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5화 : 혼일사해(四海)의 꿈은 동남풍에 타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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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5화 : 혼일사해(四海)의 꿈은 동남풍에 타버리고


혼일사해(四海)의 꿈은 동남풍에 타버리고

모든 채비를 갖춘 주유가 다만 공명이 동남풍을 빌어주기만 기다 리고 있는데 문득 형세를 탐지하러 나갔던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 렸다.

“오후께서 배를 모아 우리 진채에서 팔십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도독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주유는 한층 마음이 급해졌다. 곧 노숙을 불러 진채 의 모든 장졸들을 둘러보고 자신의 영을 전하게 했다.

“모두 배와 싸움에 쓸 기구와 돛, 노 따위를 갖추고 있다가 한번 명이 떨어지면 곧바로 나갈 수 있도록 하라. 만약 이 일을 어기는 자 가 있으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리라!”

그 명을 들은 장수들은 모두 긴장하여 손발이 닳도록 바쁘게 싸움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밤이 되었건만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애가 탄 주유가 노숙에게 말했다.

“공명이 이번만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소. 이 한겨울에 무슨 수로 동남풍을 빌어낸단 말이오?”

그러나 공명을 굳게 믿는 노숙은 좋은 말로 주유의 마음을 가라 앉혀주었다.

“제 생각에는 공명이 반드시 그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공명은 안 되는 일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연 그 같은 노숙의 믿음은 옳았다. 삼경 무렵이 되면서부터 문 득 바람 소리가 들리며 기치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주유가 장막을 나가 살펴보니 깃대가 서북쪽으로 휘고 있었다. 바라던 동남풍이 불 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깐 사이에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주유는 한편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갈공명은 정말로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는 법을 알고, 귀신도 헤아릴 수 없는 술수를 지녔구나! 이 사람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장 차 동오의 큰 화근이 될 것이다. 일찍이 죽여 뒷날의 걱정거리를 없 애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는 급히 호군교위로 있는 서성과 정봉을 불러 가 만히 영을 내렸다.

“너희 둘은 각기 군사 백 명씩을 데리고 서성은 물길을 타고 정봉 은 뭍으로 해서 남병산으로 가도록 하라. 그곳 칠성단에 이르거든 까닭을 묻지 말고 바로 제갈량을 끌어내 목을 벤 뒤 그 목을 가지고 돌아와 내게 공을 청하라.”

서성과 정봉은 어리둥절했으나 대도독인 주유의 명이라 지체 없이 따랐다.

서성은 칼과 도끼를 든 백 명의 군사를 배에 태우고 물결을 헤쳐 나아가고, 정봉은 활과 쇠뇌를 멘 군사 백 명을 말에 태워 남병산으 로 치달았다. 가는 도중에도 동남풍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먼저 남병산에 이른 것은 정봉이었다. 칠성단 위를 보니 기치를 든 군사들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정봉은 칼을 빼들고 단 위로 올라가 공명을 찾았으나 공명은 보이지 않았다. 정봉은 황 망히 단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물었다.

“공명은 어디 있느냐?”

“얼마 전에 단에서 내려가셨습니다.”

군사 하나가 본 대로 일러주었다. 정봉이 단을 내려가 급히 공명 을 찾고 있는데 서성이 배를 거느리고 그곳에 이르렀다. 둘은 힘을 합쳐 공명을 찾다가 드디어 물가에 이르렀다. 물가를 지키던 졸개 하나가 다시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어제 해질녘에 빠른 배 한 척이 앞에 보이는 여울목에 와서 있 더니, 조금 전 머리를 풀어헤친 공명이 그 배를 탔습니다. 저기 물 위에 보이는 게 바로 그 배입니다.”

서성과 정봉이 보니 과연 달빛 아래 저만큼 작은 배 한 척이 가고 있었다. 이에 서성과 정봉은 각기 물과 뭍으로 길을 나누어 그 배를 뒤쫓았다. 서성이 돛이란 돛은 다 올리고 또 노 젓는 군사를 재촉하 여 뒤따르니 오래잖아 그 배와의 거리가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을 만 큼 가까워졌다.

서성이 뱃전에 서서 큰 소리를 질렀다.

“군사께서는 잠깐 멈추십시오. 도독께서 뵙고자 청하십니다.”

그러자 배꼬리에 서 있던 공명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독께 말씀드려 조조와의 싸움이나 잘 하라 이르게. 제갈량은 잠시 하구로 돌아가거니와 뒷날 다시 서로 보게 될 것이네!”

“잠깐이면 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성이 다시 말을 꾸며 졸라댔다.

공명이 타이르듯 서성의 말을 받았다.

“나는 이미 도독이 나를 용납하지 않고 해치려 들 것을 짐작하고 있었네. 그래서 미리 조자룡에게 배를 가지고 와 나를 실어가게 한 것이니 그대는 쓸데없이 뒤쫓으려 하지 말게.”

그러나 서성은 공명이 탄 배에 배뜸(덮개)이 없는 걸 보고 그대로 뒤쫓았다. 물질에 익숙한 군사들이 모는 배라 곧 공명의 배를 거의 따라잡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때 고물에서 조운이 활시위에 살을 먹 이며 일어서더니 서성에게 꾸짖듯 소리쳤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명을 받들고 특히 이렇게 와서 군사를 모셔가는데 네가 어찌하여 뒤쫓느냐? 마음 같으면 너를 한 살[矢]에 꿰어 죽여버리고 싶다만 유황숙과 손씨 두 집안의 화평을 깰까 저어 하여 내 솜씨만 보여준다.”

