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3화 : 서쪽으로 뻗는 왕기
서쪽으로 뻗는 왕기
다음 날이 되었다. 장송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얼굴로 유장을 보러 들어갔다. 속을 졸이며 기다리던 유장은 장송을 보자마자 물 었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조조는 한실의 역적으로 천하를 뺏으려고 꿈꾸는 자라 더불어 말할 위인이 못 됐습니다. 그는 이미 우리 서천을 뺏을 마음을 먹은 지 오래된 것 같았습니다.”
장송은 조조에게 당한 욕을 분풀이하려는 듯 한껏 헐뜯어 말했다. 조조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던 유장은 그 말에 금세 얼굴이 흐 려지며 거듭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되겠나?”
“주공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어장로와 조조가 우리 서천을 가볍게 침범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계책인가?”
조조를 만나러 가기 전에도 장송이 그런 큰소리를 친 적이 있어 못 미더운지 유장이 살피는 눈으로 장송을 보았다. 장송은 짐짓 씩 씩한 어조로 유장을 안심시켰다.
“형주에 있는 유황숙은 주공과 같은 종친일 뿐만 아니라 사람됨 이 어질고 너그러워 장자(者)의 풍도가 있었습니다. 적벽의 싸움 뒤로 조조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간담이 서늘해진다는데, 하물며 장 로이겠습니까? 주공께서는 유황숙께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으시고, 그분으로 하여금 밖에서 우리를 돕게 만드십시오. 조조와 장로가 한 덩어리로 뭉쳐서 밀려온다 해도 넉넉히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장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 더니 다시 물었다.
“나도 또한 마음속으로는 그리 생각한 지 오래되네. 그런데 사자 로는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법정과 맹달이 아니면 이 일을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장송이 미리 생각해둔 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유장은 그리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이라 좌우를 한번 둘러보지도 않고 법정과 맹달을 불 러들이게 했다.
“법정은 형주로 가서 내가 써준 글 한 통을 유황숙께 전하고 우리 를 도와 서천을 지켜주기를 청하라. 또 맹달은 골라 뽑은 군사 오천을 이끌고 가서 서천으로 들어오는 유현덕을 맞아들이도록 하라. 우리를 위해 싸워줄 사람이니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접해서는 아니된다!”
벌써 유비와 한편으로 굳게 맺어진 사이 같은 말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얼굴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주공께서 장송의 말을 들으시다가는 우 리 서천의 마흔한 고을이 모조리 남의 손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장송이 깜짝 놀라 그 사람을 보니 주부 일을 보는 황권(黃權)이었 다. 황권은 서랑 중파 땅 사람으로 자는 공형(公衡)이라 썼는데 생각 이 깊고 충직스러웠다.
“현덕은 나와 종친이라 서로 힘을 합쳐 이 땅을 지키려는데 그대 는 무슨 까닭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유장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황권이 알아들을 만큼 유장에게 일러주었다.
“저도 유비가 사람을 너그럽게 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유비는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꺾는 사람이니 그를 당해 낼 영웅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 마음을 얻고, 가까이 있는 백성들로부터는 그 기대를 모아들일 뿐만 아니라 부리는 이들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지모 있기로는 제갈량과 방통이 요, 용맹으로는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위연 같은 장수들이 날개처 럼 벌려 섰습니다. 그런 유비를 촉으로 불러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 랫사람으로 부리려 하신다면 그가 몸을 굽혀 섬기지 않을 것이요, 손님으로 대접한다면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는 셈이 됩니다. 몸을 굽히려 들지 않는 사람을 부릴 수는 없으며, 또 한 나라에서 두 주인 이 있을 수도 없으니 부디 저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제 제 말을 들 으시면 우리 서촉은 태산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이요, 듣지 않으시면 주공께서는 달걀을 쌓아둔 것처럼 위태롭게 되실 것입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듣고 있던 유장이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장송은 허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주를 들렀으니 반드시 유비와 무슨 일을 꾸며놓고 왔을 것입니다. 먼저 장송을 목 베시고 이어 유 비와 관련을 끊는다면 우리 서천은 바위 위에 선 것처럼 든든할 것 입니다.”
황권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래도 유장은 그 말이 얼른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오히려 떨떠름한 낯빛을 지으며 황권의 말을 받았다.
“조조나 장로가 쳐들어오면 그때는 어떻게 막는가?”
“변경을 막고 서촉으로 드는 길을 끊은 뒤에 성마다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면 적은 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황권이 옳은 소리를 했으나 유장은 여전히 떨떠름한 낯빛을 고치지 않았다.
“적이 우리 경계 안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눈썹에 불이 붙은 것만 큼이나 다급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이라 하겠는가?”
