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1화 : 위공(公)도 서쪽으로 눈을 돌리고
위공(公)도 서쪽으로 눈을 돌리고
어쨌든 조조가 한창 문덕(德)을 쌓기에 힘쓰고 있을 때 시중 벼 슬에 왕찬粲), 두), 위개(衛凱), 화흡(和) 네 사람이 있었 다. 이들은 조조의 위세가 날로 더해가는 걸 보고 조조를 높여 위왕 (魏王)에 앉히려는 의논을 꺼냈다. 중서령으로 있던 순유(荀)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아니 되오. 승상은 이미 위공(公)으로 오르신 데다 구석(錫) 까지 더해져 벼슬로는 더할 나위가 없는 자리에 이르셨소. 그런데 다시 승상을 왕으로 높이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못 되오.”
조조의 모사 중에는 원로 축에 드는 순유가 그렇게 말리자 조조 를 위왕으로 받들자는 의논은 쑥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발 없는 말 이 천리를 간다고, 그 소문은 곧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일부러 그런 공론을 꾸미기라도 할 판에 왕찬 등이 절로 만들어준 호기를 순유가 가운데서 가로막아버렸다는 소리에 조조는 크게 노했다.
“이 사람(순유)이 또 순욱을 흉내 내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그렇게 소리치며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 소문을 들은 순유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욱이 조조 의 교묘한 강압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 는 일이었다.
‘이 사람의 야심이 남다른 줄은 알았지만 이렇도록 엄청날 줄은 몰 랐다. 이미 왕위를 넘본다면 천자의 자린들 넘보지 못할 게 무엇이 랴. 이제 그런 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제 명에 죽기는 글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에 못지않게 울분이 차올랐다. 한평생 그를 위해 일한 것이 결국은 역적질을 도운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 여 그 걱정과 울분은 병이 되고, 마침내 자리에 누운 순유는 채 보름 이 안 돼 죽고 말았다.
나이 쉰여덟이라면 그때로 봐서는 그리 이른 죽음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조조가 첫손 꼽는 모사들 가운데 하나였던 이의 죽음 치고 는 너무도 허망했다.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조조도 막상 순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어려운 고비마다 지혜와 정성을 다해 자신을 도와준 그를 새삼 아까워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뿐 만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목숨을 상해가며 말리고자 하던 일도 조용 한 마음으로 돌이켜보았다.
‘순유 같은 사람까지 이토록 안 된다고 나선다면 아직 왕위로 나갈 때는 아닌 듯하다. 내가 너무 서둘렀다. 기다리자. 일생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두름 때문에 일을 망치지는 말자.’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조조는 그후 누구도 자기를 위왕으로 떠받드는 의논을 다시 꺼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조 조의 위세는 왕은커녕 천자도 미처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조조가 여느 때처럼 칼을 차고 들어가 니 마침 헌제와 마주앉아 있던 복후(伏后)가 놀란 기색으로 몸을 일 으켰다. 겨우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헌제도 조조를 두 려워하기는 황후나 크게 다름이 없었다. 조조를 마주하는 눈빛이 너 무도 겁에 질려 있어 보는 사람이 측은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손권과 유비가 각기 일방을 차지하고 앉아 조정의 명을 거스르 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조조가 짐짓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헌제에게 물었다. 헌제는 그럴수록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제는 몸까지 후들후들 떨며 대답 했다.
“모든 일은 그저 위공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러자 문득 조조의 얼굴에 성난 기색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바깥 사람들은 모두 이 조조가 임 금을 속인다고 수군거립니다. 모든 걸 제가 멋대로 처리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조조의 방자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언행 같지만, 사실 이해하려고만 들면 그런 조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 니다. 조조가 일생을 통해 높이 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굳센 정신력과 자긍이었다.
그런데 헌제는 불행히 그 어느 편도 갖추지 못했다. 언제나 조조 의 눈치만 살피며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데만 급급하니 천자이 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도 헌제는 이미 조조에게 감출 수 없는 환 멸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듣기에 따라서는 뼈아픈 소리일 수도 있었으나, 헌제는 반발은커녕 목소리까지 떨며 오히려 사정하듯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만약 승상께서 이 몸을 도와준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거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부디 은혜를 드리워 이 몸을 버려주시길 빌 뿐이외다.”
모든 것은 그대에게 달렸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 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더욱 화가 났다. 문득 그런 태도야말로 헌 제가 고를 수 있는 가장 나은 계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 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나오면 내 생전에는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이 천하의 조조가 어찌 작은 저항도 없는 적을 칠 수 있단 말 인가.’