그리고는 활시위를 놓으니 화살은 기막히게도 서성의 배뜸을 받 쳐주고 있는 밧줄을 맞추어 끊어버렸다. 뜸이 흘러내려 물속으로 떨 어지며 서성의 배는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운은 자기 배에 있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돛을 있는 대로 다 올려라!”

군사들이 그대로 하니 곧 조운의 배는 돛마다 가득 바람을 안고 나는 듯 나아갔다. 조운의 솜씨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 배가 워낙 빨 라 서성은 뒤쫓을래야 뒤쫓을 수가 없었다.

강 언덕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정봉이 서성을 불러 말했다.

“제갈량의 귀신 같은 헤아림과 기묘한 계책은 사람으로는 따를 수가 없소. 거기다가 조운은 만 명이 함께 덤벼도 당해낼 수 없는 용 맹을 가졌으니, 당신도 당양 장판에서의 일을 듣지 않았소? 그대로 돌아가 도독께 이 일을 알리는 수밖에 없는 듯하오.”

서성도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다. 둘은 곧 주유에게 돌아가 공명이 미리 조자룡을 불러두었다가 함께 하구로 돌아가버렸다는 걸 알렸 다. 주유는 크게 놀라며 탄식했다.

“그 사람이 이토록 지모가 많으니 내가 낮이나 밤이나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겠구려!”

노숙이 그런 주유를 일깨웠다.

“당장은 조조를 깨뜨리는 일이 급합니다. 그 사람 일은 먼저 조조 를 잡은 뒤에 다시 꾀해보도록 하지요.”

주유도 그 말을 듣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영을 내렸다. 먼저 영을 받은 것은 감녕이었다.

“그대는 채중을 비롯하여 조조에게서 항복해 온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 강 언덕으로 가라. 북군의 깃발과 군호를 써서 오림(烏)에 이 르면 바로 조조가 군량을 쌓아둔 곳이 있다. 그곳에 섞여 들어가 불 을 질러 군호를 삼도록 하라. 채화는 내가 따로 쓸 일이 있으니 장막에 남아 있도록 한다.”

그다음은 태사자였다.

“그대는 군사 삼천을 이끌고 바로 황주 경계로 달려가 조조와 합 비에서 접응해 오는 군사들 사이를 끊어놓으라. 조조의 군사들을 당 하기 어렵거든 불을 놓아 신호를 하라. 그때 붉은 기를 앞세운 군사 들이 보이거든 바로 오후께서 접응하러 오신 줄 알라.”

그러고는 감녕과 태사자의 갈 길이 가장 멀다 하여 둘을 먼저 떠나게 했다.

세 번째로 부름을 받은 것은 여몽이었다.

“그대는 삼천 병마를 이끌고 오림으로 가서 감녕의 뒤를 받쳐주 도록 하라. 조조의 군량뿐만 아니라 그 진채와 목책까지 태워버려야 한다.”

네 번째는 능통이었다.

“그대는 군사 삼천을 이끌고 바로 이릉 경계에 가 있다가 오림에 서 불이 일거든 거기에 맞춰 군사를 움직이라.”

그리고 주유는 다시 동습을 불렀다.

“그대는 삼천 군사를 이끌고 바로 한양으로 가서 한천을 따라 세 워진 조조의 진채를 쳐부수라. 흰 기를 앞세운 군사를 보거든 뒤에 서 도우러 온 우리 편 군사인 줄 알면 된다.”

마지막이 반장이었다. 주유는 영을 내렸다.

“그대는 삼천 군사를 이끌고 흰 기를 앞세우고 한양으로 가라. 동습이 힘에 부쳐 하거든 달려가 도와야 한다.”

실로 빈틈없는 영이었다. 영을 받은 여섯 갈래의 군마는 각기 길을 나누어 떠나갔다. 주유는 다시 황개에게 영을 내렸다.

“장군은 조조의 싸움배에 불을 지를 화선을 한 번 더 살피신 뒤에 군사 하나를 뽑아 조조에게 글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오늘 밤 항복 하러 간다는 것만 알리는 글이면 되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싸움배 네 척을 뽑아 황개의 배를 뒤따르며 도울 수 있게 했다. 주유는 이어 수군을 배치했다. 제일대는 한당이 군관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제이대는 주태가 맡았으며, 제삼대는 장흠이요, 제사대는 진무가 맡아 이끌도록 했다. 각대는 싸움배 삼 백 척을 이끌고 나가는데 맨 앞에는 황개의 화선 스무 척이 나섰다. 주유 자신은 정보와 더불어 가장 큰 싸움배[]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기로 했으며, 서성과 정봉은 좌우에서 호위를 맡게 했다. 수 채는 다만 노숙과 감택이 남아 여러 모사들과 함께 지키기로 했다. 정보는 주유가 군사를 내는 것이 법도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해 마지않았다.

모든 배치가 끝났을 때 손권으로부터 병부를 지닌 사신이 와서 알렸다. 손권은 이미 육손을 선봉으로 삼아 기춘과 황강 땅으로 나 아가게 했으며, 자신도 그 뒤를 받쳐 호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하구의 유비는 그때 공명이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 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떼의 배가 하구에 이르렀다. 공자 유 기가 스스로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하구로 온 것이었다. 유비는 그 를 적루(樓, 망루) 위로 맞아들인 뒤 자리를 정하여 앉기 바쁘게 걱 정부터 늘어놓았다.