그러고는 황권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법정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형주로 떠날 채비를 위해 유장 앞을 물러나려는데 다시 한 사람이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아니 되오! 법정을 보내서는 아니 되오이다.”
유장이 보니 종사관으로 있는 왕루(王)였다. 왕루가 별로 달갑 잖은 눈길로 내려보는 유장 앞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오늘 주공께서 장송의 말을 따르심은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유현덕과 힘을 합쳐 장로를 막으려는 것이다.”
유장이 뻔한 소리로 왕루의 입을 막으려 했다. 왕루가 한층 목소 리를 높였다.
“장로가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은 옴이나 버짐 같은 하찮은 병에 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비가 서천으로 들어오는 것은 가슴이나 염통이 썩는 큰 병과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유비는 세상이 다 아는 효웅으로 처음에는 조조를 섬기다가 금세 그를 해칠 마음이 들어 손 권을 따랐고 이번에는 또 손권에게서 형주를 빼앗았습니다. 그의 마 음 씀이 그처럼 고약한데 어찌 그와 함께 계실 작정이십니까? 만약 이번에 유비를 불러들이신다면 우리 서천은 이만 끝장을 보고 말 것 입니다!”
그 말에 장송은 다시 가슴이 뜨끔했으나 고맙게도 유장이 대신 나서 왕루를 꾸짖어주었다.
“시끄럽다. 더는 어지러운 소리 하지 마라! 현덕은 나와 피를 같 이한 종친인데 어찌 나의 기업을 빼앗겠느냐?”
그리고 황권과 왕루를 모두 끌어내게 한 뒤 법정에게 떠나기를 재촉했다.
익주를 떠난 법정은 빠른 길을 골라 형주로 갔다. 유비를 만나보고 엎드려 절한 뒤 유장이 보낸 편지를 바치는데 유비가 뜯어보니 이러했다.
‘집안의 아우 되는 유장은 현덕 형님께 두 번 절하며 이 글을 올 립니다. 우레 같은 이름을 엎드려 사모한 지 오래나 촉 땅의 길이 험 하고 거칠어 예물을 갖추지 못했으니 실로 두렵고 부끄럽기 그지없 습니다.
제가 듣기로 길흉 간에 서로 구해주고 걱정과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돕는 것은 벗 사이에도 당연한 일이라 하거늘, 하물며 같은 피 를 나눈 친 간이겠습니까? 지금 장로는 북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제 땅을 침범하니 이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이제 한 자투리 글을 올려 감히 들어주시기 바라오니 부디 같은 종친의 정과 형제의 의를 저버리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대군을 일으켜 미 친 도적들을 쳐 없애시고 저희와 더불어 입술과 이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면 그 또한 뜻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로는 이 간곡 한 뜻을 다 전할 수 없으니 다만 기다리는 것은 형님께서 하루바삐 군사를 실은 말과 수레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시는 일뿐입니다.’
그 글을 읽은 유비는 몹시 기뻤다. 이제는 같은 종친의 땅을 힘으 로 빼앗았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될 구실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 싸 움에 허비될 군사와 재물도 크게 줄일 수 있게 된 까닭이었다. 이에 유비는 융숭한 잔치를 벌여 법정을 대접하고 장송에 못지않게 은근한 정을 보였다. 법정도 이미 들은 말이 있는지라 별로 몸을 사리지않고 유비가 권하는 잔을 받았다.
술이 몇 순배 돈 뒤였다. 유비는 문득 곁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 러가게 하고 법정에게 나직이 말했다.
“효직(孝直)의 높은 이름을 우러른 지 오래인 데다 얼마 전에는 또 장(張)별가에게서 공의 깊은 덕을 기리는 말을 많이 들었소. 이제 공을 바로 앞에 두고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니 내 평생의 큰 자랑거 리가 되겠소이다.”
“구석진 촉 땅의 한낱 작은 벼슬아치가 어찌 그 말씀을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만, 제가 듣기로 말은 백낙伯樂, 전국시대에 말을 잘 다루 던 사람)을 만나야 소리내어 울고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 야 그를 위해 죽는다 했습니다. 지난날 장별가가 드린 말씀 아직도 마음에 새겨두고 계십니까?”
법정이 자신을 높게 보아주는 데 대한 고마움을 나타냄과 아울러 물었다. 유비가 낯빛을 어둡게 하여 탄식처럼 말했다.