조조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욱 헌제가 밉살스러웠다. 조심 성을 잃었다기보다는, 그렇게라도 그 무력하고 나약한 적을 자극해 볼 양으로, 전에 없이 험하게 헌제를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바로 곁에서 천자를 모시는 사람들의 눈에도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짓거리였다. 그들 중 하나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헌제에게 일러바쳤다.
“요사이 듣자 하니 위공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일을 꾸미고 있다 합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천자의 자리를 도둑질하려 들 것이니, 폐 하께서는 부디 알아서 처결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아무리 뼈 없는 사람인 양 살고 있는 천자라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헌제는 그렇게 탄식하며 복황후의 손을 부여잡고 소리 높여 울었 다. 함께 울던 복황후가 문득 눈물을 거두며 말했다.
“저희 아비 복완(伏完)에게는 언제나 조조를 죽여 이 나라의 걱정 거리를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글 한 통을 써서 저의 아비에게 내리고 조조를 없앨 계책을 짜보게 함 이 어떻겠습니까?”
여자의 앙칼짐이 먼저 조조를 겨냥한 비수를 뽑은 것이었다. 헌제 는 여전히 눈물을 쏟으며 걱정부터 먼저 늘어놓았다.
“지난날 동승(承)이 같은 일을 꾸몄으나 그 실행이 치밀하지 못 해 오히려 조조에게 큰 화를 당하였소. 이번에 또 일이 잘못되어 조 조의 귀에 먼저 들어가게 된다면 이 몸과 황후는 모두 살아남지 못 할 것이오!”
“아침저녁을 보내기가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하니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일찍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제가 살피건대,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벼슬아치들 중에서 그 충의를 믿어 일을 시킬 만한 이로는 목순(順)만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글을 주어 제 아비에게 전하게 한다면 결코 그릇됨이 없을 것입니다.”
복황후가 그렇게 헌제를 격려했다. 헌제도 다시 생각해보니 목순이라면 그만 일은 해낼 듯도 싶었다. 이에 곧 사람을 보내 목숨을 불 러오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두 번의 큰 반(反)조조 거 사가 모두 황후의 인척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동귀비의 아버지인 동승에 의해 주도되고 두 번째인 이번은 복황후 의 아버지인 복완을 중심으로 이뤄지려 하고 있다.
헌제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느낄 수 있는 자리가 황후의 자리라 얼핏 보아서는 그게 당연할 수도 있으나, 그 뒤에는 실로 후 한 이백 년의 가장 큰 고질 중에 하나가 숨어 있었다. 곧 환관과 외 척은 후한 황실을 안으로부터 병들고 썩게 한 고질 중의 고질이었는 데, 환관세력은 원소 형제에 의해 일소되었으나 외척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황후가 있는 한 외척이 없을 수 없고, 또 그 외척은 이백 년 전통대로 무슨 기득권을 되찾듯 나라의 대권을 은연중에 노리고 있 었다.
따라서 그런 외척들에게는 조조가 눈에 든 가시 같은 존재가 아 닐 수 없었다. 그것은 동시에 조조 쪽에서도 언제나 그들 외척에 대 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거기서 외척의 주도에 의한 반조조 운동과 조조에 의한 사전 분쇄라는 형태의 참사 가 거듭 반복되게 된다.
목순이 오자 헌제와 복황후는 좌우의 근시들을 물리치고 병풍 뒤로 그를 불러들였다. 대궐 안에 풀어둔 조조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역적 조조는 스스로 위왕이 되려 하고 있다 하니 이는 오래잖아 반드시 천자의 자리까지 뺏을 속셈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짐은 황후의 아비 되는 복완에게 영을 내려 가만히 이 역적을 치게 하려 는 바이다. 그러하되 좌우를 둘러봐도 모두 역적의 심복들뿐이라 믿 고 그 명을 복완에게 전하도록 시킬 만한 사람이 없다. 이제 그대에 게 한 통 황후의 밀서를 맡겨 복완에게 전하려 하니 부디 그대는 그 대의 충의를 믿는 짐의 간곡한 청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헌제와 복황후는 목순을 보자 한바탕 다시 통곡한 뒤 그렇게 당 부했다. 목순 또한 눈물을 쏟으며 대답했다.
“신은 폐하의 크신 은덕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어찌 죽음으 로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 맡겨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이에 복황후는 그 자리에서 한 통 밀서를 써서 목순에게 주었다. 목순은 그 글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고 금궁(宮)을 빠져나가 복완 의 집으로 달려갔다.