“동남풍이 크게 일거든 자룡을 보내라 해서 보냈는데 아직도 공명이 돌아오지를 않고 있네.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닐세.”

그때 곁에 있던 군관 하나가 손가락으로 번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돛배 한 척이 바람을 가득 안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군사께서 돌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유비와 유기는 배가 오는 것을 맞아들이려 구르듯 적루 에서 달려 내려갔다. 오래잖아 배가 강 언덕에 대이고 공명과 조자 룡이 내렸다. 공명이 아무 탈 없이 돌아오자 유비는 기뻐 어쩔 줄 몰 라했다. 그러나 공명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에 더 마음이 뺏겨 있었다.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한 뒤 서둘러 유비에게 물었다.

“지금은 딴 일을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전에 약조하신 대로 군사와 말이며 싸움배는 모두 갖춰져 있습니까?”

“갖춰진 지 오래됩니다. 다만 군사께서 돌아오셔서 써주시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유비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공명은 유비와 유기를 재촉해 장 막으로 든 뒤 군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영을 받은 것은 조운이 었다.

“자룡은 삼천 군마를 이끌고 강을 건너 지름길로 오림으로 가서 거기서 빠져나오는 소로(小路) 곁 수목이며 갈대가 빽빽한 곳을 골 라 매복하고 있으라. 오늘밤 사경 무렵이면 반드시 조조가 그 길로 달아나게 될 것이다. 조조의 군마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반쯤 지 나가거든 불을 지르고 들이치되 모조리 다 죽이려 들어서는 아니 된다. 절반쯤만 죽이도록 하라.”

“오림에서 나오는 길은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군으로 빠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형주로 이어지는데 조조가 어느 길로 올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조운이 영을 들은 뒤에 그렇게 물었다. 공명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군은 형세가 급해 조조는 감히 그리로 갈 생각을 못할 것이다. 반드시 형주로 와서 대군을 수습한 뒤 허창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자 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공명은 다시 장비를 불 렀다.

“익덕은 군사 삼천을 이끌고 강을 건너 이릉 뒷길을 끊고 호로곡 에 매복해 있으시오. 조조는 감히 남이릉으로 가지 못하고 북이릉 쪽으로 갈 것인데, 내일 비 온 뒤에는 거기서 솥을 걸고 밥을 지어먹 게 될 것이오.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거든 산자락에 불을 지르고 들이치도록 하시오. 비록 조조를 사로잡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익덕 이 그곳에서 세우게 될 공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장비 또한 물러나 영을 받은 대로 떠나갔다. 제갈공명은 다시 미축, 미방, 유봉 세 사람을 불렀다.

“그대들은 각기 배를 있는 대로 모아 강가를 따라 돌면서 조조의 패잔병을 사로잡고, 병기며 여러 가지 기구들을 빼앗아 들이도록 하라.”

그러자 그들 세 사람 역시 영을 거행하러 물러났다. 공명은 몸을 일으켜 이번에는 공자 유기에게 말했다.

“무창은 한번 바라볼 만한 땅으로 우리에게 매우 긴요합니다. 공 자께서는 급히 돌아가시어 거느리고 계신 군사들을 이끌고 안구(岸 口)에 진을 치도록 하십시오. 조조가 한번 패하게 되면 반드시 그리 로 도망쳐 오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 사로잡으시되 가벼이 성곽을 떠나지는 마십시오.”

그 말에 유기도 서둘러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유기가 돌아간 뒤 공명은 빙긋 웃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번구에 군사를 머물게 하시고 높은 곳에 기대 바라 만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오늘 밤 주유가 큰 공을 이루는 것을 구 경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관운장도 함께 있었으나 공명은 그를 전혀 본 체도 아니했 다. 싸움이라면 언제나 앞장서 온 자신을 온전히 빼돌려버리니 관운 장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참다 못해 마침내 목소리를 높 여 공명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 관아무개는 형님을 따라 여러 해 싸움터를 누비면서 한번도 남에게 뒤진 일이 없었소. 그런데 오늘 조조 같은 큰 적을 맞아 싸우 는데 군사께서 나를 쓰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러자 공명이 조용히 웃으며 까닭을 일러주었다.

“운장께서는 그 일을 너무 괴이쩍어 마시오. 나는 원래 운장을 번 거롭지만 가장 긴요한 길목에 보내어 한몫을 맡게 하려 했소이다. 그러나 한 가지 미덥지 못한 데가 있어 감히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 이오.”

“미덥지 못한 데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어디 한번 들려주시오.”

관우가 후끈 단 얼굴로 다시 물었다. 공명이 깨우쳐주듯 가만가만 말했다.

“지난날 조조가 장군에게 매우 두텁게 대했으니 장군도 마땅히 조조에게 보답을 하려 들 것이오. 이제 조조는 싸움에 진 뒤에는 반 드시 화용도(容道)로 갈 것인데 만약 장군을 거기 보낸다면 어찌 되겠소? 틀림없이 조조를 그냥 놓아 보내고 말 것이오. 그 때문에 내가 감히 장군을 보내지 못하고 있소.”