“이 비는 언제나 남의 땅에 빌붙어 지내는 몸이라 생각하면 서글 프고 절로 한탄이 날 지경이외다. 뱁새도 깃들일 나뭇가지가 있고 토끼도 세 갈래 굴을 마련해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소? 거기다가 촉은 물자가 넉넉한 땅이니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소이 까? 그러나 유계옥은 이 비와 같은 종친이어서 차마 빼앗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익주는 하늘이 내린 땅이라 할 만하나 어지러움을 다스려낼 만 한 주인이 아니면 차지하고 있기 어렵습니다. 지금 유계옥은 어진이를 제대로 부려 쓸 줄 모르니 머지않아 그 땅은 남의 손에 들어가 고 말 것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제가 들고 온 일은 그 스스로가 익주 를 들어 장군께 바치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부디 그르침이 없 도록 하십시오. 토끼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란 말도 들어보지 못 하셨습니까? 만약 장군께서 그 땅을 얻으시고자 한다면 저는 죽음 을 마다 않고 장군을 돕겠습니다.”
그래도 유비는 장송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일은 천천히 의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여 술잔을 돌리게 했다.
그날 술자리가 끝난 뒤였다. 공명이 몸소 법정을 그가 묵을 방까 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니 유비가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 다. 법정이 한 말을 되씹으며 결단을 내리지 못해 애쓰는 것 같은 모 습이었다. 보다 못한 방통이 나서서 말했다.
“일을 당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그는 어리 석은 사람입니다. 주공께서는 높은 안목과 밝은 헤아림을 갖추셨으 면서 어찌 이리도 망설임이 많으십니까?”
“공이 보기에는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유비가 가만히 물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이미 여러 사람 입에서 나온 소리를 방통이 다시 한번 더 되 되었다.
“형주는 동쪽으로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는 조조가 있어 뜻을 펼 쳐 보기에는 어려운 땅입니다. 이에 비해 익주는 호구가 백만에 땅은 넓고 물자는 넉넉해 큰일을 하는 데 밑천이 될 만한 땅입니다. 이제 다행히도 장송과 법정이 저편 안에서 주공을 돕겠다 하니 이는 곧 하늘이 그 땅을 주공께 내리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대체 망설일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유비가 비로소 깊은 속을 드러내 보였다.
“지금 물하고 불 사이처럼 나와 맞서고 있는 것은 조조요. 조조는 성급한데 나는 너그럽고, 조조는 거친 힘으로 다스리는데 나는 어짊 을 으뜸으로 삼으며, 조조는 속임수를 잘 쓰지만 나는 충직함으로 그를 갈음하고 있소이다. 모든 것이 조조와 생판 다르기 때문에 지 금 이만큼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오. 만약 이번 일이 작은 이로움을 얻고자 큰 의로움을 저버리는 것이 되면 나는 결코 할 수 가 없소.”
어디까지가 책략이고 어디까지가 덕성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그 둘이 묘하게 뒤섞인 말이었다. 더구나 서천은 유비를 둘러싼 집단에 게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땅이라 결국 일은 그쪽으로 밀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같은 유비의 반대에는 종친의 땅을 힘으로 빼 앗았다는 세상의 비난을 아랫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의도까지 숨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방통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주공의 말씀은 비록 하늘의 이치에는 맞다 해도 지금처럼 어지 러운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군사를 이끌고 힘으로 다투는 마 당에는 한 가지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한 가지 옳은 도리에만 얽매여 계시다가는 한 발짝도 재겨 디딜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공께서도 마땅히 권도(權道)를 좇아 생각을 바꾸셔야 합 니다. 약한 자는 아우르고 어리석은 자는 치며, 거스르는 자는 빼앗 고 따르는 자는 지켜주는 것은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도 하신 바였습니다. 유장에 대한 의(義)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린 뒤에 갚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큰 나라를 그에게 내려 다스리게 한 다면 주공께서 믿음을 저버리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번 에 서천을 차지하지 않으신다면 그 땅은 끝내 남이 차지하고 말 것 이니 주공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어쩌면 유비가 듣고 싶은 말을 모두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제서야 유비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말씀 가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그러고는 공명도 함께 끌어들여 서천으로 가기 위한 의논을 시작 했다. 먼저 공명이 나서 유비를 깨우쳐주듯 말했다.
“형주도 매우 중요한 땅입니다. 마땅히 군사를 나누어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나와 방사원(元)은 황충, 위연과 더불어 먼저 서천으로 가겠 소. 군사(軍師)께서는 관운장, 장익덕, 조자룡 셋과 함께 형주를 지켜 주시오.”
미리 생각해둔 게 있었던지 유비가 그렇게 대꾸했다. 심복 중에도 심복, 핵심 중에도 핵심만 골라 형주를 지키게 하고 비교적 늦게 얻 은 사람들만 데리고 서천을 치러 가겠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이 유비와 조조의 대비이다. 통상으로 조조가 원정을 떠날 때 보면 한둘 미더운 사람을 골라 근거지(주로 허창)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끌고 나갔다. 요즈음의 기업에 비유하면 새로운 업종으로 진출할 때 거기다 전력을 투자하는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유비는 그 최초의 기업 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 이번 의 서천 진출에서, 주력은 고스란히 원래의 기업인 형주에 남겨놓고 그동안 쌓인 여력만을 쏟아붓고 있다.