목순이 전해주는 편지를 받은 복완은 한눈에 딸의 친필을 알아보 았다. 서둘러 읽기를 끝낸 뒤 목순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조는 심복으로 부리는 무리가 매우 많아 급하게 도모하기는 어렵네. 강동의 손권과 서천 유비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 이야. 그 둘이 밖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조조는 틀림없이 스스로 앞 장서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때 조정의 충의로운 신하들을 모아 일을 꾀해보도록 하세. 안팎에서 힘을 합치면 아니 될 일이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다시 황후께 글을 올려 손권과 유비에게 내릴 밀조를 받아내도록 하십시오. 그걸 몰래 오(吳)와 촉(蜀)으로 보내 약조를 맺고 군사를 일으키게 한다면, 역적을 죽이고 폐하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목순이 그렇게 꾀를 보탰다. 그 말을 옳게 여긴 복완은 곧 붓을 들 어 황후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걸 목순에게 주며 황후에 게 전하게 했다. 목순은 이번에도 글을 머리카락 속에 깊이 감추고 복완의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때 이미 목순의 모든 행동거지는 낱낱이 조조의 귀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지 않아도 황후의 피붙이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 리하지 않고 있던 조조는 목순이 무언가 헌제의 밀명을 받고 궁밖 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자 담박 예사롭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했다. 이에 조조는 모든 걸 제쳐놓고 몸소 궁문으로 나가 목순 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궁문 앞에서 뜻밖에도 조조와 마주친 목순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조조 앞을 지나려 했다. 조조가 그런 목순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갔다 오는가?”
“황후마마께서 편찮으시어 의원을 찾아갔다 오는 길입니다.”
목순이 얼른 둘러댔다. 그러나 조조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잠시 목순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부르러 갔던 의원은 어디 있나?”
“아직 이곳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목순은 여전히 그렇게 둘러댔으나 목소리는 이미 전 같지가 못했다. 조조가 무슨 낌새를 느꼈던지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명했다.
“저 사람의 몸을 뒤져보아라.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있으면 내게 가져오도록 하라.”
그 말에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목순의 몸을 구석구석 뒤졌 다. 그러나 옷솔기며 띠 속까지 주물러 보았지만 아무것도 이상스런 물건은 없었다. 미심쩍기는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조조도 더는 어 쩌는 수가 없었다.
“너무 괴이쩍게 생각하지 말게 들은 말이 있어 그랬을 뿐이네.”
겸연쩍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목순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한실의 불운일까, 조조의 행운일까. 겨우 시름을 놓은 목 순이 막 발걸음을 옮겨놓은 때였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목순의 사모를 날려버렸다. 놀라 사모를 집는 목순을 조조가 다시 불렀다.
“잠깐 이리 오게. 그 사모 속을 좀 봐야겠네.”
몸은 샅샅이 뒤져도 사모 속은 살펴보지 않은 걸 문득 떠올린 조 조가 그렇게 말했다. 조조의 눈길이 머리께로 쏠리자 목순은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사모 속에는 아무것도 없건만 그걸 바치는 손끝이 절로 떨렸다.
조조는 날카로운 눈으로 목순의 사모 속을 살폈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사모를 목순에게 돌려주었다.
사모를 돌려받은 목순은 급한 김에 두 손으로 받쳐들고 머리에 덮어씌웠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둔 복완의 편지가 걱정이 되어 그런 것이지만 거기서 다시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서둘다가 사모를 거 꾸로 써버린 것이었다.
그걸 보던 조조의 두 눈이 번쩍했다. 목순이 그토록 황망해하는 것으로 미루어 찾는 것은 틀림없이 머리께에 숨겨둔 것 같았다.
“저자의 머리카락 속을 뒤져보아라!”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던 조조가 문득 알겠다는 듯 차갑게 웃으며 영을 내렸다. 군사들이 다시 목순을 잡아 목순의 머리를 뒤지자 과 연 감추어져 있던 복완의 편지가 나왔다. 유비와 손권이 밖에서 호 응하도록 밀조를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읽기를 마친 조조는 크게 노했다. 곧 목순을 잡아 외진 방으로 옮 기고 엄하게 문초를 해보았지만 목순은 얼른 입을 열지 않았다. 급 해진 조조는 목순의 자백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날 밤으로 갑병(甲兵) 삼천을 뽑아 복완의 집을 에워싸게 한 뒤 늙 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복완의 가솔은 한 사람 남김없이 잡아들이는 한편 집 안을 이 잡듯이 뒤지게 했다.
그러자 거기서 다시 미처 감추지 못한 복황후의 친필이 나왔다. 그것마저 읽은 조조는 그대로 일의 전모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듯했 다. 이에 조조는 다시 군사를 풀어 복씨(伏) 삼족을 모조리 잡아 가둠으로써 만일에 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밝았다. 조조는 그제야 대궐로 눈을 돌렸다.