“군사께서는 참으로 걱정도 많으시오. 지난날 조조가 나를 두텁게 대접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이미 그 보답을 했소. 안랑과 문추를 죽 여 백마가 에워싸인 걸 풀어준 것만으로도 보답이 넘었으면 넘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외다. 오늘 조조를 만나게 된다 한들 어찌 가 벼이 놓아 보내기야 하겠소?”

관우가 어이없다는 듯 허허거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 말에 공명 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만약 놓아 보냈을 때는 어쩌겠소?”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소이다.”

관우가 흔연히 대답했다. 공명은 그래도 관우가 못 미덥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어째 마음이 놓이지 않구려.”

“그렇다면 군령장을 써드리겠소이다.”

관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군령장을 썼다. 뒤늦게나마 가장 중요한 길목을 맡게 된 걸 기뻐하는 관우에게 공명이 더 세세하게 계책을 일러주었다.

“운장께서 화용도로 가시거든 산 높은 곳에다 마른 풀이며 싸리를 베어 쌓고 불을 피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조조는 반드시 운장이 계신 곳으로 올 것이오.”

“조조가 연기 나는 것을 보면 매복이 있는 줄 알 것인데 어째서 그 길로 오겠습니까?”

관우가 또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공명이 빙긋 웃으며 깨우 쳐주었다.

“운장은 병법에서 허허실실(虛虛實實)이란 말도 듣지 못하셨소? 조조가 비록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 해도 그렇게 하면 그를 넉넉 히 속일 수 있을 것이오. 조조는 연기를 보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그것이 허장성세(虛張聲勢)로만 여기고 반드시 그리로 갈 것이오. 장 군이나 쓸데없는 인정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공명의 그 같은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믿게 된 관우는 곧 화용 도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관평과 주창을 비롯한 군사 오백이 관우 가 이끌고 떠난 전부였다.

관우가 떠나간 뒤 유비가 어두운 얼굴로 공명에게 말했다.

“내 아우는 의기를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라 만약 조조가 정말로 화용도로 가게 되면 그대로 놓아 보내기가 십상일 것이오. 실로 걱 정되오.”

공명이 그런 유비를 위로하듯 말했다.

“제가 어젯밤에 천문을 보니 아직 조조가 죽을 때는 아니 되었습 니다. 운장이 인정이나 쓰게 해주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관운장이 조조를 놓아 보내줄 것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듣 고난 유비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선생의 귀신 같은 헤아림은 실로 세상에 따를 만한 이가 없겠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저와 번구로 가셔서 주유가 싸우는 광경이나 구경하도록 하시지요.”

공명은 그렇게 말한 뒤 손건과 간옹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 신은 유비와 함께 번구로 갔다.

이때 조조는 대채 안에 여럿을 모아놓고 싸움 의논을 하면서 황 개로부터 소식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동남풍이 일 기 시작하자 정욱이 들어와 조조를 보고 말했다.

“오늘 따라 이상하게 동남풍이 일고 있습니다. 마땅히 이에 대한 방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동지는 양기가 한번 되살아나는 때이외다. 어찌 동남풍이 없겠으며, 그게 무에 이상하겠소?”

그러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와서 알렸다.

“강남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왔는데 황개의 밀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말에 조조는 급하게 그 사람을 불러들이게 했다. 과연 황개의 밀서가 왔는데 그 대략은 이러했다.

‘주유가 어찌나 방비가 엄하고 빈틈없는지 도무지 몸을 빼낼 계책 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파양호로 군량이 새로 오게 되었는 바, 다행히도 주유는 저를 뽑아 군량선을 돌보며 지키게 함으로써 겨우 방편을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동의 이름난 장수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승상께 항복하러 가겠습니다. 오늘밤 삼경쯤 하여 뱃머리에 청룡아기(靑龍旗)를 꽂은 배가 가거든 그게 곧 제가 탄 군량 나르는 배인 줄 아십시오.’


그 글을 읽은 조조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황개가 들고 올 목이 누구의 것이든 황개가 동오의 이름난 장수를 죽이고 군량을 실은 배 까지 빼내 자신에게로 항복해 왔다는 사실이 동오의 장졸들에게 알 려진다면 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거기다가 황개가 훤히 알고 있을 동오의 허실은 그대로 동오를 쳐부 술 전략의 바탕이 될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 바람에 조조 는 날이 저물기 무섭게 수채 안에 있는 큰 배 위에다 모든 장수들을 모아놓고 황개의 배가 이르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강남에서는 주유가 싸움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채화와 채중의 처리였다. 진작부터 장막에 잡아두고 있던 채화를 불러들인 주유는 곧 군사들을 시켜 그를 묶게 했다. 깜짝 놀란 채화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닥쳐라! 네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감히 와서 거짓 항복으 로 나를 속이려 들었느냐? 이제 마침 군기에 제사 지낼 제물이 없으니, 네놈의 목을 빌려 거기다 좀 써야겠다.”

주유가 싸늘하게 말했다. 채화는 마침내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 걸깨달았다. 이미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너희 편의 감녕과 감택도 이미 너를 저버렸다. 그런데도 네가 조 승상과 싸워 이길 것 같으냐? 공연한 짓 하지 말고 나를 풀어놓아 조승상께 항복할 수 있는 한 가닥 길로나 삼아라!”

“감녕과 감택은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다.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말아라.”