형주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공명도 유비의 그 같은 신중함을 구태여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는 형주 전체를 지키는 일을 떠맡고, 관우에게는 양양의 요로(路)를 지킴과 아울 러 청니(靑泥)의 병모가지 같은 길목을 틀어막고 있게 했다. 장비에 게는 새로 얻은 네 군을 맡겨 수시로 강줄기를 돌아보며 물길로 짓 쳐오는 적에 대비하게 했으며, 조자룡은 강릉에 자리 잡고 앉아 공 안을 지키게 했다.
서천으로 떠나는 유비도 자기가 데리고 갈 사람들을 나누어 진용 을 갖추었다. 황충을 전부로 삼고 위연을 후군으로 삼아 앞뒤를 맡 긴 뒤, 스스로는 유봉, 관평과 더불어 중군이 되었으며, 방통은 군사 (軍師)로서 삼군을 총괄하게 했다. 이끌고 갈 군사는 말탄 이와 걷는 이를 합쳐 오만이었다.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서천을 향해 떠나려 할 때 문득 요화가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찾아왔다. 지난날 관우가 조조로부터 벗어날 때, 도중에서 감(甘), 미(糜) 두 부인을 구해준 적이 있었으나, 관우 는 그가 황건적의 남은 무리라는 게 마음에 걸려 받아들이지 않고 뒷날을 기약했는데, 이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길이었다. 관우로부터 옛날 일을 전해 들은 유비는 반갑게 요화를 맞아들인 뒤 관우를 도와 조조를 막게 했다.
형주를 한층 든든히 한 유비가 장졸들과 더불어 서천으로 향한 것은 겨울철로 접어든 그해 시월이었다.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 아 맹달이 유비를 맞았다.
“유익주(유장)께서 제게 오천 군사를 딸려주며 멀리 나가 황숙을 맞아들이라 하셨습니다.”
맹달이 유비에게 절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서 천으로 드는 길을 인도하는 한편 유장에게 사람을 보내 유비가 온 것을 알렸다. 유장은 곧 유비가 지나게 될 주군에 글을 내려 유비의 군사들이 먹을 양식과 쓸 물자를 넉넉히 대주게 했다.
보통 유장의 성격을 나타낼 때 어리석고 나약하다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으나 공정하게 말한다면 선량하고 순진하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유비는 이미 서천을 뺏을 마음을 굳히고 오는 중이건만, 유 장은 그가 좋은 뜻으로 자기를 도와주러 오는 것으로만 믿고 있었 다. 유비에게 곡식과 돈을 대게 한 것만으로 정성이 모자란다 싶어 다시 좌우에 영을 내렸다.
“내가 친히 부성(城)까지 나가 유현덕을 맞아들이리라. 거기에 쓸 수레와 장막을 마련하고 군사들은 기치와 갑옷을 가다듬도록 하 라. 되도록이면 내 정성이 눈에 띄도록 모든 게 갖춰져야 한다.”
그러자 주부 황권이 다시 나서서 말렸다.
“아닙니다. 주공께서 그리로 가셨다가는 반드시 유비에게 해침을 당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녹을 먹고서도 주공이 남의 간계에 빠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올리는 말씀이니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세 번 생각하신 뒤에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그 섬뜩한 소리에 유장이 멈칫해 있는데 장이 나섰다.
“황권의 말은 종친 간을 이간질하고 이 땅을 도적질하려는 자들 의 위세를 더해줄 뿐입니다. 주공께는 조금도 이로움이 없을 것이니 부디 헤아려 들으십시오.”
몸에 해로운 것은 입에 달다 했던가. 장송의 말에 다시 유비에 대 한 믿음을 회복한 유장이 벌컥 화를 내며 황권을 꾸짖었다.
“내 뜻은 이미 정해진 지 오래거늘 너는 어찌 거스르려 하느냐!”
황권은 안타깝고 분했다. 방바닥에 머리를 짓찧어 피를 흘려가며 유장을 말렸다. 그래도 유장이 듣지 않자 황권은 다가가 옷자락을 잡고 말리다가 나중에는 이빨로 물고 늘어졌다.
유장은 더욱 성이나 옷자락을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 권이 기어이 악문 입을 벌려주지 않아 유장이 옷자락을 떨친 힘에 황권의 앞니 둘이 쑥 빠졌다. 실로 몸을 돌보지 않는 충신의 간곡한 만류였다.