먼저 어림장군 극려(那慮)를 보내 황후의 옥새부터 거두어오란 영을 내렸다.
이날 헌제는 외전(外殿)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 일찍 극려가 갑병삼백을 거느리고 달려들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러는가?”
“위공의 명을 받들어 황후의 옥새를 거두러 왔습니다.”
극려가 거리낌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헌제는 금세 황후와 꾸민 일이 조조에 들켰음을 알아차렸다. 심장이 쪼개지고 간 담이 부서지는 듯 눈앞이 아뜩해 극려의 무례함을 꾸짖는 것조차 잊 어버렸다.
극려가 후궁에 이르렀을 때 복황후는 막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 다. 극려는 황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새를 간수하는 궁녀를 호 령해 황후의 옥새를 거두더니 바람처럼 돌아가버렸다. 그걸 본 복황 후도 일이 이미 조조에게 들킨 걸 알았다. 두렵고 급한 김에 황후의 거실 [房] 담벽 사이에 난 좁은 틈에 몸을 숨겼다.
오래잖아 이번에는 상서령 화흠이 갑병 오백을 거느리고 후 궁으로 들이닥쳤다. 화흠은 영문도 모르는 채 떨고 있는 궁녀들을 잡고 물었다.
“복황후는 어디 있느냐?”
궁녀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결같이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러 자 화흠은 무엄하게도 군사들을 호령해 황비가 거처하는 방문을 때 려부수게 하고 그 속을 뒤져보았다. 문이 잠긴 것으로 보아 틀림없 이 안에 있을 줄 알았으나 복황후는 거기도 없었다.
잠시 방 안을 훑어보던 화흠이 문득 소리쳤다.
“벽을 허물어보아라. 어딘가 두 겹진 벽 틈에 숨었을 것이다.”
오래 대궐을 들락거리다 보니 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연 한군데 벽을 허무니 사람이 숨을 만한 틈이 나오고, 거기에 한 여자
가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화흠은 그게 복황후인 줄 알면서도 손 으로 머리채를 휘감아 끌어냈다.
“부디 이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복황후가 화흠에게 매달리며 애걸했다. 화흠이 그런 복황후를 뿌리치며 소리 높여 꾸짖었다.
“그럴 짓을 왜 했소? 당신이 스스로 위공에게 가서 빌어보시오!”
화흠이 그러하니 그를 따라온 군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풀 어헤친 머리에 맨발인 복황후를 개 끌듯 끌고 조조에게로 데려갔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만큼이나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화흠이란 인물이다. 원래 화흠은 그 뛰어난 글로 일찍부터 이름을 얻은 사람이었다. 당시의 재사才士)들인 병원(原), 관녕(管寧)과 매우 가까운 벗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들 셋을 합쳐 한 마리 용 이라 불렀다. 화흠은 그 용의 머리며 병원은 배며 관녕은 꼬리에 비 긴 것으로 보아 셋 중에 재주가 가장 나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재주는 사람됨과 무관한 탓인지, 그의 삶은 그의 글이 얻은 이름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아직 화흠이 초야에 묻혀 있을 때의 일이었다. 화흠이 관녕과 함께 채소 씨앗을 묻으려고 호 미질을 하고 있는데 땅에서 난데없이 금덩이가 하나 나왔다. 관념은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는 선비답게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호미질 만 계속하며 그 금덩이를 지나쳤다. 그러나 화흠은 그 금덩이를 주 워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야 땅에 던져버렸다.
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역시 관념과 함께 방 안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문밖에 귀인(貴人)이 지나가는지 행차 소리가 요란했 다. 이번에도 관녕은 그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책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으나 화흠은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보면 화흠이 훨씬 더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오히려 관녕이야말로 지나친 엄숙주의자며 자신의 감정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썩은 선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관념은 그 두 가지 일이 있은 뒤로 화흠을 비루한 인간이라 보았다. 어쩌다 만나도 자리를 나누어 따로 앉고 다시는 그와 벗 되기를 마 다하였다.
그러나 그게 한낱 가식이나 감정의 과장이 아님은 그 뒤 그가 보 여준 삶에서 명백하다. 세상이 점차 어지러워지자 관녕은 멀리 요동 으로 몸을 피해 숨어 살았는데 그 삶은 선비적 결벽의 극치라 할 만 했다. 누각 하나를 빌려 그 위에 살며 다시는 조조의 땅을 밟지 않았 고, 또 머리에는 항시 흰관을 써 망해버린 한실을 조상했다. 죽는 날까지 불의한 위(魏)에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에 비해 일찍부터 재물과 권세에 연연해하던 화흠은 벼슬을 구 해 먼저 손권에게로 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조조에게로 돌아섰다. 그 리고 그때에 이르러서는 조조의 총애를 얻는 데 눈이 멀어 글 읽은 선비로서는 차마 못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었다. 얄팍한 합리나 대세 또는 실리를 앞세워 화흠을 변호해주고 싶은 이들을 위해 뒷사람이 화흠을 탄식한 시를 옮긴다.