주유가 다시 그렇게 일러주자 채화는 더욱 기가 막혔다. 뉘우쳐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주유는 군사들을 재촉해 채화를 강변에 있는 조독기(早纛旗, 검은 빛의 일산 달린 깃발) 아래로 끌고 가게 했다. 그런 다음 술을 뿌리고 지방을 태워 제례를 갖춘 뒤 채화의 목을 한칼에 잘라 그 피를 군기 에 바쳤다.

“자 이제는 배를 낸다.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싸울 채비를 갖추도록 하라!”

제례를 끝낸 주유가 드디어 출전의 영을 내렸다.

황개는 세 번째 화선에서 엄심갑에 날선 칼을 빼들고 홀로 서 있 는데, 그 머리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에는 ‘선봉 황개란 넉 자가 크 게 씌어 있었다. 곧 순풍을 타고 나아가는 황개의 화선 스무 척을 앞 세운 동오의 선단은 조조의 수채가 있는 적벽(赤壁)으로 떠났다.

이때는 동남풍이 거셀 대로 거세어져 물결은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높았다. 조조는 중군에 앉아 달빛이 비치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 었다. 마치 수많은 금빛 강물을 뒤집고 물결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조조는 그 바람이 바로 동남풍이라는 것도 잊고 마음이 호쾌하여 껄 껄거렸다. 머지않아 황개가 오면 대세는 판가름난 것이나 다름없다 는 믿음이 더욱 그를 방심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물가물하지만 강남에서 돛배 한 척이 바람을 타고 이리로 다 가오고 있습니다.”

문득 군사 하나가 한 곳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조조는 높은 곳을 골라 앉은 뒤 그쪽을 살폈다. 잠시 후에 다시 눈 밝은 군사가 말을 보탰다.

“배가 여러 척인데 모두 청룡아기를 꽂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 운데 있는 큰 기에는 선봉 황개라 씌어진 것 같습니다.”

선봉 황개라면 싸우러 온다는 뜻이지만 조조는 어찌 된 셈인지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게 웃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황개가 항복하러 오는 것은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는 뜻이다!”

그사이에도 황개의 배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들고 있었다. 한동안 그 배들을 찬찬히 살피던 정욱이 급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말했다. “오는 배들에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수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어서 영을 내리십시오.”

“어떻게 속임수가 있다는 걸 알았소?”

조조가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정욱에게 물었다.

“곡식이 배 안에 있다면 배는 반드시 그 무게 때문에 뱃전이 물속에 많이 들어가고 흔들림도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기 오는 배들 을 보니 가볍게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뱃전이 물 밖에 많이 드 러나 있습니다. 틀림없이 곡식 실은 배가 아닙니다. 거기다가 오늘 밤은 동남풍이 심하게 부니 만약 저기에 속임수가 있다면 어떻게 당 해 내시겠습니까?”

그제서야 조조도 느껴지는 게 있었다. 급히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가서 저 배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겠느냐?”

“제가 물에 좀 익숙합니다. 한번 나가서 막아보겠습니다.”

곁에 있던 문빙이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날려 작은 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질로 작은 배를 맞으러 나갔다.

“승상의 영이시다. 강남에서 오는 배들은 수채로 가까이 오지 말 고강 가운데 잠시 멈추어라!”

문빙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소리쳤다. 배에 타고 있던 군사들도 목청을 모아 소리쳤다.

“어서 배뜸을 벗겨보아라!”

그런데 미처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화살 나는 소리와 함 께 문빙의 왼팔에 화살이 하나 날아와 박혔다. 문빙은 뱃전에 넘어 지고 놀란 군사들은 배를 돌려 수채로 돌아오기 바빴다.

그럭저럭 조조의 수채와 황개의 화선들 사이가 두 마장쯤 되었을 때였다. 황개가 칼을 들어 한번 휘두르자 앞의 배들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불은 바람의 위세를 따라 일고 바람은 불의 위세를 더했다. 스무 척의 화선들은 불꽃과 연기로 하늘을 가리면서 쏜살같이 조조의 수채로 들이닥쳤다.

수채 안에 있는 배들은 모두 닻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다가 연환계를 써서 서른 척 쉰 척씩 쇠사슬로 묶어놓은 터라 피할래 야 피할 데가 없었다.

무슨 군호인지 강 건너에서는 포향이 들리는데, 스무 개의 거대한 불덩이 같은 황개의 화선들은 그대로 조조의 배들에 달라붙어 불을 옮겼다. 뱃머리에 박아둔 큰 못이 조조의 배들에 박혀 군사들이 밀 어내보려 해도 꼼짝도 않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조조의 수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바다가 되 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처음 배에 옮겨 붙었던 불은 곧 거센 동남풍 을 타고 뭍에 있는 진채들에까지 옮아갔다. 조조는 강 언덕에 있던 진채에서도 여기저기 연기와 불길이 솟는 걸 보자 얼이 다 빠져나가 는 듯했다.

간밤까지만 해도 혼일사해(混一四海, 천하통일)의 꿈에 부풀어 있던 조조였다. 아니 조금 전 황개의 배가 멀리서 모습을 나타냈을 때만 해도 조조는 자신의 대망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황개 가 싣고 온 불이 그토록 무참히 조조의 꿈을 불살라버릴 줄이야.

뿐만이 아니었다. 불붙은 배에서 작은 배로 뛰어내린 황개는 몇 사람만 거느린 채 불길과 연기를 무릅쓰고 조조를 찾아 앞장서 덤벼 왔다.