그만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법 도 했지만, 이미 운세가 기울었는지 유장에게는 황권의 그 같은 악 착스러움이 곧 자신의 뜻을 꺾어보려는 아집으로만 보였다. 이에 더 참지 못하고 무사들을 불러 황권을 밖으로 끌어내게 하니 힘에 못 이겨 끌려나간 황권은 큰 소리로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간신히 황권을 몰아낸 유장이 막 부성으로 떠나려 할 때였다. 다시 한 사람이 뛰어들어 크게 외쳤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황권의 충성된 말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가십니까?”
유장이 계단 아래에 엎드린 사람을 보니 건녕 유원 땅에서 온 이 회(李)였다. 유장이 찌푸린 눈길로 내려보는데도 이회는 거침없이 이어갔다.
“제가 듣기로 임금에게는 그른 것을 말리며 다투는 신하가 있고 아비에게는 그른 것을 말리며 다투는 아들이 있게 마련[君有諍臣 父 有]이라 했습니다. 지금 황권의 충성되고 의로운 말은 주공께서 마땅히 좇으셔야 합니다. 유비를 서천으로 맞아들이시는 것은 든든 한 문을 열어 무서운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유장은 성이 꼭뒤까지 올라 무섭게 꾸짖었다.
“유현덕은 나의 집안 형님이신데 어찌 나를 해친단 말이냐? 이 일 에 다시 입을 여는 자는 목을 베리라!”
그리고 무사들을 불러 이회마저 끌어내게 했다. 그런 유장을 장송 이 한 번 더 부추겼다.
“지금 촉 땅의 문관들은 모두 제 계집 자식만 생각하고 주공을 위 해서는 힘을 다 쓰지 않고 있습니다. 또 장수들은 공만 믿고 교만하 여 모두 바깥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유현덕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적은 밖에서 쳐들어오고 백성들은 안에서 들고 일 어나 이 땅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니 주공께서는 부디 저들의 말 을 헤아려 들으십시오.”
“공은 헤아림이 매우 깊어 실로 이 몸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오. 내 반드시 잊지 않겠소.”
장송의 부추김에 다시 힘이 난 유장이 충신은 역시 장송밖에 없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황권과 이회 때문에 출발이 늦어져 유장은 다음 날에야 유비를 맞으러 가는 말에 오를 수 있었다. 유장이 막 유교문(楡橋門)을 나서 는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종사 왕루가 스스로 몸을 묶고 성문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려 있 습니다. 한 손에는 주공을 말리는 글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었는 데, 만약 주공께서 그 글을 읽으시고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 칼 로 몸을 묶은 끈을 끊어 아래로 떨어져 죽겠다 합니다.”
한 나라가 아무리 어지러워도 충신 셋은 있다더니 왕루가 바로 그 마지막 충신이었다. 그러나 유장은 짜증부터 났다.
“그 글을 가져오너라!”
마지못해 그렇게 영을 내렸으나 유장의 마음은 이미 어떤 글로도 돌릴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
군사들이 달려가 가져온 왕루의 글은 대략 이러했다.
‘익주 종사 신() 왕루는 피눈물을 뿌리며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듣기로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을 다스리는 데는 이롭고, 충성된 말 은 귀에 거슬리나 따르면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지난날 초 회왕(王)은 굴원(原)의 말을 따르지 않고 무관(武)에서 회 맹(盟)하다가 진(秦) 때문에 고단함에 빠졌는데, 이제 주공께서 하 시려는 바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볍게 성도를 떠나 부성까지 유비를 맞으러 가셨다가는 가는 길은 있어도 돌아오는 길은 없 을까 실로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장송을 저잣거리에 끌어내 목 베시 고 유비와 맺은 약조를 끊어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심은 촉 땅의 젊은이 늙은이 모두를 위해 다행일 뿐만 아니라 주공의 기업을 위해 서도 마찬가지로 큰 다행이 될 것입니다.’
마디마디 옳은 말이었으나 이미 장송의 말에 홀린 유장에게는 오 히려 성을 돋울 뿐이었다. 그대로 왕루가 매달려 있는 성문 앞으로 가 매섭게 꾸짖었다.
“나는 어진 이와 만나 난초(蘭草)와 지초(芝草)가 서로 친하듯 사 귀고자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토록 여러 번씩 나를 욕뵈느냐?”
그러자 왕루는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 여겼던지 한소리 큰 고함과 함께 들고 있던 칼로 스스로를 달아매고 있던 줄을 끊었다. 높은 성 문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몸이 세찬 기세로 땅에 떨어지니 피와 살 로 된 왕루의 목숨이 배겨나지 못했다.
이미 운이 다했는지 눈앞에서 충신이 피를 쏟고 죽어도 유장은 눈썹 한번 까딱 안 했다.