그날의 화흠 끔찍도 하구나. 華歆當日逞兇謀
벽을 부수어 황후를 끌어냈네. 破壁生將母后收
악을 도와 범에 날개를 더하니 助虐一朝添虎翼
드높던 그 이름 천년의 웃음거리일 뿐이네. 罵名千載笑龍頭
아울러 화흠을 변호할 때와 마찬가지 이유로 관녕을 나무라거나 비웃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는 뒷사람이 관념을 기린 시 한 편을 옮 긴다.
요동에 있다는 관녕루, 遼東傳有管寧樓
사람 가고 누각 비어도 이름은 남았네. 人去樓空名獨留
부귀를 탐한 화흠이 우습구나. 笑殺子愉貪當貴
흰관 쓴 풍류에 어찌 비하리. 豈如白帽自風流
그 화흠이 복황후를 끌고 외전 앞에 이르니 거기 있던 헌제가 달 려내려와 복황후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화흠이 그런 헌제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위공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급히 가야 하니 어서 비키십시오.”
이에 헌제가 움찔해 물러나니 복황후가 슬피 울며 작별했다.
“이제 살아서는 다시 폐하를 모실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내 목숨 또한 어느 때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구려. 무력한 이 몸이 한탄스러울 뿐이오!”
헌제가 그렇게 탄식하는데 갑사(甲)들은 거기에 아랑곳없이 복 황후를 끌고가버렸다. 헌제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곁에 있던 극 려에게 푸념했다.
“극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실로 피눈물 나는 정경이었으나 극려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땅 을 치며 우는 황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좌우를 시켜 궁 안으로 부 축해 들이게 했다.
이때 화흠은 복황후를 끌고 조조 앞에 이르렀다. 조조가 성난 얼 굴로 꾸짖었다.
“나는 너희들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했건만 너희들은 오히려 나 를 해치려 드는구나!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반드시 나를 죽 이게 될 것이다.”
이미 황후고 뭐고가 없었다. 오직 조조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 에게 강력하게 도전해 오는 적대 세력의 핵심인 복(伏)아무개일 뿐 이었다.
‘내가 천하 사람들을 모두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은 아 무도 나를 저버리지 못한다. ‘일찍이 죄 없는 여백사(呂伯)를 베면 서 그렇게 외치던 조조가 아니었던가.
“여봐라, 저년을 때려죽여라!”
이윽고 조조의 매서운 영이 떨어지고 이어 복황후는 어지러이 떨 어지는 몽둥이 아래 원통한 넋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조는 거기 서 그치지 않았다. 복황후의 숨이 끊어지기 바쁘게 궁궐 안으로 달려가 그녀의 소생인 두 왕자마저 짐(새의 독을 먹여 죽여버렸다.
뒤이어 남은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 목순은 말할 것도 없 고 그 가족 이백여 명도 모조리 저잣거리로 끌어내어 목을 베니, 그 걸 본 모든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해 마지않았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조조의 끔찍하고 모짊을 욕하고 복완의 충의를 노래했다.
그러나 조조가 한 일이 지나쳤다 해서 복완이 곧 충의의 사람이 라 단정할 수 있을까. 악인에게 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선 인(善人)이라 믿는 것이야말로 선악의 지나친 양분법이 아닐까.
헌제는 복황후가 죽은 뒤로 연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슬퍼만 했다. 조조가 그런 헌제를 찾아보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결코 딴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기다가 신의 딸이 이미 귀인이 되어 폐하를 모 시고 있는 바 매우 어질고 효심이 갸륵합니다. 정궁(正宮)으로 거두 어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두 번이나 외척들의 도전을 받아서인지 조조는 아예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스스로 국구가 되겠다고 나섰다. 헌제는 기가 막혔으 나 아니 따를 수가 없었다. 건안 이십년 정월 조조의 딸을 귀인에서 올려 황후로 책봉했다. 그 일에 대해 말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조조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억눌렀다.
그렇게 되니 조조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더 높아갔다. 조조는 다
시 눈을 바깥으로 돌려 오와 촉을 쳐 없앨 궁리로 의논하는데 가후 가 먼저 일어나 말했다.
“이 일은 하후돈과 조인을 불러들인 뒤에 의논함이 좋겠습니다.”