조조는 일이 위급함을 알아보고 급히 배에서 강 언덕으로 뛰어내 리려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마침 장 요가 작은 배 한 척을 저어왔다. 조조가 부축을 받아 작은 배에 내려보니 어느덧 자신이 타고 있던 큰 배도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장요를 비롯한 여남은 명의 장졸들은 조조를 감싸 지키며 급히 강어 귀 쪽으로 배를 저어갔다.

황개는 멀리서 붉은 옷을 입고 작은 배에 내리는 자를 보자 그게 틀림없이 조조일 것이라 짐작했다. 배를 젓는 군사들을 재촉하는 한 편 칼을 휘두르며 크게 소리쳤다.

“조조 역적 놈은 달아나지 말라! 동오의 선봉 황개가 여기 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괴로운 외침 을 잇달아 토해냈다. 황개가 짓쳐오는 기세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그런 황개를 그토록 쉽게 믿은 스스로를 향한 꾸짖음과 뉘우침에서 나온 소리였다. 조조와는 크기나 깊이가 달라도 황개를 미워하는 마 음만은 뒤따르는 장졸들에게도 한결같았다. 장요가 가만히 살을 뽑 아 활시위에 얹고 그 미움까지 실어 황개에게로 쏘아 붙였다.

마침 크게 인 바람에 불길은 대낮같이 밝게 비치어 황개의 모습 을 드러나게 했다. 그러나 거센 바람 소리 때문에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지 못해 미처 피하지 못한 황개는 그대로 어깻죽지를 맞고 물 위로 떨어졌다.

장요는 그 틈을 타 조조를 강 언덕까지 구해 내렸다. 하지만 이때 불은 이미 뭍에 있는 마보군의 진채에까지 옮아 붙어 조조의 대군 전체가 크게 어지러워진 뒤였다. 조조는 그런 군사들을 수습할 엄두 를 못 내고 마필을 찾아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편 그 무렵 한당도 기세를 타고 불길과 연기를 무릅쓰며 조조 의 수채로 짓쳐들고 있었다. 문득 졸개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키[] 뒤쪽에서 누가 큰 소리로 장군의 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말에 한당이 가만히 귀기울이니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공의, 한당의 자), 나를 구해주시오!”

“저것은 황공복이다. 어서 구하도록 하라.”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한당이 급히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군사들이 황개를 배로 끌어올려 보니 어깨에 화살이 꽂힌 채였다. 한당은 화살을 입으로 물고 뽑아냈으나 대만 뽑히고 화살촉은 여전 히 살 속에 박혀 있었다. 손견을 따라나선 이래 수십 년 황개와 함께 싸움터를 누벼온 한당이었다. 조조를 쳐 공을 세우는 일보다는 황개 를 구하는 게 더 급했다.

한당은 돌진을 멈추고 먼저 황개의 젖은 옷을 벗긴 뒤 칼로 황개 의 살을 찢어 화살촉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 기를 찢어 상처를 싸매 고 자신의 전포를 입혀 대채로 돌려보냈다. 그곳에서 옳은 치료를 받게 하려 함이었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황개의 목숨은 남아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러나 워낙 물에 익숙한 사람인 데다, 몹시 찬 계절이지만 갑옷을 입 은 채 물에 떨어져 황개는 얼어죽지 않고 겨우 구함을 받을 수가 있 었다. 조조 쪽에서 보면 반분은 풀린 셈이나, 동오로서도 불행 중의 다행이라 할 만했다.

그사이 싸움은 한층 열기를 더해 갔다. 불길은 강을 덮어 물 대신 흐르는 듯하고 함성은 하늘과 땅을 떨쳐울렸다. 왼쪽에서는 한당과 장흠이 이끄는 두 갈래의 군사가 적벽 서편으로 짓쳐들어오고, 오른 쪽에서는 주태와 진무가 이끄는 군사들이 적벽 동편을 따라 조조군의 수채를 덮쳤다. 그리고 가운데로는 주유, 정보, 서성, 정봉을 뱃머리에 세운 동오의 선단(船)이 모두 이르렀다.

불 기운 스치는 곳에 군사가 따르니, 불의 위세에 따라 군사들도 절로 사납고 날래졌다. 바로 삼강(三江)의 수전(戰)이요, 적벽의 오 병(兵, 모진 싸움 또는 적을 몰살시킴)이었다.

이날 조조의 군사들이 떨어진 처지는 참담했다. 창에 찔리고 화살 에 맞아 죽은 자에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를 더하면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뒷사람이 그 싸움터를 둘러보고 노래 했다.

위와 오자웅 겨루던 곳 魏吳爭鬪決雌雄

적벽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네 赤壁樓船一掃空

매서운 불길 구름을 찌를 듯 강물 비칠 때 烈火初張雲照海

주랑은 여기서 조공을 깨뜨렸네.周郎會此破曹公

몰살을 당하는 것은 강 위에 떠 있던 조조의 군사들뿐만이 아니 었다. 뭍에서도 강물 위에서와 못지않은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뭍에 있는 조조의 진채를 가장 먼저 덮친 동오의 장수는 감녕이 었다. 감녕은 거짓으로 항복해 온 채중을 앞세워 조조군 진채 깊숙 이 들어선 뒤 한칼에 채중을 베어버렸다. 이제 더는 쓸모가 없어진 그를 미리 주유가 일러준 대로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떠 나올 때 미리 주유에게서 받은 군령대로 마른 풀과 짚 검불을 모아 조조의 진채에 불을 질렀다.

