로 죽을 뿐이다.”
감택이 끝내 그렇게 뻗대자 조조가 약간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좋다. 만약 네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면 나는 어진 이로 대접하고 엎드려 맞아들이겠다.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그러자 감택도 성난 표정을 지우고 앞서와는 달리 예까지 갖추어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주인을 저버리고 도둑질을 하는 데는 그때를 미리 정할 수 없다는 말도 듣지 못하셨소? 만약 이제 황개가 그 글에서 날짜를 정해 보냈다가 형세가 급하고 절박하게 틀어져 그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됐는데도 이쪽에서 그를 맞으러 나섰다가는 그대로 주 유에게 우리 일이 들켜버릴 것이 아니겠소? 다만 때를 보아 재빨리 해치울 뿐 미리 날짜를 정해둘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일이외다. 그런 데 그 같은 이치를 따져보려고도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만 드니 배운 것 없는 자란 소리를 듣게 된 것이오.”
조조가 들어보니 한마디도 어김이 없는 소리였다. 이에 조조는 얼 굴빛을 고치고 감택을 풀어주게 한 뒤 자리에서 내려와 죄를 빌었다.
“내가 일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높으신 분을 잘못 욕보인 것 같소. 창칼을 맞대고 있는 싸움터라 의심이 지나쳐 그리된 것이니 부디 괴이쩍게 여기지 마시오.”
“저와 황개가 투항하려는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바라고 달려올 때의 그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속임수가 있을 수 있겠습 니까? 이제라도 믿어주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감택은 더욱 공손하게 대답했다. 조조는 크게 기뻤다. 딴사람이 된 것처럼 밝고 부드러운 얼굴로 감택의 두 손을 잡으며 다짐했다.
“만일 두 분께서 이번에 큰 공을 이루시기만 한다면 뒷날 두 분께 서 받는 벼슬은 반드시 모든 사람의 윗자리가 될 것이오.”
“저희들은 벼슬이나 봉록을 구해 승상께 온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도리에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감택이 더욱 능청을 떨었다. 조조는 술을 내어 그런 감택을 두텁 게 대접했다. 오래잖아 어떤 사람이 들어와 조조의 귓가에 대고 무 언가를 수군거렸다. 듣고 있던 조조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그 글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곧 그 사람이 밀서 한 통을 올렸다. 그걸 읽는 조조의 얼굴 에는 기쁜 빛이 가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이 바로 주유와의 사 항계 다툼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조조 자신 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