하후돈과 조인은 그때 모두 서쪽 변경을 맡아 지키고 있었다. 가 후가 그들을 불러들이라 한 것은 먼저 서쪽의 사정을 살핀 뒤에 계 책을 결정하자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조조는 그날 밤으로 사람 을 보내 하후돈과 조인을 불러오게 했다.
먼저 허도로 돌아온 것은 조인이었다. 조인은 밤을 꺼리지 않고 곧바로 승상부로 가 조조를 만나보려 했다. 그때 마침 조조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허저가 칼을 짚고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안 으로 들어가려는 조인을 가로막았다.
조인이 벌컥 성을 내어 소리쳤다.
“나는 같은 조씨(曹氏)로 형님을 뵈러 가는 중이다. 그대가 어찌 감히 나를 가로막는가?”
그러자 허저가 정색을 하고 맞받았다.
“장군은 비록 승상의 친척이나 지금은 나라 밖을 지키는 관원이 요, 나는 남이라도 안에서 승상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소. 주공께서 취해 누우신 방안으로는 누구도 함부로 들여놓을 수 없소이다.”
허저가 그렇게 나오니 조인도 더는 어거지를 부리지 못했다. 그대 로 방문 밖에서 조조가 깨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일을 들은 조조가 허저를 칭찬했다.
“참으로 충성스런 사람이로구나!”
조인이 온지 며칠 뒤 하후돈도 허도에 이르렀다. 조조는 조인과 하후돈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오와 촉을 없앨 의논을 시작했다. 하후 돈이 진작부터 생각해온 게 있는지 남 먼저 나서서 말했다.
“오와 촉은 갑작스레 쳐 없애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한중을 먼저 쳐서 장로를 이긴 뒤에 촉을 공격하도록 하십시오. 촉까지 얻은 뒤에 남으로 향하면 북소리 한번에 오를 쳐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후의 마음속에 있던 것도 그와 같은 계책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내 뜻과 같네.”
그러고는 곧 서쪽으로 낼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는 서정군(西征軍)을 세 부대로 나누었다. 전부는 하후연과 장합을 선봉으로 삼고, 조조 스스로는 여러 장수와 함께 중군이 되 었으며, 후부는 하후돈과 조인을 맡겨 대군이 쓸 군량과 말먹이 풀 을 대게 했다.
세작들이 얼른 그 소식을 한중으로 전했다. 장로는 아우 장위(張 衛)와 더불어 조조를 물리칠 의논을 했다. 장위가 제법 식견 있는 체 나섰다.
“우리 한중에서 험하기로는 양평관을 따를 만한 곳이 없습니다. 관 좌우의 산과 숲에 기대 여남은 데에 진채와 책(柵)을 세워 조조 의 군사를 막는다면 이 땅을 지키는 일도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 니다. 제가 그리로 가볼 것이니 형님은 한중에 남아 계시면서 군량 과 말먹이 풀이나 넉넉히 대어주십시오.”
장로가 들어보니 그럴듯한 방도였다. 그 말에 따라 대장 양앙(楊 昻), 양임(楊任)과 아우 장위에게 군마를 주어 그날로 양평관을 향해 떠나게 했다.
장위가 양앙, 양임과 더불어 양평관에 이르러 진채를 막 세우고 났을 무렵 조조의 선봉인 하후연과 장합의 군사들이 이르렀다. 하후연과 장합은 적이 미리 와서 기다리는 걸 보고 관에서 시오리 떨어 진 곳에다 진채를 세우게 했다.
그날 밤이었다. 먼 길을 막 도착해 피곤한 조조의 군사들은 진채 가 세워지자 모두 그 안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 진채 뒤에서 불이 일며, 양앙과 양임이 두 갈래로 군사를 몰고 짓쳐들었다. 하후 연과 장합이 급히 말에 올라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대군이 덮친 뒤 라 잘 되지 않았다. 사방에 들리느니 적의 함성이요, 보이느니 쫓기 는 자기편 군사였다. 조조군의 대패였다.
하후연과 장합은 하는 수 없이 말 머리를 돌려 뒤따라오는 조조 의 중군 쪽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성이 나 소리쳤다.
“너희 둘은 이미 여러 해째 싸움터를 오갔으면서 어찌 아직도 병 사가 먼 길을 걸어 피곤할 때는 반드시 적의 진채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느냐? 어째서 진작에 그걸 생각하지 못해 이런 꼴로 돌아왔느냐?”