여몽은 조조의 진채 안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보자 여기저기 불을 놓아 감녕과 접응했다. 반장 동습도 군사를 나누어 불을 지르고 함성을 울리며 조조군의 진채로 덮쳐갔다.

그렇게 되니 사방에 보이는 것은 모두 오군이 지른 불길이요, 들 리는 것은 천지를 뒤흔드는 북소리와 함성이었다. 강 위에서 이미 반나마 넋을 잃은 조조는 더욱 어찌할 줄을 몰랐다. 평소의 냉철함 이나 임기응변의 재치는 다 어디 갔는지, 불길 속을 뚫고 달아나기 바빴다. 그런 조조를 따르는 것은 겨우 장요가 이끄는 백여 기뿐이 었다.

그러나 워낙 사방이 불길이라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빠져나 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곳이 없이 이리저리 내닫고만 있는데, 모개가 문빙을 구해가지고 수십 기만 이끌고 조조를 찾아왔다. 수만이나 되 던 수군 중에서 간신히 적병과 불길을 벗어나 강 언덕에 이른 숫자 였다.

조조는 그들을 보자 한심한 가운데도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그러 나 당장 급한 것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적군과 불길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모두들 이곳을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아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조조가 군사들을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장요가 한군데 불길이 뜸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오림으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땅이 넓고 비어 있으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가 보기에도 그 길밖에 없을 것 같았다.

“좋다. 오림으로 가자!”

조조는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지름길을 찾아 오림으로 달아났다. 호랑이 같은 장수 천 명에 날랜 군사 백만을 호언하던 대군 중에서 조조를 뒤따르는 것은 겨우 장요, 문빙, 모개 세 장수에 군사 백여 기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미처 적벽을 벗어나기도 전에 뒤쫓는 적군이 있었다.

“조조 이 역적 놈아,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그 같은 고함과 함께 뒤따르는 적군의 기치를 보니 여몽이 이끄 는 군사였다. 조조는 장요를 남겨 뒤쫓는 적을 막게 하고 나머지 군 마를 휘몰아 앞으로 내달았다. 다시 앞쪽에서 불이 일며 산골짜기로 부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섰거라! 능통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앞선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조조는 놀란 나머지 간이 철렁 떨어 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황망히 서 있는데 홀연 산비 탈에서 또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내려왔다. 조조는 그게 적인 줄 알 고 눈앞이 아득했다. 그때 앞선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승상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서황이 여기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했다. 이어 어울 린 양군은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조조가 얻은 것 은 겨우 북쪽으로 달아나는 한 가닥 길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한 떼의 군마가 산 언덕에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겁부터 집어먹은 조조를 제쳐놓고 서황이 나가 물 었다.

“너희들은 무엇이냐?”

다행히도 그들은 원소에게서 항복해 온 장수인 마연과 장의가 이 끄는 군사들이었다. 삼천 군마를 이끌고 그곳에 진채를 벌이고 있던 마연과 장의는 대채 쪽에서 하늘 가득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았으 나, 내막을 알 길이 없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알맞게 조 조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대들 둘은 일천 군마를 이끌고 앞서서 길을 열라!”

조조는 그렇게 영을 내리고 남은 군마들은 모두 자신을 호위케 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서황이 나타나고, 또 마연과 장의의 삼천 군 마까지 만나게 되고 보니 다소 힘이 솟고 마음이 놓였다.

조조의 영을 받은 마연과 장의는 우쭐해졌다. 가만히 있다가 뜻밖 에도 큰일을 맡게 된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한번 공을 세워볼 기회라 생각하고 나는 듯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미처 십 리도 가기 전 에 한 떼의 군마가 함성과 함께 나타나 그런 그들의 길을 막았다. “나는 동오의 감녕이다. 어디를 감히 빠져나가려느냐!”

앞선 장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마연이 먼저 나서서 감녕과 겨루려 했다. 하지만 욕심만큼 솜씨가 따라주지 못하니 어쩌 겠는가. 몇 번 창칼이 부딪기도 전에 마연은 감녕의 칼에 동강나 말 아래로 떨어졌다.

마연이 죽는 걸 보고 이번에는 장의가 창을 꼬나 잡고 감녕에게 덤볐다.

“이놈! 네 감히 나와 맞서보려느냐?”

감녕이 그런 장의를 보고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컸던지 벌써 반나마 넋이 나가버린 장의는 손발조차 제대로 놀려보지 못하고 감녕의 한칼에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두 장수가 죽는 걸 본 군사들은 혼비백산 되돌아가 조조에게 그 일을 알렸다. 이때 조조는 합비 쪽을 바라보며 구원병이 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육손과 태사자의 군사들이 먼저 몰 려왔다. 합비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던 손권이 멀리 강물 위에서 불 길이 솟는 걸 보고 육손에게 불로 신호하게 하여 태사자를 부른 다 음, 두 사람이 이끄는 군사를 합쳐 그리로 보낸 것이었다. 강물 위에 불길이 인 것을 자기편의 화공이 바로 들어맞음을 알고 패한 조조가 쫓겨올 길을 헤아려 취한 조처였다.

육손과 태사자의 군사들이 몰려오는 걸 본 조조는 싸움 한번 하 지 않고 바로 말 머리를 돌려 이름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다시 적지 않은 군사가 꺾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도중에 장 합을 만나 얼마간의 군사가 보태어졌다.