“무엇을 하는가? 어서 길을 떠나도록 하라!”
그 한소리 재촉과 함께 삼만의 인마를 몰아 부성으로 향했다. 그 뒤에는 유비에게 줄 곡식과 물자가 천 대가 넘는 수레에 실려 따르 고 있었다.
이때 유비의 전군은 이미 숙저 땅에 이르고 있었다. 행군에 쓰일것은 서천에서 대줄 뿐만 아니라, 유비의 명이 워낙 엄해서 군사들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일은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백성의 재물은 터럭 하나라도 건드리면 누구든 목을 베리라!”
그것이 서천에 들어서면서 유비가 군사들에게 내린 명이었다. 그 땅에 다른 뜻을 품고 있는 유비에게는 당연했으나 약탈이 보편화되 었던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백성들 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길가로 나와 유비의 군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며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유비 또한 갖은 좋은 말로 백성을 걱정하고 위로했다.
유비와 함께 가던 법정이 방통을 불러 가만히 말했다.
“얼마 전에 장송의 밀서를 받았습니다. 유장이 스스로 부성까지 온다 하니 그때 유장을 없이하도록 하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이런 좋은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방통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당부했다.
“잠시만 그 일을 아무에게나 말하지 마시오. 우리 주공과 유장이 만난 뒤에 형편을 보아가며 일을 꾀하도록 하겠소. 미리 말했다가 밖으로 새나가기라도 하면 도중에 무슨 변이 나게 될 것이오.”
법정도 그 말이 옳다 여겨 그 뒤로는 아무에게도 장송의 밀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부성은 성도에서 삼백육십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유장이 먼저 부 성에 와 있다가 유비가 이르렀단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맞아들이게 했다.
유비는 군사들을 모두 부강(江) 위쪽에 머물러 있게 하고 성안 으로 들어가 유장을 만났다. 같은 종친인 데다 유비가 여러 해 손위라 유장은 형을 대하는 예로 유비를 맞아들였다.
유비 또한 오래 떨어져 있던 친아우 대하듯 유장을 대하니 유장 은 더욱 유비가 가깝고 미덥게 느껴졌다.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의 어려움을 하소연한 뒤 잔치를 열어 유비를 대접했다.
잔치가 끝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유장이 여럿을 보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황권과 왕루 같은 무리가 우습구나. 우리 형님의 어 진 마음도 모르고 망령되이 의심하다니. 내가 오늘 본 바로 유현덕 은 참으로 인의의 사람이었다. 그가 바깥에서 와 도와주게 되었으니 조조와 장로 따위를 걱정할 게 무엇 있겠는가? 모두가 장송의 덕이 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일을 그르쳐도 크게 그르칠 뻔했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풀빛 두루마기 [袍]를 벗어 황금 오백 냥과 함께 성도에 남아 있는 장송에게 내리게 했다. 상과 벌이 완전히 뒤 집힌 꼴이었다.
“주공께서는 아직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 유비는 부드러운 가운 데도 줏대가 있는 사람이라 그 마음속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마땅 히 그가 딴 뜻을 품었을 때에 대한 방비가 있어야 합니다.”
곁에 있던 유괴(劉瑰), 냉포(苞), 장임(張), 등현(鄧賢) 등의 문 관들이 유장의 지나친 방심을 깨우쳐주었다. 유장은 그런 문관들마 저 비웃듯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걱정이 지나치다. 우리 형님께서 어찌 두 마음을 품으셨겠는가?”
완전히 유비에게 홀려버린 사람 같았다. 더 말해보았자 소용없을 것임을 안 관원들은 모두 탄식하며 유장 앞에서 물러났다.
한편 그날 유비의 진중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비가 성안에서 돌아오자 방통이 들어와 물었다.
“주공께서는 오늘 잔치 자리에서 유장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계옥(玉)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 같았소.”
유비가 느낀 대로 대답했다. 방통이 문득 정색을 하고 다가앉으며 말했다.
“유장이 비록 착하다 해도 그가 거느린 유괴, 장임 등은 모두 얼 굴에 불평하는 빛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길흉을 함부로 장담하 기 어렵습니다. 제게 힘 안들이고 서천을 얻을 계책이 있는데 어떻 습니까? 한번 써보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오?”
“내일 주공께서 잔치를 열고 유장을 부르도록 하십시오. 벽에 걸 린 휘장 뒤에 칼과 도끼를 든 군사 백 명을 숨겨두었다가 주공께서 술잔을 던지는 걸 군호로 그를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한 달음에 성도로 짓쳐들어가면 칼을 칼집에서 뽑고 화살을 시위에 얹 는 수고로움 없이도 앉아서 서천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통이 그렇게 말하자 문득 유비가 고개를 저으며 마다하는 뜻을 나타냈다.