그러고는 아는 정 보던 정 없이 둘 모두 목을 베어 군법을 밝히려 했다. 여러 장수들이 말려 하후연과 장합은 죽음을 면했으나 조조는 성이 풀리지 않았다. 다음 날 몸소 앞장을 서서 양평관으로 향했다. 양평관에 가까워질수록 산세는 험악해지고 수풀과 나무가 빽빽해 졌다. 길도 잘 모르겠거니와 더욱 겁나는 것은 적의 복병이었다. 이 에 조조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돌려 본채로 돌아왔다.
“이 땅이 이토록 험악한 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군사를 이끌고 오지 않았을 것이네.”
돌아온 조조가 허저와 서황을 보고 푸념하듯 말했다. 허저가 그런 조조를 격려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는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주공께서는 수고로움 을 아끼지 마시고 뜻을 이루도록 힘쓰셔야 합니다.”
조조도 이미 뽑은 칼이라 그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결의를 다졌다.
다음 날 조조는 다시 서황과 허저만을 데리고 장위의 진채와 책 을 살펴보러 나섰다. 그들이 탄 세 필의 말이 험한 산언덕을 하나도 니 저만큼 장위의 진채가 보였다. 조조가 채찍을 들어 그곳을 가리 키며 말했다.
“진채가 저토록 튼튼하니 급작스레 쳐부수기는 어렵겠구나!”
그런데 미처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양앙과 양임이 어느새 조조가 온 걸 알고 길을 나누어 몰려온 것이었다. 자기편은 단 셋뿐인데 적의 대 군이 몰려오니 조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문득 허저가 큰 칼을 꼬나 잡으며 서 황에게 말했다.
“내가 적을 막아보겠소. 서공명(徐公明)은 주공을 잘 지켜주시오!”
그러고는 서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실 로 조조의 호위대장답게 두려움 없는 대응이었다.
허저는 적의 졸개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뜸 장수인 양앙과 양 임에게 덤벼들었다. 양앙과 양임이 힘을 합쳐 허저와 맞섰으나 엄청 난 허저의 용맹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힘이 부쳐 말 머리를 돌리니 나머지 졸개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감히 앞으로 달려 나올 생각도 못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사이 서황은 조조를 보호해 급히 진채로 돌아갔다. 겨우 산 언 덕을 일없이 돌았다 싶을 때 다시 한 무리의 군사가 앞을 가로막았 다. 서황이 놀라 보니 다행히도 자기편인 장합과 하후연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조조가 간 쪽에서 함성이 들리자 급하게 군사를 이끌 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이때 다시 기세를 회복한 양앙과 양임이 허저를 밀어붙이고 거기 까지 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네 장수는 힘을 합쳐 양앙과 양임을 두들겨 쫓고 조조를 구해 본진으로 돌아갔다. 하마터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던 조조는 허저, 서황, 하후연, 장합 네 장수에게 모두 무거운 상을 내렸다.
다음 날부터 양군의 지루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어찌 된 셈인지 조조는 오십여일이나 군사를 내지 않았고, 한중 쪽에서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조가 불쑥 영을 내렸다.
“돌아간다. 모두 군사를 물릴 채비를 하라!”
그러자 가후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조조에게 물었다.
“아직은 적이 강한지 약한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공 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물러나려 하십니까?”
“내가 보기에 적은 매일매일 채비를 새롭게 하고 있어 급하게 이 기기는 어려울 듯하네. 나는 군사를 물리는 체하며 적의 마음이 풀 어지기를 기다려 가벼운 기마병으로 적의 뒤를 칠 작정이네. 그러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이야.”
조조가 빙긋 웃으며 그렇게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가후가 감탄했다.
“승상의 귀신 같은 헤아림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조조도 스스로 흡족해하며 곧 하후연과 장합을 불렀다.
“그대들은 각기 경기輕) 삼천을 이끌고 샛길을 골라 양평관 뒤로 가도록 하라. 적에게 들켜서는 결코 아니 된다.”
그리고 남은 군사들에게는 모두 진채를 뽑고 돌아갈 채비를 하자니 절로 분주하고 떠들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앙은 그 소식을 듣기 바쁘게 양임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조조가 물러가려 한다니 그 틈을 타 들이치는 게 어떻겠소?”
“조조는 매우 속임수가 많은 자외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 니 함부로 뒤쫓아서는 아니 되오.”
조심성 많은 양임이 덤벙거리는 양앙을 말렸다. 그러나 양앙은 듣지 않았다.
“공이 가기 싫다면 나 혼자라도 조조의 뒷덜미를 후려보겠소.”
그렇게 우겨대며 양임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다섯 진채의 군마를 모조리 이끌고 기어이 조조를 뒤쫓으러 나섰다.
그날은 몹시 짙은 안개가 끼어 가까이서 마주보아도 서로의 얼굴 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양앙의 군사는 길을 반도 가기 전에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잠시 행진을 멈추고 쉬었다.