조조는 장합에게 뒤쫓는 적병을 맞게 하고 자신은 말을 채찍질해 이릉 쪽으로 내달았다. 정신없이 달린 조조는 오경이 되어서야 비로 소 뒤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차차 멀어지고 뒤쫓는 군사의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지옥 같은 적벽을 벗어난 듯했다.


이른바 적벽대전(赤壁大戰)이란 것은 좁은 의미로서는 여기서 일 단 매듭이 진다. 그런데 읽는 이의 흥을 깨뜨리는 일이 될지 모르지 만, 이쯤에서 한번 정사를 더듬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일 성싶다. 『연 의』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난 부분 가운데 하나인 만큼 역사적인 진실을 알아두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먼저 살펴보고 싶은 것은 양편의 정확한 세력[戰力]이다. 『연의』 에서 조조의 군사는 흔히 백만으로 불리고 있고, 제갈량에 의해 과 장될 때는 백오십만, 주유에 의해 과소평가될 때도 형주에서 새로 얻은 군사 팔만을 빼고 이십삼만 명이었다. 그러나 사가들은 대략 조조의 군세를 이십오만 내외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유비, 손권의 군사는 『연의와 정사가 대략 일치하여 오만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양쪽의 군세는 흔히 말하듯 이십 대 일 또는 십칠 대 일이 아 니라 오대일 정도였다. 거기다가 조조의 군사는 태반이 원소와 유 표에게서 항복해 온 군사여서 믿을 수가 없었고, 순수 북방의 군사들 은 또 태반이 병에 걸려 실제 전력은 유비와 동오 연합군의 두 배를 크게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게 전쟁사가들의 통상적인 견해다. 그다음은 적벽대전 전의 양상이다. 『연의』는 양군이 오래 대치하 여 갖은 준비 끝에 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사는 손권이 유비를 시켜 합비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싸움이 시작되고 적벽에 이르러 바 로 끝난 것으로 되어 있다.

셋째로 살펴볼 것은 남북 양쪽에서 싸움 전야에 펼치고 있는 현 란한 계략들이다. 먼저 주유가 장간을 이용해 채모와 장윤을 죽인 것은 정사에는 없다. 다만 「강표전(傳)에서 인용한 주에 장 간이 주유를 달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조조편의 채중과 채화의 거짓 항복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일련의 사 건인데, 적어도 정사에는 채중과 채화란 인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다음은 방통의 연환계連環) 정사 어디에도 방통이 조조를 찾아가 배들을 쇠사슬로 얽어두라는 계책을 일러주었다는 말은 없다.

조조의 수군이 배를 서로 얽은 것은 배 멀미를 줄이기 위해 자체 로 짜낸 방책이었다. 감택이 강을 건너 조조에게로 가서 그럴싸한 말로 황개의 항복을 믿게 하는 것도 꾸며낸 이야기다. 황개와 주유 가 꾸민 고육계도 마찬가지. 정사에는 전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토록 현란하게 오간 계략 중에서 유일하게 정사에 들어맞 는 것은 황개의 사항 하나뿐이다.

네 번째로 더듬어보고 싶은 것은 제갈량의 역할이다. 제갈량이 손 권을 설득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저항하게 한 것을 빼면 『연의』에 나오는 활약은 거의가 꾸민 이야기다. 주유와 주고받는 머리싸움도 그러하거니와 조조에게서 화살을 얻어온 일이며 동남풍을 비는 제 사 등에서는 어떤 요기(氣)까지 느껴지게 한다. 남쪽 지방에 오래 살며 계절과 기후를 세밀히 관찰해서 얻은 지식이 과장된 나머지 그 렇게 꾸며진 것이리라.

다섯 번째는 유비의 역할이다. 『삼국지』위지(魏志) 무제(武帝 記)에는 적벽에서 조조와 싸운 사람을 유비로 적고 있고, 조조의 수 군을 불태운 것도 유비였다고 주에 나와 있다. 가장 우두머리만 적다 보니 주유, 황개 등이 빠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적어도 『연의』 에서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적벽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여섯 번째로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화공 전술의 출처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과 주유의 공동 작품으로 되어 있으나, 정사의 기록은 공을 오직 황개에게만 돌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것은 그 싸움에 대한 평가이다. 조조 쪽으로 보면 뼈아픈 일패(敗)였으나 『연의』에서 보는 것처럼 그 패배가 그렇게 부끄럽고 참담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군세 (軍勢)에 있어서도 조조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것만은 아니었으며, 지략의 싸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조 아래도 여러 모사가 있었으 나 적벽대전에 참가한 모사는 정욱과 순유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제갈량, 주유, 방통, 노숙을 비롯한 당대 일류의 병 가들을 거느린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비와 젊은 패기의 손권이었 다. 그 점에서는 조조가 이겼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싸움이었다. 거 기다가 조조의 패배도 싸움에 불리하여 약간의 타격을 받고 물러났 다는 정도이지 백만 대군이 겨우 몇백 기만 돌아갔다는 식은 아니 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음미해보고 싶은 것은 작가의 사관과 정통성의 문제이다. 혈통만이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징표라는 관 점에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앞세우다 보니 유비 쪽의 승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조조의 패배는 그토 록 치욕스럽고 참담하게 꾸며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아무도 그런 『연의』의 저자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는 그가 살았 던 시대의 보편적인 관점에 따라 정통성을 부여했고, 그 정통성에 따라 얘기를 꾸며나갔을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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