“계옥은 나와 같은 종친이요, 성심으로 나를 대접한 사람이외다. 거기다가 나는 이제 막 촉 땅에 들어와 은혜를 베풀고 믿음을 거둘 겨를이 없었소.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 짓을 한다면 위로는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원성을 살 것이외다. 공의 이번 계책은 비록 패도(覇道)를 좇는 이라도 차마 따르기 어려운 것이오.”
그저 마다하는 정도가 아니라 은근한 꾸짖음까지 섞인 듯한 말투 였다. 타고난 너그러움과 어짊이 그렇게까지 해가며 실리를 좇을 수 는 없다고 뻗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제서야 방통도 문득 부끄러움 이 이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발뺌을 했다.
“이 계책은 제가 꾸민 게 아닙니다. 법정이 장송의 글을 받았는데 거기에 때를 늦추지 말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유장은 이르든 늦든 마땅히 도모해야 할 사람이라 이번 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 밖에서 듣고 있던 법정이 안으로 들어오며 유비에게 말했다.
“저희들은 이번 일을 스스로를 위해 꾸미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유장의 운수는 다했으니, 천명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유비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유계옥은 나와 같은 종친이오. 어찌 차마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뺏을 수 있겠소?”
“아닙니다. 이번만은 명공께서 틀리셨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장로가 어미 죽인 원수인 촉을 쳐서 빼앗고 말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이미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지나 이곳에 이르셨으니 이 대로 밀고 나아가 공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물러서시면 해로 움이 있을지언정 이로움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쓸데없는 망설임과 의심으로 날짜를 끌다가는 일이 밖으로 새나갈 걱정이 있 습니다. 그리되면 거꾸로 유장 쪽에서 모든 걸 알고 명공을 해치려 들 것이니 그때는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하늘과 사람이 아울러 명공께 이 땅을 돌리려 하는 때입니다. 유장이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을 해치워 빨리 기업을 세워두시는 편이 실로 가장 나 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법정이 다시 한번 간곡히 권했다. 그런 법정을 거들어 방통도 두 번 세 번 권했으나 유비는 끝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가 타는 것은 방통과 법정도 유장의 사람들 못지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유비는 유장을 불러들여 죽이기는커녕 그날 다 시 성안으로 들어가 유장이 베풀어준 잔치 자리에 앉았다. 한번 만 나본 뒤여서인지 두 사람은 전날보다 훨씬 스스럼없이 마음을 터놓 고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정을 두터이 했다. 남이 보기에는 정말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정다웠다.
일이 그렇게 되니 답답한 것은 방통과 법정이었다. 어지간히 술이 돌았다 싶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는 수가 없구려. 먼저 손을 쓰고 나중에 주공께 까닭을 말씀드리는 게 옳겠소.”
대강 그렇게 뜻을 맞춘 다음 방통이 위연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장군은 당에 올라 칼춤을 추다가 틈을 보아 한칼에 유장을 죽여 버리시오. 뒷일은 우리가 맡겠소.”
위연이 그만한 소리를 못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곧 칼을 빼 들고 유비와 유장 앞에 나아가 말했다.
“잔치에 즐길 만한 것이 없어 자리가 너무 밋밋한 듯합니다. 제가 칼춤을 추어 흥을 돋워보겠습니다.”
잔치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유비가 별 생각 없이 허락하
고 유장은 덩달아 재촉까지 했다. 그걸 본 방통은 됐다 싶어 데리고 간 무사들을 재빨리 당 아래로 모았다. 위연이 유장을 죽인 뒤의 혼 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장의 사람들이라고 눈뜬 장님만 모인 것은 아니었다. 위 연이 잔치상 앞에서 칼춤을 추는 데다 당 아래로 유비의 무사들이 칼자루를 잡고 당 위만 쳐다보고 있자 일이 심상치 않다 여겼다.
“칼춤이란 원래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서툴지만 제가 위(魏)장군 의 상대가 되어 함께 칼춤을 추어 보겠습니다.”
유장의 종사 장임이 칼을 들고 나서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비와 유장은 그 또한 의심 없이 허락했다. 하지만 위연으로서는 장임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때를 보아 유장에게 손을 쓰려 하면 어느새 장임이 칼을 들고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일이 어렵다고 여긴 위연이 유봉을 보고 눈짓 을 했다. 위연의 눈짓을 얼른 알아챈 유봉이 다시 칼을 빼들고 당위 로 올라갔다.
그걸 본 유장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냉포, 유괴, 등현 세 사람이 일제히 칼을 빼들고 나와 청했다.