양앙이 그렇게 쉬고 있을 무렵 조조의 밀명(命)을 받은 하후연 은 군사들과 더불어 그 산 뒤쪽을 돌고 있었다. 안개가 사람을 가리 는 물건이 아니어서 그 또한 짙은 안개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안개 속에서 사람의 지껄임과 말울음 소리가 들리는 일이었다. 하후연은 적의 복병이 있는 줄 알고 급히 군사를 몰아대다가 잘 못하여 양앙의 진채 앞으로 나가고 말았다.
겨우 몇 백만 남아 진채를 지키고 있던 양앙의 졸개들은 갑자기 안개 속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리자 양앙이 다시 돌아오는 줄 알고 진채의 문을 활짝 열어 맞아들였다. 그 바람에 쉽게 적의 진채로 몰 려든 조조의 군사들은 진채가 텅 비다시피한 걸 알자 얼른 뺏은 뒤 여기저기 불을 질렀다. 진채를 지키던 양앙의 군사들은 놀라 진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안개는 오래잖아 걷혔다. 쫓겨온 양앙의 졸개들로부터 진채를 뺏 겼다는 소리를 들은 양임은 급히 군사를 몰아 양앙의 진채를 구하러 갔다. 거기 버티고 있던 하후연이 달려 나와 양임을 맞았다. 양임이 힘을 다해 하후연과 맞붙고 있을 때 홀연 등 뒤에서 함성이 일었다. 다른 길로 오던 장합이 다시 적의 진채를 보고 달려든 까닭이었다. 하후연만 해도 벅차던 판에 장합까지 덮쳐오자 양임은 겁이 더럭 났다. 얼른 하후연을 떨쳐버리고 한 줄기 길을 열어 남정)을 바 라고 달아났다.
한편 안개 속을 헤매던 양앙은 뒤늦게야 자신의 진채가 걱정이 되어 그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때는 하후연과 장합이 진채를 차지 하고 들어앉은 뒤였다. 양앙이 그걸 되찾으려고 덤비려 할 때 홀연 등 뒤에서 물러간 줄 알았던 조조의 대군이 몰려왔다.
양앙은 앞뒤로 적을 받아 꼼짝없이 에워싸이고 말았다. 어떻게든 어나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닫다가 장합과 정통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양앙이 힘을 다해 맞서보려 했으나 원래가 장합의 적수는 못 되었다. 장합의 두 손이 퍼뜩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앙은 죽은 몸이 되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양앙의 졸개들은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달아나 양평관으로 몰 려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장위에게 양앙이 죽은 일이며 양임이 달아난 걸 알렸다.
장위는 양앙, 양임이 싸움에 져 죽거나 달아나고 모든 진채와 책 을 조조에게 뺏겼다는 말을 듣자 이미 양평관을 지키기는 글렀다고 보았다. 밤이 깊기를 기다려 관을 버리고 달아나니 조조는 싸움 한 번 않고 그곳을 차지해버렸다.
한편 한중으로 돌아간 장위는 제형 장로 앞에 나가 일러바쳤다.
“양앙과 양임에게 양평관으로 드는 험한 길목을 맡겼으나 둘은 함부로 움직이다 조조의 꾀에 빠져 어이없이 진채와 책을 모두 빼앗 겨버렸습니다. 그곳을 잃고는 양평관을 지킬 수가 없기에 저는 하는 수 없이 밤을 틈타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는 몹시 성이 났다. 싸움에 진 허물을 모두 양임 에게 씌워 그를 목 베려 했다. 다급한 양임은 다시 죄를 죽은 양앙에 게로 돌렸다.
“제가 몇 번이나 양앙에게 조조를 뒤쫓지 말라고 했지만, 양앙이 기어이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제 게 다시 한 갈래 군사를 주신다면 먼저 달려 나가 반드시 조조의 목 을 베어 오겠습니다. 만약 또다시 싸움에 진다면 그때는 어떤 군령 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자 장로도 속이 풀리는지 군령장을 받고 양임에게 다시 군사이만을 내주었다. 양임은 그날로 장로 곁을 떠나 남정 성 밖에 진채를 벌렸다.
한편 첫 싸움에 재미를 본 조조는 다시 하후연에게 군사 오천을 주며 영을 내렸다.
“너는 남정으로 가는 길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
이제 조조의 한중 정벌은 본격적이 되었다. 산세가 험하고 지형이 낯설어 은근히 자신 없어하던 조조였으나, 그 땅을 지키려는 인간들 이 그리 대단찮음을 알자 손댄 김에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까 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