“저희들도 군무(群舞)로 이 자리에 흥겨움을 보태볼까 합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비로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칼춤의 참뜻을 짐작했다. 좌우에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 리쳤다.
“우리 형제가 서로 만나 흠뻑 취하고자 하는데 의심하고 꺼릴 게 무엇이 있단 말이냐? 더군다나 여기는 홍문鴻門, 항우가 유방을 청해 잔치를 벌였던 곳. 그곳에서 범증은 유방을 죽이고자 방금 방통이 한 것과 같 은 일을 꾸몄음)의 잔치가 아닌데 칼춤은 도대체 무슨 놈의 칼춤이란 말이냐? 모두 칼을 놓아라. 칼을 놓지 않는 자는 세운 채로 목을 베 리라!”
유비의 그 같은 호통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눈치를 챈 유장도 또 한 장수들을 꾸짖었다.
“형제가 서로 모여 즐기는데 칼은 무슨 놈의 칼이냐? 모두 칼집을 풀어놓아라!”
그런 다음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장수들이 풀어놓은 칼을 모 두 거두어 나가게 했다.
유비와 유장의 연이은 꾸짖음에 위연과 유봉은 물론 유장의 장수 들도 머쓱해졌다. 한결같이 무안한 표정으로 제자리를 찾아 내려갔 다. 유비가 그런 장수들을 당 위로 되불러 술을 따라주며 달래듯 말 했다.
“우리 형제는 살과 뼈의 근원을 같이하는 종친이다. 함께 의논하 여 큰일을 하려는 것일 뿐 두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니 부디 그대 들은 의심하지 마라.”
진정이 아니고는 우러날 수 없는 목소리요 표정이었다. 이에 유 비를 의심하던 유장의 장수들까지도 엎드려 절하며 고마움을 나타 냈다.
그러나 장수들보다 더욱 감격한 것은 유장이었다. 유장은 고마움 을 이기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며 유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님의 크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어 다시 이어진 술자리에서 전보다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은 유 쾌하게 술잔을 나누다가 해가 뉘엿거릴 때에야 헤어졌다.
“공들은 어찌하여 이 유비를 불의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시 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잔치가 끝난 뒤 자신의 진채로 돌아온 유비가 정색을 하고 나무 랐다. 그러나 방통에게 애석한 것은 유비가 나서는 바람에 계책이 어그러진 일뿐이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장졸들의 목숨 과 물자가 허비될까를 생각할수록 답답한데 유비가 나무라기까지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편 유비와 헤어져 자신의 진채로 돌아간 유장도 그 시각 수하 들과 낮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먼저 유괴가 나와 말했다.
“주공께서도 오늘 낮에 보시지 않았습니까? 위연 등이 한 짓은 아 무래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어서 돌아가 뒷날의 걱정거리 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러나 유비의 좋은 면만 보고 있는 유장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갈리 없었다.
“우리 형님을 다른 사람과 견주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대들이 걱 정하는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니다!”
유장이 그렇게 잘라 말하자 다른 장수들이 모두 유괴를 편들어 말했다.
“설령 유비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다 해도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 렇지 않습니다. 유비를 부추겨 우리 서천을 빼앗고 그 밑에서 부귀를 누리려 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들은 까닭없이 우리 형제의 정을 떼어놓으려 하는구나!”
그 한마디와 함께 다시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 다. 오히려 그날부터 더욱 유비와 가까이 지내며 그의 마음을 사기 에만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유장에게 급한 전갈이 왔다.
“장로가 군마를 일으켜 가맹관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놀란 유장은 곧 사람을 유비에게 보내 불러들인 뒤 청했다.
“장로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형 님께서 가셔서 막아주십시오.”
“알았네.”
유비는 기꺼이 승낙하고 그날로 자기가 이끌고 온 장졸들과 더불어 가맹관으로 향했다.
유비가 떠나자 유장의 장수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유장에게 권했다.
“각처의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맡고 있는 관애(關隘)를 굳게 지키 도록 하십시오. 아무래도 유비는 믿을 수가 없으니 반드시 방비가 있어야 합니다.”
유장은 그래도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워낙 여러 사람들이 거듭 권하니 끝내 유비에 대한 믿음을 지켜내지 못했다. 백수의 도독으로 있는 양회(楊)와 고(高) 두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유비가 촉을 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부수관(涪關)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성도로 돌아갔다.
한편 가맹관으로 떠난 유비는 장로보다 먼저 그곳에 이르렀다. 싸움이 없으면 느슨해지기 쉬운 것이 군율이었으나 유비는 달랐다. 군 사를 엄하게 단속하여 민폐를 끼침이 없게 하고 오히려 기회 있을 때마다 널리 은혜를 베푸니 그곳의 민심이 곧 유비에게로 쏠렸다.